제4장 생로병사우비고뇌
생로병사우비고뇌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근심과 슬픔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이 되어 고뇌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다 하여 마음의 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침상 위로 내뻗은 손이 무언가를 움켜 질려는 듯 허공을 마구 휘저었다.
“으아악!”
아직 동트기 전 어슴푸레 한 방안의 정적이 비명으로 깨졌다.
“하아, 하아!”
헐떡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악몽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땀으로 젖어 무거운 몸을 겨우 끌고 나온 송현은 갈증을 채우기 위해 탁자 위의 주전자로 손을 뻗었다.
벌컥! 벌컥!
흘리는 것과 마시는 것이 반반이었다. 주전자를 거칠게 내려놓자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빌어먹을!”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감쌌다.
“이 더러운 기분을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자 또다시 망령들이 나타나 괴롭혔다. 백의를 피로 물들인 남궁소희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떠나 지 않았다.
“그렇게 보지 마! 제발 그렇게 보지 말란 말이야!”
남궁휘의 죽어 가는 눈빛이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쫓아다녔다. 사람을 죽인 후유증은 상상 외로 컸다.
더구나 불행하게도 한 가문의 사람들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악몽으로 변해서 밤마다 괴롭혔다.
엄습하는 사기를 떨쳐 내기 위해 송현은 방을 나섰다. 새벽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려는 시각이었다. 대지 위를 뒤 덮은 안개 속에 선 송현은 눈을 감고 양손을 합장했다.
무극무해의 기운을 끌어올리니 안개가 요동치며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리고 흔들리는 안개 속에서 시타르가 나타났다.
‘무슨 번민이 그리 많아 잠들지 못하는 거냐?’
“제 손에 쌓은 악업이 자꾸만 늘어갑니다.”
‘그것이 악업인 줄 어찌 아누?’
“사람을 죽였습니다. 피로 물든 이 손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미친놈! 네 손이 피로 물었다면 내 손은 무어란 말이냐?’
시타르가 엄하게 호통 치며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현은 그 속에 깃든 공허함을 보았다.
‘무엇이 보이느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손은 그냥 손일뿐이고 괴로움은 네 마음의 상처일 뿐이다.’
“어찌 하면 되겠습니까?”
한결 편안해진 송현의 음성에 시타르의 모습이 점차 흐려졌다.
‘숙명은 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일밖에!’
“받아들인다......”
안개가 걷히면서 시타르의 모습도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말들이 메아리 되어 울렸다.
‘무엇이 무명이더냐?
병든 눈이 허공의 꽃을 보는 것처럼 허공에는 실제로 꽃이 없는데 병든 자가 망령되이 집착을 하나니, 허망한 집착 때문에 허공의 자성을 미혹할 뿐 아니라, 또한 실제의 꽃이 나는 곳도 미혹하느니라. 이런 까닭에 허망하게 생사의 헤맴이 있으니 그러므로 무명이라 하더라.‘
안개가 걷히며 송현의 마음을 덮고 있던 어두운 그림자도 사라졌다.
“사부님 ......”
꿈꿀 때는 그것이 현실인 줄 알고 희로애락을 느끼지만 꿈을 깨고 나서는 마침내 그것이 허상임을 알듯이 허망하게 생멸을 지켜보는 것이 인간의 삶이었다. 그러므로 생사에 헤맨다고 마음의 번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극락왕생하소서 ......”
죽어서도 제자를 위해 헌신을 한 시타르를 위해 송현은 합장을 하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동시에 송현의 번민도 가벼워졌다. 동터 오는 새벽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었다
그 후로 일 년이 흘렀다......
무림맹에서 벌어진 일들은 호사가들의 입소문을 타고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말처럼 그날의 사건은 한 사람, 두 사람 건너갈 때마다 보태지고 부풀려졌다.
결국 눈덩이처럼 커진 소문은 감당하지 못할 영웅담이 되어 중원 전역을 들쑤셔 놓았다.
약관의 나이에 무림맹의 석학이라고 알려진 좌군사 위공을 조롱하고 절정고수인 남궁휘를 물리친 신진 고수의 출현은 조용하던 강호에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무공을 익히는 무인들의 꿈은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것이고 가장 빠른 지름길은 이름 있는 강자와 대결하여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세력의 균형을 이루고 무림맹이라는 합의체가 만들어진 현 무림에서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일이 점차 드문 일이 되었다.
각자의 승부욕보다 사문의 체면이 중요시되었고 이득이 없는 명분만으로는 결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점차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파나 무림공적에 대한 추살령이 내리면 강호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이 없이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명성!
그것은 무공을 익히는 이들이 영원히 붙잡고 싶어 하는 허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잡히지 않는 허상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거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또한 강호였다.
그런 무료한 시대에 정파의 심장인 무림맹에서 목숨을 건 사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은 승부욕 강한 무인들의 호승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꽃을 찾아 날아드는 나비처럼 군웅들이 항주로 눈을 돌렸다.
송현은 그날 이후로 꽤 많은 무림맹 인사들에게 시달려야 했지만 철저하게 무림인사들과 인연을 맺지 않으려 했다.
영호인이 인맥을 쌓아 두어서 나쁠 것이 없다며 나무랐지만 송현에게 강호는 슬픔과 죽음만이 존재하는 사지였다.
매일 찾아드는 손님들로 인해 지칠 법도 하지만 묵묵히 송현은 자신의 삶을 살았다.
이날도 지루한 대화 끝에 마지막 손님을 돌려보내고 책상에 엎드려 한숨을 내쉬는 송현의 귓가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의 영웅께서 벌써 지치셨나?”
영호인의 놀림에도 피곤한 송현은 장부에 얼굴을 묻은 채 한숨만 쉬었다.
“어쩐 일이야 점포에 다 나오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어서 나왔다.”
넉넉한 장포를 입고 수염까지 기른 영호인을 보며 송현은 키득거렸다.
“참내 금의위 위사가 이젠 서당 훈장이 다 되었네.”
“그런 한림원 학사께서는 장부 정리하는 모습이 잘 어울립니다.”
“큭!”
‘하하하”
서로 눈이 마주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배를 잡고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던 송현은 실컷 웃고 나니 몸에 쌓인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호인이 자네 덕분에 기분이 좀 나아졌어. 동정상방이 점점 물건 값을 낮추려고 수작을 부리는 통에 죽을 맛이었거든.”
“진 대인이 이젠 자네를 경계하고 있음이야.”
“그런가?”
머리를 긁적이는 송현을 보며 영호인은 지난 일년간 송현이 이루어낸 성과를 상기했다. 그것은 자신이 보아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기실, 송현은 지난 일 년여 동안 항주의 상계에서도 인정을 받는 상인으로 탈바꿈했다. 학문에 쏟던 열정으로 그가 목표로 삼은 자공지술의 상술을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며 항주에 뿌리를 내렸다.
무림맹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을 종자돈 삼아 무섭게 세를 확장한 태평문은 점점 그 식솔들이 불어나 항주에서 그 유명세가 점점 높아졌다.
황실 염국 출신의 태감과 학사 출신의 상인이라는 이전에 없던 배경은 태평문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 따라 태평문을 경계하는 경쟁자들도 늘어났다는 뜻이었고 사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송현이 잠잘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성장에 따라서 찾아온 성장통처럼 하나를 해결하면 또 새로운 일들이 발생했지만 송현은 슬기롭고 현명하게 해결해 나갔다. 지금에 와서 송현을 두고 사람들이 선비상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얻은 작은 명성이었다.
다시금 고개를 장부에 박고 힘들어 하는 송현의 귀로 찻물 흘러내리는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친 몸에 기운을 주는 듯 했지만 종이 하나 들 기운이 없는 송현은 그저 입만 뻐금거렸다.
“허, 이 친구가 물고기도 아니고 그게 무슨 해괴한 짓 이야?”
“찻물 소리를 들으니 갈증이 나는 걸?”
“쯧쯧쯧, 엄살 부리지 말고 어서 일어나!”
짝!
등짝을 사정없이 내려친 영호인의 만행에 송현은 천정 만큼 펄쩍 뛰어 올랐다.
“크흑! 자네 손 매운 건 알아?”
“아무렴 무당의 제자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하여간 그 말재주를 누가 당할까?”
송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지개를 폈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서 정오가 되어 있었다. 요즘처럼 하루가 짧게 느껴지는 때도 없었다.
똑! 똑!
누군가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송현은 한숨을 내쉬며 맥없는 목소리를 냈다.
“이 시각에 또 누군가?”
피로에 절은 송현을 보며 왕백이 미안해했다.
“저도 웬만하면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거절하지 못할 손님이 찾아왔네요.”
“그게 누군데?”
“무림맹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런!”
송현의 눈매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탐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심히 불편하다는 기색이었다.
“또 총군사가 왔는데 어쩌죠?”
총군사라는 말에 송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거참 포기를 모르는 여자잖아!”
격한 반응에 영호인이 의아해했다.
“지나치게 예민하군. 그녀의 방문이 그렇게 싫은가?”
“순수한 의도로 찾아온 거라면 나도 환영이지만 그녀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여자야.”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장부를 덮어 버린 송현이 굳은 얼굴로 일어섰다.
“돌아가시라고 해. 그들하고는 절대로 엮이고 싶지 않아. 그렇게 전해라!”
그러나 왕백은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하고 있어?”
“그게 실은 좀 나가 보셔야 할 거 같아요. 오늘은 그냥 돌아갈 기세가 아니라고요.”
“멍청한 녀석!”
화가 난 송현이 결국 왕백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송현의 소매를 붙잡은 영호인이 그를 진정시키려했다.
“사공혜미는 무림맹의 총군사이자 명가의 후손일세. 함부로 대해서는 안 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듣지 않겠네!”
“이 친구 웬 고집을 그리 피우는가? 사공혜미는 출신 내력도 좋고 아미파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고 있는 기재라네. 더구나 아름답기까지 한 그녀의 관심이 싫다니 자네 제정신인가?”
“그래서 싫다는 거야! 지나치게 똑똑하고 아름다워 그 자신감이 스스로를 계산적으로 만들고 있어.”
“내 살다 살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는군. 현명하고 아름다운 것이 싫다니 나 원 참!”
영호인과 이층 복도에서 실랑이를 하던 송현은 깊이 숨을 내쉬며 창밖을 보았다.
“같은 여자지만. 너무 달라. 서희는 사람을 대할 때 조금도 잇속을 따지지 않았어. 순수한 그녀의 마음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지.”
송현은 영호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뜨거운 한낮의 햇살 아래 밝게 빛나는 서희의 웃는 얼굴이 미소 짓고 있었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던 송현은 영호인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것은 전에도 들어본 말이었다.
“그녀를 멀리 했으면 좋겠네!”
지난날 객잔에서 개방방주 구걸신개 철밥이 경고하듯 남긴 말이었다. 모두들 그녀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자신만 모르는 듯했다. 순간 송현은 왠지 자신이 낯선 세계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뜻이지?”
송현의 숨결이 거칠어지자 영호인은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때 늦은 후회였다. 벌써 일 년 넘게 소식이 끊어진 서희 때문에 송현의 마음고생이 크다는 걸 알기에 영호인은 자신의 실수가 한심스러웠다.
“별 뜻은 없네. 다만 자네가 사공혜미에게서 좋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면 나 역시 서희낭자에게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을 뿐이야.”
“그건 억지야!”
“글세, 억지가 될지 어떨지는 두고보면 알겠지.”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리는 영호인을 좀 더 붙잡고 캐묻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공혜미가 참지 못하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다 올라온 사공혜미를 보며 송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마음 찾아올 건 뭐야!”
속에서 욕지거리가 올라왔지만 참아야만 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영호인이 맞이했다.
“총군사를 뵈옵니다.”
절도 있는 인사에 사공혜미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무당의 영호인 대협이시지요?”
“저를 알고 계십니까?”
“어찌 모르겠어요? 대협의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사내란 여인의 칭찬에 약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화사한 꽃처럼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녀도 송현에게 눈길을 줄 때는 다소 긴장 했다.
“아직도 제가 달갑지 않으신가 보군요.”
“초대한 적 없습니다만.”
“알아요. 하지만......”
왜 자신이 이 남자 앞에만 서게 되면 작아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그녀였지만 이상하게도 송현 앞에서는 보통의 여인처럼 수줍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냉랭한 송현의 눈빛이었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자 어렵게 발걸음을 한 것이 아니었기에 사공혜미는 안타까웠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대접을 바라지는 않았다.
풀이 죽은 그녀가 보기 안쓰러운 영호인이 송현에게 그만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사공혜미에게 매몰차게 구는 송현도 마음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강호에 나오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생활이 자신의 삶이었다. 강호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송현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두려워하며 조심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내 뜻이 아니었어요. 저도 별수 없었다고요!”
원망의 눈길로 쏘아붙인 사공혜미가 한쪽으로 물러나자 송현의 턱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사내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았으면 했다.
“오랜만일세, 반갑구먼!”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곽무헌에게 송현은 더 없이 차갑게 굴었다.
“전혀요.”
적의마저 드러내는 송현의 태도에 곽무헌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나한테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은가 보군.”
“좋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영호인은 진땀을 뺐다. 사실 송현의 입장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했다. 심사관 사건 이후 곽무헌은 사태가 커질 것을 알면서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 바람에 송현은 끔찍할 정도로 시달려야 했다.
여러 문파와 군웅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면서 송현은 두 번 다시 강호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거절당한 아픔을 송현은 가슴에 담아 두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자네는?”
“영호인이라고 합니다.”
“무당의 그 영호인인가?”
“그러하옵니다”
뛰어난 근골을 가진 영호인을 위아래로 살펴본 곽무헌은 역시,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 장문은 평안하신가?”
곽무헌이 사부인 유자강의 안부를 묻자 영호인은 그간 무당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설명하며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랬군. 맹 내에서도 무당산의 혈겁에 크게 충격을 받았네. 다행히 복구 속도가 빨라서 한시름 놓고 있었지. 유 도장의 성품은 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장문이 된 후로는 더 도력이 깊어지시는 것 같군.”
“도호를 진일자로 바꾸셨습니다.”
“그런가? 하하하 이거 곧 득도하여 선인이 되시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군.”
사부인 유자강을 치켜세워 주는 것이 듣기 나쁘지 않아 영호인은 곽무헌에게 호감을 느꼈다. 먼발치에서 보았을 뿐인 권왕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호인을 들뜨게 만들었다.
“자네도 앉게!”
곽무헌이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는 송현에게 손짓을 하자 마지못해 자리를 했다.
“이 누추한 곳까지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후, 항주 청하방 거리에서 제일 잘나가는 태평상하의 주인께서 너무 박하게 구는군.”
“그저 입에 풀칠할 정도입니다. 늘 그렇듯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요.”
툴툴거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았다. 중간에 끼인 영호인은 좌불안석이 되어 송현에게 연신 눈치를 주었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송현은 여전히 쌀쌀맞았다.
“총군사와 같이 오길 잘했군. 안 그랬다면 문전 박대를 당했을지도 모르겠는걸.”
사공혜미의 이야기가 나오자 송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그동안 맹주께서 총군사를 보내신 겁니까?”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송현을 보며 곽무헌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싫은가?”
팔짱을 끼고 재미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곽무헌과 달리 사공혜미는 바짝 긴장했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뒤쪽에서 앓는 듯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송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잔인한 일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곽무헌은 턱밑을 매만지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송현을 보았다.
“나도 별종이지만 자네도 나 못지않군.”
“무슨 뜻입니까?”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험한 길을 돌아가는 걸 보니 말이야.”
“잘못 보셨습니다. 전 골치 아픈 일은 사절입니다.”
“과연 그럴까?”
곽무헌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영호인이 준비한 차를 마시며 그는 일상적인 대화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두 사람은 몰랐지만 곽무헌을 아는 이들이 보았다면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가 공적인 일 말고 사석에서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불청객이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있으니 송현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속도 모르고 영호인은 곽무헌과 나누는 담소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도무지 자리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송현에게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영호인에게는 우상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비록 사문의 존장은 아니나 같은 길을 가는 무인으로서 그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경지를 깨달은 이에게 듣는 몇 마디 말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공부이기에 영호인은 곽무헌의 입에서는 나오는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집중했다.
‘쳇! 뭐가 즐겁다고 저리 희희낙락일까’
못마땅했지만 무림맹의 맹주를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은 터라 미안한 마음도 적잖이 가지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영호인이 한술 더 떠서 떠벌이자 송현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기왕지사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으니 이번 기회에 태평문에 들리셔서 하룻밤 유하고 가심이 어떻겠습니까?”
“음, 그래도 될까? 군사, 맹을 하루 비워도 되겠는가?”
곽무헌이 사공혜미를 돌아보자 그녀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송현은 반색했지만 영호인은 그와 시간을 더 보내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허, 완전히 빠졌군. 빠졌어!’
송현은 영호인이 혹시 남자를 좋아하것은 아닌지 점점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더 있었다.
“일정이 빠듯하지만 하루 정도는 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쿨럭!”
사래 들린 송현은 고개를 연신 가로 저었지만 사공혜미는 콧방귀를 끼었다.
‘저 여자가 정말!’
눈이 뒤집힌 송현이 사공혜미를 애절하게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자가 독을 품으면 무서운 법이었다. 송현은 오늘 그 사실을 피부로 깨달았다.
“누추하지만 지낼 만하실 겁니다. 채비를 하겠습니다.”
“그럼 신세를 지도록 하지!”
곽무헌이 흔쾌히 받아들이자 영호인은 크게 기뻐하며 왕백을 불렀다. 태평문에 연통을 넣기 위해 발이 빠른 사환 하나가 급히 태평상하를 떠났다. 죽이 척척 맞는 영호인과 곽무헌이 나가자 썰렁한 실내에 남겨진 송현은 그저 입을 벌리고 ‘어, 어!’ 만을 연발했다.
결국 대세가 기울었음을 느낀 송현은 푸념을 하며 그들을 따라나섰다.
항주 외곽 어촌 주장진으로 향하는 동안 곽무헌은 여러 차례 놀라는 중이었다. 어설퍼 보이기만 하던 송현이 거리로 나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시장의 상인들이 송현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정겨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전 상인들은 물론 난전의 상인들까지 일일이 이름을 불러 주고 집안의 대소사까지 물어 보는 송현의 모습은 항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처럼 보였다.
총군사 사공혜미의 보고서 어디에도 이런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두세 줄에 걸쳐 요식적인 내용만 서술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곽무헌이 두 눈으로 확인한 사실은 이미 송현이 항주에서 가장 점포들이 많이 모여 있는 청하방 거리에서 자리 잡은 번듯한 상인이라는 것이다. 상인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관록마저 묻어나와 보였다.
영세 상인의 고초에 같이 걱정하고 거대 상단의 횡포에 함께 분노하는 모습은 꾸며진 것이 아니었다.
“흠, 오늘 내가 여러 번 놀라게 되는군. 장사를 함에 인을 행하고 이문을 취한다. 이건가?”
곁에 있던 영호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의와 인이 아니면 아무리 이문이 많이 남는다고 하여도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유상이 되어야지 간상이 되어선 안 된다며 늘 자신을 경계하는 친구입니다.”
“유상과 간상이라......”
“네, 저 친구는 유상이 많아지면 세상이 살기 좋아지고 간상이 많아지면 백성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리채를 놓으면서도 거의 이자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호오, 정말인가?”
“네, 맹주님!”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곽무헌에게 영호인은 송현이 영세 상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있음을 설명했다.
“더불어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더군요. 나눔을 할 줄 아는 것이 장사의 기본이라고 합니다.”
송현이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곽무헌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곽무헌의 놀람은 항주를 벗어나 주장진에 이르자 더욱 커졌다.
작은 어촌 마을 사람들이 송현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공손했다. 결코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민들의 송현을 믿고 따랐다.
“이곳에 무슨 요사스러운 술법을 펼쳤기에 한결같이 그를 공경하는가?”
서늘한 눈빛에 영호인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는 주장진에 속한 태평문이었지만 지금은 태평문에 속한 주장진이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간단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뜻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림 문파가 지역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위엄을 세우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런데 겨우 정착한 지 이 년이 채 안 되어 이렇게 깊은 신뢰를 쌓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마을을 가로 질러 언덕 위에 서 있는 태평문을 보는 순간 곽무헌의 입에서 낮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저것이 태평문?”
상상 이상이었다. 분명히 보고서에는 염직 공방이라고 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것은 왕부라고 해도 될 만한 거대한 장원이었다. 곽무헌이 사공혜미를 돌아보자 그녀 역시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모르고 있던 것이 틀림없었다.
‘쯧! 이 녀석에 관한 보고서는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이 좋겠군.’
무림맹에서 올라온 보고서는 처음부터 들어맞는 것이 없었다. 주로 무림인들에 대해서 조사를 하던 세작들에게 송현은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상대의 무공이라든가 접촉하는 무인들을 감시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모습이 무림맹 세작들에게는 그저 일상의 지루한 부분으로만 비춰졌기에 보고서에도 별다른 사항 없음이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다. 곽무헌은 점점 드러나는 송현의 실체에 내심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와아아!”
태평문에 이르니 갑자기 정문이 열리며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난데없는 소동에 곽무헌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송현이 글을 가르치는 아이들입니다.”
영호인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이들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연후에 소리를 지르며 마을로 뛰어갔다.
“마을에 학당이 없는 것을 알고 송현이 태평문 안에 학당을 열었습니다. 신분에 귀천 없이 아이들을 받아들이다 보니 건너 마을에서까지 아이들이 글을 배우겠다며 찾아오는 통에 그 수가 많아졌습니다.”
흐뭇하게 아이들을 바라보던 영호인이 일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장난치며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을 풍경과 함께 주장진을 물들이고 있었다.
“여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구나.”
똑같은 땅 위에 똑같이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들이 살아 가는 곳이건만 자신이 살고 있는 무림맹과 너무나 달랐다.
그는 이곳에 온 것이 점점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이곳의 공기는 마치 전염병의 병균처럼 자신의 긴장감을 갉아 먹고 있었다.
짝!
가볍게 뺨을 치며 나른해지는 마음을 바로 세운 곽무헌이 영호인을 따라서 태평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 안에 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