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백면서생 (24/43)

  제2장 백면서생

  백면서생

  얼굴이 하얗게 될 정도로 안에서 글만 읽고 세상일에 경험이 없는 문사를 백면서생이라고 한다. 오나라 신하들과 장수들은 육손이 백면서생인 줄 알고 그의 출병을 말렸으나 손권만이 육손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아봤다는 유래에서 나온 말이다

  월나라 왕이 오나라 왕에게 선물로 소홍주를 많이 보냈는데, 오나라 군대가 물마시듯 마셔 대는 바람에 술항아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고사가 전해지는 소흥임을 감안하더라도 병들을 뉘여 쌓아 담장을 만든 것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특이하게 생긴 담을 돌아가는 길은 지난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는 여행이었다. 빛바랜 술병에 남아 있는 소홍주의 강한 향은 행인들을 금세 취객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담 넘어 보이는 편액을 보는 순간 가슴이 오그라들 만큼 무서운 현실 앞에 서게 된다.

  심사관.

  중원 무림의 잘잘못을 가리는 곳으로 사파의 무리들에 게는 저승길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중원 무림인들뿐 아니라 근방 백성들에게는 절대 발걸음하고 싶지 않은 곳이다. 무림인들과 얽혀서 이곳에 왔던 이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죽어도 심사관에 갈 일은 만들지 말라고, 얼마나 악명을 떨치고 있는 곳인지 말해 주고 있었다.

  오래된 솔 나무 향기 속에 은은하게 혈향이 배어 있었다. 그것이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이는 이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거대한 전각 안으로 들어서니 사천왕상이 제각기 검과 철퇴를 들고 악신처럼 노려보고 있다. 모든 것이 찾아온 이를 겁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거야 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오금이 저려 죽겠다.”

  왕백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발걸음이 더디니 무림맹의 무사들이 신경질적으로 눈치를 준다.

  “거참 낸들 안 가고 싶어서 그런 줄 아쇼. 그만 좀 보채라고요.”

  코에 침까지 묻혀 가며 딴청을 부리는 통에 무사들은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때 은은한 목소리가 왕백을 부르니 커다란 왕백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송 학사님!”

  십 수 년 떨어졌다 해후한 부부처럼 왕백은 송현을 얼싸안고 목 놓아 울 판이었다.

  “크! 나 원, 다 큰 녀석이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

  송현이 나무랐지만 왕백은 떨어질 줄 몰랐다.

  “이 낯선 곳에 저만 혼자 남겨 두고 밤새 돌아다니시다니 전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고요.”

  “욘석아, 그래서 이렇게 오지 않았느냐?”

  “대체 어디서 뭘 하신 겁니까? 저치들이 새벽 댓바람부터 찾아와서 얼마나 꼬치꼬치 캐묻는지 혼쭐이 났습니다.”

  “그랬구나!”

  왕백의 등 뒤로 험상궂은 무사들을 보며 송현은 왕백을 다독거렸다.

  “자, 어쨌든 이제 들어가자꾸나!”

  송현은 왕백과 함께 심사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데려다 주어서 고맙소. 이제부터는 혼자 가도 됩니다.”

  수련동에서 맹주의 명으로 이곳까지 안내한 수신 호위 에게 감사를 표하자 냉랭한 표정의 수신 호위는 고개를 저었다.

  “안에서 무슨 말이 오고가는지 빠짐없이 듣고 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큭!”

  송현은 곽무헌이 금기를 깨고 수신 호위를 불러서 안내자로 붙여 준 이유를 알게 되자 고소를 금치 못했다.

  ‘어지간히 궁금하신 모양이군. 하기야...... 당연한 일이지!’

  어깨를 으쓱해 보인 송현은 몸을 돌려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모사를 꾸미고 있는 소굴을 향해 송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왕백은 잔뜩 겁에 질린 채 들어갔다.

  탕! 탕!

  패를들어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넓은 심사관의 태청을 크게 울렸다. 좌우로 무림맹의 무력 단체인 비룡단 단원들이 심각한 얼굴로 죄인을 심문하는 퇴청과 장내 사이에 경계를 인의 장막처럼 막고 있었다. 그 뒤로 소문을 듣고 찾아온 무림맹 내의 수많은 군웅들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고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 상석에는 좌군사 위공이 판관의 자리에 서서 오만하게 송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훗!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자의 표정이지 않은가?’ 

  송현은 그런 얼굴을 황궁에서 수도 없이 보아 왔다. 그리고 그랬던 사람들의 최후가 어땠는지도 알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상석 옆으로 객잔에서 보았던 화산일 검 악소군, 아미파의 금영사태, 휘주상방의 오방원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배우들이 모두 모였구나! 그럼 좌군사 위공의 희극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놀아 볼까?’

  송현이 턱에 힘을 주자 어금니가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왕백은 그런 송현의 모습을 처음 보는지자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영패를 내려놓은 좌군사 위공이 자리 앉자 반대편에서 남궁성현이 나타났다. 퇴청의 가운데 마련된 의자로 비룡단원에 끌려가는 남궁성현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 없었다. 누가 봐도 고초를 겪은 모습이었다.

  ‘저치는 경극 배우로 나섰어야 했어.’

  다리까지 절며 격하게 기침하는 모습에 송현은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팔과 어깨에 붕대를 감은 이자웅이 스쳐 지나가며 경고해 주었다.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아무래도 우리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 것 같으니 괜히 나서다가 치도곤 당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오.”

  혜인사태에게 당한 상처로 몰골은 엉망이었지만 특유의 느물거리는 말투는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살 만한가 보군요.”

  “아니 여기서 살아 나가려고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하시오.”

  “그렇군요. 우리 모두 걸어서 이곳을 나가도록 합시다.”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는 송현을 보며 이자웅은 어이가 없었다.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해 주어야만 했다.

  “당신이야 그저 참고인 자격으로 왔을 뿐인데 괜히 위하는 척 하지 마시오.”

  씩씩거리는 이자웅을 보며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송현이었다.

  “쯔쯔, 이렇게 어수룩하니 이용을 당하지, 저들이 나를 괜히 여기까지 끌고 온 줄 아시오, 어떻게 해서든지 나와 태평상하를 오늘 이 자리에 끝장을 낼 심산이라는 걸 모르겠소?”

  “설마?”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젓는 이자웅에게 송현은 손을 내저었다,

  “쯧쯧쯧, 휘주상방이 어떤 곳인데 나를 가만히 둘 것 같소? 그간 손해 본 것을 만회하고 눈엣가시 같은 경쟁 업체를 오늘 없애려고 간밤에 모여 무슨 작당이라도 했을 거요.”

  달리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이자웅은 과거 휘주상방이 경쟁 업체를 몰아내고 타 지역에 자리를 잡는 방법을 기억해 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지역 상인들이 목숨을 끊거나 눈물을 흘리며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결국 나만 희생양이 되라는 건가?”

  씁쓸하게 웃는 이자웅에게 송현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 상황에 무슨 짓인가 싶어 이자웅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친근하게 귀엣말을 건네는 송현이 싫지는 않았다. 그간 티격태격 하다 보니 정이 든 셈이었다.

  “걱정 마시오. 내가 꼭 도와줄 테니!”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위로가 되었다. 이 심사관에서 십수 년 동거 동락한 상방의 식솔보다 송현에게 더 믿음이 가는 웃지 못할 상황에 이자웅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자웅의 태도를 자충수가 못마땅한 듯 노려보았다. 찔끔한 이자웅은 잔뜩 기가 죽어 오방원 곁으로 가서 섰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왠지 어울리지 않고 어색해 보였다. 보이지 않지만 이미 그들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세워진 느낌이었다.

  “꿇어라!”

  좌군사 위공이 크게 소리치니 비룡단원들이 남궁성현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이는 크게 놀랄 만한 일이었다. 명문정파의 자제가 심사관에서 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이런 수모를 당하는 일은 좀처럼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송현의 눈에는 이 모든 것들이 거짓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 느낌을 가지는 사람이 또 있었으니 회신일검 악소군의 눈매가 좁혀졌다. 퇴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광경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그의 각진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사태께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만......?”

  금영사태는 악소군의 진중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의 입장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미의 입장 역시 변함이 없는 것이겠지요?”

  숯덩이 같은 짙은 눈썹 아래 자리한 큰 눈망울에 금영사태의 미소가 비췄다.

  “불가근불가원. 이것이 저와 장문인의 생각입니다.”

  금영사태에게 다짐을 받은 악소군은 고개를 돌려 남궁성현을 바라보았지만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남궁휘의 담담한 태도가 더욱 눈에 거슬렸다. 악소군이 자신의 검을 쓰다듬는 것은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이었다.

  ‘소군아, 아무래도 이번 일은 예사롭지가 않은 듯싶다. 청자 배분의 제자를 보내야 옳으나 내 직감이 너를 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너무 서운타 말고 다녀오도록 해라.’

  길을 떠나기 전날 밤 당부하던 장문인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제자, 사심 없는 눈으로 살피고 치우치지 않는 귀로 듣겠습니다.’ 

  악소군은 손에 느껴지는 검의 감촉을 느끼며 마음을 다스렸다.

  “무림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 세워진 무림맹의 권한에 의거하여 남궁세가의 소공자인 남궁성현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하여 오늘 재판을 열겠다. 개정하라!”

  좌군사 위공의 외침에 비룡단원들이 낮은 저음으로 심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좌군사 위공은 서류를 두 손에 펼친 다음 소리 내어 읽었다.

  내용은 남궁성현이 무례하게도 무림의 선배이자 아미파의 장로인 혜인사태를 능멸하고 객잔에서 소란을 피워 민폐를 끼쳤다는 죄목이었다.

  좌군사 위공이 조목조목 죄목을 열거하며 논리정연하게 죄목을 따졌고 남궁성현은 객잔에서와 달리 고분고분 하였다.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이 묻고 답하는 것이 잘 들어맞았다.

  ‘좌군사는 무슨 생각인 거지? 어제 밀담대로라면 뭔가 수를 꾸미고 있다는 것인데?’

  의문이 드는 순간 좌군사 위공이 이자웅을 퇴청으로 불러냈다.

  ‘왜?’

  이미 정황에 대한 증언은 끝이 났다. 송현도 본 대로 들은 대로 증언을 했기에 남궁성현에 대한 판결은 끝이 난 마당이었다. 모두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좌군사 위공은 더욱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대가 화련상하의 상주인 이자웅이 맞소?”

  이자웅은 얼떨결에 불려 나와 다소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좌군사 위공은 서류를 보며 인상을 썼다.

  “흠, 진술에 의하며 그대는 혜인사태와 남궁성현의 다툼 사이에 끼어들어 피해를 입었다고 했소만, 맞소?”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이자웅은 진흙탕에 발이 빠지는 기분이 들어 몸서리쳤다.

  “왜 나서게 되었소?”

  순간, 이자웅은 지금 입을 잘못 놀리면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행수 자충수의 표정을 보니 하얗게 질린 것이 남궁세가와 휘주상방의 관계가 드러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런 어린 친구가 위태로워 보여서 젊은 객기로 뛰어 것뿐이오.”

  “그럴 리가...... 그날 객잔에서 내가 본 바로는 귀 상하와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이던데?’

  “그, 그건?’

  당황한 이자웅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자충수를 자꾸 바라보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난처해진 것은 자충수와 오방원이었다. 원망이 가득 담긴 눈길을 외면한 좌군사 위공은 이자웅을 궁지로 몰았다.

  “이 자리에서 거짓을 고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시오. 비록 관아의 퇴청은 아니지만 이미 무림의 여러 문파가 관여되었으므로 쉬이 넘어갈 일이 아니오.”

  으름장을 놓는 좌군사 위공에게서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흘러나왔다. 이에 이자웅이 더듬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자 좌군사 위공은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항주에 문을 연 화련상하는 휘주상방의 분점이라는 것이 사실이지 않소!”

  ‘헉!”

  이자웅이 헛바람을 들이 삼키며 크게 놀랐다. 자충수로부터 이미 다 손을 써 놓았고 오늘의 재판은 그저 요식 행위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중요한 비밀을 좌군사가 마구 들춰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좀 전에 송현과 대화를 나눌 때 들었던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은 것이다.

  “아니오. 나는 그런 것 모르오! 화련상하는 내 점포일 뿐이란 말이오!”

  이자웅이 강하게 부정하자 좌군사 위공은 콧방귀를 끼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 장강 일대와 섬서 지방의 어린 아이들도 알고 있는 사실을 아니라고 잡아떼어 봤자 소용없소. 비록 법으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명백히 휘주상방은 동정상방의 구역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소. 맞소이까?”

  “그, 그렇소만......”

  이자웅이 더듬거리자 좌군사 위공이 비룡단원 한 명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는 잠시 후에 몰골이 엉망이 된 몇 명과 함께 나타났다

  “헉!”

  “아니!”

  이자웅과 자충수가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다시피 소리쳤다. 비룡단 무사에게 끌려 나온 이들은 화련상하의 서기와 사환들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이자웅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충수는 안절부절 못하며 오방원을 바라보았다.

  피가 배이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는 오방원이 인내심을 발휘해 참고 있다는 것을 안 자충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들을 통해 화련상하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쳤다. 이자웅 그대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으득!

  이자웅의 어금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이 좌군사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에게 이럴 권리는 없어!”

  이자웅의 분노에 찬 소리를 좌군사 위공은 무시하며 송현을 바라보았다. 비룡단 무사들이 어깨를 짓누르는 통에 이자웅은 앓는 소리를 내야만 했다.

  ‘뭘 하자는 속셈일까? 일부러 자기편의 치부를 들춰내서 어쩌려는...... 설마?’

  돌아가는 정황을 나름대로 정리하던 송현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저, 저 여우같은 녀석을 봤나!’

  송현이 표정이 창백해지는 것과 동시에 좌군사 위공이 책상을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이는 명백한 위법이오. 휘주상방을 책임지고 있는 오상인 상단주가 이 자리에 없으나 전임 상단주인 오방원 대인께서 이 자리에 계시니 묻겠습니다. 중원 대륙의 십대 상방은 무림맹과 약조한 바가 있습니다. 설마 노환으로 잊으신 것은 아니시지요?”

  교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화술에 오방원은 혀를 내둘렀다.

  ‘저런 괴물을 적으로 두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로구나! 어디 어떻게 할 심산인지 두고 보자. 만에 하나 배신한 거라면 용서치 않는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고 몹시 곤란해 하는 표정으로 바꾸는 솜씨는 녹록치 않는 관록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하하, 이거야 원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그려!”

  너털웃음으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오방원은 자충수의 부축을 받아 가며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림맹과 십대상방의 상호불가침 협약이라면 뼛속까지 깊이 새기고 있소이다. 허나 무릇 장사꾼의 욕심이라는 것이 그리 되지 않더이다. 말년에 이 노인이 욕심에 눈이 멀어 그리 된 것이니 중재를 부탁드리오.”

  오방원이 포권을 해 가며 좌중을 향해 사과를 하자 화산일검 악소군은 불쾌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금영사태는 그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고 무림맹의 다른 인사들은 크게 호통을 쳤다.

  남궁성현의 판결 때와는 달리 이권이 개입된 일에 좌중의 열기는 뜨거웠다. 각 상방이 접경하는 지역에서 분쟁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듯 타 상방의 심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역에 턱하니 분점을 내며 전쟁을 하듯 치고 들어온 일은 전무후무했기에 좌중의 관심은 달아올랐다.

  “쯧쯧쯧, 오 대인께서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렇게 일을 무마하시려 하면 안 됩니다.”

  좌군사 위공은 장내를 휘어잡고 이끌어 나갔다. 이제 모든 이들은 좌군사 위공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목말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오 대인께서 묻겠습니다. 화련상하를 항주로 진출시키는데 무림맹 소속의 문파와 손을 잡지 않으셨습니까?”

  “그......”

  벼랑까지 몰고 가는 좌군사의 작태에 오방원은 어디까지 참아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잠시 좌군사 위공을 물끄러미 바라본 오방원은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인지 본인은 잘 모르겠소.”

  좌군사 위공은 잠시 긴장하던 표정을 풀고 득의하며 서류를 손에 들고 흔들어 보였다.

  “여기에 휘주상방이 무림맹 소속의 문파와 손을 잡고 항주에 진출하도록 도왔다는 물증이 있소이다.”

  좌군사 위공은 상황을 극적으로 연출했다. 덕분에 좌중이 소란스러워지며 심사관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한동안 조용하던 무림에 평지풍파가 일어나게 생겼으니 야단법석이 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조용하시오! 조용!”

  심사관의 서기가 목이 쉬도록 외치니 겨우 진정되었다.

  얼굴이 붉어지도록 소리친 서기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자 좌군사 위공은 남궁휘를 쳐다보았다.

  “자, 제 입으로 말할까요? 아니면 스스로 밝히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좌군사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며 경악했다.

  “설마?”

  ‘맙소사!”

  “어찌 그런 일이!”

  제각각 놀람과 허탈함을 담은 외침들이 쏟아져 나왔다. 남궁휘는 육중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기운에 좌중과 비룡단이 긴장했다.

  “좌군사의 말이 맞소이다. 화련상하가 항주에서 점포를 여는 데 남궁세가 사람들이 도왔소!”

  웅성웅성!

  다시금 장내는 통제가 안 될 정도로 소란스러워졌고 말 많은 호사가들은 남궁세가를 욕하기 시작했다. 좌군사 위공은 한동안 그들을 내버려 두더니 영패를 내려치며 술렁이는 장내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좌군사 위공은 장내가 가라앉자 남궁휘에게 눈짓을 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것을 눈치 챈 사람은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좌군사 위공, 조조보다 더 영활하구나!’ 

  송현이 탄복하는 동안 남궁휘는 포권을 하며 좌중을 향해 열변을 토했다.

  “여러 무림 동도 여러분! 이 남궁휘 얼마 전 조카를 잃었소이다!”

  장내의 사람들은 남궁소희가 비명에 간 일을 기억해 내고는 안타까워했다.

  “그 아이의 죽음에 나의 잘못이 크기에 이 남궁휘는 세가에서 쫓기듯 떠나게 되었소이다.”

  조카를 잃은 슬픔이 한껏 묻어나는 목소리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혈육을 잃고 떠나는 처지에 빈손으로 나오게 되었지만 나를 따르는 식솔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소? 어린 처자들을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무림인으로서가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삶의 고충을 털어놓자 장내는 좀 전의 분노는 잊어버리고 안타까움과 동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식솔들을 먹일 음식이 필요했고 잠을 잘 거처가 필요 했소이다. 그 모든 것은 다 돈이었고 그래서 휘주상방의 일을 도왔소이다.”

  주먹을 휘두르며 역성을 지르던 사람들 중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많아졌다.

  “세가에서 쫓겨난 주제에 그곳에 손을 벌릴 수는 없어서 화련상화의 일을 도왔소이다. 먹고 살자고 한 일이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남궁세가가 벌인 일이 아니고 이 남궁휘가 벌인 일이외다! 잘못이 있다면 나를 질책하고 남궁세가는 입에 올리지 말아 주시오. 이미 한 번 죄인이 된 마당에 과거의 인연까지 더럽히고 싶지는 않소이다.”

  당당했다.

  남궁휘는 전혀 위축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했고 어느덧 장내에는 그를 질타하던 목소리들이 수그러들었다. 좌군사 위공의 눈이 웃고 있음을 발견한 송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였어. 정말이지 교묘하다 못해 신묘하구나! 위공 그대의 머리는 정말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음이야.’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위공의 지혜가 두려웠다. 그러나 송현의 머릿속도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머리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어도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 일이 이쯤 되었으니 본인도 솔직한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힘들게 걸어 이자웅 옆에 선 오방원은 처연한 표정으로 장내의 사람들을 향해 읍소했다.

  “화련상하가 문을 여는 데 휘주상방이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이 일에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남궁휘 대협께서 이렇듯 용기 있게 나서시니 본인도 장사치에 지나지 않지만 여러 군웅들 앞에서 사실을 이야기해야겠소.”

  오방원은 이자웅의 등을 토닥이며 불쌍한 자식을 보듯 연민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이자웅은 무슨 일인지 몰라 두려워했다.

  “화련상하의 주인인 이 친구는 과거 무림으로부터 불명예스러운 호칭을 받은 육가권의 후예이외다.”

  또 한 번 밝혀지는 비사에 장내는 크게 술렁거렸다. 저마다 과거의 비사를 떠올리며 이자웅을 손으로 가리키며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놀란 이자웅이 뭐라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비수처럼 꽂히는 오방원의 눈빛에 이자웅은 얼어붙고 말았다.

  ‘이, 이 모든 것이 다 계획된 일이었단 말인가?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용만 당한 셈이로구나!’

  이자웅은 허탈했다. 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부상당한 상처가 주는 통증보다 가슴을 찌르는 아픔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고개를 숙인 이자웅은 사람들에게 더 불쌍하게 보였다.

  “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손가락질 하고 놀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무림의 부끄러운 사람의 제자입니다. 하지만 이 친구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다. 또 따지고 보면 마교의 교주를 어찌 육가권의 장문인 홀로 막아설 수 있겠습니까?”

  오방원이 육가권을 깎아내리고 있는데도 이자웅은 두 주먹을 움켜쥐고 울분을 참는 수밖에 없었다.

  “무림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싶은 젊은이가 오죽하면 상단에 들어와 허드렛일을 했을까 싶어서 거두었습니다. 무려 십여 년을 성실하게 일했고 상방에 큰 공도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일가를 이루게 해 주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친구의 고향이 항주였고 애초의 좋은 뜻과는 다르게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을 뿐이니 여러 군웅들께서는 부디 사정을 보아 주시길 바랍니다.”

  오방원의 절절한 사연이 끝나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이들 중 대부분은 모두 십대상방과 연을 대고 있는 이들이다. 무림인들 중에 더욱이 무림맹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상방과 줄을 대지 않고 있는 이들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중 항주의 동정상방과 관계있는 자들이 대부분 심사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들이 증인 되어 동저상방의 상인들을 설득할 테니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젠장! 박수라도 치고 싶어지는구나. 위공 당신이 천재라는 건 인정하지.’

  송현은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좌군사 위공을 노려보았다. 이미 송현은 좌군사 위공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 짐작하고 있었다.

  “흠, 저간의 사정이 그렇다면 무림맹의 입장도 곤혹스러워지는군요.”

  턱밑을 매만지며 심히 난처한 표정으로 고심하는 좌군사 위공은 누가 봐도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어려운 입장에 놓인 사람으로 보였다.

  “맹주께서 폐관 수련에 들어가신 상황이라서 심사관의 전권은 제게 주어져 있습니다.”

  맹주 곽무헌으로부터 부여받은 위임패를 좌중에 내보이며 좌군사 위공은 진중한 목소리로 영패를 들어 판결을 내렸다.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사연이 기구하여 본인도 가슴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건은 무림맹의 규칙에 크게 어긋나는 부분이 없다고 봅니다. 여러 군웅들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생각한 바를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이름이 알려진 무림 인사들이 무림의 규율에 반하지 않으니 크게 잘못이라 할 것이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좌군사 위공이 아미파의 금영사태를 향해 포권을 하며 정중하게 요청했다.

  “이번 일로 인해 아미파의 명예가 크게 손상되기는 했습니다만 남궁세가의 소공자도 크게 뉘우치고 있고 하니 이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어떨지 싶습니다만......?”

  일순 장내의 시선이 금영사태에게 향했다. 화산일검 악소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를 향해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곧 악소군의 눈이 불신으로 가득 차며 크게 치켜떴다.

  “그리하도록 하지요.”

  금영사태의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천둥이 되어 악소군의 뇌리를 울렸다.

  “도대체 왜......”

  왜 그랬냐고 묻는 악소군의 눈을 외면한 금영사태를 보며 검을 움켜진 악소군의 손이 부르르 떨었다. 이 일로 남궁성현에게 죄를 물어 무림맹 뇌옥에 오랫동안 가두어 둔다면 지나치게 세력 확장을 하고 있는 남궁세가를 견제할 수 있게 된다.

  그와 같은 천재일우 기회를 한순간에 날려 버렸으니 악소군의 눈에서 불길이 튀는 것은 당연했다. 순간, 사부의 기우가 현실로 드러났음을 깨달았다.

  ‘설마하니 이 모든 것이 계략이란 말인가?’

  악소군은 차마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금영사태를 보며 치를 떨었다

  “아니 되오! 이럴 수는 없음이오!”

  결국 보다 못한 악소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화산일검이 대노하여 나서니 좌중은 또다시 술렁거렸다. 그 만큼 악소군의 이름이 갖는 무게가 컸다.

  “눈 가리고 아옹이라더니 천하의 혜안의 가졌다는 좌 군사께서 어찌 세치 혀가 만들어 내는 거짓에 그리 쉽게 휘둘리시는 게요?”

  대노한 악소군의 목소리는 심사관의 퇴청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좌군사 위공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악소군을 향해 말했다.

  “그러시면 화산의 악 대협께서는 다른 증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있었다고 해도 좌군사 위공이 한편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악소군은 너무 방심한 것이다.

  목 언저리까지 수많은 말들이 올라왔지만 그뿐이었다. 장내의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바빴다. 본의 아니게 악소군이 악역을 맡게 된 것이었다.

  지금 상황이 사람들의 눈에는 위명을 이용해서 약자를 누르려는 행태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악소군의 신분이 도가의 제자였으니 더욱 곤란해지고 말았다.

  “크흑!”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오자 좌군사 위공은 비릿한 미소를 몰래 지어 보였다. 분했지만 악소군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발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자, 그럼 더 이상 이견이 없는 듯하니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화련상하는 이대로 영업을 계속할 것이며 이는 동정상방에서도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봅니다. 차후 통보할 것이며 남궁휘 대협이 항주에 마련한 거처 역시 남궁세가로 보기 어려우므로 이를 배척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찜찜하기는 했지만 딱히 반박할 이유도 없기에 박수를 치며 좌군사 위공의 판결에 수긍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무림의 송사에 뛰어난 혜안과 통찰력으로 기지를 발휘한 좌군사의 공을 치하했다.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야. 이거야 말로 일석 삼조로구나! 휘주상방과 남궁세가와의 약속을 지키는 동시에 자신의 입지는 공고히 하여 총군사로 도약하는 데 발판을 만들다니 귀재가 따로 없어!’

  왕백마저 이 한편의 연극에 빠져서 장내의 다른 사람들처럼 박수를 치려고 했다.

  턱!

  송현의 손을 붙잡자 왕백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재미있는 부분은 이제부터다. 박수는 그때 가서 쳐도 늦지 않아.”

  빙긋이 웃는 송현이 입구를 가리키자 왕백의 눈이 자연히 움직였다.”

  그곳에는 단아한 백의를 차려입은 여인이 퇴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흑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겼으며 고운 아미는 매혹적이었고 갸름한 눈매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우군사 납시오!”

  심사관의 문지기가 다급히 외쳤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니 어디선가 꽃향기가 풍겨져 오는 듯했다. 장내의 사람들은 그녀의 향기에 취해 일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공혜미가 여러 군웅들께 인사드립니다.”

  포권지례를 하는 사공혜미의 자세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그녀를 사방위에서 호위하는 여검사들은 아미사화라고 불리는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언제나 사공혜미를 호위하며 그녀의 그림자로 불리는 수신 호위들이었다. 사파에서 자신들을 괴롭히는 사공혜미를 암살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것은 아미사화 때문이었다.

  ‘으득! 저 계집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거지? 분명 소림의 일로 발을 빼지 못할 터인데?’

  좌군사 위공의 표정이 벌레 씹은 듯 구겨지자 사공혜미가 밝게 미소 지으며 상석에 자리했다.

  “제가 그리 달갑지 않으신가 봅니다.”

  사공혜미의 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다른 이들에게 달콤하게 들리겠지만 좌군사 위공에게는 소름이 돋는 소리였다.

  “그럴 리가 있소이까? 다만 소림의 일로 분주할 텐데 어찌 무림맹으로 귀환했는지 놀랐을 뿐이외다.”

  “호호호, 소녀를 그렇게 걱정해 주시다니 고마울 따름 입니다.”

  옷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는 사공혜미를 좌군사 위공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좌군사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만약에 보았다면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도 차갑게 변했을 것이다.

  “맹주께서는 폐관 수련 중이시라고요?”

  “그렇소이다. 게다가 우군사도 출타 중이기에 본인이 집무 대행을 맡고 있소.”

  좌군사 위공은 일부러 집무 대행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녀는 그 뜻을 아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번 판결에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무리라니? 이미 판결은 내려졌고 번복은 있을 수 없소이다.”

  좌군사 위공이 칼로 자르듯 말하자 사공혜미의 고운 아미에도 주름이 만들어졌다.

  “잘못이 있다면 바로 잡는 것이 대인의 자세라고 배웠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바로 고치는 것도 군자의 덕목임을 모르시는 겁니까?”

  날카롭게 따지는 사공혜미 때문에 좌군사 위공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안색이 크게 변한 좌군사 위공을 보며 사공혜미는 장내를 훑어보았다.

  ‘내게 편지를 보랜 자도 틀림없이 여기 어디선가 지켜 보고 있겠지? 그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그녀가 소림사의 분쟁을 해결하다 말고 발걸음을 급히 돌린 것은 한 통의 서찰 때문이었다. 무림맹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서찰의 진위와 서찰을 보낸 자의 속내를 살피느라 고심했다.

  그동안 그녀는 자신의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그간의 일을 정리했다.

  무림맹 도착 직전에 내린 그녀의 결론은 뛰어난 머리를 지닌 자가 이 일의 배후에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이라면 그자가 남궁세가와 휘주상방의 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잠시 숨 돌릴 새도 없이 그녀는 좌군사 위공의 수읽기에 심력을 끌어올렸다.

  “하하하, 거 봐라. 재미있는 구경은 지금부터라니까!”

  “알고 계셨던 겁니까?’

  “막여위와 양명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만 알면 된다.”

  “끙, 저도 속이시다니 너무 하십니다.”

  “녀석도, 놀랄 일은 아직도 더 남았으니 서운해하지마라.”

  뭐가 그리 즐거운지 송현은 미소를 지으며 벌게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쩔쩔매는 좌군사 위공을 바라보았다.

  사공혜미는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사안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궁휘 대협이 비록 남궁세가와 인연을 끊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남궁세가의 사람이고 화련상하 역시 휘주상방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이니 무림맹의 약속을 깨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이는 심사숙고해야 할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사공혜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옳다’를 외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에 좌군사 위공은 크게 당황했다. 자신이 심어 놓은 사람들이 그랬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사공혜미 역시 오늘 이 자리에 사람을 심어 놓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보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그녀는 이 사건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구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다!’

  그제야 사공혜미의 출현이 이해가 갔다. 정체불명의 적이 그녀에게 언질을 한 것이다.

  좌군사 위공의 눈이 뒤집혔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셈이었다. 서늘한 그의 눈이 장내를 훑었다.

  그때 위공의 눈에 빙긋이 웃고 있는 송현이 들어왔다.

  ‘설마......?

  송현의 미소를 보는 순간 좌군사 위공의 머릿속에 스쳐 가는 것들이 있었다.

  ‘저 녀석이었구나!’

  장강 일대와 섬서 지방에 순식간에 퍼져 나간 소문의 진원지, 그가 그토록 궁금해 하던 괴소문을 퍼트린 사람이 바로 송현임을 직감했다.

  ‘아뿔싸! 그래서 그렇게 빨리 소문이 퍼졌구나.’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학사 나부랭이라고 과소평가했던 자신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급한 것은 판결을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정색을 한 좌군사 위공이 냉정을 되찾고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나섰다.

  “우군사의 주장도 일리가 있으나 이 사건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심사를 한 것은 본인이오. 우군사는 숭산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긴 여정에 피곤하여 혜안이 잠시 흐려지신 듯하오.”

  “천만에요! 난......”

  앙칼진 사공혜미의 반격에 좌군사 위공은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는 듯 단칼에 자르며 밀어붙였다.

  “우군사, 그대는 지금 본분을 망각하고 월권을 행하고 있음을 아시오?”

  “무슨 말입니까?”

  억울한 듯 노려보는 사공혜미에게 차가운 조소를 지어 보이며 좌군사 위공은 설전을 시작했다.

  “맹주에게 명을 받은 그대는 소림사의 분쟁을 해결치 아니하고 독단으로 돌아왔소.”

  “중대한 사안이 맹에서 발생하였다 하여......”

  “그것은 말도 안 되는 핑계요. 과연 이 일이 무림맹을 위태롭게 하거나 무림의 안위에 큰 사단이라도 발생하는 중대사요?”

  “......”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들춰내는 통에 사공혜미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승기를 잡은 좌군사 위공은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다.

  “더구나 본인이 맹주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을 받은 맹주 대행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있음을 무시하고 심사장에 뛰어들어 판결을 뒤집으려 하다니 이는 월권이 아니고 무엇이오!”

  그녀의 고운 아미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서찰의 내용에 너무 놀라 서두르다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결코 이와 같은 서투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늘 천재로 대접받으며 귀하게 자라온 그녀에게 이 런 모욕은 난생 처음이었다.

  좌군사 위공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래야만 똑똑한 그녀가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 마음에 두지 않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자존심을 잘 알고 행한 행동이었다.

  “그럼 이제 판결을 내리겠소. 화련상하와 남궁휘 대협의 문제는 처음과 같고 남궁성현 소공자는 혜인사태에게 입은 상처가 중하므로 남궁휘 대협에게 신변을 양도하는 것으로 종결......”

  좌군사 위공은 득의에 찬 표정으로 판결을 외치다가 송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송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가락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덜컹!

  불길한 느낌에 가슴이 내려앉음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둘러 판결을 끝내려 했지만 세상사 쉽게 되는 일이 없었다.

  “그리는 못하겠소!”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기운이 심사관 안으로 짓쳐들었다. 나는 듯한 경공을 펼치며 안으로 난입 한 인물의 정체를 확인한 좌군사 위공은 신음을 흘렸다.

  “혜...... 혜인사태!”

  불진을 크게 휘둘러 뒷짐을 쥔 여인은 혜인사태였다. 끝까지 그녀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던 금영사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혜인사태가 경멸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금영사태의 두 다리가 덜덜거리며 떨기 시작했다.

  자칫 일이 틀어질까 싶어 좌군사 위공이 목청을 높였다.

  “혜인사태! 이 무슨 무례한 행동입니까? 지금은 무림맹의 중대한 사안을 심사 중입니다.”

  “흥! 본인이 이 일의 핵심인데 어찌 나를 배제하고 심사를 하는 것이오!”

  “이미 금영사태가 아미파를 대표해서 모든 걸 승인했으니 혜인사태는 더 이상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무림맹의 맹주 대행으로서 그대에게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따르지 않는다면 무림맹의 법으로 그대를 다스리겠소!”

  다급해진 좌군사 위공이 험악하게 나오자 비룡단의 검수들이 발검을 하려 들었다.

  사공혜미는 사태가 급박해지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그러나 자신이 나설 수 없음을 알고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웅성웅성!

  장내의 분위기가 일순 험악해지자 무림의 군웅들도 들썩였다. 비룡단과 혜인사태가 뿜어내는 살기에 무공을 익힌 군웅들이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사관에서 군웅들이 무력을 행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판이었다.

  “그만! 모두 손을 거두고 진정하세요!”

  일촉즉발의 순간 난데없이 난입한 또 한 사람으로 인해 긴박하던 실내의 공기가 흐트러졌다.

  “무엄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서는 것이냐?”

  평범한 문사 차림의 사내가 장내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호통을 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넉살 좋게 웃으며 포권지례를 하는 사내를 보며 군웅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 녀석이, 기어코!’

  좌군사 위공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문사 차림의 사내는 바로 송현이었기 때문이다.

  살기를 담아 쏘아 보는 좌군사 위공을 보며 송현은 빙그레 웃었다. 마치 승부는 이제부터라고 웃고 있는 듯했다.

  좌군사 위공은 송현이 자신 못지않게 똑똑하다는 것을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자 이 자리에 있는 수많은 무림고수들보다. 눈앞에 있는 백면서생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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