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해의추식
해의추식
이 고사는 사기 중에서 회음후열전 편에 실려 있는 이야기로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주고, 자기 밥을 나누어 줄 정도로 다른 사람을 각별히 친절하게 대하거나 돌보아 주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별이 바람에 스치는가 아니면 바람이 별에 스치는 걸까? 귀뚜라미들조차 그 서늘한 느낌에 조용히 숨죽인 이 밤 속현은 타는 듯한 갈증에 망설였다.
문득 상념에 빠져 들었던 속현은 대종사라 불리는 무림맹 맹주 곽무헌의 심중을 헤아릴 길이 없어 답답했다.
겉으로는 어린아이 장난치듯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무서움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그는 깊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대는 처음이었다. 사부인 시타르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기이한 느낌이었다. 그 점이 송현의 가슴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황궁서고에서 읽었던 야사의 내용이 갑자기 떠올랐다.
곽무헌과 구대문파 장문인들이 벌인 칠 일 낮과 칠 일 밤의 전설 같은 대결이 끝내 판가름이 나지 않자 자존심 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문 정파의 장문인들이 입을 모아 그를 칭찬했다는 이야기였다.
권왕 곽무헌.
물론 호사가들이 방정맞은 입을 놀려 부풀린 소문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어리석은 이도 없다.
소위 무림의 명숙이라는 자들이 명분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그를 무림맹의 맹주로 앉혔지만 그 이면에는 그와 같은 고수가 문파를 만들어 구대문파 이외에 새로운 세력을 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 곽무헌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세간에는 무공에는 뛰어난 자질을 타고 태어났지만 정치적이지 못하여 그런 얕은 꾀에 넘어갔다고들 알려져 있지만 오늘 곽무헌을 살펴본 송현은 그런 소문들이 다 허튼소리임을 깨달았다.
그는 때를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사는 벼랑과도 같았다.
‘위험하다!’
전혀 뜻밖에도 곽무헌은 효웅이었다.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이 그렇게 송현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좌군사 위공만을 염두에 두었던 이번 일에 예상 밖의 인물이 가장 큰 위험 요소이자 불안 요소로 다가온 것이다.
옷깃 사이로 스치는 서늘한 바람이 날카로운 검이 되어 베고 지나간다. 상념에서 깨어난 송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자신의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아무 이상이 없어 고개를 들어 보니 곽무헌이 빙긋이 웃으며 담장 위에 서 있었다. 달빛을 등지고 선 그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무림맹주를 허수아비라고 말한 인간을 찾아서 주리를 틀어 주고 싶다.’
송현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좌군사 위공에 대한 걱정을 지워 버리고 새로이 곽무헌에 대한 경계심으로 가득 채웠다. 눈앞에 맞이한 상대는 쉽게 생각해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이봐, 여기라네!”
허리춤에 손까지 얹어 가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곽무헌을 향해 송현은 굳은 얼굴을 애써 펴 가며 웃어 보였다.
서서히 달이 기울고 있었다. 송현은 입술을 깨물고 담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예상과 달리 좌군사 위공의 집무실은 불이 꺼져 이미 잠자리에 들고 아무도 없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무슨 대단한 음모라도 일어날 것처럼 굴더니 평소처럼 조용하지 않느냐?”
곽무헌이 심드렁하게 투덜거렸다.
“쉿!”
송현이 입술에 손가락을 대자 곽무헌의 눈빛도 서늘해졌다.
워낙에 은밀하게 움직여서 쉽게 눈치 채기 힘든 기운이었다. 전각들 사이에 숨어 있는 무림맹을 지키는 비룡단은 전혀 그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침묵했다.
“머저리들 같으니라고!”
경비 상태가 허술한 것이 민망했는지 곽무헌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 바람에 기겁한 송현은 서둘러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겨우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챈 곽무헌은 마지못해 몸을 숨겼다.
지붕 위에 소리 없이 착지한 인영은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핀 다음 유령처럼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능풍도?”
곽무헌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앓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괴인영의 경신법이 너무나 잘 아는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난 남궁가 놈들은 십 리 밖에서도 냄새로 구분해 낼 수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은 알지만 송현은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곽무헌이 남궁세가와 불편한 사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커다란 수확이었다. 적어도 맹주가 남 궁세가의 손을 쉽게 들어줄 일은 없을 것이다.
“남궁휘 그자일 겁니다.”
곽무헌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즉시 곽무헌이 송현의 옷자락을 잡아채고 날아올랐다. 헛바람을 삼킬 사이도 없이 곽무헌은 송현을 데리고 좌군사 위공의 전각 가까이 다가갔다. 곽무헌이 잔가지를 차고 징검다리 건너뛰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실로 놀라운 신위였다. 풍보를 극상으로 시전한다고 해도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였다. 송현이 본 경신법 중 가장 신묘막측한 경공이었다.
‘허공답보라는 경지가 이런 걸까?’
은연중 그에 대한 경외감까지 생기는 송현이었다.
순간 곽무헌의 인상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불 꺼진 실내에 아무도 없는 듯했지만 그의 불편한 기색으로 보아 안에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송현도 무극무해의 기운을 끌어올려 좌군사 위공의 집무실 주변의 이질감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왠지 곽무헌 앞에서 함부로 자신의 기운을 드러내서는 안 될 것 같아 참아야만 했다.
조바심을 내는 송현의 기색을 눈치 챘는지 곽무헌이 송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웅! 웅!
귓가에 벌이 우는 소리 비슷한 것이 들리며 약간 현기증이 일어났다.
“....알고는 있지만....... 남궁........”
놀랍게도 공간을 격하고 있는 실내의 대화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송현은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낼 뻔했다. 그것은 곽무헌이 인상을 일그러뜨린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송현의 예상과 달리 실내에는 꽤 많은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당황해하는 송현에게 곽무헌이 손을 들어 전각의 주위에 서 있는 목각 인형을 가리켰다.
‘아, 설마 진법?’
이곳에 오기 전에 호되게 당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송현은 금세 좌군사 위공의 전각이 하나의 진법으로 보호되고 있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오히려 그런 진법을 뚫고 실내의 상황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곽무헌의 능력은 송현에게 신인의 경지처럼 느껴졌다.
‘혹시 곽무헌은 좌군사 위공을 믿지 않고 있었나? 그래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제야 뒤죽박죽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일단은 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하기에 송현은 다른 생각을 지우고 전각 안에서 오가는 대화에 집중했다. 한편 전각 안에서는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가운데 심각한 대화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무림맹 안으로 사건을 옮겨 오는 데 성공했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이오.”
“흥! 오방원 당신의 그 오만함 때문에 하마터면 대업이 틀어질 뻔했다는 걸 명심해야 할 거요.”
“무슨 소리! 곽가 놈을 폐관 수련하게 만든 것이 다 내 머리에서 나온 잔꾀라는 걸 벌써 잊었나?”
“닥치시오!”
원수들끼리 만나기라도 했는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두 사람을 보다 못한 좌군사가 끼어들었다.
“쯧쯧쯧!”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에 언쟁을 벌이던 두 사람이 낯을 붉히며 물러섰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것은 두 분의 책임입니다 남궁성현 소공자를 여기까지 데려온 오 대인의 어리석음과 항주에 너무 일찍 발을 들인 남궁휘 대협이 나서지 말았어야 할 장소에 나타난 것 모두 변명할 여지가 없는 실수니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지요.”
좌군사 위공의 냉랭한 질책에 좀 전까지 서로에게 으르렁 대던 오방원과 남궁휘 두 사람은 헛기침을 하며 궁색 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좌군사 위공은 고개만 저을 뿐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흥! 그 속셈을 모를까 봐? 오방원 당신은 남궁성현을 항주까지 오도록 부추김으로서 남궁세가를 깊이 끌어 발을 빼지 못하게 만들 심산이었을 테지. 그리고 남궁휘 당신은 혹여 항주에 근거지를 만든 사실이 드러날까 봐 남궁성현의 입을 막기 위해서 서둘러 나타났으면서 뻔뻔하구나.’
불편한 기색을 감춘 좌군사 위공은 기선 잡기에 나섰다. 상대의 실수를 문제 삼아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가려 했다.
‘후! 서로 손을 잡은 동맹끼리도 믿지 못해 물어뜯는 꼴이라니 도무지 못 봐 주겠어. 이런 놈들과 천하를 논의하다니 답답하구나. 허나, 지금은 힙이 없으니 잠시 참는 수밖에!’
좌군사 위공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인내심을 좀 더 키웠다.
“이제 휘주상방과 남궁세가만 믿고 일을 추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직접 나서야.......”
“흥!”
좌군사는 아직 실내에 사람이 남아 있다는 걸 잠시 잊었다. 불편한 여인의 음성이 냉소를 터뜨리자 좌군사 위공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금영사태, 제 뜻에 반대하시는 걸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놀랍게도 콧방귀를 뀐 존재는 다름 아닌 아미파의 금영 사태였다.
오방원과 남궁휘, 좌군사 위공 그리고 아미파의 금영사태가 한밤중에 은밀히 모였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무림맹, 아니 중원 무림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질 일이었다.
좌군사 위공은 애써 눌러 놓았던 노기를 슬그머니 드러냈다. 그의 눈매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금영사태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좌군사 위공께서는 이미 틀어진 이번 사태를 바로잡을 묘수라도 있나요?”
단아하고 인자한 평소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며 가벼웠다.
“지금 그걸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만.......”
자신의 말을 끊어 놓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드러내자 금영사태는 입술을 말아 올리며 이죽거렸다.
“혹여 말하는 건데 좌군사 위공께서는 혜인사태를 염두에 두셨는지 모르겠군요?”
“혜인사태?”
짜증스러움이 묻어나는 좌군사 위공의 말투에 금영사태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이번 일에 무지막지한 사저를 제외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어간 줄 알고나 있나요?”
좌군사 위공을 비롯해서 오방원, 남궁휘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회담에 파견될 아미파의 수장으로 혜인사태가 아닌 금영사태를 앉히기 위해 들어간 금전과 수고가 꽤나 컸다. 특히나 속가제자로 알려진 휘주상방주의 아내가 직접 아미파를 여러 차례 오가는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런 결과로 혜인사태는 그녀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문파를 떠나서 보잘것없는 일에 등을 떠밀려 수행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끙!”
오방원은 그간 들어간 재물이 아까운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금영사태의 빈정거림에서 좌군사 위공은 곧 상황을 깨닫고 아뿔싸!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 그녀가 떠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좌군사 위공은 객잔에 있던 그녀가 항주를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금영사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전 사저를 누구보다 잘 알아요. 장문께서 맡긴 일이 자신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얕은 수라는 걸 객잔에서 절 보는 순간 알아차렸을 겁니다.”
“하지만 장문의 명이 있지 않소?”
오방원이 눈치 없이 끼어들자 좌군사 위공이 한숨을 내 쉬었다.
“그녀가 당금 무림에서 어떻게 불리는지 잊었습니까?”
좌군사 위공의 질책에 오방원은 무릎을 쳤다.
“멸빈 혜인!”
오방원이 혜인사태의 뒤를 항상 따라다니는 별칭을 외치자 금영사태는 법의 자락을 꼬옥 움켜쥐었다. 멸빈! 승려가 불.법.승 삼보에 대해 불경죄를 지었을 경우 승복을 벗기고 도첩을 빼앗은 뒤 속복을 입혀 절문 밖으로 쫓아내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가장 치욕적인 처벌로, 다른 형벌의 일종인 승적 박탈의 경우 절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아예 절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다.
다르게는 치탈도첩라고 불리는 이 간악한 일에 혜인사태는 주저함이 없어서 아미파 내부는 물론 소림의 승려까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여 그녀 때문에 파계된 승려와 비구니들이 셀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얻은 불명예스러운 호칭이지만 오히려 그 호칭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설마하니 그럼 혜인사태가 이번에는 금영사태를 노린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당황한 오방원이 애써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는 금영사태를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 나찰같은 계집이 꼬리를 물었으니 쉬이 놓지 않을 듯하군.”
남궁휘마저 거들자 금영사태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좌군사 위공은 오히려 빙긋이 미소 지었다.
“차라리 잘되었군요.”
넉넉한 여유마저 묻어나는 음성에 금영사태의 감겨진 눈이 떠졌다.
“묘수라도 있는가요?”
그녀의 눈빛에 간절함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린 좌군사 위공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만 가지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한두 가지 틀어지는 경우가 없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잠시 차 한 모금을 넘긴 좌군사 위공이 좌중을 바라보며 특유의 흡입력을 가진 화술을 풀어 놓았다.
“우리의 당금 과제는 휘주상방의 항주 진출이었습니다. 막대한 자금을 소요한 오 대인께서 조바심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요. 허나 그 조급함 때문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휘주상방이 항주에 문을 연 연화상하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이 때문에 남궁세가의 소공자께서 무림맹 뇌옥에 갇혀 계십니다.”
좌군사 위공이 남궁휘에게 눈길을 주자 남궁휘는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는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그 자리에 하필이면 화산일검 악소군이 나타났기 때문이죠. 여러분이나 저나 화산에서 회담 대표로 악소군을 보낼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점은 저 또한 불찰이 있기에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또한 혜인사태의 출현은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잠시 숨을 돌린 좌군사 위공은 양손을 깍지 끼며 좌중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자, 이제 솔직하게 서로의 입장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휘주상방의 목적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 따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남궁세가는 일을 너무 크게 벌이셨습니다.”
“음.......”
남궁휘가 올 것이 왔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소공자를 뇌옥에 감금한 이유 또한 거기에 기인하고 있음을 잘 알고 계시겠죠. 남궁세가는 저와의 약조를 지키지 않고 항주에 세가의 분파를 세웠습니다.
“그런 일이!”
오방원이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남궁휘를 노려보았다.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한 남궁휘는 그저 눈을 감고 부인하기 위해 애를 쓸 뿐이었다.
“그 객잔을 약속 장소로 정한 이유도 그곳이 남궁휘 대협께서 손을 대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남궁성현 소공자는 이 일을 모르는 듯했지만 객잔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을 눈치 챘을 겁니다. 만약에 남궁성현 소공자께서 그날 객잔에서 말실수라도 했다면 어찌할 뻔했습니까?”
객잔에 있던 화산일검 악소군과 혜인사태의 성정을 모두 아는 좌중은 치를 떨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일파만파 커졌을 거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남궁연 가주의 성정으로 보아 일이 터지면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어찌할까요?”
좌군사 위공의 말에 남궁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조카의 성정으로 보아 세가를 위해서라면 자식이라도 냉정하게 버릴 인물이었다.
친딸 같던 큰 조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조카를 또 하나 잃을 수는 없었다.
남궁휘는 이 일을 어떻게든 자신의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 했다. 결국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주도권은 좌군사 위공에게 넘어갔음을 인정하고 그와 손을 잡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주먹을 쥔 남궁휘의 두 손이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훔쳐본 좌군사 위공은 남몰래 고소를 지었다. 이어 쉬지 않고 금영사태를 몰아 쳤다.
“또, 혜인사태가 우리의 계획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 까요?”
정곡을 찌르는 화두에 금영사태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몇 해 전 자신의 동기 중 하나를 파계시키면서 보여 준 혜인사태의 잔혹한 성정은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었다.
가뜩이나 자신을 못마땅해 하고 있는 혜인사태에게 꼬리를 잡혔다가는 자신의 승적은 물론이고 아미파 내에서 축출되어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참담한 말로를 맞이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좌중을 궁지로 밀어붙인 위공은 자신 역시 그들과 같은 운명임을 내세웠다.
“저 또한 무림맹 내에서 지위를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를 당하겠죠.”
자신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말하는 좌군사 위공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선을 주며 이 사태를 해결할 사람은 자신뿐임을 주지시켰다. 확실하게 주도권을 쥐었다고 판단한 좌군사 위공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득의했다.
“남궁세가와 휘주상방은 항주에 뿌리를 내리고 금영사태는 차기 아미파의 장문인 되고 저는 무림맹의 총군사가 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가라앉은 실내의 공기가 좌군사 위공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는 모든 상황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잠시 계획에서 벗어났지만 다시금 그의 주도하에 놓이게 되자 특유의 여유를 되찾았다.
“우리의 원대한 목적에 현재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연화상화와 경쟁하고 있는 태평상하, 둘째 화산일검 악소군과 혜인사태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골치 아픈 것으로 남궁세가 소공자의 거취 문제가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좌군사 위공에게 꽂혔다. 그의 해결책이 정말 도움이 될지 어떨지 기대하는 심정은 한결같았다.
“첫 번째 문제는 태평상하의 주인이 이곳에 있으니 내일 판결에서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좌군사 위공이 자신 있어 하자 오방원이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괜찮겠소?”
“후후후, 한림원 학사 나부랭이에게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려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방원은 좌군사 위공이 상대를 너무 경시하는 것 같아 충고하려 했지만 분위기에 맞지 않아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객잔에서 태평상하의 주인과 좌군사 위공 사이에 악연이 있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주도면밀한 위공이 벼르고 있다면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믿어 보기로 한 것이다.
오방원이 입을 다물자 좌군사 위공은 다음 사안으로 넘어갔다.
“두 번째 문제는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화산일검 악소군과 아미의 혜인사태는 둘 다 뼛속까지 명문정파이며 작은 불의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위공의 엄포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들 역시 명문 정파이기에 정파인들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독하리만치 고지식한 이 별난 무리는 사문과 정파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맹목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탄을 받은 이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작중은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일이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정파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니 제게 맡겨 주시면 됩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들의 손을 떠난 일임을 자각하고 있어서이다.
“마지막이 가장 까다로운데 어째서 남궁세가는 소공자에게 이번 일에 대해서 함구한 겁니까? 소공자 정도의 혜안이라면 알아서 잘 처신을 했을 텐데요. 혹시 이 일은 남궁휘 대협의 독단이었던 겁니까?”
낮은 한숨 소리에 좌군사 위공은 의문점이 풀렸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 된 것이군요. 아마도 정주부에서 큰 조카를 잃으신 일 때문에 평정심을 잃으셨나 봅니다.”
아픈 곳을 후벼 파는 좌군사 위공을 죽일 듯 노려보았지만 이내 눈에서 힘을 빼고 말았다. 눈을 감자 늘 다정다감하고 총기가 넘쳤던 남궁소희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진가장원에서 마지막 담소를 나눴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정주부에서 파견 나왔다는 판관을 죽이러 밤에 찾아갔으니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후였다.
‘내가 좀 더 그 애를 지켜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 했어!’
평생의 한이 되어 버린 화화공자 사건은 남궁휘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남궁세가가 한순간에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남궁소희의 아들이 왕부를 잇게 된다면 남궁세가는 황실에 편입되는 영광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일에 걸림돌이 되는 정실부인과 왕자를 제거하기 위해 화화공자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왕비와 왕자를 제거하려 했건만 난데없이 나타난 판관 때문에 소중한 것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다. 친딸 같던 조카와 세가 내에서 하늘을 찌르던 자신의 지위도 곤두박질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남궁휘는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험을 해야만 했다.
세가조차 모르게 항주에 기반을 거의 다 닦아 놓았는데 어느 날 퍼지기 시작한 소문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비밀리에 차린 객잔에 남궁성현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리고 그것이 악몽이 되어 나타날 줄은 그도 미처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 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법입니다.”
좌군사 위공이 남궁휘의 상념을 깨뜨렸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내심 그런 반응을 기대했는지 좌군사 위공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을 모두 돌려놓겠다는 뜻입니다. 대신 저에게 힘을 좀 빌려 주셔야겠습니다.”
“빙빙 돌리지 말고 간단하게 이야기하게.”
아까와 달리 담담해진 남궁휘를 보며 좌군사는 ‘역시’라고 속으로 감탄했다.
‘남궁휘, 과연 이름값을 하는구나! 내가 그렇게 뒤흔들었건만 벌써 평정심을 되찾다니 놀라워!’
속내와 달리 좌군사 위공은 내심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어렵게 운을 떼었다.
“휘하에 있는 천검단이 필요합니다.”
꿈틀!
남궁휘의 굵은 눈썹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검에 있어서 최고라고 자부하는 남궁세가의 자랑 중에 하나가 천검단이다. 자질이 우수한 동남동녀들을 추리고 또 추려서 남궁세가의 비전으로 길러 낸 세가의 주된 무력 집단이었다. 세가의 장로급에게는 일정한 수의 천검단이 배속된다. 좌군사 위공이 그걸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어떤 의미인 줄은 알고나 있나?”
무감정한 목소리에 좌군사 위공은 미소로 답했다.
“하하하, 왜 모르겠습니까? 만일에 경우 목을 걸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지?”
“후후후, 답답하시기는 여기에 목숨 걸지 않은 이가 누가 있습니까? 실패한다면 모두 구질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살아갈 뿐이죠.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안그런가요?”
어색한 기침 소리와 침묵을 확인한 좌군사 위공이 그럴 줄 알았다며 계속 떠들었다.
“남궁휘 대협의 도움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금영사태께서도 한 가지 처리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는 또 왜 끌고 들어가는 거지요?”
금영사태는 마음대로 자신들을 휘두르는 좌군사 위공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사납게 노려보았다. 밖에서 보여 주는 자애로운 금영사태는 잊어야 했다.
“이미 짐작하신 듯하니 편히 말하겠습니다. 우군사 사공혜미의 수신 호위들을 아미파로 다시 불러들이십시오.”
그것만은 짐작 못했는지 금영사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방원 대인께서 힘을 실어 주실 겁니다. 아미파에서 본청궁을 다시 짓는데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고 들었습니다. 그 점을 이용하시면 될 겁니다.”
좌군사 위공은 할 말을 다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기울이자 모두들 그의 심중을 알게 되었다.
사사건건 좌군사 위공을 아래로 보고 무림맹에서의 입지를 위태롭게 만드는 여인 사공혜미!
그녀는 무림의 대변인이자 정파의 수호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몇몇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졌다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는 수많은 분쟁과 음모를 파헤쳐 무림의 혈겁을 수차례나 미연에 방지한 공이 있다.
그 결과 우군사 자리에 앉아 칭송과 존경을 받고 있다.
물론 좌군사 위공의 입장에서 그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공석인 무림맹 총군사가 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를 제거하는 것은 성급한 일인 듯싶소만?”
금영사태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좌군사 위공은 웃음을 터뜨렸다.
“제거라니요? 그 무슨 무서운 말씀이십니까? 저는 단지 그녀의 호위를 맡은 아미파의 여협들을 잠시만 문파로 불러들여 달라고 부탁했을 뿐입니다.
“그 사이 사공혜미를 제거하겠다는 뜻 아닌가요?”
“쯧쯧쯧, 저를 그렇게 어리석은 인물로 보셨다니 실망입니다. 사람을 죽여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제 방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쩌겠다는거죠?”
금영사태가 고운 아미를 찡그리자 좌군사 위공은 섬뜩해 보이는 미소로 입술을 열었다.
“아무래도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실수를 하게 되는 법이지요.”
“그 일에 천검단까지 필요하다는 뜻인가?”
남궁휘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자 좌군사 위공은 혀를 찼다.
“저희가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을 또 잊으신 겁니까? 제가 살아야 여러분도 살고 여러분이 살아야 저도 삽니다. 하루라도 빨리 공석으로 비어 있는 총군사 자리에 제가 올라서야 여러분들의 대업이 성취되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도무지 반박할 틈이 없다. 꺼림칙하고 믿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별다른 도리가 없다. 좌군사 위공을 뺀 나머지 사람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차피 끼어든 투전판이니 다 잃든 모두 따든 계속 가는 수밖에 없지!”
오방원이 내뱉듯이 말하자 금영사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다만 남궁휘만은 꽤나 오래 주저하며 고민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별도리가 없는 듯 체념하듯 손을 들어 동의했다.
“후후후, 자알 생각하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들의 동맹은 더욱 견고하고 돈독해졌다고 해야겠습니다. 향후 무림의 미래는 저희들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하하하하!”
파안대소하는 좌군사 위공을 바라보는 오방원과 금영사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남궁휘는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추악한 음모와 은밀한 거래를 지켜보는 것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다른 사람이 그 피해를 볼 때 해당하는 사항이지 자신의 일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담장을 넘을 때만 하더라도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던 곽무헌은 북해의 빙산보다 더 냉랭해졌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애써 참고 있지만 신체를 접촉하고 있는 송 현에게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극무해의 기운은 늘 주변과 동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송현은 곽무헌의 마음이 폭풍전야처럼 적막하다는 것을 느끼며 긴장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남궁휘가 좌군사 위공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뭔가 한 가지가 빠진 것 같아서 찜찜하군.”
“무엇이 그리도 불안하신 겁니까?”
“자네는 맹주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어.”
남궁휘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못내 싫은지 좌군사 위공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맹주라...... 사실 맹주는 전혀 위험 요소가 아닙니다. 우리 일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뿐더러 제 세치 혀에 장단을 맞춰서 춤추는 꼭두각시에 불과할 테니 그런 걱정일랑 접어 두시지요. 남. 궁. 휘 대협!”
끊어서 말하는 좌군사 위공의 말에는 일견 오만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그 당당한 자신감에 남궁휘는 이견을 낼 수 없었다. 권왕 곽무헌이 무림맹에서 우군사 사공혜미보다 좌군사 위공을 더 믿고 의지한다는 소문 아닌 소문이 오늘 사실로 증명된 셈이었다. 한밤의 은밀한 회담은 결국 좌군사 위공이 뜻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 뒤로 나누는 밀담은 워낙에 작은 소리로 속삭여서 더 이상 듣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제 자리를 떠야만 하기에 일어서려던 송현은 온몸이 찢어질 듯한 고통에 터져 나오는 비명을 손으로 막아 내야만 했다. 쉬이이!
‘크흑! 지독한 살기다. 소, 손을!’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곽무헌의 손을 떼어 놓기 위해 송현은 힘을 써야만 했다. 참아 내려 했지만 그랬다가는 살점이 떨어져 나갈 판국이었다.
‘제아무리 천하제일을 다투는 무인이라고 하지만 사람은 사람일 뿐이로구나!’
마음속에서 일어난 분노가 극에 달하자 곽무헌은 당장에 전각 안으로 뛰어들어 모두를 죽일 기세였다. 그러나 지옥의 불길처럼 활찰 타오르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리둥절하여 바라보는 송현에게 한쪽 눈을 찡긋한 곽무헌은 송현을 잡고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곽무헌의 무거운 기운이 사라지자 귀뚜라미들이 제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전각은 새벽녘의 고요함 속에 묻혔다.
어두운 공간에 살아 숨 쉬는 두 인영의 숨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사면이 거대한 석벽으로 둘러싸인 답답한 공간이었다. 한쪽에 놓인 벽곡단 단지와 물 항아리가 아니라면 사람이 지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쿵! 쿵! 쿵!
인간이 내는 힘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강맹한 기운이 석벽을 향했다. 진흙 바닥에 어린 아이들이 발도장 손도장을 찍듯이 강철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석벽에 권, 장, 족 자국이 차례로 생겼다.
송현은 그 기이한 현상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았다. 석실의 틈새로 들어오는 햇살에 비친 곽무헌의 움직임은 실로 죽음의 춤사위였다.
푸스스!
벽을 강타하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석실의 천정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자칫 석실이 붕괴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송현의 눈은 곽무헌에게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기운을 갈무리하여 내재하지 않고 밖으로 내친다는 무극무해의 구절은 바로 저걸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곽무헌이 분노를 표출하는 춤사위가 송현에게는 좋은 공부가 되고 있었다.
무극무해는 엄청나게 강한 기운을 송현의 몸에 쌓이게 만들었다. 기운이 쌓이는 건 모든 무인들이 소원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몸은 수용할 수 있는 기운의 양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기운이 갑자기 너무 커지면 어딘가로 뻗어 나가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근기가 뛰어나서 몸이 많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기운에 의해 몸이 상하거나 하는 일이 없겠지만 몸이 많이 막혀 있는 사람이라면 그 뻗치는 기운이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다가 결국에 어느 한 곳에서 정체해 버리거나 인체의 주요한 혈을 강하게 자극하여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송현은 이를 몇 차례나 경험했고 그것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바로 몸과 마음을 바로 하기 위한 수련이 오히려 몸을 망치는 원인이 되어 버리는 허무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문파나 내공수련은 무척 조심스럽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운을 늘려 가야 한다. 사파의 기운이 음산하고 성정이 사악한 것은 바로 이 부분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실로 정과 사의 차이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다행히도 무극무해의 호흡법은 기운을 축기하는 과정에서 몸을 통한 행공을 통해 자신의 몸을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 간다.
다만 독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사부인 시타르 마저 온전한 호흡법을 송현에게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이다.
호흡법 하나에 인간이 괴물로 변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만큼 인체의 숨겨진 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해 주는 단편이었다.
오랜 세월 수련을 한 이들도 무극무해 앞에 이성을 잃어버리고 괴물이 된 것은 바로 스스로에 대한 자만 때문이었다. 그러나 송현은 항상 자신을 살피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 왔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다 그 묘리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행기는 유수불부이다”
심호흡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멈추지 않고 흘러야 썩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송현은 제 이마를 세게 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그동안 영호인에게 수차례 도움을 받아 구절을 풀이 하려고 노력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진전이 없었다.
매일 밤 검무를 추며 몸속에 터질 듯이 내재된 기운을 검을 통해 쏟아 내려 했지만 언제나 손끝에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이유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무공의 이론은 학문과 같아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새로운 진리를 깨달은 송현의 머리 위로 아지랑이처럼 은은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송현은 곽무헌이 만들어 내는 광풍 속에서도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발가벗겨진 느낌이 든 송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헉!”
벽 틈의 햇살 아래 석상처럼 서 있는 곽무헌이 태산처럼 느껴졌다. 곽무헌이 천천히 몸을 돌리자 송현은 갑작스럽게 변한 그의 얼굴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밤사이 그는 십 년은 더 늙어 버렸다. 묵 빛처럼 검던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것이다. 심마가 찾아왔던 건지 얼굴에 주름도 많이 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송현이 더듬거리며 묻자 그의 입에서 허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하면 안 되는 것이냐?”
뜬금없는 말에 송현은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뒷배 없는 놈들끼리 서로 위안하며 지내면 안 되는 것이더냐. 그래서 정을 주고 챙겨 주고 한 것이 고작 이것이더냐?”
왠지 모르게 처연하게 느껴지는 넋두리였다.
“그랬었군요. 그런 일이......”
그제야 송현은 곽무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머리가 하얗게 셌는지 알 수 있었다. 수많은 무림 명숙들 사이에서 곽무헌은 외톨이였을 것이다. 다들 무림맹주라며 허리를 굽실거리지만 그건 그를 존경해서라기보다는 그의 힘 때문이었다.
출신!
가문!
혈연!
그런 것이 발목을 잡을 줄 곽무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왜 수많은 기재들이 뛰어난 자질과 무공을 가지고도 은거하며 기인이사로 지내는지 곽무헌은 훗날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떠나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들과 달리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래서 무림맹 맹주의 자리를 승낙했고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도 그를 인정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더욱 경원시 했고 멀리 했다. 그런 와중에 떠돌이처럼 흘러 들어온 좌군사 위공에게서 곽무헌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아미파라는 거대한 뒷배를 가진 사공혜미보다 좌군사 위공에게 정을 쏟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런 위공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곽무헌의 상심이 큰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해의추식이라 했거늘 어찌하여...... 어찌하여......”
곽무헌의 입에서 연신 한스러운 감정이 흘러나왔다. 송현은 책에서 읽은 옛 고사를 떠올렸다.
한신을 두려워한 항우가 그에게 유방을 치도록 명하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자기 옷을 벗어 내게 입혀 주고 자기 밥을 나누어 주었으며, 내 계책을 받아들였으므로 내가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라며, 무릇 남이 나를 깊이 신뢰하는 데 내가 그를 배신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설령 죽더라도 뜻을 바꿀 수 없다.]
라며 거절한 유명한 일화였다.
“좌군사 위공에게서 한신의 마음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어째서냐?”
“그 눈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셨군요. 그 검은 눈동자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을 말입니다.”
“하면, 너는 알고 있었단 말이로구나!”
“네, 그런 셈입니다. 아주 오래전 한림원 서원에서 그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사라기보다 전쟁을 치루고 싶어 하는 장수 같았죠. 그래서 어린 나이에 제가 그렇게 객기를 부렸나 봅니다. 그때 논제를 풀지 않고 져 주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요.”
송현이 고개를 좌우로 젓자 곽무헌의 눈이 커졌다
“네 녀석이 바로 그였구나! 위공이 그렇게 말한 평생의 적수가!”
“후후후, 그가 그렇게 말했나요? 학문을 하는 이가 적수라는 말을 하다니, 그는 이미 마음에서부터 지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 그랬을지도...... 아니 네 말이 맞는가 싶다. 아마도 내가 너무 외로워서 그 녀석의 반골 기질을 알고도 외면했을지도 모르지.”
곽무헌은 헛웃음을 흘리며 모든 걸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한 듯싶었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외로워지는 것인가?’
곽무헌을 보면서 송현은 무림인들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누구나 칭송하는 권왕 곽무헌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때 석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새벽 내내 큰 소리를 냈으니 밖을 지키는 수신 호위들이 걱정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어찌 하실 참입니까?”
“글쎄다...... 어찌 하는 것이 좋겠느냐? 내 방식대로 한다면......”
“그것은 피를 부르는 참극뿐이겠죠?”
“그래 목불인견의 참상이 되겠지!”
곽무헌이 짓궂은 표정으로 되묻자 송현은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일단 시작한 폐관수련이니 날을 채우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호오, 혼자서 자신 있다는 것이냐?”
“세상 물정 모르는 학사 나부랭이 아닙니까? 그런 녀석이야말로 무서운 법입니다.”
“하하하! 그래, 그럼 네가 어떻게 하는지 구경이나 하면 되겠구나!”
“한 번은 도와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현이 씨익! 웃으니 곽무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 봐라! 제일 귀찮은 뒤처리는 내 몫이다. 이거냐?”
“집주인이시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뭐?”
곽무헌은 당돌하기까지 한 송현의 말에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수련동 안에서 맹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걱정하던 수신 호위들은 안도하며 물러났다. 설마하니 그 안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