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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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장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하지 못하는 법이다 

  계절의 구분이 뚜렷하고 물이 풍부해서 고래로부터 어미지향, 즉 어류와 곡식이 많이 나는 곳이라 불리는 항주에 도착하니 송현은 그야말로 딴 세상에 온 듯 했다. 특히 대륙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이름난 찻잎과 비단, 서시로 대표되는 절강의 미인과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자연경관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항주만의 자랑이다. 이처럼 멋진 곳에서 당연히 즐거워야 마땅하건만 송현 일행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탁자 위에 놓인 주머니 속의 돈을 셈하는 왕백의 이마에 주름살이 점점 늘어났다.  "휴, 은자 스무 냥에 엽전 삼십 닢이 저희의 전 재산입니다. " 한숨 섞인 왕백의 푸념에 차분한 영호인 마저 코끝을 찡 그리며 인상을 썼다. 기세 좋게 황궁을 뛰쳐나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송현을 비롯해서 일행들에게 자금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 이었다.  송현과 왕백의 녹봉이야 뻔했고 양명과 막여위는 벌어 둔 돈을 항시 가족에게 보냈기 때문에 손에 쥔 돈이라고 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영호인이 꽤 모아둔 돈이 있었기에 여기까지라도 올 수 있었다. 모두들 자신을 믿고 여기까지 왔기에 송현의 어깨가 무거운 것은 당연지사였다.  "좋지 않군! 좋지 않아." 막여위가 성질을 부리자 양명이 눈치를 주었지만 괄괄한 성격의 막여위는 당장에 큰일이라도 난 듯이 호들갑을 떨어 좌중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왕백이 은자를 갈무리하며 조심스럽게 송현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송현 학사님! 제가 알아보니 항주부의 부윤이 주치 대인이던데 한번 만나보심이 어떨까요?" 항주부 부윤 주치는 곡사의 난 때 송현의 기지로 목숨 을 건진 사람이다.  그 뿐만 아니라 몇 해 전 난리 통에 구해주었던 관리들 이 항주부에 꽤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왕백이었다.  어렵사리 말을 꺼낸 왕백은 송현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 지는 것을 보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쓸데없는 소리 !" 단박에 도리질 하는 송현을 보자 왕백은 그럴 줄 알았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제일 경계하는 일이 뭔지 잘 아는 녀석이 한심한 소리나 하고, 쯧쯧쯧!" 송현은 늘 관리들이 행실을 똑바로 할 것을 강조하는 인물이었다.  왕유 같은 환관들의 부정부패에 질려 버린 송현에게 청탁을 하라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건 송현의 말이 옳다.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부정을 저지르라는 말과 같은 것이 다. " 영호인도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왕백은 땅이 꺼져라 한 숨만 내쉬었다 "하지만 일단 살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왕백이 지지 않고 대꾸하자 송현이 버럭 호통을 쳤다. "아니, 이 녀석이 그래도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대들다니 혼쭐이 나고 싶은 모양이구나!" 송현이 크게 화를 내자 영호인이 만류했다. 그러자 왕 백은 오히려 큰 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이제 저희는 녹을 먹고 사는 관리가 아닙니다.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보통 백성이란 말입니다. 청렴도 좋지만 식구들의 배를 곯게 만드는 것보다 그깟 청 탁 좀 하는 게 백번 낫다고 봅니다. "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왕백을 데리고 영호인 이 사라지자 송현은 한동안 멍해 있었다.  "저 녀석이 내가 알던 그 왕백이 맞아? 장난기가 있기는 하지만 한 번도 송현에게 대든 적이 없던 왕백이었다.  환관인 왕백이 황궁을 떠나 송현을 따라나선 것만 보아 도 얼마나 믿고 따르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왕백의 흥분한 모습은 송현에게 충격이었다.  "훗! 뿌리가 없어도 사내란 말이지!" 충격을 받은 송현과 달리 양명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무슨 뜻인가?" 양명의 말뜻을 몰라 송현이 어리둥절해 하자 막여위도 껄껄거렸다 "양명의 말은 왕백에게 부양할 여자가 생겼기 때문에 저 녀석이 저렇게 민감해졌다는 뜻이라고, 이 눈치 없는 학사님아!" 막여위의 말에 송현은 이 난감한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됬다. 그리고 북해관의 사막에서 데려온 삼묘족 소녀에 생각이 미쳤다.  '타이라 때문인가?" 송현은 가족을 잃은 지 오래되었기에 그동안 식솔들을 보살피는 일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다. 살벌한 황궁생활 에서는 살아남아 복수를 하는 것도 벅찬 삶이었기 때문이 다.  "그래 지킬 것이 있기에 왕백 녀석이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구나." 송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선비라며 고고한 척하고 있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 난 아직도 학사라는 허울을 벗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어리석은 놈!' 입술을 깨물며 후회하는 송현의 어깨를 양명이 두드려 주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말게. 녀석도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야." 양명의 위로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왕백은 좋은 녀석이었다.  "그에 비하면 난 형편없는 놈이지?" 송현의 웃자 양명 역시 씨익 웃어 보였다. "그걸 이제 알았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나며 누군가 들어왔다 "저기,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본의 아니게 듣고 말았습니다. 외람되지만 제게 약간의 여유가 있으니 여러분들을 돕고 싶습니다. " 향기마저 묻어나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소리 나는 곳을 향했다.  "서희 소저께서 그리 말해 주신다면 저희야 고맙기 그 지 없지요." 양명이 서희의 호의에 크게 기뻐했다.  "그건 아니 될 말이네!" 그러나 송현이 정색을 하고 나서자 왕백 못지않게 화가 났다.  양명은 괜한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라며 나무랐지만 뜻밖에도 송현은 완강했다.  "하지만........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말하는 송현의 태도가 답답한지 양명은 송현에게 억지를 부리지 말라며 큰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분위기가 험악해 지자 정작 난처해 진 것은 서 희였다. 자신 때문에 분란이 일어났으니 편할 리가 없었다.  "미안해요. 제가 주제넘게 나선 것 같네요. 실례할게 요." 붉게 물든 얼굴을 감추며 서희가 방을 뛰쳐나가자 깜짝 놀란 송현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바로 쫓아 나갔다.  그 광경을 보고 양명이 혀를 차자 막여위는 머리 뒤로 깍지 낀 손을 두르며 벽에 몸을 기대었다.  "암, 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갓집 신세를 안 진다고 했으니 잘한 거야!" 막여위의 농지거리에 양명은 화들짝 놀랐다.  "자네 뭐라고 했나?' 놀란 양명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막여위의 턱수염이 마 구 떨렸다.  "콕콕콕! 무당산에서 여기까지 배를 타고 오는 날들이 얼마인데 여태 몰랐다니 눈치 없기는 자네도 매한가지로 군." "허허허, 그랬나? 그랬군." 두 사람 사이를 눈치 채지 못한 실수에 제 이마를 치는 것으로 자신을 벌한 양명은 좋아하는 여인에게 돈을 빌리라고 한 자신의 입을 마지막으로 세게 쳤다. "그래서 어디 아프겠어, 내 주먹을 빌려 줄까?" 막여위가 일어나려 하자 양명이 막여위를 걷어차 버렸 다.  "시끄러!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라고!" 양명은 서둘러 서희를 쫓아 나간 송현이 그녀의 상한 마음을 잘 보듬어 주기를 바랐다. 괜히 자신의 입방정으로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해지지 않기를 빌면서…….한편 서희를 쫓아간 송현은 객잔의 사 층 누각 기둥 곁 에 홀로 서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그녀의 됫모습에 어깨를 잡으려던 손을 도로 거두었다. 잠시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송현은 용기를 내어 그녀를 불렀다.  "혹, 내가 지난번에 한 말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면 사 과하리다. " 송현은 조바심을 내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남녀관계 에 있어서는 왕백보다 못한 송현이기에 어떻게 여자의 마음을 달래야 할지 몰라 애만 태웠다.  "전 괜찮으니 겨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송 학사님의 체면을 생각하지 못한 제 불찰이 커요." 일부러 환하게 웃어 주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에 송현은 감동받았다. 그녀와는 이제 서로의 눈만 봐도 마음이 느껴지고 있었다.  "서희 소저, 그대의 고마운 마음만 받겠소." 송현이 두 손을 꼭 잡자 서희의 두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곤 그것이 목덜미까지 붉게 퍼져 나갔다. 서희는 차 마 송현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작게 속삭였 다.  "언제까지 소저라고 부를 거죠?" 가볍게 눈을 흘기는 모습이 송현의 가슴을 더욱 진탕시 켰다.  "그, 그럼 뭐라고 부른단 말이오?" 송현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자 그녀는 토라지며 슬픈 표정이 되었다 '아보 같은 사친"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송현이 안절부절못할 때 어디선가 한숨 소리가흘러나왔 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미약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 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지금 서로의 감정에 휘말려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이 멍청한 녀석아! 그럴 때는 이름을 불러 줘야지! 난데없이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 송현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적의 없는 음성에 안도하며 뽀로통하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서희......이러면 되었소?" 송현은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하 여 자신이 지금 뭐라고 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자신의 뺨에 뜨거운 감촉을 남기 고 사라질 때까지 송현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서 있었 다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지만 이렇듯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을 줄은 송현도 몰랐던 일이다.  어느덧 서쪽 하늘로 지고 있는 붉은 노을이 누각을 물들인 다음에도 망부석처럼 혼자 서 있던 송현이 제 감정 을 이기지 못하고 흥에 겨워 시 한 수를 읊조린다. 연인 만난 사람 웃음으로 입 못 다무네! "도무지 못 봐 주겠구나. 어지간하면 참아 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 있다가는 주화입마에 걸리겠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에 깜짝 놀라 현실 세계 로 돌아온 송현의 고개가 급히 돌아갔다. 그곳에는 언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는지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곰방대로 가려운 등을 긁고 있었다.  그러나 송현은 탁자 위에 놓은 청옥장이 눈에 더 들어 왔다.  "다, 당신은...... 구걸 신개?" 전음성의 주인공이 개봉부에서 만났던 개방의 장문인 구걸 신개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송현은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등 긁던 곰방대를 다시 입에 물고 빠는 구걸 신개의 기행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송현이 포권지례를 하며 고개를 숙이자 구걸 신개의 눈 이 커졌다.  '이놈 봐라! 애정지사에 끼어들었으니 화를 낼만도 한 데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시해?' 곰방대를 문 구걸 신개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이미 개봉부에서 한 차례 조우하면서 보통 인물이 아니 라는 것을 눈치 챈 후 개방의 정보력을 동원해서 송현의 됫조사를 철저히 거친 후였다.  구걸 신개의 머릿속으로 송현에 대한 자료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역시 정보는 정보일 뿐이다. 사람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 보아야 알 수 있어 무당산에서 부터 항주까지의 일을 보면 이 녀석은 보통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 이것이 구걸 신새가 송현에 대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구걸 신개의 노골적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송현은 헛기침을 하며 구걸 신개의 탁자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거대 방파의 방주라면 할 일이 많을 터인데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 "거창하게 방파는 무슨 방파! 거지 놈들이 모여서 대가 리 숫자 채워 봐야 거지는 거지일 뿐이야, 퉤!" 손바닥에 침을 뱉어 담배 가루를 비빈 다음 환처럼 만 들어 곰방대에 채워 넣은 구걸 신개는 부싯돌을 튀겨 불을 붙이는 데 집중했다.  몇 차례나 실패를 하면서도 묵묵히 그것을 반복했다.  지켜보는 이가 지루할 정도로 구걸 신개의 손길은 더디다.  그러나 송현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기다렸다. 개봉부 에서 여기까지 자신을 따라온 것이 틀림없다면 아무 이유 없이 그 먼 길을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할 말이 있어 나섰을 테니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송현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구걸 신개가 겨우 곰방대의 불을 붙였다. 그의 앙다문 볼이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자 곰방대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 다.  "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도무지 이놈은 포기 가 안 돼." 여유롭게 담배 맛을 음미하던 구걸 신개는 진중한 얼굴 로 송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지지 않고 노려보는 송현의 치기에 구걸 신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네놈은 별종이다. 그건 인정하지." 잠시 송현을 위아래로 훓어본 구걸 신개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에게 마음을 주지 말거라. 다 네 녀석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 새겨듣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너무나 뜻밖의 말에 송현은 잠시 멍해 있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고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그런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려고 예까지 왔다면 그냥 돌아가시죠." 송현의 그런 반응쯤은 예상했는지 구걸 신개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때로는 늙은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아.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날이 을 것이다. " 송현의 마음은 크게 무거웠다 그것은 구걸 신개라는 존재가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과 그의 위 치가무림에서 가볍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구걸 신개가 남녀 사이의 문제까지 간섭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송현이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인과 헤어지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누구를 만나든지 그것은 제 의지로 할 일입니다.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송현의 냉담한 태도가 거슬렸는지 구걸 신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녀석 참, 배운 티를 내려는 거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 아이를 멀리 해! 내 말을 들어서 후회한 사람 없다. " 구걸 신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자 텅 빈 객잔의 누각은 더욱 을씨년스럽게 변했다.  "늘 그런 식인가요?" 다소 가라앉은 송현의 질문은 무척이나 도발적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산전수전을 겪은 노련한 자였다. 같이 화를 내는 대신에 차가운 입술에서 담배 연기가 뿌옇게 흘러나왔다. 꽤 무례하게 굴었음에도 반응이 없는 구걸 신개를 보며 송현은 더 이상 그를 도발해 봐야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아까 전음을 날려 도와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헤 어지라 하심은 모순입니다. " "인간사가 다 그런 것이다. " 구걸 신개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고 송현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송현의 태도에 구걸 신개는 혀를 차며 화를 냈다.  "못난 놈! 겨우 계집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다니, 네 녀석 때문에 애를 쓴 보람이 없구나!" 구걸 신개가 혀를 차자 송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 때문에 수고하셨다는 뜻이 뭡니까?" 날카로운 질문이 던져지자 구걸 신개의 얼굴에서 아차! 하는 기색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금세 표정을 바뀌지만 이미 송현은 그 어색함을 찾아낸 뒤였다.  "그, 그야 네 녀석에 대해서 알아보고 다닌 것을 말하는 거다. " 궁색한 변명이라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구걸 신개 는 죄 없는 곰방대만 괴롭혔고 송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려보았다. "대답을 못하시는 걸 보니 뭔가 꿍꿍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 '당치도 않은 소리! 나를 믿지 못하는 게냐? 나 구걸질 개 철밥통은 칠십 평생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 암!" 구걸 신개는 펄쩍 뛰며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의심을 품은 송현은 그를 믿지 않고 있었다.  "저는 솔직히 개방의 방주이신 구걸 신개님이 미덥지 않습니다. " "어째서 그러냐?' 뚱한 표정의 구걸질을 똑바로 보며 송현은 가슴에 품 고 있던 것을 쏟아냈다.  "진가장원과 남궁세가의 관계를 알면서도 방관한 점, 아니 정확하게는 남궁세가의 가주가 화화공자라는 유령 인물을 내세워 하진왕의 부인인 예비를 죽이고 자신의 딸 을 정비로 들이려 한 음모를 알면서도 외면하셨습니다.  이것은 협의를 행하는 대협으로서 부끄러운 짓 아닙니까? 그런 분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 합니다. " 송현은 판관이 죄인을 심문하듯 매섭게 다그쳤다.  "휴,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연은 화화공자를 내세워 하 진왕의 예비가 죽은 뒤 첩실인 자신의 딸이 의심받지 않고 정실부인이 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 작자가 황족이 되려하다니 꿈이 너무 컸던 게지." 구걸 신개는 쾌나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후회가 가득 담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송현은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흔들리지 않았다.  "저는 개방도 이 더러운 판에 끼었는지 의심했었습니다." 무례한 언사였지만 구걸 신개는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이란 곳이 그렇게 생각처럼 간단하게 움직인다면 골치 아플 일도 없겠지, 내 한 가지만 더 충고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 송현은 속 시원하게 말하지 않고 말을 빙빙 돌리는 구걸 신개 때문에 답답했다.  "그렇게 선문답하듯 알아듣지 못할 말 대신 쉽게 말해 주십시오. 저를 도왔다는 것은 무슨 말이며, 왜 서희 소저 와 헤어지라고 하는 건지 그 이유를 제가 납득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 구걸 신개는 이마에 주름을 가득히 만들어 고심했다. 그 리고 뭔가 결심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이 ........ 구걸 신개의 입이 열리자송현의 몸이 탁자반대편이 기울었다.  삐 이 익 ! 난데없이 들려오는 호각 소리는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규칙 적으로 울렸다.  "놈이다!" 구걸 신개의 반응은 무척이나 예민했다. 그 즉시 피우던 곰방대의 재를 털어 버리고 청옥 장을 쥔 채 난간에 올라섰다.  "무슨 일입니까?" 송현이 영문을 몰라 따라 나서려 하자 구걸 신개가 기겁 하며 손을 들어 막아섰다.  "넌 절대로 따라오지 마라!" 난색을 표하는 구걸 신개를 보며 송현은 더욱 궁금해졌다 "왠지 저와 관계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헛소리 !" 단칼에 송현의 의심을 잘라 버린 구걸 신개는 몸을 돌렸다 "그 다음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자. 내 말 명심해라, 그 계집은 절대 안 돼!" 획! 사 층 누각에서 몸을 날린 구걸 신개는 경신 법을 사용하여 순식간에 공중에서 몸을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지면에 맞닿는 순간 크게 몸이 휘며 물 찬 제비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궁신탄영!" 송현은 책에서나 읽었던 신묘 막측한 신법에 감탄했다.  "일대종사라 하더니 과연 대단한 실력이다. 저러니 내 가 그의 존재를 전혀 알 수 없었구나." 구걸 신개가 사라지자 호각 소리 역시 점차 잦아들었다.  송현은 그가 하려다 만 이야기들이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구걸 신개를 뒤쫓기 위해 난간에 뛰어 올라 풍보를 시전하려는 순간 비명이 튀어 나왔다.  "헉! 송현 학사님 안 돼요!" 비명을 지른 것은 왕백이었다. 송현에게 대든 자신의 잘못을 빌기 위해 올라왔다가 난간 위에 올라선 송현을 보고 오해를 한 것이다.  "아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목숨을 버리려 하시다니 제발 마음을 돌리세요." "뭐야, 어, 어?" 왕백에게 두 발을 잡히는 바람에 송현의 신형이 크게 흔들리며 비틀거렸다.  "이 녀석아, 이거 놓지 못해?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 그와 함께 한 시간이 수삼 년이다. 송현의 고집이 어떠한지 잘 알기에 왕백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어서,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조하지 않는 한 절대 로 놓을 수 없습니다. " "나 원 참. 이 녀석이!" 송현은 갑자기 나타난 왕백 때문에 구걸 신개를 쫓아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에게 물어볼 것이 많기에 아쉬움이 컸다 그러니 화가 나는 것이 당연했다. 영문을 모르는 왕백은 송현의 목소리가 커지자 오해는 깊어졌고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더욱 세게 매달렸다.  밀고 미치는 소동으로 결국 아래층의 다른 손님들까지 몰려와 구경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옥신각신 끝에 영호인 이 왕백을 진정시켜 겨우 소동이 가라앉았다. 송현과 왕백이 오해를 푸는 동안에 갑자기 양명이 놀란 얼굴로 나타났다.  "서희 자매가 사라졌네." 양명은 서희와 송현의 다툼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사 과하려고 서희 자매의 방을 찾아갔다고 말했다.  "급히 나간흔적이 역력했네. 미처 챙기지 못한 옷가지 며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걸로 보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 겨정이군." 양명은 꼭 자신의 잘못 같아서 마음 편치 않아 보였다. 누구보다 놀란 이는 송현이었다. 그러나 송현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걸 신개가 호각 소리를 듣고 뛰쳐나간 후 그녀들도 사라졌다?' 송현의 두뇌가 급박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히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하지만 서희와 그 녀의 동생이 아닌 것은 틀림없다. 그랬다면 굳이 나에게 와서 경고할 필요는 없었겠지. 그리고 그녀들이 찾는 인물이 구걸 신개가 쫓는 자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송현은 이 일이 자신과 상관이 있음을 깨달았다 '혹시...... 그녀가 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닐까?' 송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뺨을 때렸다.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녀의 마음에 대해 의심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서로 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눈 수많은 대화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군.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도대체 개방의 방주가 왜 나를 감시했을까? 또 서희는 무엇이 그렇게 급해서 내게 떠난다는 말도 없이 떠났지?' 송현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킨 실타래처럼 꼬이자 견디기 힘들었다. 당장에 이 모든 일의 해답을 알고 싶어졌다.  송현이 벌떡 일어서자 모두들 따라 나설 채비를 했다.  송현은 일행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게 되었다.  황궁에서 떠나온 지 벌써 여러 달이 되었다. 그동안 마 음 편히 쉬어 본 적 없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함께 여기까지 왔다.  낮에 들었던 왕백의 외침이 귓가를 울렸다 언제 왔는지 타이라마저도 봇짐을 메고 왕백 옆에 나란 히 섰다 송현은 아직 일행들에게 구걸 신개의 출현을 알리지 않았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도 많은데 굳이 그 일까지 알려서 겨정을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갈등이 깊어졌다. 마음속에서도 수도 없이 여러 가지 외침이 들려왔다. 이제 겨우 항주에 도착했는데 또 기약 없는 여정을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고민이 되었다.  그때 점소이가 다가와 송현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를 읽은 송현의 입에서 힘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별수 없이 항주에 더 있어야 하겠군." 송현이 떨어뜨린 편지에는 다급히 흘려 써 내려간 서희 의 글씨가 담겨 있었다. 편지에 담긴 글은 짧았지만 그것이 송현에게는 항주에 반드시 남아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서희의 편지 가 송현의 부담을 덜어준 셈이었다. 비 개인 오후, 안개 가득한 서호 주변의 찻집에 앉아 비 파 소리에 취한 채 용정차를 마시던 송현은 잠시나마 세속의 고민거리에서 벗어나 평화를 만끽했다.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오는 날에는 더 좋다. 고 누군가 말했다더니 그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아." 송현이 찻잔을 비우며 감탄하자 점소이가 빈 잔을 채우 며 한마디 거들었다 "흔히들 하는 말 중에 소주에서 나는 비단을 입 고, 광동 요리를 먹으며 항주에서 살다가 유주에서 나는 나무로 짠 관에 묻히는 것이 최고 소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점소이의 말처럼 항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다.  '과연!' 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송현이 갑자기 품을 뒤적거리자 점소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1어라 그것이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어 깨가 축 늘어졌다.  그런 점소이의 마음도 모르고 송현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물었다.  "이보게, 이 그림과 같은 곳을 본 적이 있는가?" 송현이 내민 서화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점소이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중원 제일 절경 항주라지만 저도 다 둘러본 것이 아니 라서, 게다가 또 산이라는 것이 다 거기서 거 기 인 것 같은 지라 잘 모르겠습니다. " 볼일이 없자 냉큼 자리를 떠나는 점소이를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송현은 고소를 금치 못하고 서화를 들여다보았다.  수백 번도 넘게 보고 또 보아서 서화의 한 점 티조차도 외어 버렸지만 끝내 서화는 비밀을 털어놓지 않고 있었 다.  서화 속의 시구는 분명히 항주를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왠지 모르게 이 서화 속에 담긴 비밀이 큰 도움이될 것 같은 느낌에 쉽게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도저도 되는 일이 없으니 답답한 마음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고 송현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애꿎은 서화만 노려보았다 "이럴 때 너라도 도움이 되면 좋을 텐데." 죄 없는 그림을 노려보았지만 대답을 해 줄 리가 만무 하다. 근심이 드리워진 송현의 마음과 달리 서호 근처 안개는 어느덧 걷히고 밝은 햇살이 내리비추었다.  "그래,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지." 송현은 서화에 미련을 버리고 품에 갈무리한 다음 자리를 나섰다. 항주부 세수의 수입이 풍부한 곳이라 그런지 관청의 관리들 얼굴에도 넉넉함이 묻어났다.  송현은 항주부 부윤 주치를 만나기 위해 오전부터 내키지 않는 걸음을 했다.  '일단 살고 봐야지 않냐' 며 외치던 왕백의 얼굴이 떠올라 송현은 눈을 질끈 감고 항주부에 발을 들여 놓고 만 것 이다.  부윤 주치의 집무실. 비단 관복을 입은 주치가 두 눈을 감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주치의 곁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부윤의 책사 서광은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살며시 한쪽 눈을 뜬 주치가 입술을 씰룩이며 인상을 썼다.  "누가 왔다고?" 주치의 무거운 입이 떨어지자 서광은 반색을 하며 송현 이 항주부를 찾아 왔음을 알렸다.  "흠, 급해 보이더냐?" 주치의 말에 서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해 본 후 대답하였다.  "그다지 급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에 쫓기듯 초조 해 보였습니다. " "황제께서 내린 상도 마다하고 황궁을 나온 자가 초조 해 기색으로 나를 찾아왔다 이 말인데, 도대체 무슨 꿍꿍 이 속일까?" 얼마 자라지 않아 볼썽사나운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주치가 미적거리자 서광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곡사의 난 때 송현 학사님이 아니었다면 항주부는 끝 장이 났을 겁니다. 의당........ "의당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했어야 옳다고 하려는게냐?" 주치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서광은 괜한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두려워 얼른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나가면 내 체면이 서질 않고 너무 늦게 나가면 그의 체면이 상하니 반각 정도가 합당하겠군." 주치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반각 후 주치는 관복을 정제하고 집무실로 향했다. 멀쩡하게 걸어오던 주치는 집무실 앞에서 갑자기 병약한 노인처럼 허리를 굽히고 서광에게 부축하라고 시켰다.  문턱을 어렵사리 넘은 주치는 앓는 소리를 하며 호들갑이니,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 주치가 늙고 병 들어 손님을 기다리게 만들었습니다. " 두 손을 포근하고 위아래로 흔들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 은 영락없이 황궁의 환관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많이 변했군.' 몇 해가 흘렀다고 하지만 주치의 변화는 송현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주치는 노 인과 진배없었다.  "오래만입니다.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불쑥 찾아와 예가 아닌 줄 알지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송현 학사님이야말로 이 주치의 구명지은이 아니십니까? 내 집에 오셨다 생각하시고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넉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곡사의 난 당시 충신의 덕목을 부르짖고 선비로서 가야 할 길을 피력하던 깡마르고 대쪽 같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송현에게 큰 충격이었다. 바로 주치에게서 정치꾼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 어디에도 충과 예를 강조하던 사대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뻔히 속내가 드러나는 연극에 주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현은 그에게서 미래의 자신을 발견했다.  다음 순간 송현은 크게 몸서리쳤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에 청탁하여 돈을 받는다면 자신도 그와 같이 변할 것 같아 두려웠다. 깊이 탄식한 속현은 주치를 향해 조용 히 읖조렸다.  "부윤과 저는 평생에 두 번 만났지만 오늘 우리는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좋았을 것 같습니다. 부디 세 번째 만남에서는 서로 웃으며 만나기를 바랍니다. "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하며 부윤에 대한 예의를 차린 송 현은 맥 빠진 모습으로 항주부를 빠져나왔다. 분명히 자 신이 항주부를 찾아온 것을 많은 이들이 알았을 터인데 찾아온 이가 아무도 없었다.  송현이 저들에게 은덕을 베풀 때 결코 대가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알게 되니 서운 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감탄고토, 염량세태라고 하더니 내가 그 꼴이구나. 하기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 그 게 바로 사람의 마음이겠지." 마음이 크게 상한 송현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걸었다.  턱! 반대편에서 오던 행인과 어깨를 부딪치자 송현의 몹시 흔들렸다 점점 사람이 많아지니 송현은 사람들과 계속해서 얽혔고 멍해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여기는 어디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그곳은 항주의 유명한 저잣거리였다 상인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목청을 돋우고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짐꾼들이 부지런히 물건을 나르고 있었다. "어찌하여 이곳은 이렇게 생기가 넘쳐나는 걸까?" 송현은 우울하던 마음마저 가시게 만드는 활력에 저도 모르게 이끌려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다. 백성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한복판에 들어선 송현은 그 속에서 사람들의 땀과 웃음, 행복 그리고 열정을 보았다.  "겨우 그만한 일로 낙담하고 있던 내 자신이 부끄럽구나!" 송현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공자께서도 재물을 얻는 일이라면 말채찍을 잡 는 마부의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가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그동안 점잖을 떨었는가?" 딸린 식솔들의 안위를 챙기지 않고 공자 왈 맹자 왈 하 는 것만이 진정한 사대부라고는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저잣거리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운 송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득롱망촉

- 끝없는 인간의 헛된 욕망

  근자에 들어 항주 저잣거리에 대단한 명물이 나타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학사 차림의 서생이 무슨 호기심이 그리 많은지 상인들을 붙잡고 살림살이는 어떤지 요즘은 어떤 물건이 잘나가고 장사는 어디서 하는 것이 좋은지 등을 묻고 다녔다.  그 바람에 송현은 금세 시장 통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버렸다.  벌써 보름이 넘게 출근하디시피 하니 낯을 익혀 수인사를 건네는 이들도 꽤 되었다.  아침 장사를 준비하던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 장한이 누군가 점포 문턱을 넘는 소리를 내자 환한 표정으로 몸 을 돌렸다.  "어서 ........ 그러나 금세 벌레 씹은 얼굴이 된 장한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표정을 바꾸고 걸레를 들어 먼지를 닦아 내는 일에 매달렸다. "안녕하시오, 고씨!" 송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상대방의 반응은 쌀쌀 맞기만 했다. 허나 송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지 넉살좋게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 고 엉덩이를 걸쳤다 "칠 !" 서화방 재료를 파는 고 씨는 이 막무가내 눈치 없는 서 생 때문에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처음에는 손 큰 고객이 될 거라는 생각에 있는 비유 없는 비유 다 맞춰 주었지만 이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송현은 구걸하러 오는 거지보다 더 귀찮은 존재로 변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로 또 찾아 오셨수?" 분명한 축객 령이었지만 송현은 상관없다는 듯이 붓 하나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딴청을 부렸다. "허어, 어찌 그리 박정하시오. 누가 보면 빚쟁이라도 되는 줄 알겠소이다. " 송현이 느물거리며 말하자 고 씨의 얼굴이 누르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차라리 빚쟁이가 낫겠다!' 고 씨가 독하게 노려보자 송현도 뒤통수가 가려운지 움 찔 거렸다 "하하하, 거참 야박하기가 뭐 같구먼!" 입맛을 다신 송현이 멋쩍게 웃으며 고 씨에게 다가갔다.  "실은 말이네 자네에 긴히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왔네. " 송현이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오자 고 씨는 움츠러들며 뒤로 물러섰다.  "나도 장사를 하고 싶은데 어디 밑천을 구할 데가 없을 까 해서 말이네." "혹시 어제 자신 술이 덜 깼소? 내 못 들은 것으로 할 테니 경치기 싫으면 썩 물러가시오." 정색을 하며 내쫓으려 하자 송현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다급하게 고 씨의 소매를 붙잡고 사정을 하니 고 씨 역 시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허 참, 학식 높은 선비께서 도대체 왜 이러시오?" 서화방 고씨는 송현의 저의를 알지 못하니 머리가 아 파왔다.  사농공상이 지엄한 유교 사회에서 그것도 선비가 장사를 해 보겠다고 장사꾼인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 고 있으니 황당할 뿐이었다. 고 씨가 역정을 내니 송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선비는 밥 먹지 않고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하던가? 그러 지 말고 좀 도와주게. 내 딸린 식솔들이 많아서 그러네." "아니, 그 많은 시전 상인들 중에 왜 하필이면 접니까?" 고 씨가 사정을 하자 송현은 한 걸음 물러선 그의 손을 잡고 하소연을 계속했다.  "내 요 며칠 수소문 해 보니 그대가 항주 가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아주 유명하더군. 맨손으로 이렇게 크게 일가를 이룬 그대의 비결을 듣고 싶어서 그러니 좀 도와주시게나." 도무지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표정을 하는 바람에 고 씨는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졌소이다. 그 고집에다가 이만한 정성이면 쉽게 망하지는 않을 것 같소." 고 씨의 입에서 반승낙이 떨어지자 송현의 입가에 비로써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 성질 급한 고 씨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곧바로 점포를 나왔다 소맷자락 속에 손을 감추고 뒤뚱뒤뚱 사람들 사이를 잘 도 빠져나가는 고 씨를 놓칠 새라 송현은 주의를 기울여 쫓아갔다.  한참을 걸은 뒤에 고 씨가 멈춘 곳은 사람들이 북새통 을 이루는 대로변 이었다 "여기는 뭐하는 데요?" 말없이 고 씨는 손을 들었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쫓아가니 낡은 건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화려한 건물들 사 이에 생뚱맞게 자리한 건물은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붉은 나무 현판에 크게 새겨진 글자를 소리 내자 고 씨 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에 가면 고리를 쓸 수 있소. 허나 고리를 쓰기 전 에 명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잠시 말꼬리를 흐리던 고 씨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 되었다.  "고리를 쓰려거든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 말이오." 송현은 그가 장난을 하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지금도 그는 갈등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옛 말에 자식이 팔려가는 상황이 아니면 고리를 쓰지 말라고 했소. 아직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면 저 안으로 들어가고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한 말이라면 썩 돌아가시오." 고 씨의 눈은 송현보고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걸겠소.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호기 한번 부려 보는 것도 좋겠지." "끙! 고집하고는, 나중에 내 원망일랑 마시오." 고 씨는 낯빛을 굳히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 겨진 송현은 허름한 건물 앞에 섰다.  '곽성운이라 이름 한번 고약하네." 성공과 운을 맡기라는 현판을 보며 송현은 고소를 지었다. 고리대금업을 하는 곳의 이름 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다고 생각했다 송현은 밖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쳐진 주렴을 헤치 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떠들썩하던 거리의 소음이 들리지 않아 고요했다. 대신 마룻바닥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걸 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뉘시오?" 어두운 실내에 눈이 익기를 기다리던 송현은 곧 소리가 난 방향에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 했다.  "서화방 고 씨의 소개로 왔소만?" 노인은 다소 귀찮은 표정으로 등잔에 불을 붙인 다음 책상 위에 놓인 장부를 펼쳐 무언가를 찾았다.  "음, 용두거리의 고 씨를 말하는구먼." 노인은 기억을 해냈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당포에 무슨 일로 왔겠소? 고리를 좀 놓을까 하오." "고리라...... 노인은 책상 위에 놓인 화주를 들어 눈에 걸쳤다.  커다란 수정구 때문에 개구리처럼 커진 노인의 눈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자신을 흩 어보는 노인의 눈빛이 몸에 닿자 송현은 소름이 돋았다.  "책이나 읽는 서생이 무슨 고리를 쓰겠다고, 쯧! 돌아가시게나! 에잉, 아까운 기름만 낭비했군." 노인은 볼 장 다 봤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심지를 눌러 등잔불을 꺼 버렸다.  "돈에도 눈이 달렸소?" "뭐라고?" 노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불이 꺼져서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에 역정이 담겨 있으니 그가 화를 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송현이 불을 붙였다.  "돈에 눈이 달렸냐고 물었소. 사람 봐 가면서 돈을 빌려 주느냐, 그 말이오!" "허 !" 노인은 기가 막혀하며 혀를 찼다.  "돈은 돈일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 돈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돈을 쓰는 것도 사람이지 않소. 여 유가 없어 찾아온 사람을 당포에서 문전박대하면 어디로 가란 말이오." "내 저놈을 당장!" 노인은 송현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어둠속 에서 누군가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송현은 실내의 공기 파동이 변하는 것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모습을 드러낸 사내의 눈이 커졌다.  고수! 두 사람이 동시에 느낀 상대방에 대한 느낌이었다. 그 와 동시에 사내의 손이 '검 손잡이를 향했다.  '무송이 검을?' 평상시와는 다른 사내의 행동이 이상했는지 노인은 벌 떡 일어났다.  "동작 그만!"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책상에서 튀어나온 노인이 사내 와 송현 사이에 섰다. 노인이 손에 들고 있던 주판으로 사내의 손등을 쳤다.  "거 무시무시한 거에는 손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언제든지 발검할 태세인 사내를 보고 노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가벼이 대할 상대가 아닙니다. 단지 걸음 몇 발자국으로 선수를 잡는 걸 보면 제대로 익힌 자입니다. " "그래?" 노인은 다시 한 번 송현을 자세히 살폈다 "아무리 보아도 학사 나부랭인데, 그것도 성질이 더러 운 놈이지." 노인의 독설에 송현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장의 입도 만만치 않소." 대화는 노인과 나누고 있었지만 송현의 눈은 사내에게 서 떨어질지 몰랐다. 사내 역시 송현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다. 구대문파의 고수들이나 영 호인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이 음습하고 어두운 기운은 도대체 뭐지. 마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상대에 따라서 달리하는 무극무해의 기운은 처음 대하 는 사내의 힘에 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송현은 그 기 운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상편의 심결을 마음속으로 되새 겼다.  '제기랄! 스승님이 죽는 바람에 마지막 심상편의 구결 풀이를 배우지 못해서 이 고생이구나!' 들끓는 기혈을 겨우 잠재운 송현의 이마에서 진땀이 배 어 나왔다 또다시 정신을 잃고 폭주하고 싶지 않기에 입술을 깨물어 비릿한 핏물을 삼켜야 했다.  "피를 보고 싶은 게요?" 송현의 도발에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어허, 누구 장사 망하는 걸 보려고, 무송아 뒤로 물러나라!" "하지만 어르신!" "떽! 손님에게 무슨 무례냐, 고객을 불편하게 해서는 도리가 아니지 " 노인이 나무라자 무송은 마지못해 뒤로 물러섰다.  "그래, 도대체 자네 정체가 뭔가? 우리 무송이가 웬만한 건달들에게는 이러지 않거든?" 주판을 뒤에 쥐고 송현을 살피는 노인은 오랫동안 심심해하던 이가 재미난 일을 발견해서 즐거워하는 그런 표정 을 짓고 있었다. "정체씩이나 할 것도 없는 선비 나부랭이요. 식솔들이 굶게 생각서 장사나 할 요량으로 종자돈을 구하러 왔소." 당당하게 말하는 송현을 보며 노인은 입을 떡 하니 벌렸다.  "허, 내 평생 돈 빌리러 온 인간 중에 네 놈처럼 뻔뻔한 녀석은 처음이다. " "나 역시 돈 빌리는 것은 처음이라 그런가 보오." 노인과 무송은 송현의 거침없는 언사에 질려 버렸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내가 이 장사 오십 년 하면서 이놈처럼 파악이 안 되는 놈은 처음 본다. ' 노인은 주판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송현 주위를 빙빙 돌았다.  '후후후, 어르신께서 고민하고 계시군. 하긴 나 역시 호기심이 가는 인물이다. ' 무송은 노인이 제자리 돌기를 하는 것이 쉽사리 결정내리기 어려울 때 나오는 버릇임을 알고 있기에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래 좋다. 어디에 얼마를 쓰려고 하는지 들어나 보 자!" 송현의 허리춤 밖에 오지 않는 노인이 돌기를 멈추고 자리에 가서 앉자 송현도 노인의 책상 맞은편에 자리했다.  "아직 어디에 얼마를 쓸지 정하지 못하였소. 노인장께 서 좋은 장사거리가 있으면 추천을 좀 해 주시면 좋겠소만 "켜 !" 노인은 당장에 무송더러 죽여 버리라고 소리칠 뻔 했으나 가까스로 그 말을 삼켰다.  돈을 빌리러 온 주제에 장사 밑천 뿐 아니라 먹고 살 길 을 열어 달라고 하니 칼만 안 들었지 도적이나 다름없었다.  "옛 말에 배운 놈이 더 독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린 것이 없구나." 넋두리 하듯 노인에게 송현은 껄껄껄 웃어 보였다.  "하하하, 나 원 그냥 농으로 지껄여 본 것이오. 내 은자 백 냥 정도면 될 듯싶소만." "은자 백 냥!" 이번에는 장부를 펼치던 손이 책장을 찢을 뻔했다. 은 자 백 냥이면 엄청난 돈이다.  보통 고리를 놓는 금액은 많아야 은자 열 냥에서 스무 냥 정도다. 노인은 장부를 소리 나게 덮으며 송현을 노려보았다.  "은자 백 냥이 뉘 집 강아지 이름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그만한 돈을 빌리려면 담보가 확실해야 하는 건 알 고 있겠지?" 당연히 그만한 담보가 있는 사람이라면 돈을 빌리러 을 리가 없음을 알고 하는 소리였다.  송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품속을 뒤적였다.  잠시 후 손에 잡힌 물건을 매만지더니 노인을 향해 던 졌다.  획 하니 날아간 물건을 노인이 공중에서 낚아챘다.  "금패?"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금패에는 아주 섬세한 세공이 되 어 있었다. 등불을 켠 노인의 표정에 놀람이 가득했다 "이, 이것은?" 경악하는 노인을 보며 송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소매를 틀었다.  "고 씨가 내게 고리를 쓸 작정이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고 말하던데 내게는 목숨보다 더 한 것이니 은자 백 냥의 값어치는 있으리라 믿소." .......... 노인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섬세한 세공 을 할 수 있는 곳은 황궁밖에 없었다. 틀림없는 황실의 물건이었다.  "네 녀석이 진정 한림원 대학사라는 거냐?" 노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송현이 대학사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그런 결의마저 보이고 있었다.  "뭐 애석하게도 그런 칭호를 받았지만 내가 반려했으니 아니라고 해야겠죠. 허나 황상께서 승인을 하지 않으셨다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이라고 해야 하나?" 남의 말 하듯이 쉽게 이야기하는 송현을 노인은 질린 듯이 바라보았다.  등잔불 아래서 금패를 몇 번이고 확인한 노인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대학사까지 지낸 사대부가 왜 전당포에서 돈 을 빌리려고 하지?" 송현은 노인의 물음에 간단히 대답했다.  "장사나 해 볼까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이젠 이력이 나서요." "허, 장사? 장사를 하겠다고?" 빙긋이 웃어 보이는 송현이 노인은 괴물처럼 보였다 아무리 많이 쳐 주어도 이십 대 중반의 청년으로 보였다. 그런데 한림원 대학사에 어지간한 무림고수조차 꺼려하는 무송이 경계할 정도의 무공을 지닌 학사가 은자 백 냥을 빌리러 와서 장사 밑천으로 쓰겠다니 제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전당포의 주인이라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거야 원........ 도대체 도깨비에 홀린 것도 아니고 황당하군." 윈가 다른 속셈이 있나 싶어 이런저런 말로 의중을 떠 보자 송현은 답답했다.  "이보시오. 노인장, 돈을 빌려 주든지 아니면 관두시오. 내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느니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게 낫겠소." 송현이 강짜를 놓았지만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항주 거리 어디를 가도 네 녀석에게 은자 백 냥을 내 어 줄 전장은 단 한 군데도 없으니 헛기운 쓰지 말고 앉아 있어!" "그럼 노인장은 가능하다는 뜻이오?" "네!" 노인은 별수 없다는 듯이 앓는 소리를 냈다. 소매에 손 을 집어넣어 뒤적뒤적 거리더니 전표 한 장을 꺼내어 놓았다.  "은자 백 냥짜리 전표다!" 은자 백 냥의 가치를 가진 진표를 구경하기는 송현도 처음이었다. 과연 저 종잇조각이 은자 백 냥의 값어치가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송현의 속내를 읽었는지 노인은 화를 냈다.  "네 녀석은 속고만 살았냐? 십대상방 중항 주와 소주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동정 상에서 발행 한 전표니 확실한 물건이다. " 전표를 처음 보는 송현으로서는 그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일대의 상인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서화방 고 씨 가 추천한 것으로 보아 사기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송 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지필묵을 꺼내어 차용증을 작성했다.  "잘 듣게 이자는 원금의 삼할이며 매달 초이레에 이자를 갚아야 할 것이네, 이를 어길 시에는 이자가 배로 늘어나는 것을 명심하게!" "삼 할이라, 비싸군!" 송현이 놀라자 노인은 무시해 버렸다.  "관례로 정해진 이율이니 따질 생각은 말게나. 뭐 싫다 면 관두고." "아니오. 그렇게 합시다!" 송현은 더 이상 실랑이를 하기 싫은 듯 차용증에 자신 의 수결을 써 넣었다. "자, 이걸로 거래는 성립되었으니 매달 초이레에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으면 좋겠군." "동감이오." 전표를 건네받은 송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 하자 노인이 다시 한 번 경고를 했다.  "돈을 갚지 않고 도망치면 대륙 어디에 숨어도 찾아내 는 것이 고리대금업자라네, 만약에 죽었다면 그 영혼에게 서도 돈을 받아 내는 것이 우리들의 특기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어 보이는 노인에게 송현은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내 부친께서 늘 이르신 말씀이 있소 남의 돈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음을 잊지 말라고, 그래서 난 늘 갚을 수 있을 만큼의 돈만 빌리오. 그럼 이만!" 송현이 주렴을 밀치고 나가자 노인은 금패를 매만지며 큰 수확이라도 거둔 사람처럼 좋아했다.  "이거 항주에 명물이 들어왔군. 무송아, 애들을 붙여서 녀석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도록 해라." "어쩌시려고요?" "글쎄다, 어쩌면 저 녀석이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 줄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 "에? 무송이 깜짝 놀라 쳐다보자 노인은 그저 의미 모를 미소만 지어 보였다. 

날마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송현 때문에 왕백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 자신이 한 말 을 송현이 너무 깊이 받아들였다는 생각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오늘도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지친 몰골로 객잔에 돌아온 송현을 보자 왕백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도대체 하루 종일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시는 겁니까?' 용두거리에 있는 고 씨의 서화 방에서 장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다고 말 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송현 은 짐짓 엄살을 부렸다.  "아이고 왕백 어르신 때문에 이 송 학사가 죽을 맛이 옵니다. 솔현의 장난에 왕백은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내가 송현 학사님 때문에 제명에 못살지 싶니 다. " 왕백이 항복을 선언하자 송현은 재미있는지 배를 잡고 굴렀다. "하하하, 너는 나를 당하려면 아직 멀었다!" "에효, 어린 저를 골려 먹는 것이 그렇게 좋으세요?' "내 삶의 낙이라고 할 수 있지!" 송현의 장난에 왕백은 화를 내지도 못하고 한숨만 쉬었다.  "그런데 다들 어디를 갔느냐?" 요 며칠 영호인과 양명, 막 여위가 보이지 않자 궁금해 진 송현이 물었다.  그러자 왕백은 대답하기 곤란한 듯 송현의 눈치를 살피며 얼버무리려 했다.  하지만 송현이 누군가, 특유의 호기심이 불타올랐다.  왕백은 뭔가 알고 있는 듯 하다 쉽게 말하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속현에게 두 손을 들었다 그러나 왕백으로부터 자초지정을 들은 송현은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들이 관청에서 산적 토벌하는 일 에 용병으로 나섰다는 뜻이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왕백을 보며 송현은 심한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황궁 금의위까지 지낸 이들이 낭인 무사처럼 돈을 위해 검을 휘두른다는 소리에 송현은 억장 이 무너졌다. 

"도대체 왜?" 물론 그 해답은 송현도 알고 있듯이 바로 돈이었다.  "제기랄!" 평소에 쓰지 않는 거친 욕설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런 송현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왕백도 한을 내쉬었다.  "은자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 "내가 죽일 놈이로구나!" 송현은 참담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잘난 자존심 때문에 친구들에게 무거운 짐을 씌운 것 이 가슴 아팠다.  "이것 좀 드시고 기운 내세요." 식은 만두와 차를 내온 타이라의 미소가 송현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응?" 접시를 탁자에 내려놓는 타이라의 손을 재빨리 잡아 챈 송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린 타이라의 손에 여기저기 피멍이 들어 있었다.  "네 손은 왜 이런 것이냐?" 타이라는 송현이 다그치자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울먹였다. "말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짐이 되는 것 같다 며 뭐라고 하겠다고 어디서 삯바느질 거리를 얻어 와 밤마다 바느질을 한다고 저 모양입니다 " 타이라의 여린 손을 어루만지던 속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많이· . 많이 아팠겠구나," 차마 타이 라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송현은 방을 나서 고 말았다.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온 곳이 객잔의 사 층 누각이었다. 누각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항주의 거리 가 밤에 물드는 것을 한참이고 지켜보았다. "서희,도대체 어디 있소? 이럴 때 곁에 있어 주면 좋을 텐데........ 그녀의 따뜻한 입맞춤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누각에 서 송현은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려 애를 썼다. 휘영청 밝은 달 위로 아름다운 서희의 얼굴이 겹쳐지자 송현의 한 숨 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밝은 달이 잣나무로 뒤덮인 숲을 밝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 내달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숲을 가로지르는 이들의 몸놀림이 비상 한 걸로 보아 보통 사람들은 아니었다. 획!획! 바람 소리를 내며 달리는 이들은 한결같이 대나무 지팡 이를 들고 있었다. 잠시 후 고요한 숲의 적막을 거친 호각 소리가 깨뜨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호각 소리를 따라서 숲을 가로 지르던 인영들은 방향을 바꾸어 순식간에 호각 소리를 따 라서 사라졌다.  다시 고요를 되찾은 숲의 잣나무 위에서 가녀린 인영 둘이 뛰어내렸다.  "언니, 개방이 꼬리를 잡은 것 같아." 변복을 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눈매로 보아 여인 들이 분명했다.  "구걸 신개가 직접 나선 걸 보면 틀림없이 그자일 거 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가 먼저 그자를 만나야 한다. " "그야 당연하지. 지금까지 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자를 거지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어." 서로 눈빛을 교환한 여인들은 개방의 추격대가 사라진 방향으로 재빨리 몸을 날렸다. 가볍게 대지를 박차고 내달리는 경신법이 출중했다. 여 인들의 몸놀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절정의 신법 이었다.  잣나무 숲을 벗어나자 이번에는 갈대숲이 나타났다.  바람이 동에서 서로 스치자 갈대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그 모양이 마치 바다에 파도가 치듯 물결을 이 루니 장관이 따로 없었다. 그런 갈대숲 사이로 수십 갈래의 길이 한 방향을 향해 만들어졌다.  "저곳이다!"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몸을 날리자 한밤의 긴박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삐 이 익 ! 삐 이 익 ! 어지럽게 울리던 호각 소리가 일정한 방향을 향하자 추격대 역시 속도를 냈다. 그 선두에 청옥 장을 든 구걸 신개 가 있었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구걸 신개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누구를 쫓고 있기에 그가 이렇게 긴장하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이상한 점은 평소 개방은 이렇게 직접 나서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수집한 정보를 해당 문파나 무림맹에 알려서 그들의 손에 맡기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런 개방이 개방 도를 이렇게 많이 동원하여 뒤를 쫓는 것은 방파의 배신자를 쫓거나 아니면 무림공적을 추격할 때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근자에 들어 그런 일은 없기에 이상한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추격하는 개방의 무리들이 내딛는 발길 아래 갈대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방주님! 놈이 호접곡으로 들어갔습니다. " 선두에서 추격을 하던 발 빠른 제자의 보고에 구걸 신개 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옳거니! 호접곡 안으로 몰아넣었으니 독 안에 든 쥐렸 다. " 쾌재를 부른 구걸 신개의 신형이 나는 듯 움직였다. 그 의 급한 마음만큼 발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 답답한 듯 내력을 더 많이 끌어 올리자 구걸 신개의 발 주위로 바람이 일어났다.  쐐애액! 활이 쏘아지듯 앞으로 튀어나가는 구걸 신개의 신위에 개방의 제자들은 감탄하며 서둘러 뒤를 쫓았다.  호접곡. 안개에 갇힌 계곡의 형태가 나비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호접곡은 좁은 폭과 깎아내린 듯 하다. 절벽으로 한 번 들어가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지형이었다.  한때 근처의 산적들이 근거지를 삼은 적도 있었지만 막 다른 지형이라 결국 관군의 토벌에 모두 몰살된 이후로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오지가 된 곳이다.  짙은 안개에 가려진 호접곡 입구에 개방 도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방주님, 놈이 계곡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 가슴에 매듭이 네 개인 장로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보고를 하자 구걸 신개는 청옥 장을 확 쥐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지켜라!" "존명 !" 구걸 신개의 신형이 안개 속으로 뛰어들자 마치 안개가 그를 집어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남아 있던 개방도들은 주변 일대에 천라지망을 펼쳤다.  어차피 인적이 드문 곳이기는 했지만 방주의 명은 지엄한 것이었다.  "하아, 하아! 언니 우리가 한발 늦은 것 같은데?" 복면 사이로 눈매를 찡그리는 모습이 앳돼 보였다 "개방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잘못이다. " 낭패해 하는 목소리에 어린 소녀가 나섰다. "언니, 이렇게 되면 어쩔 도리가 없겠어." "어떻게 하려고?" "내가 저들을 유인할 테니 언니가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미끼가 되어 개방의 제자들을 유인하겠다는 소리에 크게 놀라 반대했다.  "안 돼! 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야!" 세차게 도리질 하는 그녀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언니, 우리의 안위보다는 가주님의 명이 우선이잖아. 이 일에 가문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했으니 반드시 완수해야 해." "하지만 어린 너에게 무리야," "너무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나 역시 우리 세가의 일 원이니까. 그 피가 어디로 가겠어! " 말릴 새도 없이 신형을 움직이는 바람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연아·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이미 멀어지는 뒷모습은 어둠 속 에 묻혀 버렸다.  잠시 후 고함 소리와 함께 개방도들이 펼쳐 놓은 천라지망이 느슨해지자 홀로 남아 있던 여인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이윽고 여기저기서 호각 소리가 어지럽게 울리는 틈을 타고 호접곡 안으로 뛰어는 드는 야행복 차림의 인영. 개방도들은 침입자가 하나라는 것이 밝혀지자 인원을 나누어 추격조와 경계조로 나뉘어 호접곡을 경계했다.  추호도 누군가 호접곡 안으로 들어갔으리라고는 의심 하지 못했다.  호접곡 안은 바깥과 달리 안개도 없고 평온했다. 머리 위의 달빛 덕분에 계곡 안의 시야는 어느 정도 사물을 구 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림인들에게는 그 정도 밝기만으로도 충분했다. 야행복을 입은 여인은 안력을 돋우어 점점 깊이 들어갔다 펑!펑!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강맹한 기운이 전면에서 흘러나왔다. "윽!" 가슴이 답답해지자 서둘러 운기를 하여 맞서니 창백해지던 얼굴에 혈색이 다시 돌아왔다.  "거리가 있는데 이 정도라니, 너무 엄청나서 감당이 되 질 않아." 두려움이 밀려 왔지만 어린 동생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 기 싫어 입술을 깨물고 앞으로 나섰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거친 욕설과 함께 내력과 내력 이 충돌하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찾았다!' 반색하는 그녀의 눈앞에 개방의 방추 구걸 신개와 백발 에 머리를 산발한 노인이 손속을 겨루고 있었다.  일체의 인정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잔인하고 살벌한 공 세였다.  장과 권이 어지럽게 뒤섞이며 사방의 방위를 점하여 서 로가 피하지 못하도록 필살의 의지로 박투를 벌이는 중이 이었다.  "흥! 이 노독물이 안 본 사이에 더 악아 졌구나!" 구걸 신개의 걸걸한 입담에 백발노인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 쳤다 "콕콕콕! 밥 동냥이나 하고 다니는 주제에 누굴 흉보는 것이냐!" "그래 이놈아! 어디 거지의 손맛 좀 보거라, 그런 연후에도 여유를 부리는지 한 번 보자꾸나!" 구걸 신개가 급히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리자 백발노인은 호탕하던 것과 달리 크게 당황했다.  웅! 웅! 구걸 신개가 쌍장을 여러 번 가슴 어림에서 교차하며 내력을 끌어 올리니 울음소리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강룡십팔장!" 백발노인이 구걸 신개의 수법을 알아보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구걸 신개의 손이 움직였다.  '항룡유회!" 구걸 신개의 쌍장이 앞으로 내밀어지니 계곡 안에 갑자 기 훈풍이 불었다.  그러나 그것은 뱀이 똬리를 틀듯 달려오는 장풍의 공세였다. 마주선 백발노인에게는 한겨울의 삭풍보다 더 무시무시했다 우지끈! 귀청을 울리는 커다란 소리를 낸 장풍은 계곡에 얼마 남지 않은 나무들을 쓰러뜨리며 무서운 기세로 백발노인 을 향했다.  "이 거지발싸개 같은 영감탱이가 정말 나를 죽일 셈이 로구나!" 어지럽게 발과 팔을 놀리며 뒤로 튕겨나가듯 물러선 백발노인의 소매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화풍세우!" 바람이 잦아들어 보슬비가 내리듯 약한 느낌이지만 오히려 으스스한 소름과 함께 주변이 소리 없는 독기로 적 셔지는 무서운 독공이었다.  항룡유회와 화풍세우가 두 사람 사이의 빈 공간을 메우며 충돌했다.  펑! 펑!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호접곡이 흔들렸다. 흙먼지로 인해 가려졌던 시야가 드러나자 당황한 표정의 두 사람이 보였다 "이 노인, 그새 실력이 더 늘었군." "크! 내가 할 말이다. 동냥밥으로 버티는 주제에 기력 이 점점 좋아지는구나!" 창백한 안색과 달리 거친 입담만큼은 그대로였다.  "왜냐? 네놈이 나를 쫓을 이유가 없을 텐데? 황실에서 내려진 추살령 때문은 아닐 테고. 네놈이 내 목에 걸린 현 상금이 탐이 나서 이러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거 안다. " 가쁜 호흡을 추스르는 백발노인의 질문에 구걸 신개 역 시 들끓는 내력을 다스리며 답을 주었다 "그야 네 녀석이 더 잘 알지 않느냐? 네놈이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쫓는 이상 나는 그것을 묻어 버릴 의무가 있기 때문이지." "콕! 결국 그런 거였군. 네놈 역시 그것을 찾고 있던 거냐?" 지독한 냉소가 쏘아졌지만 구걸 신개는 그 보다 더 냉담 했다.  "흥! 모두가 네놈 같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라. 네 꼴을 봐라, 되지도 않는 욕심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  하물며 네 가문은 대역죄로 인해 지금 말로 다하지 못할 고초를 겪고 있다 그걸 보고도 내가 욕심을 낼 것 같으냐?" 구걸 신개의 일침에 백발노인의 표정이 보기 흥하게 일 그러졌다.  '랑문에...... 무슨 사단이 벌어진 거냐?" 다소 떨리는 음성에 그가 상당히 흥분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봉문을 당한 상태다. 그나마 소림과 무당에서 손 을 써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구족이 멸했을 것이다. " "크윽!" 참담한 마음이 들었는지 백발노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리석은 지고, 어리석은 자고!" 구걸 신개는 호통을 치듯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마. 스스로 무공을 폐하도록 해라! 그것이 너를 위하고 사천당 문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다. " 무인에게 스스로 무공을 폐하라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었다. 백발노인의 신형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두 손으로 바닥의 흙을 움켜지는 모습이 처절해 보였다.  "강해지려는 것이 잘못인가? 무인으로 태어나 절정고수가 되려는 욕심이 왜 나쁘냔 말이다. " 견디지 못하고 바닥을 내리치자 바위로 내려친 듯 큰소리를 내며 땅이 움푹 파였다.  "네 삐뚤어진 욕망으로 인해 죽어간 영혼들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정도무문이라고 했다. 그 것을 깨우치지 못한 어리석음을 탓해라!" 구걸 신개의 가혹한 폭언에 백발노인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닥쳐라!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세상은 강한 자의 말 이 법이고 정의다. 내가신공을 대성하면 된다. 내가 신의 경지에 이르면 황제도 내 발아래 무릎을 꿇을 것이고 천하는 내 세상이 된다. " 구걸 신개는 백발노인의 단호한 외침에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포기를 하지 못하는구나!" 구걸 신개는 쌍장에 다시금 내력을 끌어 모았다. 그에 반해 백발노인의 상세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내상 을 입은데다가 구걸 신개로부터 당문의 소식을 들은 뒤라 그런지 정상이 아니었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그 책을 본 사람들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인가 보구나." 씁쓸한 표정과 함께 구걸 신개는 신룡패미의 수법을 사용했다.  "잘 가게. 노독물!" 독하게 마음먹은 구걸 신개의 장풍이 백발노인을 덮치려는 순간 방해꾼이 나타났다.  콰쾅! 신룡패미의 기운이 방향을 바꾸어 절벽을 때렸다. 화들 짝 놀란 구걸 신개가 불청객을 찾았다.  "웬 놈이냐?" 검은 야행복 차림의 불청객은 감히 신룡패미에 맞서지 못하고 이화접목의 묘리로 가까스로 방향을 바 꾼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벅찼는지 불청객의 다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바로 검을 꺼내 들고 구걸 신개를 겨누었다.  "감히! 노부의 일에 끼어들다니 목숨이 여럿이라도 되 는 줄 아는구나!" 화가 난 구걸 신개의 노성에도 불청객은 물러설 줄 몰랐다 "괜한 의협심에 끼어들었다면 그냥 가거라. 저자는 악인 중의 악인이기에 내가 벌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 냥 못 본 척 간다면 잘못을 묻지 않겠다. " 구걸 신개가 인정을 베풀었지만 검을 든 손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어리석은. 네가 구하려는 자가 누군지나 알고 나서는 것이냐? 그자는 나라에서도 추살령을 내린 죄인이다. 어 서 물러나라!" 구걸 신개가 더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자 드디어 불청객의 입이 열렸다.  "알다마다요." "계집?" 구걸 신개는 예상외의 사태에 잠시 당황했다.  "사천당문의 당천 악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걸 알면서도...... 설마? 언뜻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구걸 신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년은 바로........' 구걸 신개가 뭔가를 짐작했는지 대노하며 불청객을 가리켰다.  그러나 불청객은 뒤로 물러서며 남은 손으로 당천악의 옷깃을 잡았다.  "살고 싶다면 소녀를 따르세요!" 기혈이 들끓어 잠시 기운을 잃었던 당천악의 눈에 생기 기 돌았다.  "크크크! 거지 왕초야, 내가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 것 같구나!" 당천악이 가래 끓는 웃음을 흘리자 구걸 신개는 다급해 졌다. "네 연놈들을 모두 죽여주마!" 강룡유회가 경고도 없이 밀어 닥쳤다. 전력 다한 장법에 불청객은 절대로 맞설 수가 없었다. 불청객의 품에서 검은 구슬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이 한 수로 모든 악연이 끝날 것임을 구걸 신개는 믿어 의심 치 않았다.  "헉, 천뢰지탄!" 검은 구슬이 엄청난 위력을 가진 화탄임을 눈치 챈 구걸 신개를 급히 신형을 날렸다.  콰콰광! 천지를 뒤엎는 듯 한 굉음과 함께 호접곡의 절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구걸 신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바위 더미를 피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경공을 시전했다. 그러나 절벽에서 떨어지는 바위들이 너무 많았다.  "아뿔싸! 멍청한 학사 놈에게 경고를 했건만 정작 조심해야 할 것은 나였구나!" 굉음과 함께 호접곡이 무너져 내렸다.  구걸 신개의 외침은 너무나 허무하게도 맥없이 묻혀 버리고 말았다. 

제삼장 양가하부홍유

- 훌륭한 상인이 어찌 큰 유학자만 못하랴 

  이마에 난 혹을 매만지며 따라나서는 왕백의 볼이 두꺼비처럼 부풀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송현은 전날 과 달리 표정이 한결 밝아져 있었고 왕백은 무슨 도살장 에 끌려가는 소처럼 울상이었다.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끝날 줄 모르던 왕백이 송현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제빌 다시 한 번 생각하시고 마음을 돌리세요." "허어, 이 녀석이 내가 한 말을 허투로 들었구나." 송현이 짐짓 무서운 얼굴로 나무랐지만 왕백은 결사적으로 막아섰다.  "어느 대명천지에 선비가 장사를 한단 말입니까? 다가 한림원에서 영영 제명될지도 모른다고요." 왕백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송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평생을 희생해서 이루신 일이지 않습니까? 그 많은 고 초를 겪으면서도 지키신 자리입니다 그걸 생각하셔야 . "왕백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필사적으로 송현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송현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편 안했다. "나는 요즘처럼 황궁에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때도 없는 것 같다. " "느닷없이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황궁을 나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어찌 잘했다는 말씀이에요? 볼멘소리를 하는 왕백의 머리를 장난치듯 마구 헝클었다 "알아보니 차 농사와 문방사우를 만들어 팔며 수공업으로 살아가는 선비들이 많더구나. 그들은 '유학은 근 본, 장사는 수단 이라는 신조를 갖고 장사를 한다 하여 선비 상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 "선비 상인이요?" 처음 들어보는 말에 왕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이야기 하는 김에 어린 왕백을 위해 송현은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아무리 가난하고 하인 하나 없는 선비라고 하더라도 몸소 장에 나가 흥정하고 거래하는 것을 비천하게 여겼던 무리에 나 역시 포함된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보거라 황 궁 밖에 나오니 세상은 책과 너무나 다르구나."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송현은 얽매여 있던 구속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왕백아, '아무리 많은 이익이 보인다 해도 의롭지 않으면 하지 말고, 장사를 하려거든 이윤을 남기지 않는 장사는 하지 말라' 고 가르치신 분이 누군지 아느냐?" "글쎄요? 제가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머리를 긁적이는 왕백을 보며 송현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 순박해 보여서 일까? 송현은 마른 입술에 침을 묻혀가며 이야기해 주었다 "놀랍게도 바로 공자의 가르침이다. 이때 공자의 가르침은 '이익을 볼 때 의로움을 먼저 생각하라'는 '견리사의' 인 것이다. " "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왕백은 할아버지에게 재미난 이야 기를 듣는 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말이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비록 중앙에 나가 벼슬을 하겠다는 마음은 접었지만 선비의 도리를 다하여 돈을 벌어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그 런 장사치도 괜찮지 않을까?" 환한 미소의 송현을 보고 있던 왕백은 크게 감동받았다 '크다! 이분은 정말 대해처럼 크신 분이구나!' 왕백은 다시 한 번 송현의 뒤를 따르기로 작정한 일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새벽부터 걸음을 하신 것이 그와 관계되는 겁니까?" 왕백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자 송현은 일단 산 하나 넘 었음을 알았다. 물론 제일 큰 영호인 이라는 산이 남았지만 그가 토벌에 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일을 벌여 놓은 뒤니 어쩔 도리가 없을 거라는 속셈이 었다.  "그래, 장사도 일종의 전쟁이라고 했다. 그럼 전쟁에서 이기려면 훌릉한 장수를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야 그렇죠? 그런데 그 장수가 누군데요?" "너도 잘 아는 사람이다. 가 보면 알 것이다. " 의미심장한 미소로 왕백의 궁금증을 증폭시킨 송현은 해가 중천에 오르자 길을 서둘렀다.  주변의 절경은 천천히 구경하며 유람이라도 하고픈 충 동을 느끼게 했지만 해야 할 일들이 있는 이들에게는 고문이었다.  서쪽에는 방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졌고 커다란 탑들은 마치 하늘을 받치는 기둥처럼 늠름하게 서 있었 다. 탑 아래를 통해 소주로 들어서니 항주와는 또 다른 풍 경이 펼쳐졌다.  좁은 운하 사이로 작은 배가 지나다니는 낭만적인 풍경 은 소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소주의 풍경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보대교 위로 사람들이 오고가는 모습이 신비하게 비춰졌다 "이곳이 강소성의 소주로군요. 대륙인이라면 누구나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다더니 정말로 아름다운 도시 네요. " 왕백이 운하 사이의 고택과 정원들이 잘 어우러진 풍경 에 취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래 멋진 곳임에는 틀림없지. 그러나 우리는 여행을 온 것이 아니니 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벌써 해가 지려한다. 송현의 재촉에 왕백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북서쪽으로 몇 리를 더 가야만 했다.  운하에서 벗어나니 붉은 흙토를 가진 대지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위로 수십 수백 채의 가옥들이 줄을 지어 촌락 을 이루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는 촌락의 모습은 온통 울긋불긋 한 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건조대에 염색을 마친 천과 비단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설마 이곳은 직염방?" 고개를 갸웃거리는 왕백의 어깨로 송현의 손이 올라왔다 '타로 보았다. 이곳은 황실의 내직염국에 단필을 대는 곳으로도 유명한 소주의 직염방 촌락이다. " 목적지를 알게 되자 왕백은 맥이 풀려 버렸다 송현이 삼 년간 몸담은 곳이 내직염국 이었다. 어용과 황실 내에서 사용되는 단필을 대는 일이 지겨울 만도 한 데 또다시 염방을 찾은 송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껏 고심하신 게 이거란 말입니까?" 왕백이 황당해 하자 송현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어쩌겠느냐? 내가 공부하는 것 빼고 제일 잘 아는 건 이것뿐인걸." "하아!" 송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왕백을 이끌고 직염방 촌락 깊숙이 들어갔다. 큰 직염방 들이 황실의 납품하는 곳임을 대문마다 표시를 해 두고 있었다. 나염하는 냄새가 마을 전체에 배어 있었다. 왕백은 소매로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린 채 송현의 뒤를 졸졸 따라 갔다.  쾌나 촌락 깊숙이 들어왔는데도 송현은 멈출 생각을 하 지 않고 점점 더 안쪽을 향해 들어갔다.  개천이 흐르는 작은 다리를 몇 개를 지나자 점점 가옥 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송현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길을 묻기를 수차례 나 반복하고서야 원하던 곳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너무 낡아서 폐가처럼 보이는 낡은 건물이었다.  "여기에 사람이 살기는 하는 걸까요?" 왕백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을까 봐 발끝으로 문을 밀 었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문이 힘없이 열렸다. 마당 에는 나염한 천들을 말리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 는 건조대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돌아가시죠.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습니다. " 귀신이라도 나을 것 같은 분위기에 겁을 먹은 왕백이 송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송현은 오히려 크게 소리쳤다. "영감! 나 왔소. 살아 있으면 나와 보슈!" 청아한 송현의 목소리가 집안 곳곳에 울리자 몰래 숨어 지내던 새들이 깜짝 놀라서 날아올랐다. 소심한 왕백이 그 바람에 기겁하여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모양 을 보고 송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으, 누구 놀래서 죽는 걸 보려고 그러신 거.... 괴, 괴 들늰" 엉덩이를 주무르며 인상을 쓰던 왕백이 무엇을 보았는 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송현의 등 뒤를 가리켰다.  송현도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며 그늘이 지자 깜짝 놀 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허!" 크다!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사람인지 곰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커다란 몸집을 가진 청년이었다.  "뉘세요?" 어눌한 말투라도 나오지 않았다면 왕백의 말처럼 괴물 이라고 생각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더벅머리는 너무 길게 자라서 눈을 가리고 있었고 두꺼운 목화솜 외투는 때에 찌들어 원래 색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워 보였다. 벌어진 옷 섬 사이로 드러란 가슴 틸은 같은 남자 가 보아도 징그러울 정도로 무성했다.  "윽!" 송현이 급히 코를 막고 뒤로 물러섰다. 사내에게서 심 한 악취가 풍겨 왔기 때문이었다. 왕백은 거의 사색이 되어 숨을 참으며 바닥을 기었다.  "도대체 얼마나 안 씻은 거야? 왕백이 소리를 지르자 사내는 양손을 들어 손가락을 꼽 으며 셈을 하려했다. 아무래도 조금 모자라 보이는 사내 였다.  그다지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두 사람은 경계를 풀었다. 송현은 코를 막고 사내에게 다가 갔다.  "직조 영감 안에 계시는가?" 송현의 말귀를 못 알아들었는지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 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욕쟁이 영감 말이다 " 송현이 손짓 발짓을 해가며 흥내를 내자 사내는 키득거 리며 고개를 끄덕 였다 '따라오세유!" 어눌한 남경 지역 사투리가 우습게 들리는지 왕백은 사 내 곁에서 빙글빙글 돌며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뒤에서 보니 커다란 고목에 매미가 붙어가는 형상이었 다. 그런 왕백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내는 왕백을 붙잡아 자기의 뺨에 비벼 댔다.  "으악, 안 돼! 애, 퉤! 퉤! 퉤!" 울상이 된 왕백의 얼굴은 사내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이 나쁜놈아, 이 옥처럼 고운 얼굴을 망쳐 놨으니 어찌할셈이냐?" 바닥에 떨어진 막대기를 주어 들고 사내를 때려 보았지 만 자신만 손해 였다.  학! 학! 뭐 이런 괴물이 있어. 때리는 내가 더 힘들잖 아. " 왕백은 복수를 포기했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왕 백을 사내는 번쩍 들어 어깨에 올려놓고 뒤채를 향해 성 큼성큼 걸어갔다.  "으아악! 송현 학사님, 이 괴물이 저를 잡아먹으려 하 나 봐요. 살려 주세요!" 왕백이 버둥거리며 비명을 지르자송현은 고개를흔들 었다.  "생김새는 저래도 순박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그렇게 가까이는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경계심조차 없는 사람은 처음이야." 송현의 사내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고 뒤를 쫓아갔 다. 그가 자신이 찾는 인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하니 별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이미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니 오 늘 밤은 여기서 보내야만 했다.  뒤뜰로 나오니 술병들이 여기저기 눈에 뜨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양조장으로 착각할 정도로 많은 술병들이 버려져 있었다.  "저곳인가?" 사내가 왕백을 내려놓고 멈춰선 곳은 아무렇게 지은 움 막이었다. 그 앞에서 사내는 그 큰 덩치를 어쩔 줄 몰라 했다.  "영감! 손님이 왔는데 좀 내다 보지 그래!" 송현이 고함을 지르자 사내는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 다. 그러면 큰일이라도 되는 듯이 사내는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어떤 썩을 놈이 감히 노부의 오수를 방해하는 것이 냐? 괴팍한 목소리가 성질을 부렸다.  "오수는 무슨 얼어 죽을 오수! 밤하늘에 별이 총총 떴 다. " "응?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인데........ 만사가 귀찮아 보이던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 나왔다.  잠시 후, 바람을 막기 위해서 씌워 놓은 거적이 들리며 깡마른 노인이 술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며 나타났다.  '헉! 직조 태감 황염!" 왕백이 노인을 알아보고 대뜸 이름을 불러 댔다.  "고얀 놈, 어디 어르신 이름을 함부로 불러 대느냐?" 왕백은 그가 무서운지 얼른 사내 뒤로 숨었다.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눈동자를 굴렸다.  "수염이 안 난 걸 보니 네놈도 고자로구나. 하하하!" 황염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보를 터뜨리며 바 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세상에 그 대쪽 같던 직조 영감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 을까? 왕백은 어린 소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황궁에서 직조 태감 황염은 엄하고 무섭기로 소문났었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뺏속까지 관리인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 런 사람이 이처럼 변해 있으니 왕백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좀 사람처럼 보이네, 황궁에서 영감은 바늘로 찔 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거든." "누구......?" 술이 덜 깼는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황염의 눈이 번 쩍 뜨였다. 당신은 송현 대학사?" 황염은 그제야 송현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주변 을 살피더니 얼른 사내에게 술병을 집어던졌다.  "이 멍청한 놈! 함부로 사람을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 았느냐!" 황염이 역정을 내자 사내는 잘못했다며 빌었다. "그 친구는 잘못 없어. 괜한 트집 잡지 말아, 영감." 송현이 끼어들자 황염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그래, 왕유 그 돼지가 아직도 내 목을 노리고 있는 게 유금의위 위사들은 어디에 숨겨두었소?"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가는 황염의 얼굴이 분노로 뒤 덮였다.  "쯧쯧쯧, 그러니까 집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고 세상 돌 아가는 것도 좀 듣고 살아야지, 왕유는 끝장난 지 오래야, 영 감." 송현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숙이자 황염의 표정은 뭐 라고 말하기 복잡하게 변했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우 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웃고 있는 듯했다.  "그 빌어먹을 놈이 죽었소?" 쩌렁쩌렁하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왕유 에 대한 복수심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듯했다. 그런 원수 가 끝장났다는 소식에 갑자기 더 늙어 보이는 황염이었 다 "죽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살아도 산 것지 아닌 신 세가 되었지. 대역죄에 추살령이 내려졌으니 만약에 살아 있다면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나날일 거야. 아마도 어딘 지도 모르는 곳에서 객사를 했을 가능성도 다분해." "우라질 놈!" 황염은 가래침을 바닥에 뱉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마치 눈앞에 사례감 왕유가 있기라도 하는지 무시무시한 저주 를 퍼부었다 '팬힌 한이 많기도 하네." "백 년을 해도 모자라지 암!" "그 남아도는 힘을 다른 데 써 보는 건 어떨까, 영감? '다른 데라니?" 왕유의 소식에 흥분하다 보니 송현이 자신을 찾아온 이 유를 묻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혹시, 황상께서 나를 다시 부르시는 건가? 황염이 황궁을 쪽을 향해 엎드려 절을 하자 송현은 어 이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영감. 그건 나도 알고 영감도 알 아. " "8응!"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은 황염을 송현이 노려 보았다.  "그럼 왜 찾아 왔지?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거 보 려고 그 먼 길을 오진 않았을 텐데?' 황염이 술 냄새 나는 고약한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송현 은 웃으며 반겼다.  "영감 손재주가 필요해서 찾아 왔어." "내 손재주라니?" "비단 만드는 기술은 대륙에서 두 번째지, 아마?" 송현이 황염을 자극하자 대번에 반응이 왔다.  "어느 놈이 그러더냐? 천하제일 명인은 바로 나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아나는지 역정을 내는 모습이 젊 은이 못지않았다. 그런 성정을 잘 아는지 송현은 웃음을 참으며 이야기했다 "오호, 그렇단 말이지?그럼 더 잘되었네. 내가 염방을 하나 낼까 하는데 영감이 같이 일해 주면 좋겠어." 황염은 송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렸다. "으하하하하, 내 오늘 별의별 소리를 다 듣는구나. 왕유가 뒈졌다는 소리를 듣더니, 이젠 대학사께서 장사를 하신다니 이거야 원, 동네 개가 웃을 소리로구나!" 안색을 바꾼 황염이 화를 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장난칠 요량이면 돌아가 네!" '나도 황궁에서 쫓겨났어.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야 하 니 좀 도와주지그래." 생글거리는 송현의 얼굴을 보며 황염도 그가 농을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정말이군."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송현을 보며 황염은 기가 막혀 했다.  "왜 하필 염방인가?" "그야 영감이 잘리면서 나를 내직염국에 처넣었잖아. 세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주라고는 한림원에서 배운 학 식보다 내직염국에서 배운 것들이 필요하더란 말씀이지," "흥! 설마하니 내직염국에 발령 낸 복수를 하고 싶은 거겠지." "그걸 이제 아셨수!" "끙! 찰거머 리보다 더 지독한 인간이다, 너는!" 황염이 한숨을 내쉬자 송현은 그가 승낙했음을 눈치 챘 다. 염방이 몰려 있는촌락의 밤은그렇게 이상한 재회로 깊어만 갔다. 송현과 왕백이 황주에 돌아오자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영호인이 었다.  노발대발 하며 반대하는 영호인을 설득하기 위해 송현 은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양명과 막여위는 오히려 송현 의 결정을 지지하며 옹호했지만 영호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송현이 여러 날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다.  영호인은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낭인 무사로 돈을 벌어 오는 편이 났다며 정 무엇을 하려거든 학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과 남을 가르치는 것이 엄연히 다 름은 그 자신도 알기에 송현과 영호인은 본의 아니게 냉 랭한 사이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우정이 돈독한 두 사람이기에 결국 송현의 고집 에 영호인이 한 발 물러서게 되었다.  그날은 두 사람이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며 그 동 안 쌓인 감정을 털어 냈고 왕백은 술값 때문에 울상을 지 어야 했다.  일행들의 뜻을 모은 송현은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 다. 소주에 있던 황염이 염공들을 모으는동안송현은 염 방으로 쓸 건물을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일 줄은 송현도 미처 생각 하지 못했다.  "아니 집 한 채 구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송현은 사나흘을 돌아다니며 항주의 살인적인 물가와 건물의 부족을 절감했다. 대가족이 살만한 가옥은 있었지만 염방을 차리고 많은 인원이 생활할 만한 건물은 항주 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가마꾼들을 앞세워 항주 전역을 돌아다녀 보지만 눈에 차는 집들이 보이지 않아 애만 태 우고 있었다.  일명 집주름꾼이라고 불리는 가마꾼들은 토지나 가옥 을 매매해 주고 소개비를 받는 중개인들이다. 항주 토박 이들인 그들도 송현이 요구하는 조건에 맞는 물건이 없다 며 고개를 저 었다.  "이거야 원, 이자 낼 날은 가까워지는데 장사는 시작도 못하고 있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구나." 푸념하는 송현을 보며 왕백도 볼멘소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송현이야 무극무해의 기운으로 쉼게 지 치지 않았지만 어린 왕백은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걷는 일이 보통 힘에 부치는 것이 아니었다. 신발을 벗자 물집이 잡혀 퉁퉁 부운 발이 나타났다.  용케도 그 발로 쫓아다닌 걸 보니 구시렁거리기는 해도 그 마음씀씀이가 기특하기만 했다.  송현이 왕백의 발을 주물러 주자 왕백의 얼굴이 벌게지며 황급히 발을 치우려 했다.  "가만 있거라. 이대로 두면 밤새 앓을 거다. " 송현은 무극무해의 기운을 빌려 왕백의 발에 뭉친 기혈을 풀어 주었다. 무릎을 꿇고 물집 잡힌 냄새나는 발을 매 만져 주는 송현의 정성에 왕백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저기...... 송현 학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너무 조급히 서두르다 보면 일을 그르친다고 하잖아요. 곧 좋 은 매물이 나을 거에요." "너도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할 때도 있구나." "참내 저도 곧 열아홉이라고요!"송현은 왕백이 어느새 그렇게 컸나 싶어지자 세월이 참 무상하다는 것을 절감했 다 그렇게 그날도 허탕을 치나 싶어서 돌아가려는데 염 소수염을 가진 가마꾼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더니 침을 튀어가며 말을 쏟아냈다.  '학사 양반이 원하는, 딱 그런 매물이 있소." 얼마나 쉬지 않고 달려 왔는지 가마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송현은 마냥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 물건이 있 었다면 다른 가마꾼들이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런 물건이 있는데 왜 이제야 이야기하는 게요?" 송현의 차가운 반응에 가마꾼은 정색을 하면서 조심스 럽게 말을 꺼냈다.  "그것이 조금 하자가 있는 물건이라서 그런데 학사 양반 이 급하다고 하니 내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는 거라오." 짐짓 생색을 내는 가마꾼을 송현이 노려보자 그는 궁지 에 몰린 생쥐처럼 안절부절 하지 못하다가 생쥐가 고양이 를 문다고 되레 큰소리를 냈다.  "어허, 이 양반이 내 힘들게 알아 왔더니 되레 의심을 하니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나. 뭐, 싫다면 관두쇼!"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려 세우는 모양이 금세 가 버릴 것 같았지만 송현은 며칠 동안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것 이 허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송현과 왕백이 자신을 붙들지 않자 그는 쾌나 머쓱해했 다.  "하하하, 흥정을 할 줄 아시네." 이쪽에서 세게 나가니 금세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태도 를 바꾸자 송현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어디 구경이나 합시다. 결정은 물건을 보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소." 송현이 가마꾼을 앞세우자 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걸음을 옮겼다. 가마꾼은 항주의 도심을 벗어나 한참을 이동했다. 그곳은 바다 내음이 묻어나는 마을이었 다 "이곳이오!" 가마꾼이 안내한 곳은 항주의 외곽 해안 마을이었다. 대륙의 동남 해안에 있는 마을 중 하나였다. 꽤 큰 촌락 이 었지만 어딘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주장진의 언덕 위에 아주 큰 고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규모가 굉장히 컸다.  가까이 다가가니 오랜 세월 풍파를 겪어 꽤 낡은 집이 었지만 청소가 잘 되어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태평문이라, 거 이름 한번 좋구나!" 송현은 참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어 몇 번이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현판의 글씨체를 보아하니 꽤나 박식한 사람이 쓴 것이 틀림 없었다.  "이보게, 이곳은 뭐 하던 곳인가?" 질문을 받은 가마꾼은 잠시 주저하다가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무림의 문파였습니다. " "무림문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초라하게 변한거니? 송현과왕백이 의아해하자 가마꾼은 내키지 않는 얼굴 로 사연을 들려주었다.  태평문은 십여 년 전 항주 일대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무가였다고 했다. 양가창과 더불어 태평문도 신묘 막측한 창술로 명성을 날리며 강소성을 중심으로 명성을 쌓아 갔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태평문의 장문인인 송승천이 무리한 비 무행으로 숨을 거두면서부터 가세가 기울어 오늘은 그 명 맥만 유지하게 되었다고 했다.  "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한데. 다른 제자들은 뭘 하고 있었기에 이 모양으로 방치한 건가?" 송현이 의심을 풀지 못하자 가마꾼은 저간의 사정을 모 두 들려주었다 명나라 초기부터 시작된 왜국의 노략질로 인해 동남 해 안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주장진 어촌도 마찬가지였 다. 작년 이맘 때 엄청난 규모의 해적들이 난입했고 이를 막기 위해 태평문이 나섰다고 했다.  그러나 장문인이 전쟁 중에 죽고 나자 태평문의 직전제 자들이 모두 사문을 떠났고 그나마 남아 있던 제자들마저 각자 자기 살길을 찾아 나서면서 태평문은 가세가 급격히 기울고 말았다는 사연이었다.  "사정이 딱하게 되었죠. 그래도 태평문이 주장진에서 는 평판이 참좋습니다. 저들이 왜구의 노략질을 막지 않 았다면 마을은 진즉에 사단이 나고도 남았으니까요. 마을 에서 어느 정도 도와주는 모양이지만 워낙에 없는 이들이 니 티도 안 날 겁니다. " "자네의 말은 그럼 아직도 태평문에 사람들이 산다는 

뜻인가?" 송현이 놀라서 묻자 가마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 덕 였다.  "그럼 저들은 어쩌란 말인가?' "내쫓아야죠. 이미 관청에서도 압류 처분이 내려진 곳 입니다. " "압류라니?" "세금을 못 내니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송현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소리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럼 우리더러 남아 있는 태평문 식솔들을 쫓아내고 살라는 뜻인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마꾼을 보며 송현은 어이가 없었다.  "쯧쯧쯧, 학사 양반도 딱하시우. 그 돈으로 항주 어디 에서도 원하는 집은 못 구합니다. 그나마 흠이 있으니까 그 가격에 흥정이라도 하는 겁니다. 싫으시면 관두시던가 요. 저도 이문을 남기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집 모녀 가 딱해서 그런 거죠. 정 뭐하면 학사 양반이 거두어 주던 가요. 안 그러면 길거리로 쫓겨날 판입니다. " 가마꾼은 할 말을 마치자 볼일을 다 봤다며 자리를 떴다 송현과 왕백은 태평문 앞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었다. 당장에 소주에서 황염이 염색공들을 데리고 출발하겠다고 난리인데 염방으로 쓸 터전을 못 구해 놓았 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하루하루 객잔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하루가 급한 처지였다 "별수 없지 않습니까?' 왕백이 입맛을 다시며 별 도리가 없다며 송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렇지 별 도리가 없구나 " 삶은 치열한 것이었다. 남이 살던 터전을 강제로 매앗 는 기분이 들어서 좋지 않았지만 자신들도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 었다.  송현은 고색창연한 현판을 보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태평문이라, 언제쯤 그런 세상이 올까?' 부질없는 꿈을 꾸기라도 했는지 송현은 너틸웃음을 터 뜨리며 발길을 돌렸다.  가마꾼의 말대로 관청에 밀린 세금만 내면 태평문은 송 현의 것이 된다. 몇 번을 뒤돌아 본 끝에 송현은 단단히 결심을 하고 객잔으로 돌아갔다. 주판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노인의 뒤로 좀 전에 태평문 을 소개해준 가마꾼이 머리를 조아렸다. "시키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 송현 앞에서 어수룩하게 보였던 모습은 온데간페없이 사라지고 진중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잘 벼려진 무사 같았 다.  "그래, 어떻게 마음에 있어 하드냐?" "아직 태평문에 식솔들이 남아 있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습니다. " "훌훌훌, 그게 바로 이번 일의 재미있는 점이지. 고 녀 석이 어떻게 처리하나 두고 보자." 주판을 허리춤에 매단 노인이 일어서자 무송이 그림자 처럼 뒤를 따라나섰다.  "내 돈을 빌린 녀석이 무얼 하나 지켜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구나, 허허허!" ' 노을이 지는 주장진의 하늘은 참으로 멋진 풍경을 그리 고 있었다. 위로 노인의 웃음소리가 사라져 갔다. 송현이 객잔에서 일행들과 함께 짐을 가지고 태평문 앞 에 도착하니 주장진의 주민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하나 둘 모여 들었다. 문사 차림의 송현을 보고 마을의 촌장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나리께서는 무슨 일로 들리셨는지요?" 주름이 너무 많아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구분이 안가는 촌장을 향해 송현은 미소로 답했다.  "오늘부터 태평문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 태평문에 새로 이사를 왔다고 말을 꺼내자 마을 사람들 은 크게 놀라며 웅성겨렸다. 송현은 내심 불쌍한 모녀를 걱정한다고 생각하여 손을 들어 마을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아아, 여러분들의 걱정은 저도 압니다. 태평문의 남은 식솔들은 예전처럼 태평문에서 지내도록 배려할 예정이니 너무 걱정들 마시기 바랍니다 " 사뭇 인자한 표정으로 흡족하게 미소 짓는 송현은 됫짐 을 지고 새로운 터전을 향해 발길을 내디디다.  "저, 저기 나리...... 조, 조심하십시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태평문의 정문 손잡 이를 잡은 송현을 말렸다.  "다시 한 번 생각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의 뜻밖의 행동에 송현과 일행들은 의아해 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열면 후회하실 겁니다. " 정문의 문고리를 잡고 멀뚱히 서 있는 송현과 얼굴이 창백해져서 말리는 촌장이 밀고 당기는 실랑이를 벌였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눈은 문을 열지 말라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우르르! 마을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뒤로 멀찍이 물러섰 다. 마을사람들 속에는 왕백과 영호인 등도 함께 있었다.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하지만 결국 홀로 남은 송현만이 태평문 정문 앞에 서게 되 었다.  "거참 사람들이 실없기는 어서 안으로 들어...... 헉!" 팡! 공기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송현의 신형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송현이 있던 자리에 유엽도 모양의 창촉이 공 간을 부수며 춤을 추었다.  "감히 웬 놈이 허락도 없이 문지방을 넘는 것이냐?' 창대가 바닥을 찧자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울렸다 안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는 아주 드세 보이는 여인이 었다. 얼굴을 보아 하니 여인이 분명한데 말투나 행동은 사내 그 이상이었다 "이보시오. 대체 일언반구도 없이 무력을 사용하다니 이 무슨 행패요?" 낭패를 당한 송현이 화를 내자 정체불명의 여인은 콧방 귀를 끼며 성을 냈다.  "흥!주인의 허락도 없이 문을 넘으려 했으니 도둑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당하는 건 마땅하다. " 너무나 당당하여 송현이 죄인이 된 듯했다. 결국 점잖 은 송현도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나는 정당한 방법으로 태평문을 매입하였소. 그대는 태평문이 그대의 것이라는 증거가 있소?" 송현의 말이 그녀를 자극했는지 고운 아미가 찡그러지 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거 좋지 않은데?" 영호인은 그녀의 기세가 사뭇 달라지자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까지와는 다른 소리가 나며 그녀의 손 에서 창이 춤을 추었다.  휘 익 ! 휘 익 ! 창이 활처럼 휘며 송현의 전신 요혈을 노렸다. 기겁을 한 송현의 다리가 본능적으로 풍보를 밟았다. 백팔 개의 걸음이 뱀처럼 똬리를 트는 여인의 창날을 요리조리 피해 나갔다.  "송현의 보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바람이 되어 가는 구 나, " 영호인은 송현의 보법이 또 한 단계 발전했음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송현의 무공을 감상하던 영호인의 시선 이 점차 여인에게로 향했다. 왠지 낯이 익은 창술에 영호 인의 기억이 과거를 쫓아 거슬러 올라갔다.  "설마 양가창?"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영호인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호인이 왜 그러나? 우리 송 학사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창에 스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양명은 호인이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위로 하려 했지만 영호인이 놀라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째서냐, 어째서 저 여인이 양가창술을 사용하고 있 는 거지' 영호인은 여인의 창술에 격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랜 세월 헤어졌던 가족과 상봉하는 이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송현과 여인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제발, 말로 합시다. " '팍쳐라. 악적!" "악적이라니 도대체 누가 악적이라는 겁니까!" 드디어 참지 못하고 송현이 공세를 취했다. 계속해서 수비만 하던 송현은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다음 기수식을 취했다.  송현의 검이 절제된 흐름 속에서 창을 막아가며 공격의 맥을 끊어 버렸다.  "무당 칠성검?" 여인은 송현의 검을 알아보더니 얼굴이 더욱 표독스럽 게 변했다.  "무당의 개더냐?흥! 더러운 말코 도사들 같으니라고, 용서 못해!" 여인의 창에 살기가 실리기 시작하자 이젠 박투가 아닌 생사지결이 되어 버렸다. 그걸 본 영호인의 표정이 무섭 게 변했다.  "아무리 여인이라지만 손속이 잔인하니 더 이상은 용 서할 수가 없소." 송현이 마음을 모질게 먹고 검을 매섭게 휘둘렀다. 송 현의 검세가크게 변하자 여인의 손이 어지러워지면서 뒤 로 비칠비칠 물러서고 말았다 여인이 그쯤에서 물러나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송현이 배려한 것이나 여인은 어리석게도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나왔다.  "어리석은!" 파국으로 치닫는 여인을 보며 송현은 혀를 찼다.  '나를 무정타 하지 마시오!" 송현은 창룡횡격의 수법으로 여인의 팔을 노 렸다.  공격에만 치중한 나머지 여인은 너무나 많은 허점을 노 출하고 있었다. 그 빈틈을 노리고 송현의 검 끝이 파고들 었다 "아뿔사!" 낭패한 표정으로 실수를 깨달았지만 어느새 송현의 검 이 지척에 다가왔다.  여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따땅! 파육음 대신 금속음이 들리자 여인은 감았던 눈을 살며 시 떴다 한손으로는 송현의 검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인의 창을 막고 중간에 끼어든 것은 영호인이었다. 여인은 영 호인의 얼굴을 지척에서 보았다 "영 .호. 인!" 독기를 품은 여인의 입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영호인은 그런 여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야. 살아 있으니 이렇게 보는구나!" 여인은 입술에 피가어진 두 사람의 조우로 장내의 분위기는 기 시작했다. 나도록 깨물었다. 갑작스립게 이루 또 한 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사장 고목생화 

- 말라 죽은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뜻으로 졌던 사람이 행운을 만나서 잘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싸움의 주체가 송현에서 영호인으로 바뀌면서 두 사람 은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이 격돌했다. 그녀는 무당과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 보였다.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였나?' 예기치 않은 상황에 휘말린 송현은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잠시 여유가 생기자 송현은 뭔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눈치 챘다. 웅성거리며 구경을 하는 마을 사람들 중에 촌장을 찾아냈다 "저기 촌장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병든 모녀가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촌장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당연히 송현의 표정 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혹시 왜구의 노략질에 때문에 이 마을이 위험해 빠졌을 때 태평문이 앞장서서 그걸 막았다는 이야기도 사 실이 아닌가요?" "왜구요? 그거야 저기 남경이나 해당되는 이야기지 저 희는 구경도 못했습니다." 촌장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라며 고개를 도리질 하자 송현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럼 혹시 이 저택의 가격이 싼 이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소?" "그야, 백년도 넘은 낡은 집이기 때문이지요. 제 할아 버지 때부터 있던 고옥이니 이곳에서 살려면 고치는 비용 이 만만치 않으실 겁니다. 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저 괴팍한 요녀가 나타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임자가 나설 리가 없죠." 촌장의 말이 끝나자 곁에서 듣고 있던 왕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제대로 낚인 거 같습니다 " 송현은 뭐라고 반박도 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어디선가 웃고 있을 가마꾼의 얼굴이 떠오르자 당장에 요절을 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찾아봐야 이미 멀리 도망 치고 없을 것이 분명했다.  겉으로 보기에 멀정한 건물이었는데 마을 촌장의 말을 듣고 나니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두려워진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눈앞에 있는 성질 사 나운 여 인이 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 워 담을 수도 없으니 뭐가 되든지 간에 밀어 붙어야 했다.  곧 있으면 황염이 소주에서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 준비를 마쳐야 했다.  검과 창이 격돌하는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감탄하며 박 수까지 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경극쯤이나 되는 줄 아는지 재미있는 구경을 하듯이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영호인, 이제 그만하고 끝내!" 화가 난 송현의 외침에 영호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구나, 친구가 화가 많이 난 모양이야. 우리의 해후는 이쯤에서 끝내자." '락쳐 !" 창날이 번뜩이며 급소를 노렸지만 영호인의 검은 여유 릅게 창대를 타고 내려가 그녀의 손목을 쳤다.  "t:!"날카로운 교성과 함께 손목을 부여잡은 그녀가 무릎을 꿇자 구경거리는 끝이 났다.  "이 더 러운 놈! 악적!" 여인의 독설에 송현은 두통이 밀려왔다. 거기에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해지니 첫날부터 악연이라는 생 각이 들어 한숨만 나왔다. 보다 못한 막여위가 걸걸한 목 소리로 사람들을 내쫓았다.  "자, 자! 구경은 끝이 났으니 냉큼 돌아가시오!" 마을 사람들은 돌아가면서도 한마디씩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좋은 말이 아니었고 송현의 기분은 바닥으 로 가라앉았다.  "자, 이제 두 사람은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송현의 낮은 음성에 영호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 고 여인은 표독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아, 도대체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한숨을 쉬며 안으로 들어선 송현의 입에서 절망과도 같 탄성이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일행이 무슨 일인가 싶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본 것은 곧 귀신이라도 나을 것 같은 폐가의 내 부였다.  망연자실 주저앉은 송현에게 일행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꽃혔다.  "아니 집을 사는데 내부도 둘러보지 않았단 말이냐?" "그게 가마꾼의 말만 믿고 ...... 왕백이 죄 인처럼 대신 대답을 했다.  "세상에 어느 멍청한 인간이 .... 읍!" 막여위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쓴 소리를 하려고 하자 양명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양명의 고갯짓에 막 여위도 송현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로구나."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송현 앞으로 더 기가 막힌 일 이 나타났다.  "저건 또 뭐야?" 막여위가 양명의 손을 치우고 고함을 쳤다. 막여위가 본 것은 수십 명에 달하는 아이들이었다. 여자아이부터 사내아이까지 제멋대로 뒤섞여 있었다.  너무나 황당한 광경에 송현이 영호인을 보자 영호인은 여인을 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여인을 향하자 그녀는 처음으로 두려운 표정이 되어 아이들 앞으로 뛰어갔다. 새끼를 지키는 어 미처럼 그녀는 겁에 질린 모습이 되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영호인 자네가 좀 설명을 해 주 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영호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오래전 무당파와 양가장 사이에 벌어진 비사를 들려주었다.  당시 무림의 음적이었던 흑색쌍마가 호북성 일대 에서 준동하여 무당의 장문인이 내린 명에 따라서 무당의 제자들이 흑색쌍마를추살하기 위해 호북성 일대를 이 잡 듯이 뒤진 일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흑색쌍마가 양가창으로 유명한 양가장에 숨어들었다.  당시 무당의 제자들을 이끌던 혜운도장은 악을 멸하는 데 있어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며 양가장에 피해 가 클 것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무력을 사용했고 그 과정 에서 양가장의 장주 양인정과 그의 부인이 흑색쌍마의 손 에 주검이 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 일은 무림의 정의라는 미명 아래 묻히게 되었다. 무 림맹의 입장에서는 양가장의 비극보다 오랜 세월 동안 무 림맹의 골칫거리였던 흑색쌍마의 죽음이 더 중요했기 때 문이었다.  "그래서 자네가 그 자리에 있었나?"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이제야 그녀가 무당에 대 해서 과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양가장엔 과년한 딸이 한 명 있었지 양설란, 그녀의 이름이네." 영호인은 힘들게 이야기를 꺼냈고 다른 일행들의 그녀 를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누그려져 있었다.  "저 아이들도 양가장의 생존자인가 보군." "아마도 그럴 걸세 " "혼자서 저 많은 아이들을 보살폈다니 힘들었겠어." 대충 사연을 전해 들은 송현은 잠시 하늘을 보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와 아이들 앞에 선 송현은 됫짐을 지 고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제대로 먹지를 못했는지 발육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 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어 보였다. "앞으로 함께 지냅시다. 그걸로 무당의 빛을 씻을 없겠지만 차차 살아가면서 풀어 보도록 합시다. "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변하는 걸 지켜보던 송현은 고개 를 끄덕여 주고 모두를 돌아보았다 "자, 자 모두들 앞으로 우리가 살 집이니 사람이 살만 한 집으로 바꿔 보자고!" 팔을 걷어 부치며 다부지게 말하는 송현을 보며 모두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절망보다는 희망을 찾는 송현의 긍정적인 사고는 다른 이들에게도 쉽게 전염되었다.  출발은 다소 삐꺽거렸지만 그걸로 좌절할 사람들이 아 니었다. 잔뜩 겁에 질렸던 아이들은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돈이 얼마나 남았지?" 왕백은 묻지 말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별수 없다. 아이들 먹게 마을에서 쌀을 좀 구 해 와.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뭐라도 먹어야 힘을 쓰 네 ." 한숨을 내쉬는 왕백의 등을 떠민 송현은 태어나 처음으 로 얻은 자신의 집을 둘러보며 기뻐했다 "좀 낡았지만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쿵! 그때, 송현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는지 어디선가 불어 온 바람에 문짝이 하나 떨어졌다.  이튿날부터 한적하던 어촌 주장진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연일 망치질 소리와 톱질하는 소리에 설마 설 마 했던 사람들은 태평문이 새 주인을 찾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인심 좋은 어촌의 주민들은 새로운 이웃에게 넉넉지 않 은 살림을 나누어 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고단한 하루의 일을 마치면 마을 사람들은 태평문으로 몰려와 손을 거들 었다. 덕분에 태평문의 먼지들이 사라졌고 떨어졌던 문들이 제자리를 찾으며 사람이 살만한 집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즈음에 맞춰서 황염 이 염색공들을 데리고 소주에서 도착했다. "하하하, 영감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어!" 호들갑을 떠는 송현의 환대에 황염은 혀를 찼다.  "대학사까지 지냈다는 양반이 채신머리없게, 쯧쯧쯧!" 황염은 문틱을 들어서자마자 꼼꼼하게 저택의 안을 살 폈다. 송현은 그의 뒤를 쫓으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 절부절 못했다.  "하하하, 뭐 이 정도면 내직염국에 비교해도 규모 면에 서는 크게 뒤지지 않지?" 제발 저리다고 송현은 혹여 황염이 트집을 잡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기쁘지 않군." "정말이우? 뜻밖의 말에 송현의 표정이 환해졌다. 황염은 저택의 기둥을 두드려 보며 만족해했다.  "글쟁이 치고는 제법 보는 눈이 있군." 송현은 혹여 황염이 이런 곳에서는 염방을 차릴 수 없 다고 할까 봐 졸이던 마음을 달랬다. "아직도 이런 건물이 남아 있다니 놀라운 일이야. 목재 들은 천 턴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금강목이고 돌들은 하나같이 대리석들이니 아무래도 왕족의 왕부가 아니 었나 싶다. " 송현은 황염의 말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기 를 당해 억지로 떠맡은 집이라 여겼던 것이 보물이라는데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송현은 속으로 쾌 재를 불렀다 "생활의 방도를 세우는 치생에 있어서 반드시 먼 저 지리를 살펴야 하네. 지리는 물과 땅이 아울러 탁 트인 곳을 최고로 삼는다는 것은 잘 알겠지만, 이처럼 뒤에는 산이고 앞에 물이 있으면 더욱 훌륭한 곳이 되지 그리고 또 그 터가 넓어야 재물이 모일 수 있는 법인데 이 저택은 그런 풍수지리에 아주 잘 따르고 있으니 보통 사 람의 집은 아니 었을 거야." 이 정도면 극찬이었다. 애물단지가 하루아침에 변신을 하니 송현은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절감했다.  "양거 즉 주택지는 좌하 그러니까 집터가 평탄하고 좌우가 좁지 아니하며, 명당이 넓고 앞이 트였으며, 흙은 기름지고 물맛은 감미로워야 한다 고 택경에서 말하고 있으니 지체 높은 양반이 머물 던 곳이 틀림없어." 황염은 우물의 물맛을 보더니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염방을 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지" 오히려 반대다. 이런 곳에 염방을 내다니 이 저택이 아까워." 송현의 입이 귀에 걸리자 황염도 껄껄껄 소리 내어 웃 었다.  사실 그도 세상 경험이 없는 송현이 쓸 만한 장소를 구 해 놓을지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집안을 한 바퀴 돌아본 황염이 큰 소리를 내었다.  "짐을 풀어라! 앞으로 우리의 터전이 될 곳이다. " 황염의 시원한 외침에 백여 명의 염공과 가족들이 부산 을 떨며 짐을 풀기 시작했다.  "아, 저 친구도 왔군." 소주에서 만났던 거구의 사내를 기 억해 낸 송현은 크게 달라진 모습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심하게 지저분하여 곰인지 사람인지 구분하지 못했던 그가 깔끔하게 옷을 입 고 머리카락을 쳐내니 준수한 청년으로 탈바꿈하였다.  '항우라고 하는데 힘 하나는 어디 빠지지 않지." 황염이 쓸모 있는 일꾼임을 강조했지만 송현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 만큼 많이 먹어댈 것 같은데, 아니오?" "쿨럭 !" 황염은 사래가 들려 기침을 해 댔다. 송현이 등을 두드 려주며 한숨을 쉬었다.  ·뭐 이것도 다 인연이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해 봅시 다. " 황염은 송현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때는 긴가민가하였는데 확실히 변했어." "나 말이오?" "보기 좋게 변했다는 뜻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인 황염은 짐을 부리는 염색공들 에게 향했다.  그가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다그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송현은 황염의 말을 떠올렸다.  "변했다? 내가 변했나? 왕백아, 네가 보기에도 그러 냐?" 송현이 왕백을 찾았지만 왕백은 장부를 들여다보며 혼 자 중얼거 리느라 바빴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변했냐고 물었다. " 왕백은 장부를 덮고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변하셨죠. 저 많은 입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천하태평하신 걸 보면 아주 많~이 변하셨습니다. 아마도 내달이면 이자를 갚아야 하는 때가 돌아오는 것과 잔고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계시겠죠?" "응!" 송현은 왕백이 전생에 원수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여하간 황염과 염색공들이 도착하자 태평문은 염방의 모양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태평문이 염방으로 탈바꿈 한 지 한 달여가 흐르자 첫 나염이 시작되었다. 황염과 염공들이 깨끗한 의복을 정제한 채 제단에 향을 피우고 엄숙하게 천제를 올렸다.  "천지신명이시여, 굽어 보살펴 주소서. 염방이 앞으로 크게 번창하도록 도와주소서 " 황염이 향을 들고 배례를 하자 송현도 향에 불을 붙여 절을 하였다 "이 송현, 부와 귀는 누구나 다 원하는 것이지만 도로써 얻는 것이 아니면 취하지 아니하겠습니다. 또 한 의주리종과 견리사의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바른 유상이 되도록 하겠나이다. " 이익만을 위한 이익 추구보다는 선비 정신을 잃지 않는 상인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송현을 보며 황염은 고개를 끄덕 였다.  천신에 대한 제례가 끝이 나자 황염과 송현은 첫 나염 을 위해 쓰일 물감을 독에 부었다 "우리가 나염한 비단이 최고의 물건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우와!" 수많은 이들이 박수와 함성으로 염방의 시작을 축하해 주었다. 마을 주민들까지 찾아와 기뻐해 주니 한바탕 잔 치가 벌어지게 되었다.  귀한 음식은 아니지만 소탈한 음식에 값싼 탁주를 곁들 이자 그것도 훌륭한 만찬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청소 를 하고 보수를 하니 태평문도 그럴듯하게 보였다. 감회 가 남다른 송현은 퇴청마루에 올라 태평문의 정경을 내려 다보았다.  "무얼 그리 넋이 빠져 있냐?" 황염이 나타나 송현의 사색을 방해했다 "꼭 정분 난 여인네처럼 슬퍼 보이구나." "거 영감한다는소리가꼭...... 사실 서희 생각에 잠시 우울해하던 참이라 송현은 속내 를 들킨 것 같아 그걸 감추기 위해 되레 역정을 냈다.  "정말 그랬나 보군 " 오래 산 세월만큼 쌓인 연륜이 어디 가겠는가? 송현은 황염의 눈썰미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 신소리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니고 할 말이라도 있소?" 송현 앞에 탁주 한 사발을 내려놓은 황염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열흘 정도면 비단과 단필이 쌓이게 될 터인데 어 떻게 할 텐가?" "팔아야지!" 당연한 말을 묻는 황염을 보고 송현이 이상하게 생각하 자 황염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하여간황궁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대책 없이 일을 벌 이는데 재주가 비상해." "영감은 만들기나 해, 파는 것은 내가 책임 질 테니." 송현이 장담을 하자 황염은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기는 내가 왜 소주에서 염방을 접었는지 그 생 각은 안 해 봤나? 비단을 만들 줄 몰라서 염방이 망했겠냐 말이다. " 답답한 황염은 송현에게 중원의 상인들이 어떻게 무리 지어 장사를 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이 나라에서 장사를 하려면 좋든 싫든 상방에 소속 되 어야만 하지 저잣거리에서 조그마한 가판을 한다면 상관 없지만 비단의 경우는 사정이 달라." "상방?" 송현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본래 상인은 혼자서 장사를 하거나 일족과 함에 하지 만 명나라가 시작된 후로 상품 생산과 상인 수가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난 뒤로 상인들은 이에 대한 대책과 더불어 관의 간섭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인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상방'이라고 불리는 거대 상인 집단이다 " 상인들에게도 조직이 있다는 말에 송현은 긴장했다. 무릇 조직이란 여럿이 힘을 합쳐 소수를 핍박하는 일이 많으니 송현으로써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방은 지연과 혈연을 인연으로 모인 규율이 느슨한 조직이나 집단이었고 그 수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지. 그러나 그 가운데 대표적인 열 개의 상방을 따로 가리켜 '십대상방' 이라 부르는데, 그 결속력과 조직력은 여타 상방 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무섭다. " 몰랐던 사실에 송현은 장사란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 님을 깨달았다.  "십대상방 가운데 가장 큰손은 산서 지방 출신 상인들 이 모인 '산서 상방'이고 그들은 대륙의 소금 거래를 장악하고 있다. 또한 근면하기로 유명한데 아마도 험한 산 서 지방의 풍토 탓일 거야. 그리고 하늘에서 호수까지 이르는 곳마다 휘상이 있다'라고 사람들이 말해 주는 휘주 상방이 있지. 그런가 하면 험한 변방만 돌면서 장사를 하 는 '섬서 상방'의 경우 워낙에 위험한 지역에서 장사를 하다 보니 검술이나 각종 무공에 능해서 감히 대적할 자 가 없다고들 하지." 그 밖에 황염은 나머지 십대상방에 대해서 대략적인 특 징을 설명해 주었다.  영파 상방, 산동 상방, 광동 상방, 복건 상방, 동정 상 방, 강우 상방 마지막으로 용유 상방까지 황염은 송현에 게 대륙의 상인들이 어떻게 결탁하고 담합을 해서 이문을 남기고 장사를 하는지 자세한 설명해 주었다.  "문제는 그들의 힘과 위세가 관과 무림에까지 미친다는거야." 황염의 이어지는 말들은 송현에게 쾌 큰 충격이었다.  거대 상방들이 째물로 관청을 주물렀고 그들보다 소수 의 상인들을 짓밟고 성장해 왔단 사실 때문이었다.  "저들은 금력과 무력을 다 가지고 있는 무서운 집단들 이야." "저들 뒤에 무림 문파가 있다는 뜻입니까? 황염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예를 들어 산서 상방의 뒤에는 곤륜이 뒤를 봐 주고 있고 섬서 상방의 무사들이 모두 화산파의 속가제자들이 라는 것은 이미 오래된 소문 아닌 사실이지 심지어 소림 사도 휘상의 보이지 않는 배후라고 알려져 있다. " "그럴 수가!" 소림마저 상권에 개입해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지 송현은 고개를 저 었다.  "무림 문파가 그 많은 가솔들을 어찌 먹여 살리겠나? 그들이 무공 수련을 별반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이유는 다 보이지 않는 상방의 지원이 있기 때문이야." 황염이 지루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지금의 질문을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우리와 상관있는 이야기를 꺼내 볼까? 자! 항 주와 소주에서 비단 장사를 하려면 동정 상방에 들어 그 들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어찌할까?" "그 말은 모든 걸 그들과 함께 공유해야 한다는 뜻인가?' "공유? 하하하, 천만에 말씀! 상납이라고 해야겠지." 냉소를 퍼부은 황염의 얼굴에는 분노라고 해도 좋을 격 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항주 전역과 소주 서남부 일대의 사주업은 그들을 통 하지 않고서는 비단 한 필도 팔수가 없어." "관청은 뭘 한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내 말을 허투로 들었구나? 관리들 역시 상방 소속이나 만찬가지 란 말이다. " 불의라는 것을 알지만 별반 도리가 없다는 말에 송현은 분통을 터뜨렸다 "어떤 영세 상인이 독자적으로 비단 한 필을 은 닷 냥 에 내놓았다고 치세. 그럼 그들은 담합하여 비단 한 필에 은 넉 냥으로 시세를 조정하지 그럼 어쩔 수 없이 영세 상 인은 비단의 가격을 내려야만 하지. 허나 그럼 그길로 끝 장이야." "왜지? 영감?" 이것이 그들의 무서운 점이지 비단의 가격을 은 석 냥 으로 내리면 그 비단을 동정 상방에서 싹쓸이를 하지 그 런 연후에 그 비단을 은 넉 냥에 팔지." "맙소사!" 송현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황염은 처연한 표정으로 나 직이 웃었다.  "기가 막히지? 하지만 그런 수법으로 쓰러진 염상들이 저기 있지 않나?" 황염이 가리키는 사람들은 그가 데려온 나염 기술자들 과 비단 직공들이었다 싸구려 탁주에 환하게 웃는 그들 의 가슴에 그런 응어리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미처 알 지 못했다 "영감도 그렇게 당했군." 탁주 한 사발을 한 번에 들이켰다. "크흐, 술 맛 한 번 고약타!" 입가에 묻은 술을 손등으로 훔친 황염이 술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산산조각 난 술잔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객기로 덤비다가는 저 꼴이 난다는 걸 명심해야 할 거야 대학사 나리." 황염은 할 말을 다했는지 무거운 몸을 흐느적거리며 처소로 돌아갔다.  어려운 과제를 떠안은 송현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고민했다. 하나 둘 술에 취해 잠에 취해 돌아가고 어슴푸레 동이 트을 무렵 감겼던 송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너의 삶을 살아라!" 그날 무당산의 비역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에 장진인이 송현에게 남겨준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물러서지도 피하지도 않겠습니다. 나 송현 부끄럽지 않은 유상이 되겠다고 맹세하였으니 그 길을 가렵니다.  그 어떤 시련과 고초가 기다리고 있다 해도 굽히지 않겠습니다. " 송현은 장진인이 있기라도 하듯이 중얼거렸다. 동녘에 서 햇살이 비추어 오자 하늘에서 시타르가 송현을 보고 웃고 있었다.  "스승님, 지를 꼭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 결심을 굳힌 송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 섰다. 일단 결정하면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 송현이었다. 도포가 흔들리는 만큼 새벽의 공기가 요란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부드럽게 추는 춤사위에 주변은 격랑에 시달리는 바다처럼 요동쳤다.  왼손이 원을 그리며 좌에서 우로 흐르니 오른 손도 어 미가 자식을 쫓듯 쫓아가며 태극의 원리를 몸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무당태극권이 펼쳐지는 공간은 외따로 떨어진 별세계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의 정이었다.  진기를 일주천 하며 태극권을 펼친 영호인은 한결 가벼워진 몸 상태에 만족하며 감은 눈을 떴다.  "네?"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주변의 기척을 살피지 못했던 영호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호기심에 가득 물든 눈망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재미있더냐?" 영호인이 아는 체를 하자 아이들은 와! 소리를 내며 도망쳤다. 그러나 멀리가지는 못하고 근처에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구경하고 있었다. "이리 오너라." 그중 가장 어린 사내아이에게 식은 만두를 내밀자 손가락을 빨고 있던 아이는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다가 왔다.  그 모양새가 어찌나 귀엽던지 영호인은 저도 모르게 머 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만두를 받아든 사내아이는 깜짝 놀라며 만두를 쥐더니 줄달음을 쳤다 '배우고 싶은 게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호인은 껄껄껄 웃었다.  "나를 사부로 모시겠다는 뜻이냐?" 아이들은 서로 쳐다보더니 주저했다. 하지만 만두를 우 적거 리던 사내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네!" 영호인이 고개를 끄덕여 주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해서 뒷마당은 때 아닌 연무장이 되어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처음 해 보는 기마자세가 힘들 법도 한데 아이들은 조 금도 불평 없이 묵묵히 구슬땀을 흘렸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흐뭇해질 정도로 배우는 아이들이나 가르치는 영호 인이나 열성이었다. "뭣들 하는 짓이야?" 양설란이 악을 쓰자 평화로웠던 아침 풍경이 져 버렸다. 양설란은 들고 있던 빨래 바구니를 고 달려왔다. 산산이 깨 집어 던지 짝! 큰소리와 함께 아이들 중 가장 맏이로 보이는 소년의 뺨이 금세 부어올랐다.  "너희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이나 알아?·, 그녀는 분해서 어쩔 줄 몰랐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른 다음 영호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같이 지낸다고 해서 내 마음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 은 꿈도 꾸지 마. 어디서 그 더러운 손으로 애들에게 수작 이야. 나쁜 자식!" 양설란의 입에서 차마 듣기 거북한 욕설이 만 영호인은 불편한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튀어나왔지" 설란 소저, 그저 난 애들을........ '닥쳐!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데 얼마나 사납게 구는지 영호인은 대꾸조차 할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이들에게도 심하게 대했다. 결국 겁에 질린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쯧쯧쯧,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닭 잡듯이 닦달을 하누?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야" 그녀는 자신을 빼고는 누구나 적의를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난 송현이라고 예외는 아니 었다.  "천만에 집주인은 나니까, 상관 좀 해야겠어." 송현은 양설란이 어떤 표정을 짓든지 상관할 바 아니라 는 식으로 아이들 곁에 다가가 다독여 주었다 "양설란 당신 사정이야 대충 들어서 잘 알고 있으니까 그건 넘어가도록 할게. 하지만 아이들은 무슨 죄지? 당신은 이 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할 건가?구걸이라도 시킬 테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다니...... 말끝을 흐리는 그녀에게 송현은 피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말이 안 되기는 뭐가 안 돼. 못 배우고 제대로 크지 못 하면 구걸이나 비적질밖에 할 일이 더 있나?" 비아냥거림으로 들렸는지는 양설란의 표정은 더욱 표독 스럽게 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송현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그건 두 사람 사이의 일이야, 아는지 모르겠지만 영호인 저 친구 가 무당에서도 이제는 제법 위치가 높아졌다고. 그런 친 구에게 무공 좀 배우면 세상 나가서 밥술은 뜰 텐데. 왜 그걸 막지?" "하지만........ "원수라고?그래서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이봐요 못난 아가씨 좀 더 넓게 세상을 보라고. 그때 무당파가 없었다 면 아가씨와 아이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까?" 송현의 거침없는 언변에 양설란은 점점 할 말을 잃어갔 다.  "게다가 저 친구는 그때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속가 제자일뿐이었다고. 사실 따지고 보면 영호인에게 잘못을 물을 수도 없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친구는 아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걸 욕하면 안 되지." 송현은 아이들이 진정되자 환하게 웃어 주었다. 양설란 에게 뺨을 맞아 퉁퉁 부어오른 소년을 보자 다시 인상을 썼다.  '힘없는 애들 괴롭히지 말고 불만이 있으면 어른들끼 리 해결해야지. 안그래?" 송현은 아이들을 나가게 했다 그리고 양설란을 향해 진중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대의 가슴에 맺힌 한을 내가 어찌 알겠소만 과거에 집착하는 삶을 살면서 자신과 아이들의 미래를 망치지 마 시 오." 송현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양설란의 목에서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 강호의 은원이라.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더니 하 나도 틀린 말이 없구나." 장탄식을 한 송현은 울먹이는 양설란의 어깨를 두드리 며 위로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복수 만을 꿈꾸다 인생을 망치든지. 아니면 아이들과 함께 미래를 꿈꾸든지. 그건 당신이 선택할 일이오. 영호인은 무 공을 가르치고 나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도록 하겠 소. 내 볼품없어 보여도 한림원 학사까지 지낸 인물이니 아이들에게 제 이름 석자 정도는 쓸 수 있도록 만들어 주 리다. 어떻소? 송현의 제안이 뜻밖이었는지 눈물이 가득한 양설란의 눈이 커졌다. '나 송현, 약속은 지키는 사내요. 그러니 제발 둘이서 잘 지내도록 노력이라도 하시오." 송현은 양설란을 놓아두고 영호인에게 향했다 "뭐 봄 눈 녹듯이 한 번에 묵은 감정을 털어내지는 못 할 테지 하지만 자꾸 부딪치고 정이 들다 보면 언제고 좋 아질 날이 오지 않겠어?' 송현은 영호인을 향해 한쪽 눈을 찡그린 다음 자리에서 사라졌다. 영호인은 울헉이고 있는 양설란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 려했다. 그러나 결국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조용히 밖으 로 나가 버리고 말았다.  됫마당에는 홀로 남은 양설란의 억지로 삭이는 듯한 울 음소리만 들려왔다. 새로 칠한 정문 위에는 무림맹이라는 세 글자가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대단한 필체임에 틀림없었 다 그 아래로 이마 중앙 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무사들 이 눈빛을 빛내며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거참, 아무리 여기를 들락날락 해도 탐나는 것은 저 현판 하나뿐이라는 게 우습지 않으냐?" "누가 듣사옵니다, 어르신!" 가마 안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호위를 맡은 무사가 난처 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흥! 뭐가 그리 무섭다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 느냐?" '하오나 이곳은 무림맹이옵니다. 제발 경솔한 행동은 자제하십시오." "떽! 이놈이 나를 가르치려 들어?" 가마 속에서 대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중년의 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단주 어르신의 당부를 잊으셨습니까?" 상단주라는 말이 나오자 가마 안이 조용해졌다.  "끙! 자식 놈이라고 기껏 상방을 내주었더니 이런 험한 일이나 시키고 협박까지 하다니 불효자식이 따로 없구 나!" 상단주를 언급하니 노인의 기가 한풀 누그러졌다. 중년 무사는 고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참아 야만 했다 "정지! 신분을 밝히시오." 무림맹의 정문을 지키는 수호신위들의 고함에 중년무 사는 익숙하게 가슴에서 패를 꺼내 보였다. 황금으로 만 들어진 패에는 정교한 세공과 함께 글자가 새겨져 있었 다. 그것을 본 신위들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통과! 정문을 열어라!" 신위의 명령에 정문을 지키던 무림맹 수호대 무사들이 서둘러 빗장을 풀고 장정 스무 명이 통과할 수 있는 커다 란 문을 열었다. 육중한 굉음과 함께 무림맹의 정문이 오 랜만에 움직 였다.  옆에 난 작은 통문으로 출입하던 이들이 도대체 누군가 싶어서 걸음을 멈추고 기웃거려보았지만 가마에 늘어진 주렴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가마 행렬이 무림맹 안으로 들어가자 정문은 다시금 굳건히 닫혔다. 현 무림맹의 맹주 곽무헌은 서재의 책상 위에 탑을 만 들고 있는 서신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좀이 쑤셔서 한바탕 드잡이라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결제를 기다리는 무림맹 관리들의 표정을 보며 입맛만 다 실뿐이었다.  그때 총관이 급히 들어오자 맹주 곽무헌은 외출할 핑계 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반색했다.  "오, 무슨 일인가?" 맹주가 살갑게 대하는 것이 낯설어 잠시 주저하던 총관 은 급히 자신의 목적을 상기하고 고하였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 총관이 낯익은 황금패를 내밀자 곽무헌의 표정이 형편 없이 일그러졌다.  "제기랄! 뭐 처먹을 것이 있다고 또 찾아온 거야?" 맹주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자 총관은 사색이 되었다. "목소리가 너무 크시옵니다. 제발, 제발!" 손을 들어 맹주를 달래는 총관에게 곽무헌은 콧방귀를 픽 었다.  "알바 아니다. 왜 나를 찾아 왔다더냐?" "소신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임 상단주가 이번 방문 의 책임자입니다. " "뭐, 그 중늙은이가 왔다고?" 곽무헌은 턱수염을 몇 번 쓸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 노인네는 상대하기 영 껄끄러운데," 내키지 않아 하는 곽무헌에게 총관이 조심스럽게 자신 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아침 좌군사 위공이 무당산의 일을 마치고 돌 아왔습니다. " 좌군사가 돌아왔다는 말에 맹주 곽무헌의 표정이 환해 졌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것이냐. 어서 위공을 불러라. 곽무헌은 늙은 생강을 대하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때마침 지략과 언변이 뛰어난 좌군사가 무림맹 에 귀환했다니 그 보다 좋은 소식은 없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무림맹의 객청은 꽤나 호사스러웠다.  가마 안에 있던 노인은 백발이 성성하고 몸집이 자그마한 초로의 노인이 었다. 맹주 곽무헌을 기다리는 것이 지루했던지 참지 못하고 일어나 객청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때로는 감탄 을 때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하하, 뭐가 그리 눈에 차지 않으셔서 그리 혀를 차십니까?"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노인은 언제 그랬냐 싶게 허 리를 숙이고 포권지례를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미천한 소인이 무슨 보는 눈이 있다고 감히 무림맹의 시설을 보고 평가를 하겠습니까? 황망하신 말씀입니다. " 연신 손사래를 치며 호들갑을 떠는 노인을 보며 무림맹 의 맹주 곽무헌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게 뭐 냐? 곽무헌이 노인을 이끄니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노인은 곽무헌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젊은 서생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여우는 무당산에 갔다며 언제 돌아왔지? 곽가 놈이 실실거 리는 이유가 저놈 때문이었구나.' 웃는 얼굴로 서로의 속내를 감춘 두 사람은 기세를 잡 기 위해 상대를 살피며 그 기회를 노렸다.  "실은........ "무슨........ 동시에 운을 떼다가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멋쩍게 웃 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달랬다. 말할 기회를 놓친 곽무헌 이 입맛을 다시자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노인이 파고들 었다.  "실은 맹주님께 어려운 부탁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 선수를 놓친 곽무헌은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표정은 변 함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제길! 먼저 거절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구나.' 곽무헌이 슬쩍 좌군사 위공의 눈치를 살폈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곽무헌은 안심했다.  "하하하, 무림맹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시는 분인 데 버찌 소원할 리가 있겠습니까? 가탄없이 말씀하시지 요" 노인은 거의 승기를 잡은 듯 득의만면했다.  "이렇듯 저희 상방을 위하시니 돌리지 않고 바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저희 상방이 항주와 소주에서 사주 업을 시작해 보려 합니다. " "사주업이라면 혹시 비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근자에 서역과의 교통이 빈번해짐에 따 라서 비단의 수요가 크게 늘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저희 상방도 물품을 매입하는 것보다 직접 생산하기로 결정하였기에 맹주님께 도움을 얻고자 이렇게 불원천리 달 려온 것입니다. " 맹주 곽무헌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항주와 소주는 절강상의 뜨거운 감자다.  항주와 소주는 지방 정치력과 중원 무림을 중심으로 한 경제력의 결합으로 절강이 대륙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점 차 확대시키는 중이었다.  그래서 절강성에서 활동하는 상방은 관료사회의 보수 성과 무림인의 개방성을 아울러 갖고 있다. 두 가지 기질 을 아울러 갖고 있다는 것은 다른 면에서는 임기응변과 상황 대처 능력에 뛰어나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만큼 위협적인 존재라는 뜻도 된다.  노인의 상방이 이곳에서 장사를 하겠다는 사실이 알려 지면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곽무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음, 천하제일 상방인 안휘의 휘상이 무엇이 아쉬 워 남의 판에 끼어들려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군 요" 곽무헌의 목소리에 배어 나오는 진중함에는 평생을 무 인으로 살아온 무게가 실려 있었다.  '콕! 이것이 곽가권으로 중원을 호령하던 맹주의 기세로군. 하지만 봇짐 하나 들고 중원천지를 돌아다닌 나다. ' 노인은 곽무헌의 암중지세를 흘려보냈다.  "천하제일 상방이라니 누가 들으면 웃을 일입니다. " "겸손이 지나치시군요. '휘상이 없으면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항간에 떠도는 걸 저도 귀가 있 어서 듣고 있습니다. " 휘상은 안휘성에 근거지를 둔 십대상방 중 하나로 소금과 차를 주력 상품으로 장거리 무역을 하 는 유명한 상방이었다 장강 일대는 그들을 통하지 않고 돈이 돌지 않는 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하하, 다 헛소문이지요. 장사가 조금 되려니 배가 아픈 것들이 시샘을 내는 겁니다. "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는 노인을 보며 곽무 헌은 혀를 내둘렀다. '휘상의 전대 상단주 오방원, 백 년 먹은 구렁이를 백 마리도 더 넘게 먹어 치운 상늙은이로다. ' 곽무헌이 입을 다물고 있자 노인은 품에서 두툼한 봉투 꺼냈다. 자신의 앞으로 스르륵 다가오는 봉투와 오방원을 번갈 아 본 곽무헌은 사람 좋아 보이게 웃어 주는 그의 웃음에 짜증이 밀려왔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봉투의 내용물을 꺼낸 본 곽무헌의 입이 찢어질 뻔했다. "이, 이것이 무엇이오?" 곽무헌의 음성이 떨리고 있음을 눈치 챈 좌군사 위공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하하하, 별거 아닙니다. 저희 상방이 보증하는 은자 일만 냥짜리 전표올시다. " 은자 일만 냥! 일개 개인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액이었 다. 천 냥짜리 전표도 본 적이 없는곽무헌으로서는손이 떨릴 지경이 었다.  "대체 이걸 왜?" 곽무헌이 의아해하자 좌군사 위공이 나섰다.  "휘주 상방이 항주와 소주의 사주업에 뛰어든다는 것 은 곧 화산파와 척을 진다는 뜻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소주는 아미파에 줄을 대고 있는 염방들이 매우 많습니 다. 물론 대부분 동정 상방 소속이지요." 좌군사 위공의 설명을 들으며 손에든 은자 일만 냥짜리 전표를 노려보던 곽무헌은 오방원을 직시했다.  "무림맹에서 나서 주는 대가라는 말이로군." 곽무헌의 냉소에 오방원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다른 깊은 뜻도 있기 때문에 오 대 인께서 직접 나서신 겁니다. 아닙니까?" 대인이라고 높여 부르는 좌군사 위공을 보며 오방원은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좌군사 위공은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고 빙긋이 미 소를 지었다. 곽무헌만이 그 사정을 몰라 좌군사 위공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제오장 자공지술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장사하는데 그 재주가 뛰어나 거래를 하는 데 뛰어난 재주를 가리켜 자공지술이라고 말들을 한다. 

  무림맹의 두뇌이며 맹주 곽무헌의 오른팔로 불리는 좌 군사 위공의 입가에 빙긋이 미소가 그려지자 휘주 상방의 전임 상방주 오방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오방원은 무림맹의 좌군사 위공이 출타 중임을 확 인하고 급히 서둘러 온 것이다. 현 상방주인 오방인이 자 신의 아버지를 닦달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머리를 굴리는 데 인색한 곽무헌을 상대해야 적은 노력으로 최대한 많이 얻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좌군사 위공의 조기 귀환은 휘주 상방에게는 불운이었다.  "휘주 상방에서 우리에게 은자 일만 냥의 수고비를 아 끼지 않는 것과 절강성의 동정 상방 뒤에 있는 화산파와 아미파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새로운 조력자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 "새로운 조력자?" 곽무헌은 소림사가 휘주 상방의 뒷배가 되고 있음을 알기에 좌군사의 말에 크게 놀라워했다.  "네, 맹주님! 사실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의 위명이 큰 것은 사실이나 불문인 까닭에 다른 문파처럼 상단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속가제자들 이 있다고는 하나 아시다시피 그들은 명예를 보다 소중히 여기는지라 휘주 상방의 자잘한 문제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 좌군사의 논리 정연한 설명에 곽무헌의 의문이 풀렸다.  "설마하니 휘주 상방이 다른 문파와 손을 잡았단 말인 가?" 곽무헌이 오방원을 지긋이 바라보자 난처한 표정의 노인이 꾀를 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보며 곽무헌은 오늘 이 자리에 좌군사 위공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니 암담하기만 했다.  "그래서 어디란 말인가?" 곽무헌이 참지 못하고 좌군사를 재촉하자 위공은 미소 와 함께 오방원을 바라보았다.  '아로 남궁세가지요." "뭐? 남궁세가!" 곽무헌은 얼마나 놀랐는지 손에 쥔 것이 일만 냥짜리 전표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찢어발기듯이 움켜쥐었다.  "그래서 휘주 상방이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남궁세가를 절강성으로 끌어들이겠다는 말이오? 그건 절대 불가한 일이오!" 곽무헌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쉽 게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맹주 곽무헌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감궁 세가가 이리도 무림맹과 척을 지고 있었나' 오방원이 크게 당황할 정도로 곽무헌은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곤혹스러워하는 오방원을 노려보는 곽무헌의 눈 에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남궁세가를 절강성에 끌어들인다면 그건 턱밑에 비수 를 꽃는 거나 마찬가지다. 남궁연 그놈은 너무 위험해!' 곽무헌은 음험한 남궁연의 본성을 잘 알기에 늘 그를 경계해 왔다. 좌군사 위공 역시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연 이 큰 야심을 품은 효웅임을 눈치 채고 있었기에 곽무헌 의 경계심을 이해했다 이는 남궁세가를 바라보는 전 무림의 시선이 비슷하다 는 것을 의미했다.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지자 좌군사위공이 먼저 실마리를 풀어갔다. 하하하, 맹주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 대인 께서도 아시다시피 화산파의 옥종인 장문님과 아미파의 정인사태, 그 두 분의 성정이 어떤지는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좌군사 위공의 말에 오방원은 하마터면 속내를 입 밖으 로 낼 뻔했다.  '개차반이지 !' 오방원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좌군사 위공은 보이지 않 게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가 재빨리 지워 버렸다.  ·.은자 일만 냥이 적은 돈은 아니오나 맹주님께서 겪으실 곤란에 비하면 다소 실망스러운 금액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승낙도 거절도 아닌 애매한 말투에 오방원의 이마에 주 름이 늘어났다. 허, 이놈 봐라! 장사꾼을 상대로 거래를 하려 들다니. 이놈 무림맹 군사가 맞기는 한 건가?' 그러나 속내와 달리 오방원은 얄미울 정도로 조리 있게 말하는 좌군사 위공을 쳐다보며 넉넉하게 웃어 주었다.  ·어려워하지 말고 기탄없이 말해 보오." 오방원의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좌군사 위공은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마지못해 입을 여는 척 했다. "맹주님께서 그 수모를 겪으실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이 일은 없었던 일로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 "끙!" 결국 좌군사 위공에게 오방원이 항복을 해야 했다.  '약은 것이 불여우보다 더 하구나. 공자의 제자인 자공 도 이 녀석에게 형님이라고 부르겠다! 네놈들이 원하는 데로 해 주마. 대신 너희들이 내민 패가 형편없다면 각오 해야 할 것이다. ' 오방원은 쓴 맛이 나는 입 안을 다시며 품에서 봉투 하 나를 더 꺼내서 곽무헌 앞에 놓았다.  "은자 일만 냥짜리 전표입니다. 이만하면 성의 표시는 한 줄 압니다. " 더 이상은 줄 것이 없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오 방원이 좌군사 위공을 바라보자, 만년 서생 같은 그의 하 얀 얼굴에 흡족해 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휘주 상방의 큰 배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수 일 내로 맹주님께서는 폐관수련에 드실 겁니다. " "응? 내가? 아니 왜?" 곽무헌은 난데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좌 군사 위공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따라서 절강성 일대에서 벌어질 무림맹과 관련된 업 무를 당분간 처리하실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상방 자긍재술 끼리의 다툼이든 문파 간의 대립이든지 어느 정도 시 일이 지나고 나서야 무림맹에서는 사태 수습에 나서게 될 것이 고 그 정도 시간을 벌어들인다면 휘주 상방에서는 충분히 원하던 것을 얻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긴 설명이 끝나자 오방원은 크게 탄복하며 진정으로 좌 군사 위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저런 인재를 상방에 들이지 못했다니 억울하군. 이번 기회에 한번 운이나 떼어 볼까?' 오방원은 소문으로만 듣던 무림맹의 좌군사 위공의 혜 안에 감탄하여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지만 좌군사 위공의 존재가 크 게 느껴진 오망원은 사람 욕심이 많은 터라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무림맹에서 썩기는 아까운 녀석인데 아쉬워! 자공지술을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녀석은 처음 보는 군." 입맛을 다시던 오방원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고 돌아 섰다. 욕심도 많지만 포기도 빨랐다. 그것이 바로 대 상방 을 이끄는 수장으로서의 남다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매우 서둘렀다. 시간이 돈이라며 수행원들을 다그쳐서 일찌감치 무림맹을 벗어 난 것이다. 맹주의 집무실은 무림맹의 가장 높은 전각에 있는지라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오방원 일행의 모습이 점이 되어 보이지 않게 되자 곽 무헌은 찜찜한 표정으로 좌군사 위공을 쳐다보았다.  "폐관을 들어간다니, 너무 뻔한 핑계잖아! 화산의 그 영감탱이가 그 말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 지? 아니지 화산의 영감탱이보다 아미의 정인사태, 그 할 망구의 잔소리는 해가 갈수록 일취월장하고 있단 말이 야. " 곽무헌은 실제로 그들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수 선을 피웠다.  무공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을 다투는 무인이지만 정치 에는 다소 둔감한 체질이었다. 그러나 그런 우직함 때문 에 만장일치로 수년간 무림맹의 맹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무림맹이 중원 무림의 조율자로서 있기를 원하는 정파의 바람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곽무헌에게 좌군사 위공은 유비에게 있어 제갈공 명 인 셈이었다.  "맹주님, 일단 은자 이만 냥을 챙기셨으니 실리는 취하 신 셈입니다. 이 자금이면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 손을 벌리지 않아도 당분간 숨통이 트일 겁니다. "좌군사 위공의 웃음을 보며 뭔가 숨겨진 한 수가 있음 을 눈치 챈 곽무헌이 조바심을 냈다.  "호오, 뭔가 꼼수라도 준비해 둔 모양이군." 좌군사 위공은 벽에 걸린 지도 두루마리 중에서 절강성 의 행정지도를 꺼내어 펼쳐 보였다.  절강성의 요소요소좌 산지의 특산물, 상업, 농멉, 광물 의 출처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이런 지도를 개인이 갖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이곳은 무림맹이었다 좌군사 위 공이 지도 앞에 선 곽무헌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 기 시작했다.  "휘주 상방은 지나치게 그 세력을 팽창하고 있습니다.  장강 이남에서 시작된 휘주 상방은 벌써 섬서 이북과호 북성 일대는 물론 대륙의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 다. 하지만무엇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그들이 관은 물론 황궁에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휘주 상방의 오방인 상방주 가 군상과도 접촉하고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 "군상을? 그건 아주 좋지 않은 소식이군:" 곽무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군상이라 함은 군수품을 취급하는 상인과 직접 장사하는 군인을 가리켰다.  십대상방은 각기 자신들의 지역에 맞는 특성을 지켜 왔 다 그러나 휘주 상방은 고래가 바닷물을 집어삼키듯 닥치는 대로 세를 불리고 있었다.  "일단 저들을 안심시켰으니 잠시 눈을 속인 셈입니다. " "자네 뜻은 무엇인가?" "이쯤에서 한 번 눌러줄 필요가 있습니다 " "눌러 준다. 이 말이지?" 좌군사 위공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곽무헌이 비릿 하게 웃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휘주 상방과 남궁세가가 대륙의 모든 상권과 무림을 집어삼키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 니까요." "흥!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그 쥐새끼 같은 놈에게 강 호를 넘겨줄 수는 없어. 암!" 곽무헌은 남궁연의 얼굴을 떠올리더니 어금니가 으스 러지도록 턱에 힘을 주었다.  둘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보통 악연은 아 닌 듯싶었다.  좌군사 위공은 위공대로 휘주 상방에게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으니 저에게 전권을 주신다면 휘 주 상방과 남궁세가의 야심을 막아 내도록 하겠습니다. " 자신 있게 말하는 좌군사 위공이 믿음직스러웠는지 곽 무헌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좋아, 자네 말대로 제대로 한 번 눌러 주자고!" 곽무헌의 허락이 떨어지자 위공은 모처럼 하얀 이를 드 러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결코 실망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양 쪽 모두 힘이 빠지게 만들겠습니다. " "호오, 그 말은 내게 힘을 실어 주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동안 무림맹을 너무 우습게 아는 것 같 아서 기분이 나빴거든요." 곽무헌은 자신의 무공보다도 그의 작은 두뇌가 새삼 대 단하게 느껴졌다.  "좋아, 한번 실력 발휘를 해 보게나, 그나저나 무당산 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지?" "아, 이런!" 좌군사 위공은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잠시 고개를 흔 들더니 무당산의 참극에 대해서 상세히 보고했다.  "흠, 그래? 그렇단 말이지........ 곽무헌은 좌군사 위공의 설명을 듣고 보고서를 여러 번 훌어보았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마교라고 밝힌 이들의 시체를 살펴보았지만 그들이 마교의 주구라는 사실은 알 길이 없었고 대부분의 증거는 비역이 무너지면서 다 파묻혔기에 알 길이 없다?" 곽무헌은 보고서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힘든지 혀를 찼다.  "무당이 어느 곳인가?다른 곳도 아닌 무당이 겨우 불 청객 몇 때문에 무너질 곳인가? 그게 아니라는 것은 자네 도 알고 나도 알고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네." 곽무헌의 강한 의심에 좌군사 위공은 난처한 기색을 보 였다.  "실은 보고서에 적지 않은 내용이 있습니다. 워낙에 민 감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리도 조심하는 겐가?" 곽무헌이 귀를 기울이자 위공은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그러나 곽무헌의 그런 위공의 노력을 바로 날려 버렸다.  "무엇이라고? 당천악 그자가 그날 무당산에 있었단 말 인가?" 곽무헌은 당장에라도 당천악을 찾아 떠날 태세였다. 그 의 성정을 잘 아는 좌군사 위공이 그의 소매를 급히 잡아 당겼다.  "진정하시고 이야기를 마저 들으십시오. 지금 무당에 가 봐야 아무도 없습니다. " "그럼 어디 있나?" "사라졌습니다. " "사라져? 어디로?' 좌군사 위공이 고개를 가로젓자 곽무헌은 탄식을 했다. 휘주 상방의 음모를 들었을 때도 이렇게 흥분하지 않았던 곽무헌의 과격한 반응에 좌군사 위공은 의아함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리도 흥분하신단 말인가? 당 천악이 비록 황궁에서 악행을 저질러서 무림맹이 곤란해 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금의위에서도 당천악 개인의 소행으로 결론이 난 일이 아닌가7사천당문의 봉문으로 사 태가 일단락 지어진 마당에 이런 반응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군,' 결국 좌군사 위공은 자신이 모르는 내막이 있음을 짐작 하게 되었다.  흥분한 곽무헌을 진정시킨 좌군사 위공은 보고서에 적 지 않은 내용을 마저 이야기했다.  "더욱이 이상한 점은 그날 그곳에 구걸 신개가 있었다 는 사실입니다. " 구걸 신개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에 놀라지 않는 곽무 헌을 보고 좌군사 위공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 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러나 모르는 척 설명을 계속 했다.  "구걸 신개가 이미 무당산에 있었는지 아니면 뒤에 도 착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를 보았다는 세작들의 보 고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습니다. 그럼 그랄 무 당에 난입한 이들은 구걸 신개, 당천악 그리고 자칭 마교의 후예들이라고 정체를 밝힌 적혈마대 이 셋입니다. " 곽무헌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주먹을 쥐락펴락 하며 불안해하였다.  "바역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고? 확실한가?" 팍무헌이 재차 물어 오자 좌군사 위공은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 였다.  "제가 직접 조사를 해 보려 했지만 워낙에 험준한 곳에 위치해 있고 또 무슨 폭발이 있었는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복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 "그럼 그 폭발로 모두 묻혔다는 뜻인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구걸 신개는 무사 히 빠져나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얼마 전에 항주의 한 객잔에서 목격되었고 또 최근에 호접곡에서 개방도를 이끌고 무언가 일을 벌였음이 드러났습니다. "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좌군사 위공의 설명에 곽무헌 은 얼굴이 보기 흥하게 일그러졌다 "여하간 구걸 신개는 객잔에서 누군가를 오랫동안 지켜 보았고 또 무당은 그날 제삼의 인물을 보호하기 위해 입 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 "제삼의 인물이라니?" 곽무헌은 새로운 존재에 대한 언급되자 눈빛을 번뜩였다.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조사를 하는 와중에 알아낸 것입니다만, 당천악과 적혈마대로 인해 풍전등화의 위기 에 빠진 무당을 구한 것이 갑자기 나타난 젊은 고수의 출 현이라고 무당의 제자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와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하였음메도 불구하고 제가 물으면 위에서 함구령이 내렸는지 모두가 묵묵부답이었 습니다. " 곽무헌은 그 존재에 대해서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좌군사 위공도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새로운 장문인 유자강은 무림맹의 수사에 전혀 협조 하지 않았습니다. 적혈마대에 당한 시신을 통해서 마교의 무공인지 살펴보려 했으나 서둘러 화장을 한 흔적이 역력 했습니다 심증은 있으나물증이 없으니 더 조사해 볼 이유가 없어 서둘러 무림맹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당산에서 내려온 제삼의 인물이나 구걸신 개 모두 항주로 향했다는 겁니다. " '항주?" "그렇습니다. 사건 발생 이후로 무당산을 내려간 이들 은 그들이 유일했고 최종 목적지는 항주였습니다. " "그럼 당천악도 항주에 있을 가능성이 높군," 곽무헌의 지적에 좌군사 위공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목석처럼 움직이지 않던 곽무헌이 몸을 일으켰다.  "수고가 많았네. 먼 길을 오가느라 고생이 많았겠지만 시국이 뒤숭숭하니 서둘러 직무에 복귀해 줘야겠어....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 "좋아, 자네는 휘주 상방의 움직임에 대해서 철저히 사하게 난 구걸 신개의 일을 맡지." "알겠습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호접곡에서 구걸 신개의 행방이 끊겼습니다. 개방도 지금 구걸 신개를 행방을 찾기 위해서 혈안이라고 합니다. " 곽무헌은 알았다며 손을 내저었다. 읍을 한 좌군사 위 공이 맹주의 집무실을 나가자 실내는 고요 속에 파묻혔 다 말없이 창가에 서서 하루가 저물어 가는 것을 지켜보던 곽무헌은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구걸 신개는 그 금서가 다시 나타났다며 호들갑을 떨 더니 어떻게 된 거야?또 당천악 그 녀석이 금서에 대하 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쓸데없는 일 이나 벌이고 다니다니 미칠 노릇이군. 그건 그렇고 구걸 신개가 나에게까지 정체를 숨긴 존재는 또 누구지?·. 생각이 가지에 가지를 치며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자 두통이 밀려왔다.  "으, 젠장! 이런 건 나하고 맞지 않아!" 곽무헌은 답답한지 창문을 열어젖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조금은 답답했던 마음이 풀어 지는 듯했다.  가슴 깊이 숨겨둔 책자를 꺼낸 곽무헌은 손때가 묻어 색이 바란 책자를 보며 사납게 인상을 썼다.  "너는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마물인데, 허나 너를 없애지 못하고 이리도 소중히 가슴에 품고 있으니 나 역 시 미련한 인간 중에 하나일 뿐이구나. 장진인과 혜승선 사와의 약속이니 너를 아는 모든 인간은 죽어야 해!" 곽무헌은 답답한지 책자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책의 표지로 쓰인 양피지는 낡았지만 선명한 글씨가 적 혀 있었다.  한 장, 한 장 펼쳐 보던 곽무헌은 책을 가슴속 깊이 집 어넣더니 기마자세를 취했다. 양손을 들어 살괭이처럼 움 직이자 갑자기 실내 공기가 출렁 였다.  절도 있는 권법의 투로는 거칠 것이 없었고 내력을 운 용하는 것 또한 일품이었다. 이것이 바로 중원제일의 권법이라고 칭송받는 곽무헌 의 독문무공 곽가권이었다. 신형을 빙글빙글 돌리며 양손 을 내뻗으니 무형의 기운이 뻗어 나가 집무실을 벽을 때 렸다.  쿠콰광! 엄청난 위력이었다. 단단한 흙벽이 잠시도 버티지 못하 고 무너져 내렸다. 이에 놀란 수신호위들이 뛰어들었지만 그들이 본 것은 무너져서 생긴 집무실의 구멍뿐이었다 어딜 보아도 암살자로 보이는 적은 보이지 않았다. 실 수를 범한 곽무헌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들을 내보냈다.  "휴, 일단 펼치면 자제하기가 힘드니, 무극무해는 참으 로 놀라운 무공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면 괴물로 변하고 마는 마공이기도 하지, 네 녀석의 존재가 알려지 면 또다시 무림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건 한 번이면 족해 ! ”평생의 짐이라도 되는 듯 곽무헌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구걸 신개 이 인간은 나에게 오지 않고 도대체 항주에서 누구를 만난거지?"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풀려다가 더욱 복잡해진 머릿속 을 진정시키기 위해 벌떡 일어섰다.  곽무헌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몸을 움직여야 그것이 해소되는 체질이었다.  물론 대련을 핑계로 한 가혹한 구타 행위였지만 감히 따질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짜증이 난 곽무헌은 서둘러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무림맹의 위사들은 곽무헌이 상의를 벗고 우람한 근육을 드러내자 저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오늘 연무장에서 수련 나온 위 사들은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오산의 산길을 따라 걷는 송현과 황염의 뒤로 왕백이 봇짐을 지고 투덜거리며 따르 고 있었다 이들이 지나고 있는 오산 일대는 예로부터 항주에서도 상업이 발달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수공업이 매우 발달하여 삼성교의 큰 나무 아래에는 수많은 화랑거가 매일 모여들었 다 이 수레에는 실, 바늘, 일상 용품에서부터 없는 것이 없 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거래되고 있었다.  활기찬 장터를 구경하는 즐거움을 뒤로 하고 일행은 오산 광장의 서쪽으로 향하였다. 큼지막한 거리의 양쪽에 늘어선 상점 거리를 한참 지나니 '청하방'이라고 쓴 세 글자가 보였다 이곳은 옛날 번화했던 남송시대의 시장이 명나라까지 이어져 온 오래된 거리였다. 차, 비단, 골동품을 파는 상 점과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파는 식당 들이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왕백이 향긋한 음식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주린 배를 매만지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보였다.  "수많은 왕조가 이곳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는데 이 거리며 사람들은 변함없이 살아가고 있군." 송현의 넋두리에 황염이 혀를 찼다 "그것이 역사고 그것이 인간사지. 과연 저들이 이 땅에 명 왕조가 세워지든 송 왕조가 세워지든 관심이나 있을 까? 그저 내 새끼 배부르고 따뜻하면 그 뿐이야.- "옳으신 말씀!" 황염의 말에 송현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충신이니 왕조를 위한 충성심이니 하는 것들이 황궁을 떠 난 이후로 상당히 엷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크게 호통 치는 고함 소리와 함께 거리가 떠들썩해졌다. 길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양 갈래로 갈 라지자 멀리서 가마 행렬이 나타났다. "뭐지?" 고개를 내미니 붉은 비단 관복을 입은 관리가 가마에서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이 복잡한 곳에 가마를 타 고 나타났으니 사람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호위를 하는 무사들의 험상궂은 모습에 누구도 눈을 들지 못했다.  "빌어먹을 향신 같으니라구!" 황염이 가래침을 바닥에 뱉으며 욕설을 하자 주변에 있 던 사람들 모두 같은 마음으로 구시렁거렸다.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살거나 향 촌의 퇴직 관리, 유력 인사들을 향신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는 성품이 좋은 이들이었지 만 점차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들이 입김이 세지면서 지방 행정에 관여하거나 영리 사업에 권세를 휘두르는 부 패한 자들이 늘어나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향신의 가마 행렬 뒤에는 비단포 를 가득히 쌓은 수레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뇌물일세!" 황염이 더러운 것을 보았다며 욕설을 내뱉었다. 아마도 저 비단은 이 지역 관리들의 개인 창고로 들어갈 물건들 일 것이다.  향신들이 지역에서 세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물건을 구입해 가는 길임을 알 수 있었다.  "뭐 어쨌든 비단의 수요가 많은 건 틀림없다는 이야기 로군?" "그렇지, 게다가 요즘은 서역과의 거래로 비단의 수급 이 크게 달린다고 들었네. 자, 가지! 늦었어." 황염은 자꾸 지체되자 짜증이 나는지 사람들 사이를 밀 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원 노인네가 기운도 세지. 왕백아 어서 가자!" "윽!" 가판에서 떡 하나를 몰래 사 먹으려던 왕백은 잠시의 틈도 주지 않는 송현과 황염을 저주하며 울상을 지었다. 명화당이라고 쓰인 붉은 간판을 내건 점포는 규모가 상당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고관대작의 부인들로 보이는 여인네들이 비단을 고르며 수선을 떠는 풍경이 곳 곳에서 발견되었다.  송현 일행을 발견한 점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황염이 손 가락 두 개를 꼬아 보였다. 점원은 표식을 알아보고 일행 을 이 층으로 안내했다.  "영감, 그건 뭐야? "수어다, 같은 상방의 상인들끼리 사용하는 일종 의 암호지 저길 봐라." 같은 상방끼리 장사를 할 때는 남이 알지 못하도록 '수어' 를 사용한다.  소매 밑에 손을 찔러 넣은 다음 서로의 손가락을 거머 쥐고 숫자를 확인한다. 예를 들어 집게손가락을 잡으면 일,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집으면 이, 그리고 엄 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양쪽으로 붙이면 팔이라는 식 이다.  "호오, 고것 참 재미있는걸." 상인들의 거래 방법이 쾌 치밀하고 그 속에서 깊은 연 륜이 느껴졌다. 송 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상술이 니 역사가 깊은 것은 당연했다. 황염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는 얼굴을 찾아내더니 아 체를 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황염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겨우 기억의 끄트머리에 있던 황염의 존재 를 끄집어랬다.  "하하하, 황 대인 오랜만입니다 " "고명한 진 대인께서 이 못난 황모를 기억해 주시니 황 망할 따름입니다. " 장사치들이 만나는데 꽤나 격식을 차리는 모습에 웃음 이 절로 나왔지만 황염이 지그시 발등을 밟으며 눈치를 주었기에 송현은 어금니를 깨물어야 했다. "어인 일로 이 먼 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소주에서 예 까지면 반나절 거리 인데요."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왔을 것 같은 진 대인은 주판 알을 털고 일어났다. 지나치게 살찐 배가 일어설 때 탁자 를 치고 말았다.  "큭!" 송현과 왕백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실수를 범 했지만 진 대인은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털털하게 웃었 다.  "하하하,·이놈의 배가 늘 문제지요. 자, 자. 안으로 드 시지요. 이쪽은 보는 눈들이 많아서." 기분이 상하여 얼굴을 붉힐 만도 한데 진 대인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 보였다. 과연 관록 있는 상인의 처세술이 었다.  송현은 크게 감탄하며 자신의 실수를 부끄럽게 여겼다 이 층을 가득 메운 상인들의 눈을 피해서 안내된 방으 로 들어가자 깡마른 체격의 사내가 들어와 문가를 지켰 다.  송현은 사내를 잠시 훌어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자로군.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는데도 조금씩 흘러나오는 기세가 대단하다. ' 송현은 무극무해의 기운을 슬쩍 흘려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애써 참았다. 그러고 보니 당포에서 돈을 빌린 노인의 무사도 대단 한 고수였지. 상인들 곁에는 늘 저 정도의 고수들이 함께 하는 걸까?' 만만치 않은 상계에 발을 들여 놓았음을 점점 피부로 느끼는 송현이었다. 진 대인은 직접 차를 따르며 부산을 떨었다.  황염도 보조를 맞추어 시중에 떠도는 잡다한 이야기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다.  "궁을 나온 지 쾌 오래 되셨지요?" "한 칠, 팔 년이 다 되어 가나 봅니다. " 진 대인이라는 자는 황염의 내력에 대해서 소상히 아는 눈치였다. 사례감 왕유가 몰락했으니 이제 황 대인께서도 슬슬 돌아가실 요량인가요?" 허허허, 이제 북망산을 바라볼 나이인데 관직에 욕심이 있겠습니까?그보다는 소개해 드릴 서 불원천리 달려왔습니다. " 사랍이 있어 " 소개라니 누구를 말입니까?" 뜻발이었는지 진 대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황염을 바라 보았고 송현 역시 누구를 소개해 준다는 건지 궁금해 황 염을 바라보았다. 때가 되었음을 안 황염이 넌지시 송현을 내세웠다.  '한림원 학사를 지내신 송현 학사님이십니다. " "아, 인사가늦었습니다 저는 진여송이라고 ...... 송현 학사? 설마 그 송현 학사?" 진여송의 랒빛이 크게 변하며 포권지례를 하던 몽이 그 대로 굳어 버렸다. 화들짝놀라며 몸을 일으킨 진 대인은 송현을 다시 훔어보더니 말을 더듬었다.  "이번에 왕유의 난 때 공을 세우신 대학사 송현이 당신 이란 말입니까?" "과찬이십니다. 대학사라는 칭호는 감히 무거워 받지 못했습니다. " 뜻밖의 상황에 송현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만면에 미소 를 띠며 겸손을 떨자 진여송은 손사래를 쳤다.  "아킵니다.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황제께 충언을 올려 역당의 무리를 벌한 그 충절에 백성들 모두가 감동하고 있습니다. 내 오늘 송학사님을 만난 것은 가문의 영광입 니 다. " 진여송의 반응이 너무 뜻밖이어서 송현은 당황했지만 황염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 다.  '영감탱이! 무슨 꿍꿍이 속셈이지?' 송현이 사납게 노려보는 속내를 다 안다는 듯 황염은눈치를 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판을 깨지 말라 이건가?' 황염의 의중을 파악하고 송현은 억지 미소를 유지했다.  진여송은 여러 가지를 질문을 쏟아 냈고 송현은 여유를 잃지 않고 차분히 모두 답을 해 주었다. 이에 진여송은 크 게 감동하였다.  "이렇게 귀한 손님을 맞이했으니 오늘 저녁은 저희 집 에 묵어 주시겠습니까?" "고마우신 말씀이나 저희는 바빠.... 으!" 난데없이 허벅지에서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이 밀려오자 송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하하, 송현 학사님께서 남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몹 시 싫어하시지만 진 대인의 초청이라면 기꺼워하실 겁니 다. 그렇지요?" 황염이 허벅지를 꼬집은 통에 눈물을 삼켜야 했던 송현 울며 겨자 먹기로 진여송의 초청을 수락해야만 했다.  그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송현은 황염에게 이를 갈았다. "허벅지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수다. 영감!" 불편한 심기를 유감없이 드러냈지만 황염은 콧방귀를 픽었다.  "흥! 진 대인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다면 그깟 살점 좀 떨어진들 무슨 대수야." 황염의 독기에 송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 나 의문이 드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했다.  "헌데, 말이야 영감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왜 나를 이렇게 환대하는 걸까?"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송현에게 황염이 가려운 곳 을 긁어 주었다.  "상인들은 부유하여 향락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지만 결코 고귀한 삶은 살 수 없지."』한 삶?" 황염은 가마를 타고 가며 흡족해하는 진여송을 가리켰 다.  "명제국은 철저한 관료들의 나라다. 제아무리 돈이 많 다고 한들 권력에는 못 미치기 때문이지. 그래서 저들은 평생에 걸쳐 중앙에 나아가기를 꿈꾼다. 허나 애석하게도 상인의 집안에서는 걸출한 인물이 나포지 않아." 유난히 화려한 가마를 보며 황염은 혀를 찼다.  "제아무리 좋은 재료를 쓰고 화려하게 치장했다고 해 도 종이품 관리가 타는 낡은 초헌보다 못한 것이 현실이 니까." 그제야 황염의 의중을 알게 된 송현은 상인들이 사인 즉 얼마나 사대부가 되고 싶어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관직을 사지만 대부분 하급 관리 일 수밖에 없지 그래서 저들은 부를 가졌지만 자네 같은 순수한 사대부를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거네." "저들의 부라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군." "허망해 보여도 볼거 리는 대단하지 " 황염이 가리키는 곳을·본 송현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 다.  "저, 저게 개인의 저택이란 말이야?" 저택은 웅대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사치 가 극에 달한 정점을 보는 듯하여 질려 버릴 지경이 었다 "이건 너무 하지 않아?" "후후후, 아직 안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그런 소리를 하다니, 쯧쯧쯧 놀라는 건 지금부터야." 황염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어 넘겼지만송현과 왕백 은 휘둥그레 커진 눈길을 잠시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저택의 문이 열리는 순간 다른 세상에 온 착각이 들었다.  "요지경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요지경 인가 봅니다. " 맥 풀린 음성으로 허탈해하는 왕백보다 더한 심정인 송 현은 혀를 내둘렀다.  "태평문은 여기에 비하면 궁색하기만 하구나." 황염이 시골 촌사람처럼 행동하는 두 사람의 등을 떠밀자 진여송이 흡족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연회가 시작될 때까지 별채에서 쉬도록 하십시오." "하하하, 진 대인의 배려에 감사할 뿐입니다. " 황염이 잘 둘러대니 어린 하녀들이 손님들을 안내했다.  문과 문을 얼마나 지랐을까? 작은 정원에 단아한 별채가 일행을 맞이했다. 그곳에서 일행은 진여송이 부를 때 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황염은 송현의 질문에 결코 속 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벌어질 모 든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별채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새 해 가 졌고 장원에 하나 둘 등불이 밝혀지자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제육장 고주일척

- 전력을 기울여 어떤 일에 모험을 하다

배가 고파 지쳐 잠이 든 왕백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턱 을 괴고 탁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황염에게 담요를 덮어 준 송현은 조용히 별채 밖으로 빠져나왔다.  밖은 벌써 밤이 깊어 휘영청 밝은 달이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저택은 붉은 초롱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깊어가는 한밤의 정취를 자아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한 진여송의 부름이 없어 할 일이 없어진 송현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정원을 서성거렸다.  달빛의 경치에 취해 거닐던 송현은 문득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문에 정진하여 대성하는 것은 유형의 결과가 아니고 개인적 인 만족이며 지성을 쌓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닌 남이 평가를 해 주는 다소 이율배반적 인 논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진여송이 쌓은 부는 겉으로 드러나며 자신 스스로도 평가를 할 수 있는 유형의 결과라는 것을 떠올리며 삶의 방식과 질의 차이에 대한 갈등에 빠져 들었다.  "과연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지 송현은 허탈하게 웃으며 쓸데없는 망상을 머리를 흔드는 것으로 털어 내고 화려한 정원을 구경하는데 열을 올렸다.  "응?" 걸음을 멈춘 송현은 풍수의 법칙에 의해 잘 꾸며진 정 원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밝은 달밤에 어울리지 않는 밤 고양이로구나. 객식구 인 손님으로 왔으니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야 하나, 아니 면 주인을 배려하는 의미에서 나서야 할까?" 송현은 어둠 속을 응시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밤 고양이가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안채로 움직이자 갈등은 금세 끝나고 말았다. "몰랐으면 모르지만 본 이상 모르는 척하는 것은 예의 가 아니겠지." 빙긋이 웃으며 밤 고양이보다 더 조용히 뒤를 쫓았다 송현의 발걸음의 뒤로 가벼운 바람이 일었다.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걸걸한 목소리 가 내뿜는 호통이 문지방을 넘어 크게 들려왔다. 이를 말리는 소리도 있지만 화를 내는 사람을 감당할 수 없는지 이내 점점 사그라졌다.  "진 대인께서 그리 물러 터지게 행동을 하니, 타지 놈 들이 겁도 없이 점포를 여는 겁니다. 이대로 안방까지 다 내어 줄 셈 입니까?" "천하의 유사홍도 이제 겁쟁이가 되었나 보군. 겨우 비 단 점포 하나 들어섰다고 동정 상방이 당장에 어떻게 되 지는 않아!" 비단 모자를 쓴 유사홍이 씩씩거리는 데도 진여송이 차 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자 보다 못한 초로의 노인도 유사 홍을 거들었다.  "유사홍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게야." 별재 모문룡의 침중한 표정을 본 후에야 진여송은 찻잔 을 내려놓았다. 그가 심각하다고 하면 정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어제 그 점포를 둘러보았는데 물건들이 모두 상등품 이었네." 뭐, 그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여전히 대수롭지 않아 하는 진여송을 보며 별재 모문룡이 일침을 가했다. 그게 그렇지 않아. 비단은 모두 당라와 능라였네, 흔한 단필 따위가 아니고 말이야. 게다가 모두 최상품이야." 당라와 능라라, 게다가 상품의 물건이란 말인가?" 동정 상방에서 거래하는 물품의 등급을 매기는 별재 모문룡의 말이니 확인할 필요도 없다. 더 놀라운 일은 호의 붓, 휘주의 먹, 단 계의 벼루까지 모두 구하기 힘든 진귀한 것 들 뿐이었네 ." 별재 모문룡의 말이 끝나자 진여송의 표정에서 더 이상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군." 이마에 주름이 만들어지며 사나운 표정을 짓는 진여송 을 향해 유사홍이 패를 하나 건넸다.  "이게 뭔가?" 패를 확인하던 진 대인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남궁세가의 표식이 아닌가?" 진여송이 왜 이걸 보여 주는지 몰라 유사홍을 바라보자 그는 냉소하며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놈들의 뒷배가 궁금해서 창고를 감시하다가 한 놈의 호주머니를 털었더니 이게 나왔습니다. " "그럼 놈들이 남궁세가란 말인가?" 진여송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자 유사홍은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 강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남궁세가가 장사판 에 뛰어들었을 리는 없으니 누군가의 됫배를 봐주기로 계약을 했을 겁니다. " "그럼 십대상방 중 하나라는 건가?" 별재 모문룡과 유사홍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여송의 손 에 있던 남궁세가의 옥패가 산산이 조각났다 "감히 이것들이 어디 안전이라고 함부로 날뛰는가?" 진여송이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항주에 새로 개업 한 정체불명의 점포를 당장에 불태우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렇게 기분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네. 그놈들은 준비를 제법 오래 한 모양이야. 항주부 부윤 주치 대인 과 각별한 듯해 그러니 괜히 분란을 일으키면 우리만 손해야. 게다가 무림맹의 곽 맹주가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고 들었네." "왜 하필 지금?' 진여송의 반문에 별재 모문룡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으로 시의 적절하지 않은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지." 별재 모문룡이 말꼬리를 흐리지 않아도 그 뜻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음이었다.  "곽무헌 이 작자가 이제 와서 등을 돌리겠다는 건가?" 진여송 크게 노하자 사유홍은 고개를 저었다.  "몰랐습니까? 그는 애초에 누구의 편도 아닌 사람입니다" 그제야 진여송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럼 도대체 이놈들은 누구야?" 진 대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지붕이 무너져 내리며 무언가 커다 란 물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놈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 '당신은?" 느닷없는 사태에 경악했던 진여송의 놀람이 채 가시기 도 전에 홀연히 나타난 송현의 출현은 더 큰 충격이었다.  "산책을 나왔는데 저택에 밤 고양이가 숨어들었더군요. 모른 척 할 수 없어 이렇게 끼어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누시던 대화도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듣고 말았으니 사과드립니다. " 송현이 공손히 포권지례를 올리는 순간 밖에서 안으로 무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렇게 큰 소리가 났으니 눈치 채지 못한다면 모두 파면감이다.  허나 훌륭한 호위무사라면 지붕 위에 불청객이 있음을 미리 눈치 챘어야 옳았다. 진여송의 사나운 눈길이 그들 을 향한 이유다.  "별수 없었을 겁니다. " 늘 진 대인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깡마른 사내 가 바닥에 기절해 있는 야행복의 침입자를 살펴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걸 보십시오. 이자의 오른쪽 손목에 새겨진 글 자...... 박쥐 복자입니다. " "편복일랑!" 진여송이 신음하듯 내뱉은 말에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박쥐가 무덤에 숨듯이 한다는 뜻을 가진 신비한 집단이었다.  주로 정보 수집 및 미행과 추적에 능한 곳으로 사파와 정파의 중간 정도에 있는 묘한 곳이었다." 어린아이일 때부터 신체의 일부 뼈를 제거한 다음 고 유의 은신술과 잠행, 추적술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편이니 저들은 전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송구스럽게도 저 역시 눈치 채지 못하였으니 벌하여 주십시오." 허리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깔끔한 태도에 진여송 도 허물을 묻지 않았다.  명확한 상명하복 자세에 송현은 동정 상방이 왜 절강성 일대 숨은 지배자라고 불리는지 그 저력을 약 간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이들은 상인이라기보다 마치 군대 조직처럼 느껴진 다. 명보다 더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동정 상방의 실체를 처음 접한 송현의 느낌은 그렇게 각인되었다. "하하하, 이거 손님을 모셔 놓고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 그러나 상인은 상인이었다. 순식간에 실내를 정리하는 것은 차치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표정을 바꾸며 화제를 돌리는 기지는 오랜 상술을 통해 익힌 처세술이었을 것이다.  속으로 혀를 내두른 송현도 그런 내색을 숨기며 함께 자리를 옮겼다. 지붕이 뚫린 실내에서 더 이상 대화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철통같은 경계 속에 새로 자리한 곳에서 진여송은 송현에게 크게 사죄했다. 물론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상인다운 허례일지는 알 수가 없었다.  "송현 학사님께 정말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진가가 오늘의 실수는 반드시 잊지 않고 갚도록 하겠습니다. " 가볍게 두 손을 들어 예의를 차린 송현은 자신을 무슨 신기한 동물 쳐다보듯 바라보는 사유홍과 별재 모문룡 때문에 헛기침을 했다.  "자, 자! 인사들 하시지요. 이쪽은 저희 상단의 물품 출 납을 맡고 있는 상단주 사유홍이고 이분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장인 중의 장인 모문룡 어른이십니다. " 보통 상인들이 허풍이 세다는 것은 잘 알지만 모문룡에 대해서는 송현도 인정해야만 했다. 황궁의 내직염국에서 재직할 당시 부시랑으로 부터 모문룡에 대해서 귀가 닳도록 그 명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뵙는군요. 그대의 비단을 후궁들께서 꽤 좋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 모문룡은 송현이 아는 체를 하자 크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 저처럼 천한직공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내 황궁에서 직책이 내직 염국의 국주였소." "어찌 한림원 학사께서 내직 염국의...... 맙소사!" 모문룡 역시 송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는 무릎을 쳤다. "소마송현 학사님!" 저도 모르게 한 말 때문에 모문룡은 얼굴이 시뻘겋게 "죄, 죄송합니다. " "하하하, 괜찮습니다. 황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불 렀으니까요." 개의치 않고 웃음을 터뜨리는 송현과 달리 진여송과 사유 홍은 범상치 않은 내력을 가진 손님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자의 정체가 뭐지? 한림원 학사라는 것은 분 명한 것 같은데, 좀 전에 보여준 신위는 또 뭐란 말인가? 내 평생 무공을 익힌 학사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다. ' 진여송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백면서생의 정체 때문 에 곤혹스러웠다.  아무 생각 없이 초대한 사람에게 발목을 잡힌 꼴이었다.  '분명히 우리의 대화 내용을 다 들었을 텐데. 어떻게 말 을 꺼내야 하나? 이 일이 저자거리에 알려지면 곤란하다. '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론 진땀을 흘리고 있는 진여 송을 대신해서 송현이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귀 상단의 곤란함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뭐 곤란까지야 장사를 하다 보면 늘 있는 일 이지요." 지금부터 머리싸움이 시작됨을 눈치 챈 송현도 단단히 마음먹었다.  학사인 자신이 동정 상방에 끼어들려면 지금이 아니고 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지붕을 뚫고 들어가는 장면도 일부러 과장되게 연출한 것이다.  바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늘 있는 일이라면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고심하지 않 으시겠죠. 더구나 아까 불청객도 보통은 아닌 것 같고 그 말은 상대방도 제대로 해 볼 각오라는 이야기죠. 안 그런 가요?" 보통은 물러나기 마련인데 오히려 치고 들어오는 송현 때문에 진여송은 됫골이 당겼다.  한림원 학사라고 하니 배경으로 삼을까 싶어서 가벼운 마음에 저녁 초대를 한 것뿐인데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속셈이 있는 듯 보였다.  "송현 학사께서 비록 손님이기는 하지만 저희 상방의 일에 간섭하시는 것은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드디어 진여송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례인줄 알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무슨 뜻입니까?" "장기를 둘 때 수가 몰리면 판을 엎지 말고 수를 달리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그 묘수를 알려 드릴까합니 다. " 도대체 서생인 송현 학사가 상방 일에 대해서 무얼 안 다고 나서는 건지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송현에 대해 들은 풍월이 있는 별재 모문룡은 달리 생각했다.  "고견이 있으신 모양인데 경청할 테니 말씀하시지요." 모문룡이 기회를 주자 송현은 그를 향해 미소로 감사를 표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즉 어느 곳에 서든지 주인이 되어 생활하면 지금 있는 그곳이 모두 진 리 라는 고사입 니다. " 잠시 주위를 환기시킨 송현은 자신의 의중을 자세히 설 명했다.  "누구인지 몰라도 아주 지독한 계책을 쓰고 있단 뜻입 니 다." "지금 그 말은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듯이 약은 수를 쓴다는 뜻입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송현을 보며 진여송의 콧김이 뜨겁게 뿜어졌다. "제길, 감히 어떤 놈들이지? "사유홍이 분통을 터뜨리자 모문룡도 심각해절다.  "편복일랑의 수하라면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테니. 배 후를 캐는 것은 힘들 겁니다. " "응!" 앓는 소리를 낸 진여송의 눈이 비로소 송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상방끼리의 충돌은 곧 피를 부르는 무력 싸움이 뒤따 를 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뛰어 들었다면 뭔가 믿는 구석 이 있다는 뜻이고 분쟁이 생길 줄 알면서도 중재를 해 야 할 무림맹의 맹주가 자리를 피했다는 것은 이미 그들끼리 뭔가 교감이 이루어졌다는 걸 말해 주는 겁니다. "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송현의 이야기에 동정 상방의 수 뇌부는 점차 빠져 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과연 배짱 좋게 항주 한복판에 동 정 상방이 보란 듯 큰 점포를 연 그들의 정체와 목적입니 다 과연 단순히 상권의 확대를 위함이냐, 아니면 더 큰 속셈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 꿀꺽! 누군가가 긴장한 나머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 다.  "제가 볼 때 이번 일은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는 것과 같은 이치 입니다. " ·.그들이 우리의 의중을 떠본다는 뜻인가요?" '바로 보셨습니다. 진 대인" 자신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 흡족한지 송현은 고개를 끄 덕 였다.  별재 양반, 그 점포에서 파는 물건들보다 질 좋은 상 품을 동정 상방에서는 밀마나 준비할 수 있나요?" 송현의 질문에 모문룡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고심했 다 ·랑라와 능라 비단이 십 동, 붓이 네 동 정도입니다. " "어째서 그것 밖에 안 되지?" 진여송이 역성을 내자 모문룡은 답답해했다.  ·.올해는 소긍이 부족할 거라며 있는 대로 사재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맙소사!"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린는지 깨달은 진여송은 등골 이 서늘해졌다. 일단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진 대인의 책임도 크다고 봅니다. " 송현의 지적에 진여송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분명 그 의 지적대로 한동안 상방의 일보다는 사대부들과 교류에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자연히 상방의 일은사유홍과 모문륭이 떠안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었다.  "적은 항상 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린다고 했습니다. 그 들이 보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과감히 행동을 한 것이지요." 모두들 깨닫는 바가 있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체불명의 점포를 조정하는 배후 세력은 동정 상방 을 무너뜨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 "그건 말도 안 돼는 소리요. 우리는 그렇게 쉽게 무너 질 상방이 아니외다. 더구나 여기는 우리의 고향이요." "그런가요? 그럼 어째서 무림맹의 맹주는 폐관수련에 들어갔습니까?동정 상방의 뒤를 봐주는 화산파와 아미 파에 연통을 넣어 보시면 더 확실히 아시게 될 겁니다. " "설마......?" 진여송은 믿을 수 없다며 도리질을 했지만 반박하기에 는 송현의 추리가 너무나 빈틈이 없었다.  "적이 상대방을 뒤흔드는 방법을 취한다면 이쪽에서는 풍림화산의 수를 써야 합니다. " "풍림화산이라면 병법서에 나오는 말이 아닙니까?" "진 대인이 바로 보셨습니다. 혹, 상재에 무슨 병법이 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병법에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사 람입니다. 적의 장수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를 예상하여 대처하는 것입니다. 이는 병서에 나오는 교훈들이 실생활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송현치 논리 정연한 설명에 모두들 크게 감탄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전쟁이며 생존이 걸린 일입니다. 진 대인께서는 이 전쟁에서 지고 싶은 가요?" "천만에! 동정 상방은 질기게 살아남았소, 명황조가 사 라져도 동정 상방은 살아남을 것이오." 분기탱천한 진여송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커졌다.  "좋습니다. 그런 기개라면 아직은 승산이 있다고 보면 되겠네요." 송현이 환하게 미소를 짓자 모문룡이 의구심을 참지 못 하고 물었다.  "풍림화산의 수를 쓰신다고 하였는데 그렇기에는 우리 가 너무 알려져 있어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지적입니다. 당연히 이쪽에서도 숨겨둔 비장의 수를 써야지요." "숨겨둔 수라니?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문룡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며 사유홍과 진여송을 바라보자 그들 역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송현을 바라 보았다. 송현은 그런 그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튿날, 진여송의 저택에서 나온 황염은 길을 걷다가 멈춰 서더니 무엇이 그리 걱정이 되는지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땅을 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보다 못한 송현이 잔소리를 늘어놨 다 "거참, 영감. 그것 좀 그만 하면 안 되겠어?" 황염은 송현을 노려보다가 목이라도 조를 태세였다.  "이...... 이...... 그러나 이내 팔에 힘을 거두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미쳤지. 소마 송현과 손을 잡다니, 황궁에서 저 지른 망나니짓을 너무 쉽게 잊었어." 혀를 차며 자신을 책망하는 황염을 보며 송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왕백아, 영감이 오늘 왜 저러는지 아느냐?"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시죠?" 왕백도 송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정 상방의 도움 없이 점포를 여신다고 했다면서요?" 왕백이 무섭게 따지고 들자 송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물론 황염도 들으라고 일부러 큰 목소리를 냈다.  "동정 상방이 나서면 그건 상대방이 기다리던 거야, 준 비해 둔 순서대로 동정 상방을 쓰러뜨리겠지. 하지만 말 이야 복병이 나타나면 저쪽에서도 당황할 테고 그럼 허점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 "그럼 그걸 조건으로 거래를 하셨단 말씀이세요?" '팎아, 대신 우리 염방이 직접 장사를 해도 된다는 약 속을 받아 냈다. " 송현이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지만 왕백과황염은 어처 구니 없다는 표정이 었다.  "무슨 돈으로 하시겠다는 겁니까? 어디 하늘에서 은자 라도 떨어지는 꿈을 꾸시기라도 했습니까?" "그 만한 상점을 열려면 자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생각이라도 해 봤나?" 왕백과 황염의 잔소리가 쏟아졌지만 송현은 전혀 걱정 하고 있지 않았다.  "뭐, 아는 곳이 있으니 신세 좀 져 봐야지." "설마하니 제가 생각하는 그곳은 아니겠죠?" "아마 그럴걸!" "하아, 시작부터 빛더미라니 앞날이 환하다. " 왕백의 푸념에 송현은 희망을 가지라며 다독였다.  "자, 힘을 내자고 다 잘 될 거야!"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송현의 생각일 뿐이었다. 현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 의 실랑이는 그다지 좋은 구경거리가 아니 었다 "영업 방해라도 할 참이냐?" 걸걸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주판으로 등을 긁어 대 는 노인이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소. 손님으로 온 거니 들어갑시다 " "뭐 ?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송현은 제집 들어가 듯이 휘적휘적 안으로 들어갔다.  "저놈이 또 돈을 빌리러 왔다는 거냐?" 왕백은 노인의 물음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말도 말라며 손을 내저은 왕백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처럼 맥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놈은 내 돈이 자기 돈인 줄 아나?" 황당한 표정이 된 노인은 소매를 걷어 붙이고 씩씩거리 며 안으로 들어갔다.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탁자를 두드리는 송현을 향해 노 인은 주판을 던졌다.  그러나 보기 좋게 빗나간 주판은 벽을 향해 날았지만 어느새 튀어나온 무송이 낚아채어 부서지는 신세는 면했다."볼 때마다 기분 나빠지는 친구라니까." 송현은 검은 무복의 무송을 보며 마음에 들지 않아 했 다.  "흥! 난 네 녀석이 기분 나빠! 그래도 저놈은 내 목숨과 재산을 지켜 주기라도 하지만 넌 하는 일이라고는 내 돈 을 축내는 것밖에 더하느냐?" 버럭 성질을 내는 노인에게 송현은 서찰 한 통을 내밀 었다. 심드렁하게 구는 그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자 마지 못해 읽어 보았다. 다 읽은 그의 얼굴은 벌레 씹은 표정이 되어 버렸다.  "백면서생이 장사를 한다기에 보증도 없이 은자 백 냥 을 빌려 주었더니 넉 달 만에 나타나 한다는 소리가 그 열 배를 내놓으라는 거냐?" "거기 적힌 대로 은자 천 냥이면 대충 어떻게 될 것 같 소" "하, 은자 천 냥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나 본데. 어림 도 없는 소리 말아. 나는 원금을 다 갚지 못한 인간한 테 추가로 빌려 주는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원칙은 절대로 지킨다. " 노인의 전의를 불태우며 불가를 외치자 송현은 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원칙은 깨지라고 있는 거고 내가 그 첫 번째 예가 되면 되겠군. 사기꾼 양반!" "사기꾼이라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누구긴 당포 탁성운의 주인이며 절장성 내의 은자는 모두 당신 호주머니를 거친다고 알려진 돈줄이지,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전귀라며 독하다 하지만 알 고 보면 어려운 이들에게 쌀섬을 베푸는 아량도 있는 영 감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 노인에게서 무서운 눈빛이 흘러나왔다 "전설적인 상인 소광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는데 알려 진 바는 없고 단지 공자의 제자 중 상재가 뛰어났던 자공의 이름을 빌려 사람들 사이에서 자공이라고 불리고 있다." 미소가 사라진 송현의 얼굴을 바라보는 노인, 자공은 더 이상 인자한 노인이 아니 었다.  "넌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나에 대해서는 이미 알아볼 만큼 알아봤을 텐데 늘 주변을 맴도는 쥐새끼들 때문에 귀찮아 죽을 지경이야." "그렇다고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건 나를 모욕하는 짓 이야." "흥! 엉터리 가마꾼을 붙여서 다 낡은 집을 사 놓게 하 구선 그런 말을 하다니 생각보다 뻔뻔하기도 하군." 가마꾼 이야기가 나오자 자공은 흠칫했다. "어찌 알았냐?" "뭐 나도 조금은 인맥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 말이오. 그리 어렵진 않았소." 영호인을 통해서 금의위의 손을 빌렸다고는 말하고 싶 지 않았다.  "흥, 그래도 은자 천 냥은 너무 많아. 그리고 이미 나는 많은 돈을 네게 주었다. " '할도 안되는 소리로 나를 놀릴 심산인가?" 송현은 자공이 돈을 빌려 주기 싫어서 일부러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공은 의미 모를 미소만 지 어 보였다.  "이미 네놈에게 넘치는 재산을 주었으니 삶아 먹든 구 워 먹든 맘대로 해라. 단 찾는다면 말이지." "어려운 선문답 따위를 듣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야. 이 필요해." 송현이 다급하게 등을 돌린 자공에게 소리쳤지만 그는 흥미를 잃은 얼굴로 이 층을 향했다.  "무송아, 손님 돌아가신단다. " 자공은 더 이상 볼일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이........“ 화가 난 송현이 이를 악물었지만 얼음보다 차가운 무송 이 앞을 가로막자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강제로 훔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어깨에 힘을 빼고 당포 문을 나서는 도리밖에 없었다.  길 건너에서 애타게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황염은 한숨을 내쉬는 왕백을 보며 결과를 짐작했는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젠 정말로 망했군!" 이번에는 송현도 황염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하지 못했 다.  패잔병처럼 기가 죽은 세 사람은 터벅터벅 기운 없는 발걸음을 억지로 걸었다. 저 멀리 태평문이 보일 때까지 세 사람은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세 사람의 동행은 저녁놀이 지는 어촌에 가까이 와서야 멈춰섰다.  "아름답네요." 왕백이 해가 저물어 넘어가는 태평문의 아름다운 광경 에 감탄했다.  "그래,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인데, 어디서 봤 더라?" 맞장구를 쳐 주던 송현은 깜짝 놀라며 품속을 뒤졌다.  그리고 늘 지니고 다녔던 손때 묻은 서화를 꺼내어 펼쳤 다.  "이런 빌어먹을! 눈앞에 두고도 몰랐다니 장님이나 다름없었어!" 병풍처럼 둘러쳐진 거대한 산 아래 인생을 달관한 듯한 강태공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서화가 현실세계로 튀 어나와 있었다.  "어째서 저 산들이 그동안 보이지 않았을까?" 낡은 서화한 장을 들고 감격에 겨워 기뻐하는 송현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황염이 한마디 했다.  "쯧쯧쯧, 망이산 일대는 안개가 짙어서 저런 풍경은 일 년에 서너 번밖에 보지 못하는 걸 이제 알았나?" "하하하, 그랬구나, 그랬어!" 드디어 그림의 비밀을 푼 송현은 무일푼인 처지를 잊고 뛸 듯이 기뻐했다.  강태공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연못이 태평문에도 있었다. 송현은 그림의 비밀이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 가 없었다.  "나 먼저 갈 테니 냉큼 따라오슈!" "네?!" 깜짝 놀란 황염과 왕백이 뭐라고 고함을 쳤지만 이미 송현의 마음은 태평문을 향하고 있기에 소용이 없었다.  머릿속에 기억된 서화 속 시구을 떠올리며 송현은 풍보 로 힘차게 내달렸다. 나는 술 한 통을 가지고, 홀로 강조석에 올랐네. 천지가 열린 이래로, 몇 천 개의 바위가 다시 생겨났네. 술잔을 들어 하늘을 향해 웃으니, 하늘은 햇살을 서쪽으로 비춰 주는구나. 이 조어대에 올라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엄릉은 낚시를 오랫동안 드리웠네. 산중인에게 말을 건네면, 당신도 함께 어울릴 수 있을 텐데. 송현의 코끝이 움찔거렸다 코를 찡그리는 버릇은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들이 닥친 송현이 인사도 받지 않고 안채로 뛰어들자 아이들을 가르치던 영호인은 걱정이 되어 달려왔다.  ”그림 속의 강태공은 두보가 아니었다. 그건 물고기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거 였어, 그게 뭘까?" 한번 타오른 송현의 탐구욕은 불길처럼 솟아올랐다. 염 방의 나염을 위해 쓰는 정원의 연못에 도착한 송현은 서 화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이보게 송현, 자네 괜찮나?" 영호인이 불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송현은 미친 듯이 연못가를 서성일 뿐이었다. 보다 못한 영호인이 송 현을 붙들었다.  "이 친구야, 정신 차려 !" 억센 팔에 딸려온 송현은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 호인, 자네로군."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난 자네가 미치기라도 한 줄 알 았어. 그래 갔던 일이 잘 안 되었나?" 영호인이 나름대로 생각한 바를 이야기하자 송현도 점 점 머리가 차가워졌다.  "아, 그래. 그렇지!" 다시금 현실 세계로 돌아오자 산적한 문제들이 송현을 짓눌렀다.  잠시 서화의 비밀을 캐냈다는 생각에 어린아이처럼 흥 분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휴, 그게 말이지 잘 안 되었어." 낙담하는송현을 영호인이 어깨를 다독여 주며 위로했다.  "너무 심려하지 말게 양명과 막여위랑 상단의 호위무 사 자리를 알아보고 있으니까 급료를 좀 당겨 쓸 수 있을 거 야." "자렌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군. 그냥 황궁에 남아 있었 다면 승천하여 호의호식하며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이 무 슨 고생인가?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어떤가? 병부시 랑께서 자네들을 잊지 않고 있을 거네." 간곡한 송현의 권유에 영호인은 그저 투박한 미소로 답 했다.  "몸이야 고될지 모르지만 마음만은 편하다네, 양명과 막여위도 식구들을 부른 모양이야. 그들도 어떻게 사는 것이 나은지 깨달은 거지. 관복을 입고 거드름을 피워 봐 야 하루살이 목숨에 불과하다는 긴 우리 모두 아는 사실 이지 않나." 영호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송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 친구 시무룩하기는. 기운 내게 자네는 웃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구." "호인........ 아이들이 언제 왔는지 담벼락에 주르륵 매달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고녀석들! 요즘은 저놈들 가르치는 락에 산 다니까." 송현은 영호인이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음을 느꼈다.  "무엇을 하든 우리는 자네를 믿고 따를 테니 너무 조바 심 내지 말게나.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늘 여유 있는 마 음으로 세상을 살피라고 말이야." 어깨를 툭하니 쳐준 영호인이 아이들과 함께 뒤뜰로 사 라지자 송현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 해지고 서화 때문에 들떴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우스웠다.  '학, 학! 도대체 그놈의 괴상한 무공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잡네. 치사하게 혼자만 가시면 어쩌라는 겁니까?" 겨우 쫓아온 왕백이 하얗게 질려서 잔소리를 늘어놓자 송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게 말이다. 이게 뭐라고 소중한 너를 남 겨두고 나 몰라라 했으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나란 녀석 은 말이야." 땀을 뻘뻘 흘리는 왕백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놓은 송현은 손에 든 서화를 미련 없이 연못에 집어 던졌다 "헉! 애지중지하시던 거잖아요." "아니다 내가 잠시 정말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그것 이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이들이라는 걸 말이다. " 술잔을 들어 하늘을 향해 웃으니, 하늘은 햇살을 서쪽으로 비춰 주는구나. 산중인에게 말을 건네면 당신도 함께 어울릴 수 있을 텐데 '당신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구려. 나는 결코 당신처럼 쓸쓸하게 산중인이나 기다리지 않으려오," 송현은 서화 속의 시구에 숨겨진 의미를 깨달았다. 그 것은 인생의 황혼에 서 보니 주위에 벗도 가족도 없는 것 을 깨닫고 슬픔을 노래한 것이었다.  외로움을 낚시로 달래 보려 하지만 덧없는 일이고, 아 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물고기도 없는 연못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인생의 말년을 쓸쓸히 보낸 서화 주인의 심경이 었던 것이다.  우연인지 그림 속의 시간과 송현이 서 있는 시간이 일 치했다. 똑같은 풍경에 송현은 저도 모르게 시 구절처럼 서쪽 하늘을 향해 눈길을 들었고 오랜만에 안개가 걷혀 드러난 망이산을 보며 혹시 모를 산중인을 찾아보았다.  번쩍! 뭔가가 망이산 중턱에서 반짝거렸다.  처음에는 잘못 보았을 거려니 했지만 반짝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내 이미 거금을 너에게 주었으니 찾아내서 쓰든지 말 든지 네놈 하기 나름이다. ' 왜 갑자기 자공 영감의 말이 기억났는지 모른다. 그러 나 망이산의 중턱에서 반짝이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 어졌다.  숨을 헐떡이고 있는 왕백을 바라보자 겨우 땀을 훔쳐내 고 있던 왕백이 흠칫 몸을 떨며 말을 더듬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왕백이 불안해하자 송현은 짓궂은 표정이 되었다 "하하하, 왕백아 오랜만에 등산은 어떠냐?" 쿨럭! 하얗게 얼굴이 질린 왕백을 보며 송현은 웃음을 터뜨렸 다. 산속에 숨어 있는 것이 무엇이든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 더 이상 나빠질 것이 무에 있나!" 송현은 그렇게 희망을 가졌다. 

제칠장 풍림화산

- 바람처럼 빠르게,숲처럼 고요하게, 불길처럼 맹렬하게, 산 처 럼 묵직하게 

-손자병법 군쟁 편 중에서-

  어둠이 밀려오는 진강대로는 불야성을 이루며 홍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취객을 유혹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교태 섞인 기녀들의 웃음소리에 걸음을 멈추는 사내들이 흥정을 하느라 소란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그런 홍등가의 구중심처는 고요하기만 했다. 적막함이 감도는 실내에 자리한 중년의 장한은 표정을 굳힌 채 말없이 노인만 바라보았다. "진가야,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게냐?" "자공 어르신,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상방의 숱한 인재들을 내치시고 학사라니요. 다른 대행수들이 알면 크게 반발할 것입니다. "진여송의 푸념에 주판으로 등을 긁던 자공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깟 놈들 백이든 천이든 떠들어 보라고 해!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 " "어르신!" 동정 상방의 진여송이 답답하다며 자공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후, 시키신 대로 송현 학사에서 영업권을 내주기는 했지만 그가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다 " 자공은 낡은 서화를 진여송에게 건네주었다. "무엇인지 알겠느냐?" 서화를 펼친 진 대인의 손길이 풍에 걸린 사람처럼 흔 들렸다. 그는 몇 띤이고 몇 번이고 서화를 살피더니 자공 을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것은 소광 어른의 그 비역에 관한 서차가 아닙니까? "그래, 우리 동정 상방의 천년 염원이 담겨 있는 그 비역을 그 학사 녀석이 찾아냈다. " "네?" 진 대인은 까무러칠 정도로 기겁했다. 이 서화는 모두 개다.  전설의 상인 소광이 죽기 직전 모든 보물을 숨겨 두고 그것을 수수께끼 속에 숨겨 세상에 남긴 것이다. 하나는 상방에 하나는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놓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에라, 이놈들아. 찾는 농이 임자니라!' 기행으로 유명했던 그다운 발상이었지만 정작 후 손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거의 백 년 동안 동정 상방의 후손들은 그의 비역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알아낸 것이라고는 태평문이 서화 속 에 나오는 연못의 장소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은 제동이 걸렸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렇게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 송현 학사, 그자가 보물을 차지했다는 뜻입니까?" 다급해진 진여송의 호흡이 가빠지자 자공은 진정하라 며 그를 다독였다.  "아마 자네는 상상도 못할 것이네. 그 녀석이 어떻게 했는지 말이야." 숨 넘어 갈듯한 진여송을 위해서 자공은 뜸들이지 않고 이야기 해 주었다.  '웃기는 녀석이 비역에서 가져간 것은 은자 천 냥뿐 일세 ." ......?"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진여송을 위해서 자공은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그 말은 저를 놀려 주시려고 하신 겁니까? 만일 그렇다면 저는 전혀 웃기지도 않았고 소름 이 돋을 정도로 무섭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정색을 하며 말하는 진여송을 보며 자공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도 믿기 힘들었으니 자네는 더할 나위가 없겠지. 하지만 사실이네, 그 녀석이 나를 찾아와 한다는 소리가 뭐였는지 아나?" 자공은 웃음을 참으며 송현의 말을 상기했다.  당신이 찾고 있는 듯해서 이렇게 가져왔소. 내 물건이 아닌 듯싶어서 말이오. 하지만 나도 산에 오르느라 고생 을 했으니 발품 팔은 수고비는 받아야겠기에 은자 천 냥 을 가져가오. 자공은 그 일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멈출 줄을 몰랐다.  "설마하니 송현학사, 그자가 찾아낼 줄 아셨던 겁니까?" 자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반이었네, 사실 녀석이 남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운까지 트인 놈인 줄은 예상하지 못했네, 우연히 들 린 점포에서 소광 어르신의 서화를 얻고 항주까지 흘러 들어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이 우리를 엮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 진여송에게 서화를 다시 건네받은 자공은 촛불에 서화를 불태웠다. 오래된 서화는 금세 불길에 휩싸이며 재로 변했다.  "비역에는 나조차도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많은 재물 로 가득 차 있었네. 그런데 녀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겨우 은자 천 냥만 꺼내 왔을 뿐만 아니라 나를 찾아와 비역의 위치까지 알려주었네. 놈은 내가 일부러 그 집을 떠 넘겼다는 사실을 눈치 챈 거야 " "그러면서도 모든 걸 포기했다는 겁니까?" 진여송이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고 하자 자공은 이해한 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믿기 힘들겠지. 녀석은 딱 한마디만 했네," "뭡니까?" 진 대인의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거렸다.  "내 것이 아니니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지." "허 !" 진여송은 무릎을 치며 혀를 내둘렀다. "이런 놈은 처음이야. 이 녀석이야 말로 날로 쇠퇴해 가는 동정 상방의 미래라고 할 수 있다. " 자공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진여송은 여전히 부 정적이었다 "송현 학사가 군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이 험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는 놈들이 누군 지 알아냈습니다. " "누구더냐?" 자공이 크게 관심을 드러내자 진 대인은 잠시 주저하다가 아는 바를 털어놓았다.  "얼마 전 휘주 상방의 오방원 전임 상방주가 무림맹을 조용히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럼 폐관수련을 핑계로 면담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 그날 이후라는 말인가?" '바로 보셨습니다. " "다 늙은 곰은 재주를 부리려 하는구나." 주판알을 튕겨보던 자공은 혀를 찼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시켜 알아보니 이번 일에 휘주 상방 전체가 나선 듯합니다. 아들인 오방인 상방주 는 물론 그의 부인까지 화산파와 아미파에 줄을 대고 있습니다. " "우리의 손발을 묶겠다는 뜻이로군 " 답답해하는 자공에게 진여송은 더 나쁜 소식을 보탰다.  "틀림없이 저들은 오래전부터 절강성을 수중에 넣을 계획을 세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희 동정 상방은 지금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안방을 내주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 "미련한 것들!" 마뜩치 않은 얼굴로 탁자를 내려친 자공을 향해 진여송 은 간곡한 어조로 부탁했다.  "절강성은 머지않아 살벌한 전장으로 변할 겁니 다. 그런데 서생 따위가 어떻게 저들과 싸운단 말입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공 어르신께서 다시 나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쯧쯧쯧, 여직 당하고도 아직도 모르겠느냐? 지금의 동 정 상방이라면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하얗게 질려 버린 진여송에게 자공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고 했다. 그동안 우리 동 정 상방은 너무나 나태해졌어. 그 결과 투쟁심도 없고 경쟁심도 없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버렸단 말이다. 늙은 호랑이가 쥐새끼에게 물려 뜯기는 건 당연한 일이야." "하오나........ ·.내 말 끝까지 들어! 네가 보기에 송현 그 아이가 보잘 것 없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녀석은 하나의 변수다. 우리 에게 변수라는 것은 저들에게도 변수라는 뜻이다. 변수란 때때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 자공의 말속에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음을 안 진여송은 더 이상의 설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그 아이에게서 뭔가 특별한 것을 보았다. 그래서 녀석에게 모든 걸 걸어 볼 작정이다. " "하지만 어르신, 똑똑하니 상재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무림이 있습니다. 그걸 그가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너도 그 아이의 신위를 보았다며? 무송이가 말하기를 자신보다 더 고수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 "하지만 관우운장도 백만 대군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듯이 혼자서 오랜 전통을 가진 무림세가와 맞서 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 포기하지 않고 설득하려는 진여송에게 자공은 매몰차 게 대했다.  "시끄럽다. 두고 보거라 난 그 아이가 십대상방을 발아래두고 구대문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천하를 호령 하 리라 믿는다. " "천하를 호령 ........ 진여송은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자공의 꿈은 너무나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송현 그 아이에게 휘주 상방이 됫배라는 건 알리지 않았겠지?" "철저히 도움을 주지 말라고 하셔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 "내 존재 역시 철저히 감춰야 한다. " "어르신의 존재는 상방에서도 몇몇만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은 심려하지 마십시오." 진여송의 조치가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이 된 자 공은 주판을 구부정한 등 언저리에 꽂았다.  "그래 녀석은 어찌 한다더냐?" 자리를 뜨려다 말고 생각났는지 물어보는 자공에게 진 여송은 송현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풍림화산의 수를 쓴다고 했습니다. " "풍림화산이라?" 몇 번이나 입속에서 풍림화산을 중얼거린 자공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렇게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되다니 말년이 즐거워지겠구나." 상방 전체의 운명이 걸린 일을 재미있는 구경이라고 말하는 자공을 보며 진여송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뿐 이었다. 항주의 오산에서 유명한 상점들이 운집해 있는 청하방거리에 오층의 거대한 점포가 들어섰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풍문으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오색찬란한 폭죽이 요란하게 터지고 북과 징 소리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자춤은 축하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몰고 갔다. 구경꾼들은 박수와 함성으로 화답했다.  화려한 비단 장포를 걸치고 영웅건을 이마에 두른 장한 이 발치 아래의 광경에 흡족해하자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적이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이만 하면 화려한 신고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 무게가 느껴지는 중후한 목소리와 외모가 잘 어울렸다.  "아마도 동정 상방의 진 대인이 보면 까무러칠 젓입니다. " '하하하, 암 그래야재. 동정 상방을 쓰러뜨려야 장강 이남이 우리 손에 들어온다 이건 전쟁이나 다름없으니 각 객상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장한의 지시네 모두가 포권를 했다. 그러나 그중 허리 가 구부정한 노인이 걱정을 드러냈다.  "하오나 동정 상방은 화산파와 연이 깊습니다. 결국 화 산파의 성질 더러운 도사들이 행패를 부릴 것이 뻔합니다. " 장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노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그대들은 세를 확대하는 일에만 전념해라. 그 외의 일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 "존명 !" 점포의 문이 활짝 열리며 영업을 시작하자 밖에서 이제 나 저제나 기다리던 손님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후후후, 무려 십 년을 준비한 일이다. 이제 절강성에서 동정 상방은 그 명이 다했음이야." 장한은 기분이 좋은지 껄껄껄 대는 소리를 크게 냈다.  그러나 이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잡음에 인상을 찌 렸다.  "아니, 이런 붓으로 어떻게 글을 쓰라는 거지? 젊은 사내가 멀정한 붓을 가지고 트집을 잡자 점포의 사환이 당황해서 얼른 달려왔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 당라는 비단이라고 할 수도 없겠는데요." 한 명이 아니라 둘이다.  "허어, 그것이 당라였더냐? 나는 단필목인줄 알았구나. " 절로 이마에 주름을 만드는 불협화음에 장한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가 작정하고 온 냄새가 랐다.  처음 점포를 열면 늘 있는 불청객들이다.  이럴 때는 구리 엽전 몇 개 쥐어 주면 해결되기에 장한 은 점포를 관리하는 행수가 뛰어가는 걸 보며 관심을 끊 었다.  그러나 그가 좀 더 자세히 보았다면 여타 불청객들과 달리 그들의 복장이 남다름을 알아 차렸을 테고 그랬다면 다시 걸음을 하는 수고를 덜었을 것이다 "어라? 이거 손님의 입막음을 하려고 돈을 주다니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법도요?" 수염도 나지 않은 어린 친구가 호들갑을 떨자 구리 엽 전 열 냥이든 주머니를 건넨 행수는 분통이 터졌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옵고, 도대체 저희 물건에 하자가 있다고 이렇게 시비를 거시는 겁니까?" "시비를 걸다니? 어허, 이 사람 좀 보게. 정말 큰 일 날 사람이네." 한없이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인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 를 지르자 물건을 고르던 손님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모 여들었다.  "아이고, 여러분 내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어떻게 생겨 먹은 점포가 손님에게 나가라고 협박을 다 합니까?" 행수와 사환은 일이 커지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 다 개업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기면 영업에 막대한 지장이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든 저 입을막아야만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길 건너편 점포를 가 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길 건너떼 뭐가 있기에 그러느냐?" "허어, 소문못 들으셨구나. 길 건너 점포의 비단은황 궁의 내직염국에서 일하던 태감이 직접 비단을 만들고문 방사우는 한림원 학사를 지내신 양반이 고르고 고른 물건 들만 있답니다. " "아니, 그런 일이 있으면 진즉에 알려 줄 것이지 왜 이 제야 말하는 거나. 괜히 헛걸음만 했구나. 그리로 가자꾸 나!" 한바탕 점포에서 소동을 일으킨 두 사내는 과장된 몸짓 을 하며 유유히 걸어 나갔다. 점포의 행수와사환은 안도 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곧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점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손님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하나 둘 눈치를 보던 이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그것 이 ........ 궁색한 변명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나이 든 행수는 그저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 렸다.  결국 화가 난 장한의 호통에 어린 사환이 좀 전의 상황 을 설명하자 두 눈에 쌍심지를 올렸다.  "어디냐 그곳이?" 어린 사환의 안내를 받아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장한의 몸에서 한기가 흘러나왔다.  큰길을 가로 질러 연등이 늘어진 건물에는 좀 전까지 자신의 점포에 있던 손님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아우성이 었다.  "윽...... 윽........ 악다문 어금니 사이에서 억눌린 분노가 흘러나왔다.  "도대체 이런 큰 점포가 언제 생긴 거지?" 허겁지겁 쫓아온 행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한은 그 꼴을 보니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자신의 점포와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큰규모였다. 안으로들 어서니 능라와 당라에서 서민들이 사용하는 단필목까지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더구나 물건들의 상태가 한 눈에 보아도 최상품이었다.  "주인이 누군가 알아 봐라!" 입구에 동정 상방의 표식이 없음을 확인한 장한은 몹시 기분 나쁜 목소리를 냈다.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 행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장한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저것들을 내 당장에!" 장한의 눈이 튀어나을 만도 했다. 좀 전에 점포에서 소 동을 일으켰던 두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장한의 몸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여기서 말썽을 피우시면 곤란합니다. " '나도 그 정도는 아니 걱정 마라. 하지만 인사를 받았 는데 모른 척 하면 예가 아니지 "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삐거덕 거 리는 소리가 점포 안에 크게 울렸다.  '흠, 무림 인이 었군.' 일부러 내력을 하체에 집중해서 걸음을옮기는 장한의 행동에 송현은 웃음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감축 드리오. 본인은 길 건너에 문을 연 화련상하의 이자웅이라 하오." 훅! 하니 여름 날 뜨거운 공기가 밀려오듯 짓쳐드는 열 기를 송현은 가볍게 흘려버렸다 "태평상하의 송현이라고 합니다. " 부드러운 미소에 이자웅은 당황했다.  낭패하게 만들 속셈으로 내력을 흘려보냈는데 백면서 생으로 보이는 유약한 자가 가볍게 받아 내니 놀라지 않 을 수 없었다.  '이것 봐라! 어디 우연인지 아닌지 보자꾸나 ' 이자웅은 입술을 깨물고 단전에서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렇소이까? 이것도 인연이니 우리 앞으로 잘해 봅시 다. 하하하!" 쨍!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 것과 동시에 뒤에 걸려 있던 청 동경촐이 반으로 갈라졌다.  곁에 있던 왕백을 재빨리 밀쳐 낸 송현은 상대가 생각 보다 훨씬 웅후한 내공의 소유자임을 느끼고 바짝 긴장했 다.  '이 사내, 결코 공부가 얕지 않다. ' 그 순간 이자웅이 앞으로 걸음을 한 발 내딛자 예상하 지 못했던 미증유의 힘이 밀려와 신형을 휘청거리게 만들 었다.  '창피를 줄 심산인가?' 이자웅의 의도를 알아차린 송현은 무극무해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다음 순간 보이지 않는 벽과 벽이 부딪치며 힘의 충돌이 일어났다.  곧이어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무공에 놀랐다.  이자웅은 이자웅대로 자신의 수법을 무력화시킨 송현 의 무공에 놀랐고 송현 역시 자신의 기운에 잠시 휘청거 렸다가 바로 신형을 안정시킨 이자웅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역시나 이자웅이었다. 서 생 따위라고 경원시했는데 그게 아니다.  자세를 바로 하고 송현을 자세히 살폈다.  '이자 어디를 봐도 무공을 익힌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 면 자신의 기도를 숨길 수 있을 정도의 고수란 말인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어 구겨진 자신의 체면을 바로 세우려 했던 이자웅은 더 나아갈지 여기서 멈출 것인지 가부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때 계단 울리는 소리가 나며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 올라왔다.  "무슨 일이지?' 영호인이 소리치자 양명과 막여위가 험악한 표정을 지 어 보였다. 손에 들린 검을 흘깃 쳐다본 이자웅의 어깨에 힘 이 들어갔다.  "아, 어서들오라고. 이분은 길 건너 화련상하의 이 대 인이라고 하네. 인사차 친히 이 렇게 오셨어." 송현의 소개에 세 사람은 검을 든 손으로 포권지례를 했다.  "영호인입니다 이쪽은 양명과 막여위라고 합니다. " "이자웅이라고 하...... 영, 영호인이라면 무당칠검 영호인?" 이자웅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영호인은 무당의 속가 제자 시절 여러 차례 무림맹의 임무에 투입되어 세간에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하찮은 허명입니다. " 겸양을 떠는 영호인을 보며 이자웅은 큰 혼란에 빠졌 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백면서생으 로 보이는 자는 내력을 측정할 수 없는 고수에다 무당칠 검 영호인에 저 두 사람도 수련이 깊어 보인다. 동정 상방 사람들은 아닌 것이 분명한데. 그럼 누굴까?' 사태가 불리함을 깨달은 이자웅은 표정을 바꾸고 수선 을 피웠다.  "하하하, 겸손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영 대협의 위명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모의 영광 입니다. " "과찬이십니다. " 이자웅이 한결 부드러운 태도로 일관하자 송현은 마땅 치 않은 표정이 었다.  '상대를 알지 못할 때는 적당히 물러설 줄 아는 머리를 가졌단 말이지, 앞뒤 안 가리는 다혈질이길 바랐는데 물 건너갔구나.' 쉽지 않은 상대임을 알게 된 것도 소득이라며 스스로 위로한 송현은 이대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감했 다 "같은 업을 하는 분이 축하해 주러 일부러 발걸음을 하 셨으니 그냥 보내 드릴 수는 없고 제가 작은 선물을 드리 겠습니다 왕백아!" 송현이 붓을 들자 요상한 웃음소리에 혼쭐이 난 왕백이 이자웅을 흘겨보며 먹을 갈았다.  야! 가볍게 탁자를 치자 화선지가 바람을 타고 펼쳐졌다.  신기한 광경에 점포안의 구경꾼들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 왔다.  게다가 한림원 학사라고 소문을들었으니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집중되었다. 붓에 먹을 적신 송현은 잠시 눈을 감고 분위기를 잡았다.  문구가 떠올랐는지 눈을 뜬 송현은 종이위로 붓을 현란 하게 움직였다 일필휘지! 저마다 글 좀 안다고 여기는 자들은 탄성을 자아내며 명필이라며 침을 튀었다. 이자웅 역시 송현의 붓놀림을 보며 그가 한림원 학사가 아닐 거라는 의심을 지워야만 했다. '부귀한 집안은 마땅히 너그럽고 후해야 하는데 도리 어 시기하고 각박하면 이것은 그 행실을 빈천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능히 그 부귀를 누릴 수 있겠는가' 라고 꼬집 어 말하는 내용이었다.  이자웅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을 조 롱하고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는 체면을 중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있고 오늘은 화련상하가 문을 연 첫날이니 체신을 지켜야 했다.  "하하하, 멋진 글귀로군요. 그럼 저도 그에 화답을 해야 마땅하겠지요." 이자웅이 붓을 들자 그의 행수가 탁자에 다. 송현처럼 달필은 아니었지만 힘 있게 써 양새가 한두 해 붓을 잡은 솜씨는 아니었다. '총명한 사람은 마땅히 그 재주를 거두어 감추어야 하 는데 도리어 드러내어 자랑한다면 이것은 총명하면서도 어리석고 어두운 병폐에 빠져 있음이니 어찌 실패하지 않 겠는가?' 웃으며 자신의 쓴 글을 건네는 이자웅을 보며 송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쓴 글을 교환하는 두 사람을 보며 영호인은 고개를 내저 었다.  "장군, 멍군이군 " 왕백은 받아든 글을 보며 얼굴이 붉게 물들며 콧김이 드세졌다.  "도대체 뭐가 어찌 되는 건가?" 막여위가 영문을 몰라물으니 양명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해 주었다.  "송 학사가 돈 좀 있다고 까불지 말라고 했더니, 저치 가 똑똑하다고 잘난 체 하지 말라는군 " "뭐?" 막여위의 콧수염이 떠는 걸 보며 양명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나저나 저자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저 정도 인물이라면 분명히 명성이 있을 텐데. 이자웅이라는 이름은 도통 낯설단 말이야." 영호인이 모를 일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 서로 글을 교환한 송현과 이자웅이 인사를 끝냈다.  "손님 가신다. 배웅해 드려라!" 내쫓듯 몰아치는 송현의 대접에 이자웅은 끝까지 미소 로 답했다.  화련상하의 사람들이 물러나자 점포 안은 다시 소란스 러워졌다.  "보통내기 가 아닌데?" 영호인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이야기 하자 송현은 고개 를 내저었다.  "꼭 그렇지 만도 않은걸. 장사를 하겠다는 사람이 비단 장포에 영웅건이라니. 우습지 않아?게다가 행동이며 글 자 하나하나에까지 배어 있는 교만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는 법이지." 송현은 이자웅의 글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일단 적을 세우고 혼란하게 만들었으니 지켜보떤 알 겠지. 아무튼 자네는 저자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봐 줘. 그 리고 화련상하의 됫배가 어딘지 알아보는 것은 어떻게 됐 어?" "확실히 급조한 자들은 아니야, 쾌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것이 분명하다고 하더군." 그럴 줄 알았다는 송현을 보며 영호인은 서찰을 건네주었다. "그동안 알아본 내용들이네. 읽어 보고 태워 버리게," "그러지!" 송현은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는 종이를 펼쳐 본 다음 가슴에 갈무리했다 "그나저나 저 이자웅이라는 작자 말인데, 자존심이 상했으니 어떤 식으로든지 보복하려 들 거야." '』도 느꼈어." "아무리 봐도 상인보다는 무림인에 가까워. 분명히 행동을 취할 것이 틀림없네." "좋아, 그때가 되면 저자의 밑천도 드러나겠지. 손을 섞어 보면 사문을 알 수 있을 테니." 이자웅의 글귀를 구겨 버린 송현은 선전포고를 하고 난 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자, 풍림화산이 시작되었으니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가 되는구나.' 각오를 다지는 송현의 눈 속에서 작은 불꽃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 

제팔장 당랑포선 황작재후

- 중국의 설화집 '설원‘에 나오는 말이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는데 꾀꼬리가 뒤에 있다는 뜻.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결국 큰 해를 입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세상의 경험이 얕으면 더러움에 물드는 것 또한 얕고, 일의 경험이 깊으면 속임수 또한 깊다. 그러므로 능수능란 하기보다는 박하고 우둔한 편이 낫다는 말이 있다. 치밀하고 약삭빠르기보다는 소홀하고 거친 편이 어떤 때에 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 면에서 본다면 이자웅은 박하고 우둔한 편이기 보다는 잔꾀가 많고 눈치가 빠르며 간계에 능한 인물이다.  문파의 장문인이나 앉을 법한 화려한 태사의에 앉아 뭔 가 골똘하고 있던 이자웅은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생각 을 접어야 했다.  "누군가?" "아소입니다. " 황급히 들어온 사환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본점에서 자충수 어른이 오셨습니다. " "제기랄!" 이자웅의 표정이 보기 흥하게 일그러졌다. 태평상하의 출현으로 계획이 보기 좋게 틀어져 버렸다. 동정 상방을 압박하기는커녕 태평상하와 가격 경쟁을 하느라 제 살 파먹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묘하게도 태평상하는 화련상하보다 꼭 두세 문 정도 낮은 가격에 물건을 팔았다 그렇다고 꼭 가격 때문에 화 련상하가 고전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화련상하에는 없고 태평상하에는 있는 것, 바로 명성이었다.  황궁에서 비단을 관리하던 태감이 직접 만드는 비단과 단필목, 한림원 학사 출신이 골라 주는 문방사우 게다가 상하에서 행수를 맡아 보는 청년마저 황궁의 관리였다는 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태평상하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물건이라도 사람들은 왠지 황궁에 대한 신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화련상하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점포 계단을 내려서는 이자웅은 썰렁한 실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점포를 나서서 대로를 가로지르는 동안 이자웅은 만 가 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자신이 만나야 할 자충수 대행수 때문이 었다.  "그 꼬장꼬장한 성격에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으니 큰 일이군. 이번 일을 성공시켜 상방에서 입지를 두텁게 하려고 했건만 오히려 신임을 잃게 생겼으니, 후!" 멀리 두 눈에 들어오는 객잔의 간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가 도착하자 객잔의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 입구에는 매서운 눈매를 가진 무사들이 이자웅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위에 계십니다. " 짤막한 대답에 이자웅은 고갯짓을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객잔의 이 층은 붐비는 일 층과 달리 텅 비어 있어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자웅은 가운데 탁자에 자리하고 있는 깡마른 남자를 발견하자 긴장했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 "네!' 인사를 건넨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면박을 주는 이는 휘주 상방의 대행수 자충수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 울 나지 않는 냉혈한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지금의 자리에 올라선 인물이다.  '빌어먹을!' 이자웅은 예상보다 더 차가운 반응에 당황해서 자충수 말고 다른 사람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너무 오래 세워 두시는 거 아닙니까?" 생김새는 남자인데 목소리는 미성이었다. 이자웅은 얼 른 낯선 이를 살폈다.  '뭐야, 사내야 계집이야?' 그가 당황할 만도 한 것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웬만한 여인보다 더 미색이었다.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바라보는 사내의 눈은 여심은 물론 감자들의 방심도 흔들어 놓을 정도로 매혹적 이었다.  "어흠! 흠! 흠!" 젊은 청년의 미소에 당황한 이자웅이 눈길을 피하며 헛기침을 하자 자충수가 혀를 찼다.  "누구신지?" "못난 놈 같으니라고, 남궁성현 공자시다. " '밤궁.... 성현?" 이자웅은 기억 속에서 남궁세가의 후지기수인 남궁성 현에 대한 정보가 펼쳐졌다 '이자가 남궁성현? 장강수로연합체를 공격할 당시 아 이와 아녀자들까지 모두 씨를 말렸다는 잔혹한 자가 이렇게 아름다운 미공자였단 말인가?' 소문과 실물을 비교하면서 이자웅은 남궁성현의 아름다운 미소 속에 숨어 있는 잔혹함을 엿볼 수가 있었다.  '진정 무서운 자로구나!' 이자웅은 남궁세가의 후지기수가 왜 자충수와 함께 자 신을 찾아왔는지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그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구르는 것을 지켜보던 자충수 가 탁자를 내리쳤다.  "멍청한 녀석!" "해, 행수 어른........ '학련상하에 들어간 자금이 얼마인 줄 알고 있겠지? 또 한상방주께서 얼마나 공을 들인 일인 줄 알면서 늑장을 부려 막대한 차질을 빛고 있으니 그 죗값을 어찌 치르겠느냐?어디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거라!" 쌍심지를 돋고 추궁하는 기세가 너무 매서워 이자웅은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그것이 실은 뜻밖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 '방해라니?‘ 자충수는 그가 어떤 변명을 하든지 용서치 않을 생각 이었는데 방해라는 말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어서 이자웅이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 소상히 고하라 자충수의 이마에는 내천 자가 깊이 새겨졌다 "지금 그 말이 사실이렸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혹, 동정 상방의 진 대인이 부린 술책이 아니더냐? "철저하게 조사해 보았지만 그쪽하고는 아무런 끈도 이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 황궁 출신의 관리들이 영업장을 열었다는 말에 자충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들었다. 항주로 출발할 때만 해도 장강 일대에 떠도는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하면서 그저 이자웅이 게으름을 피운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살펴보니 보통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설마하니 관상이 항주로 진출하려는 건가? 관리들 중에도 장사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가리켜 관상이라고 했으며 이재와 상재에 밝은 이들이었다.  각종 이권에 개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지만 지방으로 직접 점포를 내는 일이 드물기에 자충수는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한간의 소문이 엉터리는 아니었나 봅니다.... 자충수와 달리 남궁성현은 마치 재미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눈을 번뜩였다. "공자의 말씀은?" 자충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남궁성현은 부채로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어째 동정 상방이 조용하다 싶었습니다. " "허나, 동정 상방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하지 않습 니÷가?" 자충수가 고개를 젓자 남궁성현은 빙긋이 웃어 보였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의 예상과 달리 동정 상방은 화련 상하에 어떤 압박도 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느닷없이 새로운 점포가 문을 연 시기가 우연치고는 딱 들어맞는 것도 또한 이상한 점입니다. " "그 말씀은 동정 상방이 뒤에 있단 말씀입니까?" "아마도요." "허 !" 자충수가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과 달리 이자웅은 남궁성현의 똑똑함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나 보통내기가 아니다. 나 역시 그리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못했는데 내가 한 말만 듣고 그 모든 것을 추리해 내다니 어린 친구가 심계가 깊구나.' 이자웅이 남궁성현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동안 그는 벌 써 대응책을 자충수와 논하고 있었다.  "알아보는 방법은 단 하나, 절대 양보하지 못할 것을 건드려 보는 겁니다. "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소금을 들여와야겠습니 다. " "소금을요?" 크게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밖을 넘자 실수를 깨달은 자충수는 표정을 정리하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나 소금은 민감한 물품입니다. 게다가 소금은 동 정 상방에서도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품목이라서 잘못하 면 큰 사단이 벌어질 것입니다. " '바로 그걸 원하는 겁니다. 저 태평상하가 소금을 취급 하지 않는다면 경계할 필요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저들 역시 소금을 내놓는다면 동정 상방의 전위부대라고 여겨 도 무방하겠지요." "그렇다면?" "전쟁입니다. " "전쟁 !" 남궁성현의 스산한 말에 자충수는 침음성을 흘렸다.  "오상인 상방주께서도 이미 각오하고 계신 일입니다 소금이 들어오면 화산파와 아미파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인맥으로 어떻게든 막아 보고 있겠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화산과 아미는 결국 나설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 "감당이 되시겠습니까? 자충수가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남궁 성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저희 세가의 저력은 무궁무진합니다. 때가 되면 아시 게 될 겁니다. " "상방주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만 화산파와 아미 파 두 곳을 모두 상대하시는 것이 정말 괜찮단 말입니 까?" "쓸데없는 체면과 명리에 얽매인 끄들이 과거라면 저 희 세가는 미래입니다. 안일하게 안주해 온 그들은 곧 남 궁세가의 무서움을 체득하게 될 터이니 아무 걱정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남궁성현이 장담을 하자 자충수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 이 되었다.  그때 밑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 층 계단을 막아선 휘주 상방의 호위무사들과 누군가 실랑이가 벌어진 모양 이었다.  쿠당탕!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 고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기척이 들렸다.  곧이어 낯익은 승복이 눈에 들어오자 이자웅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이럴 때!' 몸집이 넉넉한 중년 여승이 불진을 흔들며 차가운 냉소 를 머금었다.  "흥! 냄새가 고약타 했더니 그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쌀쌀맞은 여승의 뒤로 아미파의 제자들이 따라서 올라 왔다 그 뒤로 그들을 막지 못해 낭패한 표정의 휘주 상방 소속 무사들이 황급히 올라왔지만 대행수 자충수의 성난 눈길만 받았다.  "곤란하게 되었군." 자충수가 자리를 잡고 앉은 아미파의 사람들을 보며 남 궁성현에게 자리를 옮길 것은 권했다.  괜한 말썽은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남궁성현은 자리를 피하는 대신에 환하게 웃으 며 아미파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무림말학 남궁성현이 아미파의 혜인사태를 뵙습니 다. "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환한 미소에 몇몇 아미파의 제자들이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떨어뜨리자 혜인사태 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탕! "흥, 고매하신 남궁 공자께서 여인네를 희롱하다니! 그 대의 눈에는 내가 우습게 보이는가?' 날카롭게 꾸짖는 혜인사태의 불호령에도 남궁성현은 미소를 잃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감히 연배로 따져도 한참 후학인 제가 어찌 그런 마음 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얼토당토 안 되는 소리입니 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인사를 받는 사람이나 하는 쪽이나 서로 달가운 행색은 아니 었다.  혜인사태는 남궁성현의 능글맞은 미소가 마뜩치 않았 다.  배분으로 따져 보아도 한참 후배인 남궁성현이 다른 이 들처럼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방의 기녀들에게나 보 이는 값싼 웃음으로 제자들을 현혹하는 광경은 그녀의 괄괄한 성정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상대가 남궁세가라면 감정이 격해지기에 알맞 상대였다.  노기를 띤 혜인사태의 이마에 주름이 진하게 새겨지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좋지 않다. 어쩐다?' 이자웅은 사태가 격하게 흐르자 조바심이 났다. 아직 점포가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인데 남궁성현은 무슨 생각 인지 일을 크게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점주인 자 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행수 어른,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면 우리의 입지가 좁아지게 됩니다. " "내가 더 잘 안다. 하지만 누가 저 사이에 끼어들 수 있 을까? 네가 하겠느냐? 물론 이자웅은 그렇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 실력 을 뽐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어야만 흥이 났다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면 이자웅은 관심이 없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이자웅은 장내의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지 추이를 살폈다. 아미파의 혜인사태가 불편한 심 기를 행동으로 옮길지 어떨지, 만약에 그렇다면 남궁성현 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혜인사태는 아미파에서도 불같은 성정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그 손속도 지나치게 잔인해서 여러 차례 물의를 일으킨 전적이 있으니 남궁성현을 곱게 보내줄 리가 없 다. 그렇다면 람궁가의 소공자께서는 어찌 나오실려나' 이자웅의 걱정과 달리 수적으로도 불리한 남궁성현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투기가뿜어져 나오는상황에 이르자 아미파의 제자들도 긴장했다.  '흥! 이쯤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면 용서해 주려고 했 거늘 그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지 애비와 조금도 다르지 않구나!' 남궁연의 모습을 떠올린 혜인사태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가을 무림맹 대전에서 자신에게 모멸감을 안겨 준 남궁연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녀 역시 체면과 명예를 먹고사는 뺏속까지 무림인이 었다. 마음속의 원한은 결코 쉬이 잊혀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냐, 네 애비만큼 오만 방자한 것이 실력 또한 그런 지 견식이나 해 보자꾸나." 결국 혜인사태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 자충수가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휘주 상방의 대행수 자충수라고 하옵니다. 고명하신 혜인사태께서는 부디 선심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 "내가 왜 그래야 하나?" 냉막한 그녀의 눈길을 피한 자충수는 최대한 허리를 낮 추었다.  "아시다시피 현 상방주님의 부인에서는 사태와 같은 동문이며 현재 아미파와 휘주 상방은 서로 좋은 관계를 맺어 가고 있는 시기입니다. 오늘 남궁가의 소공자는 저 희의 손님으로 모신 분이니 부디 저희의 체면을 봐서라도 자비심을 베푸시길 바랍니다. " 자충수는 그녀의 노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완곡하게 부탁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그녀를 자극하 고 말았다.  "흥! 출가외인이라는 말도 못 들어 봤나? 더구나 속가 제자 따위의 체면을 들어줄 여유가 본녀에게는 없다. 어 디서 얼어 죽지도 못할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 냐 감히 휘주 상방 따위가 나를 꾑박하려 들다니 웃음도 안 나오는구나." 혜인사태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자 둘 사이에 끼어들 었던 자충수가 그녀의 신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지려 하였다.  "행수 어른!" 이자웅이 재빨리 자충수를 부축하며 뒤로 물러섰다.  "호오, 제법이구려." 남궁성현이 이자웅의 솜씨를 보고 칭찬을 하자 그는 모 욕을 느꼈다.  '어린 녀석이 정말이지 기고만장하구나. 도대체 무얼 믿고 저리 자신 만만한 것일까? 제아무리 실렬이 출중하 다 해도 혜인사태의 상대는 아님이 틀림없지 않은가?' 이자웅은 이제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휘주 상방이 남궁세가와 손을 잡았다면 분명이 서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런 때에 남궁가의 소 공자가 큰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어찌 보면 휘주 상 방에게는 득이 되는 일일 수도 있었다.  짧은 순간에도 이자웅은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할 계책 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태평상하와의 경쟁으로 인한 손실을 남궁성현이 저지른 사고로 무마하려는 속셈이었 다 그런 이자웅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혜인사태의 불 진 끝에 매달린 수술이 바람도 없는 실내에서 마구 흩날 렸다.  "후배, 사태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 남궁성현이 물러서지 않고 그녀를 도발하자 얼음처럼 차가운 그녀의 얼굴에 소름끼치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냐, 잠시 뒤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꾸나!" 혜인사태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진을 회전시키며 남궁성현을 핍박해 들어갔다.  난피풍검! 아미파의 대표 절기가 불진을 통해서 펼쳐지자 무서운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남궁성현은 혜인사태의 출수에 감 히 경시하지 못하고 진신기운을 끌어올렸다. 불진 끝에 매달린 짐승의 털은 참선과 수행 시 벌레를 쫓는데 쓰이는 것이지만 혜인사태의 내력이 더해지자 철강검보다 더 위력적이었다.  가가각! 남궁성현의 부채가 좌우로 현란하게 흔들리며 사혈을 노리는 불진을 막아서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윽!" 답답한 신음과 함께 재빨리 뒤로 물러선 남궁성현의 장포자락이 펄럭였다.  "그럼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 됫짐을 쥔 채 부채를 살랑거리던 남궁성현의 신형이 줄 을 당기듯 튕겨 나왔다.  "제왕일파!" 제왕의 걸음이 수만 가지 물결로 갈라진다는 초식 명에 어울리게 화려한 변초가 혜인사태를 덮쳤다.  "흥! 어쭙잖은 수로 내 눈을 더럽히지 마라." 혜인사태는 그 많은 변초를 흘려버리고 그중에서 진짜 실체를 찾아내었다.  칼불진과 부채가 부딪히는 소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십여 합을 겨룬 두 사람이 잠시 사이를 둔 것은 순식간 의 일이었다.  "좋아, 인정해야만 하겠구나. 남궁연이 자식을 제대로 가르쳤어."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 혜인사태와 달리 안색이 창백한 남궁성현은 그녀를 경 계하였다.  "곧 죽어도 체면을 차리는구나. 지 애비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 그래서 난 남궁가 놈들이 싫다. 뒤에서 짓을 꾸밀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지." 남궁세가를 몰아세운 혜인사태는 남궁성현을 지켜보면 서 고민했다.  이정도 혼쭐을 내주었으면 체면치레는 한 셈이었다.  더 손을 섞으면 남궁성현이 크게 다치거나 부상을 당하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죽여 버려도 시원치 않지만 그렇 게 되면 남궁세가와 아미파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게 된 다 그러나 무림맹에서 남궁연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가 계 속 쑤셔 오는 통에 유혹을 떨치기 힘들었다. 불진을 만지 작거리는 손이 갈등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촤르륵: 불진의 털이개가 꽃처럼 활짝 피자 남궁성현도 부채를 쳐 들었다. 그녀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막아야 해!" 자충수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이자웅은 벌레 씹은 얼굴 로 마지못해 나서야 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남궁성현 은 혜인사태의 삼초지적도 되지 못하는 상태였다.  펑 ! 펑 ! 펑 ! 중간에 끼어든 이자웅의 성난 쌍장이 혜인사태의 불진 을 쳐냈다. 당황한 혜인사태을 보며 이자웅은 포권지례를 했다.  "휘주 상방의 이자웅이라고 합니다. 사태께 무례를 범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저희 손님이 다치는 일이 발생하면 우리도 곤란하기 때문에 결례를 범했으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자웅답게 처신을 잘했다. 흠을 잡을 만한 구석이 없었지만 문제는 상대가 혜인사태라는 데 있었다. "흥! 휘주 상방이 아미파와 척을 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마!" "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 당황한 이자웅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혜인사태의 분노가 폭발했다.  차창! 제자의 검을 이내 든 혜인사태의 눈에서 불길이 있었다. '제기랄! 망했군.' 이자웅은 후회를 했지만 쉽게 목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짓쳐들어오는 혜인사태의 검을 맞아 그의 쌍장 이 춤을 추었다.  "안 돼, 이런 멍청한:" 남궁성현이 악을 쓰자 자충수가 뛰어와 그를 말렸다 "소공자 도대체 어쩌시려고 자꾸 분란을 일으키는 것 이 오." "이런 한심한 자들을 봤나. 내가 다쳐야만 일이 쉬워지는 것을 왜 몰라!" "그게 도대체 무슨...... ?" 파리한 안색으로 악을 쓰는 남궁성현을 붙잡은 자충수 는 그의 의중을 몰라 답답할 뿐이었다. 그저 이자웅이 미친개처럼 날뛰는 혜인사태를 막아 주길 바랄 뿐이었다.  "이자웅이라고 했느냐? 상단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재주로구나." "하아, 하아. 과찬이십니다. " "흥! 칭찬이라니 착각도 유분수지! 단지 육가권이 아직 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할 뿐이다. " 이자웅의 표정이 싸늘해지자 혜인사태는 재미있어 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네 녀석이 떳떳하게 사문을 밝힐 수 없는 이유도 말해 주랴!" '락치시왼" 격분한 이자웅의 손이 매서워졌다. 크고 화려했던 동작 이 거칠고 잔혹하게 바뀌었다.  혜인사태가 보법을 밟아 미끄러지자 그녀 뒤에 있던 기둥이 이자웅의 손아귀에서 무참히 찢겨졌다.  단단한 나무 기둥이 종이처럼 찢겨지는 대단한 악력이었다.  "오늘 아주 재미있는 날이구나, 남궁가의 소공자에다 가 잊혀 진 육가권의 후손까지 사문으로 돌아가면 해 줄 이야기가 아주 많겠어." 혜인사태의 투쟁 본능이 극한으로 올라가자 그녀의 신위는 더욱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맹수의 위력을 지닌 이자웅의 쌍장도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혜인사태의 놀라운 신력에 환호했다. 그녀는 마치 제자들에게 실력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아미의 절기를 마음껏 펼쳐 보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자웅은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다리로 서 있게 되었다.  "제법 잘 버텼다만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유감이구나. 석년의 이모추가 펼친 육가권은 정말이지 대단했지 허나 애석하게도 너는 거기에 못 미치는구나. 아직 살아 있느냐?" 혜인사태의 검이 이자웅의 목덜미에 닿자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모욕하지 말고 죽이시오." "글쎄다. 아미의 검에 더러운 육가 놈들의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구나." "어 째서 ........?' 이자웅은 눈은 죽여 달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혜인사태 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것도 차디찬 비웃음이었다.  "이모추가 말해 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명교를 징벌할 때 무림맹의 일원으로 저질렀던 추악하고도 비겁한 짓거리를 말이야." "그건 누명이라고 하셨소!" 이자웅의 눈에서 핏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러 나 혜인사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너희 같은 놈들은 늘 핑계를 대지, 어린애처럼 징징거리는 통에 귀가 아플 지경이야. 당시에 모든 무림의 명숙 들이 이모추가 저지른 패악을 지켜보았다. 다시는 육가권 이 무림에서 빛을 받는 일은 없을 거야.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맹세하지." 자충수는 왜 이자웅이 그렇게 명성을 얻기 위해서 안달 이 났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휘주 상방에서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이자웅이 많지 않은 나이에 행수가 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고 굴욕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 왔는지 그것을 옆에 서 지켜본 그로서는 그가 얼마나 명성에 목을 매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저 녀석이 무림에서 겁쟁이라고 매도된 육가권의 후 예였구나. 그래서 그렇게 악에 바쳐서 성공하기 위해 간 도 쓸개도 버렸던 거 였군." 자충수는 무림에서 회자되는 한 가지 소문을 떠올렸다.  명교 정벌 당시 혼자 도망치는 명교의 교주를 막지 못하고 두려움에 길을 내준 일로 육가권은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  제자들은 육가권의 후예임을 숨기며 살아야 했고 강남 일대에서 명성을 자랑하던 육가권은 어느 날 조용히 사라 져 버렸다.  "그건 정파 놈들의 누명이다 장문께서는 목숨을 걸고 명교의 마두와 사투를 벌이시다 돌아가셨단 말이다. " "그래 그렇게 믿고 싶겠지, 허나 진실은 냉혹하기 마련이지. 네놈의 피를 묻혀 봐야 아미의 얼굴에 먹칠을 할 뿐 이니 그만두지." 혜인사태가 검을 거두고 돌아서자 이자웅은 심한 모멸감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떨었다.  이보다 더한 치욕은 없었다. 붉게 충혈 된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그를 비웃으며 혜인사태는 남궁성 현을 쳐다보았다.  "자, 대단한 가문의 소공자 나리, 장사치 뒤에 숨어 있는 꼴이 보기 좋구나." "비켜!" 자충수를 밀쳐 낸 남궁성현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 "호호호, 내가 아미의 골칫덩어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네, 잘 알죠. 앞뒤 안 가리시는 그 성정 때문에 결국 아미가 봉변을 당하게 될 겁니다. " 남궁성현의 독설에 혜인사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 졌다.  "이제 내게 자비를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 남궁성현은 대답 대신 부채를 내밀었다 털썩! 기운을 잃고 쓰러진 이자웅을 힐끗 쳐다본 남궁성현은 내력을 끌어올렸다. 히인사태의 검도 예기를 더해 갔다.  "모두 그만 하시지요!" 엄청난 내력이 실린 웅후한 외침에 무공을 모르는 자충 수가 귀를 막고 엎드려야 했다. 나는 듯이 뛰어 오른 이는 검은 도사 복장의 중년인이었다.  "악소군!" 혜인사태가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소리치자 그녀의 제 자들은 일제히 그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아미의 제자들이 화산일검 악소군 도장을 뵈옵니다. " 악소군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사태, 오랜만이외다. " 서글서글한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을 좋게 만드는 싱그러움이 담겨져 있었다.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전에도 말했을 텐데요." 혜인사태가 쏘아붙이자 악소군은 손사래를 치며 지레 겁을 먹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다마다요, 허나 저 교활한 녀석을 건드리면 아미와 화산이 곤란해지니 그런 것입니다. " "흥! 그딴 것이 두려우면 무림에서 살지 말아야지." "하하하, 역시 사태는 변함이 없구려. 그 말이 백번 옳소 무림에서 검으로 먹고사는 자들이 두려움이 많다면 말 도 안 되는 소리지요. 허나 이번 일에는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으니 아미의 장문인 정인사태께서도 달가워하지 않으실 겁니다. " 화산일검 악소군은 중원 무림에서 검으로 이름 난 절정 의 고수였다. 혜인사태도 타고난 말투는 어찌하지 못하지 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자였다.  "악소군 도장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남궁성현이 피를 보면 항주가 아주 시끄러워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명분을 준다는 것이 더 큰일입니다. " "누구냐?" 또 다른 불청객의 목소리가 들여오자 혜인사태는 짜증 이 밀려왔다.  "네 녀석은?" 상대를 발견한 혜인사태의 표정은 잔뜩 화난 사람이 되 어 버렸다.  "거참 아무리 그래도 무림맹의 좌군사인데 네 녀석이 라는 표현은 좀 그렇지 않소?" 악소군이 혀를 차며 그녀를 나무라서가 아니라 좌군사 위공의 말에 혜인사태는 뜨거웠던 머리가 점차 차가워졌다. '뭐지? 휘주 상방과 남궁세가가 함께 있다는 건 그렇다 고 쳐도 화산일검의 등장과 무림맹의 좌군사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비로써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때 또다시 우르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나며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사저 !" "흥!" 계단을 단숨에 올라온 이들은 아미의 제자들이었다. 그 중에 혜인사태를 보고 비명을 지른 이는 낭패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여기네 계시는 겁니까?" '내가 내 발로 어디를 가든 내 마음이 아니더냐, 일일 이 너에게 보고라도 해야 하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 고개를 숙이며 당황해하는 이는 혜인사태의 사매인 금 영사태였다.  "요망한 것, 네가 장문인께 총애를 받는다고 해서 기고만장하다가는 큰코다칠 줄 알아." '이럴 리가 있습니까." 잔뜩 주눅이 든 금영사태는 곤혹스러워하며 좌군사 위 공을 쳐다보았다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그는 외면하지 않았다.  "진정하시지요, 혜인사태. 우연이든 아니든 이렇게 모였으니 이번 사태에 대해서 논의해 보도록 하시죠." "흥! 난 그런 정치에는 관심 없다. 저 녀석만 손 봐주면 돼." 혜인사태가 검을 들어 남궁성현을 가리키자 좌군사 위 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십니까?" "감히 !" 혜인사태가 좌군사 위공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를 하자 금영사태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녀석이 왜 사태를 도발하는지 정말 그 이유를 모르십니까?" 좌군사 위공이 날카롭게 다그치자 이미 머리가 차가워 진 혜인사태는 화를 내는 대신에 좌군사 위공의 답을 기 다렸다.  '감궁가는 어떻게든 항주에 발을 붙을 구실을 찾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혜인사태가 남궁성현을 핍박하여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남궁세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가의 식 솔들을 이끌고 항주로 몰려들 것입니다. 그런 연휴에 갖은 핑계와 구실을 대며 항주에 자리를 잡을 겁니다. " 혜인사태는 좌군사 위공의 설명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좌군사 위공의 이야기를 아쉬워하는 남궁성현을 보며 혀를 찼다.  '어린놈이 지 애비보다 더 간교하고 교활하구나.' 자신은 우연히 이 객잔에 들린 것이니 그 짧은 순간에 생각해 낸 잔꾀라는 이야기였다. 혜인사태는 겨우 약관도 지나지 않은 남궁세가의 소공자를 보며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네 녀석은 운이 좋은 줄 알아라!" 혜인사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을 집어 던지자 검은 정확하게 검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금영사태가 장문인인 정인사태에게 모종의 임무를 받고 왔음이 분명했다. 화산일검 악소군에 무림맹의 좌군사 까지 함께 자리했으니 뭔가 은밀한 이야기 일 게 틀림 없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그녀로서는 이런 자리가 달갑지 않았다.  찬바람을 날리며 돌아서는 혜인사태를 따라서 제자들 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잠시 몸을 돌려 금영사태를 바라 본 그녀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계단을 향해 걸어가던 그녀는 바닥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자웅을 보며 한마디 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희 육가 놈들은 언제나 패배자였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앞으로 영원히 말이다. 다시 한 번 무림에서 육가권 을 펼치다 내 손에 걸리면 그게 마지막인 줄 알거라. 가 자!" 그녀와 일행이 냉기를 풀풀 흘리며 객잔을 빠져나가자 분위기가 썰렁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휘상의 무사들이 이자웅과 남궁성현, 좌충수를 부축하고 금영사태의 제자들이 부서진 탁자와 의자를 정리하며 어수선 할 때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웬 승려들이 저렇게 쌀쌀맞은 거야?" "그러니까요, 나 참 만두 한번 먹기가 이렇게 힘들어서 야. 원!" 아마도 혜인사태의 일행들과 계단에서 마주친 모양이었다. 좌군사 위공이 눈살을 찌푸리며 무림맹 위사들에게 눈짓을 하자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계단으로 향했다.  "어라? 송현 학사님 화련상하 이 대인이 완전히 걸레짝 이 되었는데요?" "뭐?' 왕백이 수선을 피우자 송현이 깜짝 놀라 만신창이가 된 이자웅을 살폈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한눈에 보아도 상세가 좋지 않았다. 이자웅의 무공이 낮지 않음을 잘 아는 송현은 즉시 주변을 살폈다.  '후후후, 역시나 집을 뒤흔드니 이리 벌떼처럼 달려왔구나. 어디 면모를 살펴볼까? 송현은 화련상화를 주시하고 있다가 이자웅이 누군가를 만난다는 정보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흠, 전부 무림인들이로구나! 저 도장은 내력이 가장 깊은 걸로 보아 이들 중 제일 고수임에 틀림없다. 헌데 누굴까, 이자웅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은?' 경계하는 호위무사에게 괜찮다며 손을 내저은 이자웅 은 송현을 향해 못난 꼴을 보여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 무슨 말씀이오. 같은 업을 삼은 동료나 마찬가지인 데 이런 낭패를 당했으니 의당 도와야지요." "아닙니다. 괜히 그대도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 있으니 자리를 피합시다. " 이자웅은 파리한 신색으로 송현을 채근했다. 지금 이 자리에는 혜인사태보다 더 고강한 화산일검 악소군과 그 혜안의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무림맹의 좌군사가 고수 급 위사들을 여럿 대동하고 나타난 자리였다. 게다가 아미파 의 금영사태와 제자들까지 있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하시오. 당신은 관련이 없으니 나가 주셔 야겠소." 강압적인 무림맹 위사의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누구 마음대로!" 무림맹 위사는 학사 차림의 서생이 으름장을 놓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괜히 객기 부리다 다칠지 모르니 물러서는 편이 좋을 .... !" 송현의 어깨를 밀치려던 무림맹의 위사는 강한 반탄력 에 비칠거리며 뒤로 형편없이 물러났다. 이자웅을 빼고 모두가 놀라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대명천지에 힘으로 사람을 핍박하려 들다니 도대체 뭐하는 자들이냐?" 맑고 정기가 깃든 외침에 좌군사 위공은 일이 꼬임을 느꼈다.  "위공이라고 하오, 수하들이 결례를 저질렀소이다. " "흠, 난 이 아래 사거리에서 점포를 낸 송현이라고 하 오이다 " 장사치라고 소개를 하자 다들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무림맹의 위사를 물러서게 만든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고인의 제자이려니 했는데 장사치라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정말이시오?" 좌군사 위공이 눈매를 좁히며 재차 묻자 송현은 콧방귀를 뀌었다.  "무림인들이 의심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리도 속이 좁은지는 몰랐군. 믿든 말든 내 알바가 아니지, 자 이대인 갑시다. 서둘러 치료를 해야겠소." 송현이 이자웅 일행을 데리고 나가려 하자 좌군사 위공 이 제동을 걸었다 -소공자는 우리와 함께 있어야겠소." 자충수가 기겁하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소공자는 내 손님이니 나의 책임 이오." 자충수가 역정을 내자 휘주 상방의 무사들이 검을 곧추 세웠다 그러나 무림맹 위사들의 숫자는 십여 명이 넘었고 소란 을 감지하고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십여 명이 더 올라 오니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송학사 오늘은 아무래도 길보다 흉이 많은 날인 듯싶소. 그냥 가시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리다. " 이자웅은 진심으로 송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 살벌한 상계와 무림에서 같은 패도 아닌 이가 걱정 해주는 따뜻한 마음은 그에게 있어서 충격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모르면 몰랐으되 눈으로 본 이상 꽁무니를 빼는 것은 내 성정하고 맞지 않아요." 점잖은 말투 속에 담긴 송현의 노기를 느낀 이자웅은 긴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3.1" 웃는 통에 상처가 벌어지자 인상을 찌푸린 이자웅은 이 특이한 사내가 하는 요량을 지켜보기로 했다. 송현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 소리쳤다.  "그래 또 힘으로 해 보시겠다 이건가?" 송현이 앞발을 내디디며 풍부를 시전하자 훈훈한 바람 이 객잔 안에 휘몰아쳤다.  백면서생으로 보이는 송현의 보법을 보고 화산일검 악 소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송현의 공부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안 이들은 잠시 침묵했지만 곧 아미파에서 여린 목소리를 가진 제자가 검 을 들고 뛰쳐나왔다 "아미산에서 온 주소민이라고 해요. 그대의 용기처럼 실력도 있는지 어디 봐요!" "여자와는 다툼을 하지 않소!" "흥! 어디 그 말을 언제까지 하는지 두고 보죠. 하앗!" 아미파의 소양검을 날카롭게 펼치는 여제자의 검세를 송현은 풍부만으로 피해 냈다. 백팔 번의 걸음은 소양검이 공격하는 모든 검로를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저럴 수가!" 악소군은 눈을 비비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녀의 스승인 금영사태였다 "절정고수?" 좌군사 위공은 그의 자료 속에 없는 새로운 고수의 출 현에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퍽! 양소능운의 수법으로 상대를 휘감아 베려는 주소민의 검세를또 한차례 떨쳐 낸 송현은 순간의 빈틈 을 놓치지 않고 주소민의 손목을 낚아챘다.  "악!" 쨍그랑! 그녀의 검이 객잔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여자와는 다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송현이 짐짓 사나운 표정으로 윽박지르자 주소민의 눈 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 아니 왜?" 그제야 송현은 자신이 처녀의 손목을 억세게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험 ! 험!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 용서하시오." 시뻘겋게 부어오른 손목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선 주소 민이 눈물을 흘리자 송현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더 당혹스러운 것은 상대편이었다.  '도대체 저자는 누구냐? 휘주 상방과도 안면이 있는 듯 한데 아미 제자의 소양검을 저리 간단히 제압하는 학사라니 믿을 수가 없다. 송현......송현이라? 설마하니 그 송 현이란 말인가?' 좌군사 위공의 눈이 벼락을 맞은 듯이 커졌다. 그리고 믿지 못할 사실이라는 듯 경악했다. 

제구장 용담호혈

-용이 사는 못과 호랑이의 굴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좌군사 위공은 송현을 보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의 위공은 지금처럼 차갑지도 근엄 하지도 않은 순수 하고 열정이 느껴지는 청년이었다.  서생 차림의 위공은 지방 향시 과제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과를 치르고 있었다. 위공과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 은 위공이 당연히 향시 장원으로 통과하리라는 것을 철썩 같이 믿었다.  시험 과제 역시 위공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시제 중 하 나였기에 막힘없이 써 내려갔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신 말고도 뛰어난 인재가 많다는 것 을 위공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겨우 십사 세의 어린 소년이 향시에 장원 급제를 하자 위공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한 번의 좌절에 무너질 위공이 아니었다. 그는 와신상 담 글공부에 매진하여 대과에 도전하였지만 이번에도 그 는 쓰라린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상대는 지난번 향시에 서 자존심에 상처를 안겨 준 같은 소년이었다. 위공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소년이 내 놓은 답지를 보고 그 뛰어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과 소년을 같은 시대에 태어나게 한 하늘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붓을 꺽은 위공이 어느 날 갑자기 무림맹의 좌 군사로 변신하여 나타난 것은 몇 해 뒤의 이야기였다.  송현을 노려보는 위공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저자가 정말 무해년 대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학사를 제수 받은 송현이 맞단 말인가? 나에게 처음으로 참담함 을 안겨 주고 평생의 글벗으로 여겼던 사람이 장사나 하겠다고 떠벌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나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지?' 회한과 원망이 가득 담긴 눈길이 부담스러운 송현은 처 음 보는 낯선 이에게서 왠지 모를 적대감을 느꼈다 '누구지? 누구기에 나를 보는 눈빛이 저다지도 차가운 것일까?' 제 아무리 기 억 속을 뒤집어 보아도 떠오르지 않는 미지 의 인물이었다.  송현은 무림인들 중에 자신이 아는 이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송현을 보며 좌군사 위공의 가슴은 더욱 서늘해졌다. 마지막 구술 논객에서 자신을 몰아붙이며 학사에 오른 송현이 자신의 존재를 기억조차 못한다는 사실에 분노 했다.  '후후후, 그랬나?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군, 내가 그의 경쟁자이며 학문의 적수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전인수 격 의 해석이었다. 정작 본인은 나란 존재 따위는 손가락의 때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 말이로구나.' 허탈한 조소로 눈물을 삼키는 좌군사 위공의 신형이 미미하게 떨려왔다.  학사로서 성공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일념을 포기하고 무림에 뛰어든 자신의 선택에 대한 회의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대는 무해년 대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학사로 제수 받은 존경받는 선비일진데 어찌하여 이 항주에서 점포를 열어 천한 장사치가 되었소?" 차갑다.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한마디, 한마디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눈치 빠른 화산일검 악소군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언사 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좌군사 위공의 관심은 오로지 눈앞의 송현에게만 집중되었다.  "권세와 이익과 사치와 화려함은, 이것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을 깨끗하다고 하지만 이를 가까이 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을 더욱 깨끗하다고 한다. 잔재주와 권모와 술수와 교묘함은, 이것을 모르는 사람을 높다고 하지만 알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더욱 높다고 하느니라." 좌군사 위공은 마치 과거의 구술 논객 때로 돌아간 것처럼 운을 떼었다. 그제야 송현은 어렴풋이 오래전 기억 의 한 자락을 떠올릴 수 있었다.  "군자의 마음가짐은 하늘이 푸르고 햇빛이 밝은 것과 같이 하여 남들이 모르게 해서는 안 되며, 군자의 재화는 구슬이 숨어 있고 진주가 감추어져 있는 것과 같이 하여 남들이 쉬 알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라." 막힘없는 대답에 위공은 인상을 찌푸렸고 송현은 빙긋 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그때도 이렇게 시제에 대한 답을 내었지요?" "콕! 기억하고 있었군. " "기억하다마다요. 그래서 한림원에 코를 빌었는데 모를 리가 있습니까?' "코를 빌었다? 천하의 선비들이 염원하는 바를 그렇게 표현하다니 잔인하군." "크크크, 잔인하다라! 천하의 안위를 걱정하고 황상의 정치를 도와야 할 학자들이 사내구실도 못하는 환관에게 굽실거리며 내일의 삶을 걱정하는 일로 소일하게 되는 것 이 진정한 잔인함이지요." 무공초식을 주고받는 것보다 더 살벌한 대화가 오고갔다.  갑자기 냉기가 흐르자 객잔 안의 사람들은 두 사람 사 이가 궁금해졌다. 과연 무림맹 군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좌군사 위공과 신흥 상인 송현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리도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지 못내 궁금할 뿐 이었다.  그러나 송현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연유인지는 모르나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일은 옳지 않소. 더구나 이리 부상당한사람도 있으니 옳고 그름은 나중에 가려야 할 것이오." 송현이 이자웅을 부축하여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좌군 사 위공은 송현을 놓아 주지 않았다.  "천만에, 옳고 그름이라 하였으니 내 알려 주지. 무림 의 일은 무림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남궁가의 소공자는 무림인이니 무림맹의 좌군사로서 남궁가와 아미파 간에 생긴 오해를 풀기 위해서 그를 데려가겠다. 이것이 옳음 이 다. " 권위를 내세우기 싫어하는 좌군사 위공의 낯선 모습은 무림맹의 위사들조차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익숙한 광경이 아니었다.  "무엇 하느냐? 남궁가의 소공자를 무림맹으로 모셔 라!"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에 무림맹 위사들의 신형이 절로 움직였다. 자충수는 감히 위사들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 형편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자웅이 울컥하며 나서려 했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는 무리였다.  콰콰곽! 남궁성현을 붙잡아 끌고 가려던 무림맹의 위사들은 항거할 수 없는 기운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강맹한 바람이 탁자와 의자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엄청 난 위력의 장풍이었다.  '감궁가의 자식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리도 수모를 주는가?"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좌군사 위공과 화산일검 악 소군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졌다.  '감궁휘!" 육중한 몸집을 자랑하며 나타난 중년의 사내 뒤로 수십 명의 무인들이 자리했다.  남궁세가의 실세 중 하나인 남궁휘가 등장하자 남궁성 현과 자충수는 죽다 살아난 표정이 되었다.  남궁휘의 등장으로 객잔은 두 무리로 확연히 나뉘었다.  화산일검 악소군은 검을 쥔 손에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고 아미파의 금영사태는 당장이라도 출수할 기세였다.  '해묵은 원한이 있는 문파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참 으로 난감하구나!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 한날한시에 같은 객잔에 모여 들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 려워 의심스러웠지만 지금은 눈앞에 문제를 해결하고 볼 일이었다.  '감궁가의 소공 자제서 아미파와 말썽을 일으키셨으니 무림맹에서 중재에 나선 것뿐이오. 다른 의도는 없으니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 좌군사 위공의 답변에 남궁휘는 특유의 거만한 몸집과 함께 거드름을 피우며 걸음을 옮겼다.  "흥! 이 얼굴을 보고도 중재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 세울 참인가, 좌군사 나리." 엉망인 된 남궁성현의 얼굴을 들어 올린 남궁휘의 콧수염이 떨린다고 생각한 좌군사 위공은 씁쓸한 속내를 감추고 포권지례를 한 손을 더욱 들어 올리며 완곡하게 입을 열었다.  "잘잘못은 무림맹에 가서 가릴 것이니 이에 따라 주시 기 바랍니다. " 좌군사로서는 사건의 무대를 무림맹으로 옮겨야만 자 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갈 수 있음을 알기에 필사적 이었다. 이에 화산과 아미가 힘을 실어 주었다.  "좌군사의 말이 옳소 소공자가 분명히 아미파의 혜인 사태께 무례를 범했으며 아미파에까지 큰 결례를 하였으니 이는 무림맹에서 그 진위를 따져야 하오." 화산일검 악소군은 좌군사 위공의 속내를 눈치 채고 무 림맹으로 갈 것을 종용했다. 남궁휘의 주먹이 쥐어지는 것을 보며 아미의 금영사태는 이 자리에 혜인사태가 없음 을 하늘에 감사했다.  불같은 성정으로 유명한 사저가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 장문인인 정인사태가 그녀 대신에 이번 일의 책임자로 자 신을 보냈음은 아마도 오늘 같은 사태를 짐작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걱정대로 만에 하나 혜인 사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미 객잔은 난장판이 되었음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음이었다.  "남궁가가 이번 일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아미는 이 일을 공론화 하겠습니다. " 금영사태 역시 강수를 두자 남궁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이것들이 감히 노부를 핍박하다니. 천하의 남궁휘를 뭐로 보고, 크윽! 성질 같아서는 모두 쓸어 버려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 어쩐다?' 불길이 치솟는 가슴을 다스리지 못해 주저하는 남궁휘 의 뒤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혀를 차며 걸어 나왔다.  "쯧쯧쯧, 이러면 약속이 틀리지 않소?" 노인을 본 좌군사 위공의 표정은 저승사자를 만난 사람 처 럼 사색이 되었다 '빌어먹을 저 영감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좌군사의 표정이 급변하는 것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린 노인이 정신이 빠진 자충수를 보더니 사정없이 정강이를 걷어찼다.  자충수는 입만 벌리고 눈을 껌뻑거리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마나 아픈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몰골이 엉망인 이자웅은 그 행색이 한심했던지 혀를 차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  "면목 없습니다. 어르신........ 이자웅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 노인은 대꾸도 하지 않고 좌군사를 향해 일침을 가했다.  "내가 굳이 입을 열어야 속이 시원할까?" 협박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휘주 상방의 오대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오금이 저 릴 정도로 무섭군요." 좌군사가 노인을 향해 휘주 상방의 오방원이라고 부르자 송현의 눈빛이 번뜩였다. 물론 그를 모르는 이들도 역 시 크게 놀라며 노인을 살폈다.  오방원! 장강일대의 실세로 경제권을 쥐락펴락하는 휘주 상방 의 살아 있는 역사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봇짐 하나 지 고 대륙을 종단하며 일궈 낸 눈부신 업적은 신화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저 자그마하고 허리가 굽은 초로의 노인 이 휘주 상방의 전대 상방주인 오방원이라는 사실을 모두 가 믿기 힘들어 했다.  좌군사 위공은 오방원이 지난날 무림맹에서 거래했던 밀약을 거론하고 있음을 알기에 곤혹스러웠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맹주 곽무헌의 폐관수련 이유가 휘주 상방의 뇌물, 은 자 이만 냥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봐야 좋을 것이 하등 없었다 아니 그로 인해 무림맹이 입을 타격은 끔찍할 것이 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앞으로의 행보가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기에 좌군사 위공은 허세를 부렸다.  "사람의 입을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머리가 있다면 장소를 가릴 줄 알겠지요," 좌군사 위공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눈을 똑바로 치켜뜨자 오방원은 기가 막혔다 '허, 이놈 봐라! 보통내기가 아님은 잘 알지만 뭘 믿고 저리 뻔뻔할까? 뭔가 한 수를 숨겨 두고 있음인가?' 확실치 않으면 거래를 하지 않는 휘주 상방의 전통을 만든 것이 오방원이었다. 상대의 패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험을 할 위인이 아니.  "허허허, 어찌 휘주상방이 무림맹과 척을 지겠소이까. 허나 남궁가의 소공자에게 죄가 없음은 온 천하가 아는 일이니 이쯤에서 없던 일로 하는 것이 어떻겠소?' 오방원이 중재를 하고 나선 것이다. 보통 웬만하면 중재를 하는 사람의 지위를 봐서 받아들이는 것이 무림의 규칙이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불가하오!" "뭣이라고?" 좌군사 위공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거절하자 오방원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오 대인께서 그 어떤 말을 하셔도 이 일은 무림맹에서 나설 것이며 아미파가 정식으로 무림맹에 건의하였으니 이 일은 이미 정식으로 무림맹의 사건이 되었소. 이를 가지고 왈가왈부 한다면 무림맹에 척을 진다고 생각할 것이오." "윽...... 오방원은 치를 떨었다 '돈 받아 처먹을 때는 뭐든지 들어 줄듯 하더니 지금 뭐하자는 거지? 내가 맹주와의 더러운 거래를 폭로해도 괜찮다 이거냐? 아니면 또 다른 내막이라도 있다는 거냐' 너무나 자신만만한 좌군사 위공의 태도에 오방원은 화 가 치밀어 올랐지만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비밀을 밝혀서 이득이 될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될지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남궁휘 대협께서도 무림의 법도를 잘 아시니, 제 고충 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소공자의 안위는 제가 책임질 것이니 믿고 따라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남궁휘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상황이었지만 장소와 시 기가 좋지 않았다.  아미파의 금영사태 하나라면 모르지만 화산일검 악소 군은 그로서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게다가 혜인사태를 봤다는 제자의 보고가 있었기에 남궁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독사 같은 계집이 근처에 있다면 일이 커질 수도 있음이야.' 길을 떠나기 전 가주인 남궁연이 자신에게 신신당부하 던 모습이 떠올랐다.  '좋아, 지금은 일단 참아 주마!' 손아귀에서 힘을 푼 남궁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치를 살피던 무림맹의 위사들이 조심스럽게 남궁성현을 부축 하여 데려갔다.  물론 조금 전과 달리 아주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남궁성 현을 다루었다.  "좋소, 좌군사. 그대를 봐서 따르기로 하지. 그러나 무림의 송사에는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저들이 증인이라면 우리에게 너무 불리하지 않은가?" 남궁휘가 아미파와 화산일검을 노려보며 따지자 좌군 사 위공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림맹은 철저히 중립입니다. 모든 일에 투명할 것임 을 맹세합니다. " 좌군사 위공이 강경하게 나오는 배경이 궁금하기만 한 오방원은 주위를 살피다 낯선 인물을 찾아냈다 무림인으로는 보이지 않고 일견 서생으로 보이는 사내가 주눅이 들만도 한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기, 제가 나서도 될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야 말 로 가장 중립적인 인물이고 저기 공자와 다툼이 일어날 때 바로 아래층에서 들은 바가 있으니 증인으로서 아주 적합하다고 보는데 어떤가요?" 손까지 들고 나서는 송현을 보고 좌군사 위공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자가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좌군사 위공은 송현의 돌출 행동을 제지하려 했지만 오 방원이 한발 더 빨랐다.  "그대는 누군가?" 위 아래로 훑어보는 눈길을 마다하지 않으며 웃어 보인 속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소개했다.  "화련상하와 더불어 근간 항주 일대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태평상하의 송현이라고 합니다. " "태평상.... 네놈이로구나!" 자신을 항주까지 발걸음하게 만든 장본인이 눈앞에 나 타나자 오방원은 이를 갈았다. 게다가 자신이 항주의 동 정 상방을 뒤흔들라고 보낸 이자웅이 송현에게 부축 받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속이 뒤틀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하하, 저를 알고 계시나 보네요." "알다마다. 네놈 때문에 내가 십 년은 더 늙었으니 모를 리가 있겠느냐?" "거참 노인네가 입 한 번 거칠구려. " "허 !" 자신의 입담 못지않게 거침없는 젊은 사내를 보며 오방 원은 송현에 대한 평가를 바꿔야 했다. 생글거리는 표정 을 바꾸지 않고 조리 있게 받아 치는 넉살은 젊은 날 자신 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오방원이 이자웅을 노려보자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틀림없구나. 요 녀석 때문에 손해가 무려 일만 냥이 넘었다. 돈도 돈이지만 한 달 안에 항주가를 뒤흔들려던 계획이 무참히 깨져 버렸으니 원수가 따로 없다. ' 모든 일의 원흥을 찾아낸 오방원은 좌군사를 향해 이빨 을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우리로서는 긍정적 이오만?" "허나, 그는 무림인이 아닙니다. " "그러니 더 증인으로서 가치가 있소이다. " '좌군사로서는 딱히 거절한 만한 명분이 없었다.  독기를 품고 송현을 노려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금영사태, 악소군과 더불어 화련상하의 일을 매듭지고 난 뒤에 휘주 상방을 궁지에 빠뜨리려고 했건만 일이 틀어져 버렸어. 제기랄!' 자신의 계획이 뜻한 대로 되질 않자 좌군사는 입 안이 타들어 갔다.  원래 좌군사 위공은 맹주 곽무헌이 폐관수련이라는 명 목 하에 자리를 피한 동안 휘주 상방과 남궁세가 그리고 평소에 무림맹 내에서 맹주를 기만하는 아미, 화산의 기를 꺾어 놓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위공은 계획은 사람이 세우나 결정은 하늘이 한 다는 격언을 떠올리며 몰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모두의 의견이 그렇다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 좌군사 위공이 한발 물러서자 모두들 수긍을 하였다.  객잔을 엉망으로 만든 이들이 떠나자 울상이 된 것은 주 인 혼자였다.  "이거면 부서진 집기들의 수리비가 되고도 남을 것이 오" '헉 !"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가 은자를 건네자 망연자실 바닥 에 주저앉아 한숨을 쉬던 객잔의 주인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고마워했다.  "대신, 오늘의 일은 입소문 좀 내 주여야겠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울다가 웃는 통에 얼굴이 엉망인 주인이 영문을 몰라 하자 사내는 주인장의 귀에 속닥거렸다.  '하하하, 그 정도야 누워서 떡 먹기입니다. 심려 마십시오." 튀어나온 뱃살을 출렁거리며 뛰어나가는 객잔 주인을 보며 사내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게 호인, 이것도 그 풍림화산인지 뭔지 하는 계책 중에 하나인가?" 객잔 주인에게 너무 많은 돈을 주었다면 투덜거리던 막 여위가 머 리를 긁적이며 물어 오자 영호인은 어깨를 으쓱 거리며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낸들 알겠나? 그 친구가 하는 일이 워낙에 엉뚱해서 말이야." "장강 일대를 돌면서 소문을 퍼트리느라 아주 고생을 했다고." "콕콕! 아미와 화산에 가서 화련상하와 태평상하의 일 을 떠벌인 양명은 지금쯤 파김치가 되어 있을 거야. 그런 소리 말게나." 영호인이 고소를 금치 못하자 막여위는 양명의 투덜거리는 얼굴을 떠올리더니 어개를 들썩였다.  "그 꺽다리가 입이 서너 자는 나왔겠구먼. 하하하!" 영호인 역시 상상을 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런데 왜 이 객잔을 택한 거야? 달리 이유가 있나?" 막여위가 물어오자 영호인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곳 동파육이 끝내주네, 구대문파와 오대세 가를 감시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으니 그 정도 호사는 누려도 되겠지?" "암! 송현도 이해할 거야." 두 사람은 모처럼 의기투합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엉망이 된 이 층에는 더 볼일이 없었다. 항주에서 동쪽으로 십여 리 되는 곳에 아름다운 소도시 가 있다. 도심 이리저리 얽혀 있는 운하와 곡선형의 다리 가 인상적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월나라의 도읍지이기도 했던 이곳은 명주라 불리는 소흥주로 유명하다.  중원 명주의 하나로 손꼽히는 소흥가반주는 멥쌀과 밀을 감호 맑은 물로 빚어낸 것으로 전 통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술이다. 소흥의 광장에서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가반주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술을 빚는 양조장이 있어서 부근 일대는 늘 술 향기로 그윽하다. "좋구나!" 술 향기에 취한 송현이 부채를 흔들며 한량이라도 된 듯이 행동을 하자 왕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점점 타락의 길로 접어드신 것 같은 데요?" 왕백의 이마에 일침을 가한 송현은 혀를 찼다 "요 녀석아, 이것이 바로 허허실실 전법이라는 거다. " "크윽, 허허실실?" 아픈 이마를 매만지며 엄살을 부리는 왕백을 보며 송현 웃었다.  "암, 내가 이렇듯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위인이라는 걸 보여 주어야 저들이 안심을 할 것이 아니냐." 그러나 왕백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객잔에서 조신하셨어야죠. 아미파를 망신 준 것은 기억에서 지워 버리셨습니까?" "응?" 왕백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송현을 노려보는 처자가 있었다.  송현과 검을 겨룬 주소민이었다.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그녀의 눈길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화산일검 악소군의 미소였다.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송현을 바라보는 눈길은 소름끼쳤다.  '제길, 나도 모르게 무극무해를 사용하고 말았어.'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게다가 오방원마저 시종일관 자신을 탐색하고 있으니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었다.  '큭!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겠어. 이로서 내가 뜻한 대로 무대와 배우들이 마련되었으니 진 여송과 약속한 대로 항주에서 휘주 상방을 몰아내고 남궁세가와 무림맹을 다투게 만들면 풍림화산의 계책은 성공이다. 그동안 들인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으 려면 그 성패가 무림맹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 송현은 모든 일에 변수가 있음을 잘 알기에 주의하고 또 조심하지만 세상일이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 다. 지금만 해도 좌군사 위공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그는 땅을 치며 후회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예전에 한림원에서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상대라는 것이 속현에게는 부담스러웠다.  무림인들의 원한 못지않은 것이 학자들의 속 좁은 질시 와 투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 인간이 아무래도 나한테 단단히 원한이 있는 것 같아서 곤란한걸. 하지만 이 점을 잘 이용한다면 기회가 을 지도 모르겠어. 대개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오히려 빈틈이 많은 법이니까,' 송현은 자신을 노려보는 수많은 눈길 속에서도 애써 의연하게 행동했다.  "괜히 나 때문에 어려운 일에 휘말렸소." 아직 몸이 성치 않은 이자웅이 미안해하자 송현은 손사래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거, 무슨 말씀이오.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끼리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보다 아까 듣자 하니 무림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듯 하다 나보다 이 대인이 더 곤란한 거 아니오?" "상관없소이다. 내 스승과 나는 떳떳하니 부끄러울 것 이 없소." 아픈 몸이면서도 사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를 높이는 이자웅을 보며 송현은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명분과 명성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양날의 칼과 같구나.' 송현은 무림맹으로 향하는 동안 자신이 상대해야 할 무리의 특성을 어떻게 이용할지 고심했다.  아침 일찍 출발한 일행은 반나절을 허비하여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장소에 도달했다. 중원 무림의 뜻이 하나로 모인 무림맹이 있는 동호였다.  각종 담화집이나 민담 설화 속에 등장하는 무림 고수들 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하여 많은 이들이 먼발치에서나 구경을 하려고 모여드는 소흥의 명물 중에 하나인 무림맹은 동호를 지나 절후산 절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위용 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이곳이 무림맹, 과연 중원 무림의 집합체라고 할 만 하다. " 범인들은 그 위용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거대한 전각들이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불가사의하기까지 한 건축물을 보며 송현은 무림맹의 저력을 실감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겠어!!' 각오를 다진 송현은 육중한 무림맹의 정문이 열리는 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호굴로 들어서는 송현은 긴장한 왕백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신의 마음도 추슬렀다.  우락부락한 무림인들이 득실거릴 거라는 기대와는 달 리 무림맹 내부는 한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처음 방문하는 송현과 왕백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상황 이었다. 내심 많은 수의 무인들이 무공을 연마한다던지 그런 광경을 보고 싶던 왕백과 송현으로서는 여간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후후후, 생각과 달라서 놀란 모양이오." 이자웅이 가슴을 부여잡고 웃음을 참았다.  "여기가 무림맹이 맞소? 정문을 지키는 위사들 빼고는 인적이 한산해서 사실 좀 의외기는 하오." 그럴 줄 알았다며 이자웅은 절벽을 가리켰다.  "전각들이 보이시오? 각 전각들마다 맡은 바 임무가 다른 부서들이고 필요할 업무 외에는 출입을 삼가고 있소. 또 대부분 무공 수련은 개인적인 장소에서 하는 것이 불문율이니 알아두시오. 혹 차후에라도 남의 무공 수련을 훔쳐보는 것은 목을 걸고 해야 할 금기 사항이니 명심에 또 명심을 해야 할 것이오." 이자웅의 충고에 송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 무림맹과 사이도 좋지 않다면서 무림맹에 대해 서 어찌 그리 잘 아는 거요?" 이자웅은 씁쓸하게 웃으며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다 "무림맹은 각 문파에서 파견한 이들이 주재하고 있소 일종의 출장소라고 하면 맞을 것이오." 각 문파를 대변하고 문파에서 생긴 일을 무림맹에 대신 해 알리는 창구와 같은 역할이었다. 무림맹의 중진들이 각문파의 원로들이나 무림의 명숙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들은 무공보다는 처세술이나 언변이 뛰어난 자들이었 다 이자웅도 육가권이 상승의 절학으로 무림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무렵 아버지를 따라서 무림맹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교 잔장 소탕 임무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쫓겨나다시피 한 아픈 상처를 아무른지도 않게 털어 놓았다.  "내가 괜한 짓을 했군요." 멋쩍어 하는 송현을 보며 이자웅은 그럴 것 없다며 고 개를 내저었다.  "이곳을 보면 사람의 인생사와 다를 바가 없는 생각이 들어요. 살다 보면 가파른 언덕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듯 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문파의 운명에 따라서 무림맹에 기거하는 이들의 삶도 크게 요동치니 말이오." 공감하는 바가 크기에 송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보니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무림맹의 화려한 건축물들도 다 부질없어 보였다.  꾸물대는 사이 해가 저물어 버리는 바람에 일행은 일단 여독을 풀기 위해 각자의 처소를 배정받았다.  "어째 우리는 그다지 환영 받는 거 같지 않습니다. " 왕백이 피곤한 발을 주무르며 인상을 쓰자 송현은 입에 손가락을 대고 눈치를 주었다. 송현이 창문 밖을 가리키니 그곳에는 좀 전에는 없던 무림맹의 위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걸 본 창백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송현은 다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아이고, 십 리 길을 쉬지도 않고 왔더니 힘들어 죽겠네" 송현이 일부러 목청을 돋우며 호들갑을 떨자 왕백도 의중을 눈치 채고 맞장구를 쳤다.  "누가 아니랍니까? 저는 너무 힘들어 일찍 눈 좀 붙여 야겠습니다. " "너도 그러냐. 나도 그렇구나!" 일부러 소란을 피우니 위사들도 관심을 보이다 이내 피식 웃고 만다. 한바탕 떠들어 대던 소리 대신에 코를 심하게 고는 소리가 나자 몸이 날랜 위사 하나가 발소리를 죽 이고 다가와 안을 살피고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눈을 감고 깊이 잠든 것 같던 송현의 눈이 떠졌다. 입으로는 계속 콧소리를 내며 조용히 하라는 모 습이 우스웠다 왕백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느라 입을 틀어막았다.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백이 계 속 잠꼬대 소리를 내는 동안 송현은 무극무해의 기운을 끌어 올린 다음 풍보 중에서 가장 기운을 감추는 데 용이한 보법을 펼쳤다.  "응?" 문을 지키던 위사 중 하나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이 내 관심을 끊어 버렸다. 지붕 위에 고양이처럼 달라붙은 송현이 적이 안심하며 몸을 날렸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좌군사 위공이라는 자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이번 일이 성공하고 못하고는 그자와 나의 머 리싸움에 달렸어.' 송현은 헤어지기 전에 유심히 눈여겨보았던 이자웅의 저처를 향해 밤 고양이처럼 움직였다 지극히 조심스러운 움직임. 아무래도 이곳이 무림맹이라는 사실이 송현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림의 쟁쟁한 고수들이 곳곳 에 포진해 있기 때문에 조그만 실수도 해서는 안 된다. 무 극무해의 기운이 송현의 심장을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두려운 마음을 안으로 삼킨 송현은 무림맹 전각 사이로 뛰어 내렸다. 

제십장 풍전등화

- 바람 앞의 등불이라는 지를 비유한다는 뜻으로 매우 위급한 처지를 비유한다 

  초승달에 세상 번뇌를 걸쳐 놓은 듯 밤이 기울어 가는 절후산 능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로움에 휩싸이게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주봉인 용선봉에서 하후봉까지 직선거리가 십 리 조금 넘는 길이에다 실제 산길 거리는 거의 세 배에 달한다. 그만큼 산길에 심하게 주름이 졌다는 뜻이 다 사실 무림맹의 절후산 능선 길은 야간에 걷기에는 마땅치가 않다. 거리도 만만치 않고 보기보다 길도 험하며 곳곳에 세워진 방책들과 수목들이 우거져 코앞의 시야를 확 보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밤중에 이곳을 찾을 이유 가 없다 그런데 달리 용무가 있는 사람이라면 별 수 없이 고생을 하는 수밖에 없다.  '후, 사방에 기척이 숨어 있으니 운신하기가 여간 어렵 지 않다. 다시 처소로 돌아갈까?'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이왕 이 먼 곳까지 왔 는데, 달랑 산꼭대기만 보고 가려 하니 억울하다는 생각 이 들었다.  무작정 나서기는 했지만 낮에 본 무림맹과 달빛 아래 어둠속의 지리는 또 달랐다. 가을 달빛이 내린 산 능선을 따라 낯선 봉우리 사이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이자웅의 숙소를 찾아내겠다던 야심 찬 계획은 사실 무모했다.  더구나 날씨마저도 송현의 편이 아니었다. 낮부터 꾸물대던 하늘은 기어이 비를 내리고 만 것이다.  '이런 비까지 ...... 이중 삼중으로 어려움에 처했지만 송현은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아니다. 오히려 오늘 같은 날이 내 존재를 숨기기에 더 좋을 것이야. 옷 좀 버리는 게 무슨 대수냐.' 낮에 눈여겨보았던 전각의 지붕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자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 대인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좌군사의 손에 놀아나신 겁니까?" 남궁휘가 연신 마땅치 않아 하며 볼멘소리를 하자 뜨거 운 차를 두 손에 잡고 온기를 즐기던 오방원은 눈을 감은 채 코를 찡그렸다.  대행수 자충수는 남궁휘가 오방원에게 함부로 구는 것 이 못마땅했다.  그는 휘주 상방에서는 하늘같은 존재다. 평소에도 무림인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자충수로서는 남궁휘 의 태도가 못내 불만이었다.  "휘주 상방의 큰 어른이십니다. 남궁휘 내협께서는 말 을 가려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뭐라?" 무림의 대선배로서 존경을 받아온 남궁휘로서는 나이로나 신분으로 따져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자충수의 언사에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  '감궁세가가 휘주 상방과 함께 하기로 한 것은 네 녀석 같은 놈에게 충고 따위를 듣고자 함이 아니다 지금 우리 는 휘주 상방 때문에 세가의 후계자를 무림맹에 볼모로 잡혔는데 너희는 무엇을 했느냐?" 남궁휘가 흥분하니 실내는 긴장감으로 휩싸였다.  "그 어린 녀석이 휘주 상방이 항주에서 자리 잡도록 하 기 위해 제 몸까지 내던지며 모험을 하는 동안 너희는 무엇을 했느냔 말이다. " 자충수는 움찔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남궁휘의 질책처럼 이번 일에 휘주 상방의 태도가 미온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남궁세가와 휘주 상방 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인데 남궁세가는 당장에 항주로 진출하기를 원했고 휘주 상방은 평소대로 천천히 지역에 흡수되어 자연스럽게 자리 잡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차 맛이 형편없군, 그 동안 무림맹에 처바른 돈이 얼마인데 손님에게 이따위 차나 대접하는지, 쯧쯧쯧!"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오방원이 운을 떼자 눈썹이 역 팔자가 된 남궁휘의 코 평수가 커졌다 그 속에서 불길이 라도 뿜어져 나을 듯했다.  "지금 차 타령이나 할 때요!" 성난 목소리에도 오방원은 차를 홀짝거리며 혀를 찼다.  "거참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게요? 좀 진정하고 앉으시오" "지금 진정하게 되었소? 세가의 자식이 무림맹에서 수모를 당하고 있단 말이오." 남궁휘의 역정이 그치지 않자 오방원은 결국 찻잔을 내려놓았다 "좌군사 위공은 소공자의 옷깃도 건드리지 못할 테니 걱정 마시오. 그보다는 여우같은 좌군사가 왜 굳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소공자와 우리를 무림맹으로 불러들였는지 그 속내가 궁금하니까." "뜻은 무슨 뜻! 그 놈들은 남궁세가라면 무조건 쌍심지를 돋우는 놈들이오. 이번 일로 우리 세가의 체면을 구기겠다는 심보지 무엇이겠소." "그렇다면 나도 걱정이 없겠지만 이번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으니 그게 문제요." 오방원은 짧은 수염을 손으로 쓸며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 생각을 이어 맞추느라 애를 썼다.  "대행수 자네는 어떻게 남궁가의 소공자와 항주에 오게 되었나?" 오방원의 질문에 자충수는 잠시 신중히 생각을 한 연후 에 입을 열었다.  "장강 이남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여 자초지정 을 캐는 과정에서 역시 괴소문을 듣고 소공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괴소문이라? "네, 어르신! 그것은...... '항주에 화련상하라는 큰 점포가 문을 열었는데 곧 망 하게 생겼다?" 이미 오방원도 알고 있음을 눈치 챈 자충수는 입을 다 물었다. 조용히 한편에 있던 이자웅은 크게 놀랐다. 그런 소문 이 장강 이남에서 떠돌았다니 그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찌하여 자충수가 황급히 항주에 나타났는지 짐작이 갔다.  "게다가 화련상하는 하나를 팔면 두 푼이 손해고 팔지 않으면 세 푼이 손해다. " 오방원은 이자웅의 눈이 커진 것을 보며 그가 모르고 있음을 알았다. 코를 찡그리며 남궁휘를 살핀 오방원은 넌지시 말을 흘렸다.  "또 하나, 무림의 유명한 문파가 항주에 자리를 트려 하니 이제 항주는 그들의 것이다.  우뚝! 남궁휘의 신형이 돌처럼 굳었다 "어찌 알았는지 묻지 마시오. 남궁가에서 쾌나 사람을 풀어 입단속을 시킨 모양이지만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하지 않소. 오늘 객잔에 모여든 화산과 아미를 보더라 도 알 수 있는 일이지." "끙!" 앓는 소리를 내는 남궁휘를 보며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 지 않는 오방원이 언짢은 소리를 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좋을 때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 때도 그 짐을 같이 짊어진다는 뜻이오. 우리가 소림 보다 남궁세가를 택한 것은 위기에 닥쳤을 때 염불이나 외며 체면을 차리기보다 검을 들어 우리를 막아 줄 친구 가 필요했기 때문인데 이러면 곤란하지 않겠소?" 막강한 무공을 가진 남궁휘가 힘없는 초로의 오방원에 게 꼼짝을 못했다. 때로는 말이 주먹보다 강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우리가 남궁세가에 자금을 댔다고 해서 유세를 떤다고 여기지 마시오. 도대체 무엇이 그리 급해서 안달이 난거요?" 오방원이 몰아 부치지만 남궁휘는 묵묵부답이었다.  "혹 우리 몰래 벌써 항주에 거점을 확보했소?"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질 때마다 남궁휘의 그 큰 몸집이 움찔거렸다.  과연 장사치의 세 치 혀는 무서웠다. 오방원은 단순히 몇 개의 질문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아냈다 "그래서 그렇게 안달이 났던 거로군. 남궁성현에 남궁 휘 그대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을 보면 말이오." 남궁휘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나저나 이 일을 꾸민 자는 지금쯤 회심의 미소를 짓 고 있겠군, 원하던 대로 광대들이 다 모였으니 말이야." 오방원이 입맛을 다시자 자충수가 깜짝 놀라며 대꾸했다. "그럼 그 소문들이 모두 누군가가 꾸민 짓이란 말씀 입니까?" 오방원은 다 식은 차에 입을 대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암, 거짓이다마다. 게다가 아주 보기 좋게 당했다. 나 와 남궁휘 대협까지 항주로 오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와 같은 일을 저 질렀느냐 하는 거다. 자꾸만 동정 상방 쪽이 잠잠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그쪽은 확실히 아닙니다. " 이자웅이 급히 말문을 열자 오방원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나도 나름대로 알아보았지만 이 일은 확실히 동 정 상방과 맞지 않는 일이지, 곰처럼 우직하고 저돌적인 동정 상방 놈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오방 원에게 자충수가 조심스립게 의견을 피력했다.  "혹, 무림맹의 좌군사가 아닐까요?" "흠, 가장 유력하기는 한데 하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그 친구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 문제야. 더구나 우리 와 약조도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꾸몄다면 스스로 자멸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알면서 화약을 지고 불에 뛰어들 만큼 무모한 친구는 아니지." 좌군사 위공과 맹주 곽무헌의 목줄은 자신이 잡고 있었다. 지금도 소매 속에는 은자 이만 냥과 바꾼 밀약의 내용 이 적힌 서류가 잠들어 있다. 이것이 알려지면 맹주 곽무헌과 좌군사 위공은 맹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중재를 해야 할 맹의 수뇌부가 뇌물을 받고 특정 문파를 눈감아 준 꼴이 되기 때문이다.  "어렵군. 어려워........ 오방원이 식은 차보다 더 차가운 표정으로 상념에 빠졌 다.  그걸 끝으로 실내는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늦은 가을밤은 빗소리에 점점 깊어만 갔다.  달빛마저 진한 먹구름에 가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조심스럽게 한 인영이 움직였다. 고양이마냥 살금살금 지붕 을 타고 내려와 다른 전각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살쾡이보다 더 날렵했다 비에 젖은 몸으로 무림맹의 전각을 살피는 송현은 이자 웅의 처소에서 너무 오래 지체해서 시간이 별로 없었다.  허나 중요한 정보를 엿들었기에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 많은 전각 중에 좌군사 위공의 처소를 찾기란 정말 이지 사막에서 바늘 찾기구나!" 잠시 한숨을 내쉰 송현은 내일이 오기 전에 상대방의 의중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했다. 어둠과 비 그리고 도처 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을 피해 송현은 곡예사가 줄을 타는 심정으로 어둠속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불빛을 길잡이 삼아 다시 몸을 날렸다.  무림맹 내부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송현의 이마에서는 진땀이 흘러내렸다 "제길, 벌써 몇 번째 제자리걸음이니 큰일인걸." 무극무해의 기운을 최대로 끌어올려 풍보를 펼쳐 보았지만 돌고 돌다 보면 같은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귀신에 홀린 건가? 아니면 누군가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나?" 영문을 모르니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죽림에 들어선 순간부터 송현은 깊고 깊은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분명히 오솔길에 발을 들여 놓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주변 풍경이 사라지고 울창한 죽림이 나 타났다. 그 다음부터는 덫에 걸린 생쥐 꼴이었다. "하아, 하아!"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내력을 소모하며 경신 법을 발휘 해 보았지만 결국 또다시 제자리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많은 힘을 쓰기는 했지만 무극무해의 기운을 빌려 쓰는 경신법 풍보가 자신을 지치게 만드는 일은 단연코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인위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 " 몇 차례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에야 송현은 죽림이 자연 의 순리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가만있자 태평 문을 수리하면서 황염 영감이 기문진식 에 대해서 가르쳐 준 것이 있었는데?" 어깨너머로 배운 기문진식에 대한 기억을 어렵게 떠올린 송현은 죽림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정 한 규칙에 의해서 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한 팔 괘진은 아니었지만 무슨 진인지는 기문진식에 정통하지 않은 송현으로서는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응? 바람이 서쪽에서 부는 데 대나무는 동쪽으로 기 울지 않고 오히려 바람 부는 쪽으로 기운다?" 안력을 돋우어 주변 풍광을 살피던 송현은 죽림 속에서 이질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역행이로구나!" 언뜻 지나치기 쉬운 자연의 섭리가 이곳에서는 반대였다. "그렇다면 길을 찾고자 하면 절대로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송현은 이전에 황궁서고에서 읽었던 잡서 중에서 진법에 대해서 기술해 놓은 장황한 책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진이란 점들을 이은 선과 같아서 그 시작점을 알면 끝 도 보이기 마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역행을 근본으로 삼은 진법이니 그 시작이라 함은...... 어디 보자........ 송현의 시야에 이질적인 기운들이 떠오르며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물?" 어이가 없었다.  죽림 사이로 흐르는 작은 개울이 실상은 흐르지 않고 있었다. 물이라면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하지만 죽림의 개울은 흐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이걸 눈치 채지 못했을까?" 이마를 치며 황당해하던 송현은 그것이 바로 기문진식 의 무서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익숙한 것에 무심하기 마련이고 또한 자연의 법칙이 의당 당연하다고 믿어 왔다. 그 말은 늘 접해 왔기 때문에 인지하는 것이 무뎌진다는 간단한 논리였다. 자연 히 익숙지 않은 것에 감각은 집중하게 되어 정작봐야할 것들을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속임수에 속아 오랜 시간을 낭비한 송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흐르지 않는 개울가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주변의 풍경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면 서 걷다보니 하늘까지 닿을 듯 솟아있던 죽림이 어느 순 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후, 진법이라는 것이 이렇게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다음에 반드시 공부를 좀 해 두어 야겠어 " 뒤를 돌아보며 혀를 내두른 송현은 눈앞에 난 오솔길이 이번에는 진짜이기를 빌며 안으로 들어갔다. 저 너머에서 보이는 불빛이 좌군사 위공의 거 처이기만 을 기도했다.  밤손님을 보고 올빼미가 울어대자 송현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올빼미가 울 지 않기를 바랐다. 기특하게도 그 마음을 알았는지 올빼미는 울음을 그쳤다.  "후우우, 이거야 원 정말 못할 짓이로구나!" 진땀을 흘린 송현이 오솔길의 끝에 다다르자 낡은 초막 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송현이 기대하는 풍경이 아니었다. 무림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가옥을 보며 송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영문을 몰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무성한 숲과 오솔길뿐이었다.  "이것도 허깨비 인가?" 또 다시 진법에 빠져 자신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그때 바람결에 고기 굽는 향이 묻어왔다.  "흠! 흠! 진법이 냄새까지도 나게 할 수 있나“ 냄새는 낡은 초막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꼬르륵 눈치도 없이 송현의 배가 소리를 냈다 "그렇고 보니 아무것도 먹질 못했네. 흠! 잠시 살펴 볼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송현은 기척을 죽이고 살며 시 접근했다.  유혹은 초막의 뒤편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가 오는 밤에 지붕도 없는 곳에서 고기를 굽다니 한심한 일 이었다. 정갈한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빗속에서 불을 지키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초라한 가옥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모를 가진 사내였다 "큭!" 그 모양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만 송현은 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누구냐?" 꽤 사나운 음성이 터져 나오자 송현은 이미 들켰음을 인정하고 순순히 걸어 나왔다. 어둠속에서도 사내는 송현 이 잘 보이는 듯했다.  "이 오밤중에 웬 글쟁이지?" 사내는 잠시 송현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이내 관심을 끊고 불을 살리는데 집중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예사롭지 않은 복장으로 보아 틀림없이 지체가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내가 쭈그리고 앉아서 불길을 살리기 위해 입 바람을 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쉽지 않았는지 갈 길 이 바쁜 송현은 참지 못하고 나섰다 "지붕을 세워야 불길이 젖지 않을 거 아닙니까?" "아, 그렇지!" 전혀 몰랐던 사실인지 사내는 이마를 치더니 다 쓰러져 가는 초옥의 문짝을 뜯어내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어설픈 지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젖은 나무들은 고기를 굽는데 필요한 화력 을 충분히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열 양공이라도 익혀 둘걸 그랬나?" 버럭 성질을 내며 불길을 헤집던 나뭇가지를 바닥에 내 던졌다.  보다 못한 송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다가왔다.  "고기를 익혀 줄 테니, 저 좀 도와주시렵니까?" "응?" 하늘에서 천군마마라도 나타난 듯 사내의 얼굴에는 희망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그러더니 그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겠다는 열의를 보였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만 송현은 죽어가는 불길을 파헤쳤다.  애써 피워놓은 불길을 마구 헤집으니 사내는 기겁했다 그러나 송현은 불길을 헤집는 것도 모자라 바닥을 파내 기 시작했다.  "너 지금 미쳤냐?" 사내가 울듯이 소리쳤지만 송현은 대꾸하지 않고 땅속 을 나뭇가지로 파냈다. 불길이 피워졌던 땅속은 빗물에 젖 지 않아서 모락모락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한 송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파헤친 불길 속에서 숯을 골라내어 다시 땅속에 집어넣은 다음 마른 흙을 덮었다. 소매 속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어 사내가 굽다 실패한 닭고기를 잘 싸맨 후 빗물에 젖어 진흙이 된 황토를 골고루 발랐다.  "아니, 이런 미친놈을 봤나? 귀한 음식에 흙을 묻히다 너 뭐하는 짓이냐?" 펄쩍 뛰는 사내에게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준 송현은 여러 번 진흙을 덧바른 후 진흙이 굳어가자 서둘러 땅속 에 넣고 흙과 재를 함께 묻었다.  사내는 손으로 땅속에 묻힌 닭과 송현을 연신 번갈아가 며 가리키더니 울듯이 소리쳤다.  "이 닭 도적아! 오늘 내 손에 경을 칠 줄 알아라!" 장포의 소매를 걷어 붙이며 으름장을 놓는 사내에게 송 현은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쉿!" "쉬?" 사내는 너무나 태연한 송현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슬슬 익기 시작하네요."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확인한 사내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송현의 말대로 향긋한 냄새가 땅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오, 참기 힘든 좋은 향기로다!" 연신 감탄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이 같다. 송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 그러고 보니 네놈은 뭐하는 녀석인데 여기까지 을 라온 거지?" 겨우 생각났는지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송현을 살 폈다.  '내 비역으로 올라오려면 역행진을 지나야 하는 데 요 녀석이 설마하니 역행 진을 파해하고 올라왔다는 말 은 아니겠지?' 어느 모로 보나 백면저생에 불과한 송현이었다.  '제길, 좀 더 참을 걸 그랬나? 내가 밖으로 돌아다닌다 는 것이 밝혀지면 곤란한데?' 고민하는 듯 보이는 사내가 자신을 노려보자 그의 부담스러운 눈길을 애써 피하며 송현은 사내의 관심을 닭고기 로 돌렸다.  "이제 다 된 듯싶습니다. " 나뭇가지로 흙을 퍼내기 시작하자 사내의 표정에 화색 이 돌았다.  송현을 의심하고 있던 사실은 까맣게 잊어 버렸다. 그 만큼 그는 오랫동안 배를 곯고 있었다.  '젠장, 벽곡단 따위로 며칠을 더 버티다가는 미쳐 버릴 지도 몰라.' 이미 본능에 충실해진 사내는 냄새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시 생각을 접었다. 송현이 땅속에서 파낸 진흙 덩어리를 세게 치자 도자기가 깨지듯 굳어 버린 진흙이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흙을 털어 내고 손수건을 걷어 내 자 잘 익은 닭고기가 속살을 드러냈다 "오오오!" 사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드세요."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할까 봐 사내는 체면 불구하고 송 현의 손에서 재빨리 닭고기를 낚아채더니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음식이 뜨거워 입천장을 데일 지도 모르는데 사내는 대수롭지 않은지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드세요. 누가 뺏어 먹을 사람 없으니까요" 대답 대신 고개만 주억거리는 사내의 앞으로 닭고기의 뼈가 쌓이는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꺼 억 !" 기분 좋은 트림이 흘러나오며 사내는 배를 두드리고 흡족해 했다.  "참으로 맛난 요리 였다 " 배고픔이 사라지자 송현이'눈에 들어왔는지 사내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러고 보니 네 녀석은 누구냐?" 사내는 입가에 번들거리는 기름기를 닦아 낼 생각도 하 지 않고 물었다 "그냥 길을 잃은 사람입니다. " "길을 잃어?" "네!" 아무 거리낌 없이 대답하는 속현을 보며 사내는 헛웃음 을 터뜨렸다.  "이 밤중에 무링맹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서생이라 참 으로 웃기는 소리구나. 그래 어딜 가려던 참이지?" 열손가락에 묻은 닭고기의 흔적을 열심히 빨던 사내는 송현의 대답에 동작을 멈추었다.  "좌군사 위공의 처소입니다. " 입맛을 다시며 인상을 쓰던 사내가 천천히 송현을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무슨 일로 찾아가는 것이냐? 이 한밤중에 좋 뜻은 아니렷다?" 사내의 눈빛이 서늘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송현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당연하죠. 무슨 말들을 하나 몰래 들어보려고 합니다. "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하는 송현을 보고 사내는 기가 막혀 했다. 뻔뻔해도 이 정도면 가히 일류 고수급이었다.  "흠, 내가 무림맹 사람이면 어찌하려고 그런 말을 늘어놓는 게냐?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너를 고자질하거나 해 치면 어찌하려고 했느냐?" 배가 부른 사내는 이제 송현과 장난을 치듯이 말장난을 건넸다.  물론 눈빛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대답 여하에 따라서 손을 쓸 작정인 듯싶었다. 그의 몸에서 우드득!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소름이 돋았다.  몸으로 임포를 놓는 사내를 보고 송현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배가 부르니 이제 살만 하신가 봅니다. " "네!" 허를 찌르는 재치에 사내는 애써 끌어 모았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녀석이기에 이리도 대범한 거지?' 대부분은 자신과 눈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만큼 사내는 자신의 눈길이 무섭다는 것을 안다. 그 런 자신의 눈을 보고 웃는 인간은 두 종류뿐이었다. 미쳤거나 자신이 넘치 거나 둘 중 하나땄다.  "좌군사=의 처소를 엿들어서 무얼 하려는 게지?" 호기심을 드러내는 사내에게 송현은 누가 듣지도 않는 데 속삭였다.  "그자의 뒤통수를 쳐서 어떤 무리와 척을 지게 만들려 고 합니다. 기왕이면 서로 죽고 죽이도록 싸우게 만들 참 입니다. "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는 송현을 보며 사 내는 분명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너는 내가 너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당연하죠." "어째서냐?" 자못 궁금하다는 투로 물어보는 사내에게 송현은 뼈만 남은 닭고기를 가리켰다.  "상당히 배를 주린 듯 하신데 맛난 요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 "흥! 그 걸로는 부족해!" 사내가 고개를 돌리며 화를 내자 송현은 그가 거부하지 못할 조건을 내걸었다.  "그럼 황궁요리를 맛보게 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드시는 어선방의 일급 요리 말입니다. "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내는 이미 눈을 감 고 진수성찬의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러나 세차게 고개를 흔든 사내가 정색을 했다.  "흠! 흠! 나도 체면이 있지. 그럴 수는 없다. 네 녀석을 잡아서 위사들에게 넘겨야겠다. " "그러실 수 없는 입장 아닙니까?" "뭐?" 송현을 붙잡으려던 사내는 여유를 부리는 송현을 보며 잠시 주저했다.  "어째서냐?' 불신이 가득한 눈길을 받은 송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 숨어서 고기를 드시니 것은 분명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죠. 더구나 초막 안을 보니 이곳에서 지내시지 않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딱히 할 말을 잃어버린 사내는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려 다 이내 그만두었다.  "그렇다면 곡기를 참아가면서까지 정체를 숨겨야 한단 뜻이니, 그쪽이나 저나 피차 큰소리 낼 처지는 아니라는 거죠." 구구절절 속을 뒤집어 놓는 말에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럽다! 난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니 네 녀석을 죽 여 버리겠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비밀을 지킬 수 있겠지 . "사내가 음흉하게 웃자 송현은 더 느물거렸다.  "과연 그럴까요?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도망치는 데는 가견이 있습니다. " 그걸 증명이라도 할 듯이 신형을 옮기는 동작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호라, 경공을 쓸 줄 안단 말이지?" 전혀 내공이 없어 보이던 송현이 상승의 경신 법을 구사 하자 사내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장난기 섞인 미소도 얼굴에서 사라졌다 "제가 소동을 피우면 무림맹의 수많은 이들이 당신을 보게 될 터이니 그래도 좋다면 어디 한번 솜씨를 보여주시지요." "허, 그 녀석 배짱 한번 대단하군. " 사내는 송현의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작게 한숨 을 내쉰 사내는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벌떡 일어섰다.  송현은 그가 해코지라도 하는 줄 알고 기겁하며 재빨리 떨어졌다.  "녀석 아까와는 달리 겁이 무척 많구나!" 사내는 송현을 비웃으며 발로 바닥을 문질러 흔적을 지웠다. "대신 조건이 있다. 나도 간다. 혹여나 네 녀석이 좌군 사에게 위해를 가하면 나중에 나 역시 곤란해지니까!" "좋습니다. 그럼 거래하시는 거죠?" "좋다. 네깟 녀석이야 벌레를 죽이듯 손가락 하나면 충분하니 까 말이야." 사내의 음성에서 진한 살기를 느끼고 바짝 긴장했다 그 말이 결코 허언으로 들리지 않았기에 송현은 잠시 자신이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닌지 후회가 들었지만 시간이 너무 없었다. 밤은 결코 길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송현은 오솔길을 따라서 나는 듯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사내를 따라서 어디 론가로 향했다.  잠시 후 오솔길을 벗어나자 십여 채의 거대한 전각이 위용을 드러냈다. 그중 원형으로 만들어진 전각을 가리켰다 "저곳이 좌군사 위공의 처소다. " 사내가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살핀 송현은 경비가 다른 전각에 비해 삼엄한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군요!" 만족스러워하며 송현은 사내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것은 사내가 길을 너무나 잘 알 아서 어렵지 않았다.  "하하하, 제집을 조심스럽게 훔쳐보는 일이 이렇게 재미날 줄은 미처 몰랐다. "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내는 이런 일들을 재미있어 했다.  송현은 문득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비록 필요에 의해서 동행하고 있지만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정체가 뭡니까?" 사내는 갑자기 짓궂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크크크, 나 말이냐?' 사내는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쑥스러운지 괜히 헛기침 을 했다.  그런 사내의 행동에 송현은 억지로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이름이 흘러나오자 송현은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당.... 신이 곽. 무. 헌?" 사내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 무림맹주이며 곽가권의 창시자로서 무림의 일대 종사라고 일컬어지는 무학의 귀재가 당신이란 말인가요?" 송현의 말투가 마음에 들었는지 사내를 허리에 양손을 얹고 가슴을 폈다.  "그래, 내가 그 곽무헌이다." 아연실색한 송현은 재빨리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공포가 온몸을 지배하여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이자가 곽무헌이라니 세상에 이런 기막힌 우연이 어디있담.' 송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추기 위해서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저 우람한 체격이 내뿜는 입김에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원망해 보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운을 믿어 보는 수밖에...... 

(학사장문인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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