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九 章 호사다마(好事多魔)
배가 선착장에 들어오자 강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뱃사람 중 하나가 오늘의 마지막 배임을 크게 외치자 사람들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우당탕!
등짐을 지고 배를 타려던 노인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어구구, 사람 죽네!"
허리를 다쳤는지 노인은 인상을 쓰기만 할 뿐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흥, 천하디 천한 것이 어디 함부로 구는 거야!"
비단 옷으로 치장한 젊은 청년들이 노인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배에 올랐다.
아마도 노인이 청년들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청년들을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지만 나서서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차림으로 보아 유복한 집안의 자제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청년들 곁에는 인상이 험악한 무사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흥! 어쩌면 저렇게 안하무인일 수가 있지."
"소소, 노인장이나 봐 드리자."
"알았어요, 언니."
날렵한 경장 차림의 여인들이 쓰러진 노인을 부축해서 배에 태웠다. 사람들은 그제야 여인들과 함께 노인의 짐을 들어 다시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허, 낭자들이 대단하군."
송현이 크게 감탄하자 영호인이 보통 규수들은 아니라고 귀띔해 주었다. 송현도 그녀들의 손에 들린 청명검을 보았기에 무림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남성을 떠나 호북성에 다다른 일행은 천호(千湖)의 성이라고도 불리는 곳답게 천 줄기 이상의 하천이 흐른다는 호북성인지라 육로보다 뱃길을 택했다.
별다른 일만 없다면 항주까지 시간도 줄이고 훨씬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하천의 대부분은 장강(長江) 및 한강(漢江)으로 회류하여 '장한 하천군(江漢湖群)' 이라고도 불린다. 바람까지 순풍으로 도와주니 배는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강바람이 강둑의 갈대를 흔들자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강물 위로 흐르는 달빛을 벗 삼아 송현은 오랜만에 밤의 정취를 즐겼다.
그대는 보지 않는가?
하늘에서 내달은 황하의 물이 굽이쳐 흘러 흘러 바다에 들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그댄 또 보지 않는가?
드높은 집에 사는 부귀한 이들
거울 속 백발 보고 한숨짓는 걸
아침엔 푸른 가락이 저녁엔 백설
인생이란 기쁠 때 기뻐할 것이
달빛 아래 금술단지 헛되이 마라.
이백의 시를 한 수 외우니 그동안 마음속에 쌓인 때가 저 강물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배의 난간을 손가락으로 퉁퉁 두드리며 시조를 외는 즐거움이야말로 송현이 즐겨하는 오락이었다.
"이백의 장진주를 이처럼 달빛 아래 강 위에서 들으니 참으로 아름답군요."
갑자기 낭랑한 소리가 들려오자 송현은 깜짝 놀라서 몸을 돌렸다. 미처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을 너무 긴장을 푼 탓이라 자책을 하기도 했지만 다가오는 여인의 걸음걸이에 실린 내력이 가볍지 않다는 것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선착장에서 노인을 도와준 여인들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사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방해를 한 셈이군요."
송현의 얼굴이 붉어지며 당황해하자 그녀는 무척이나 재미있어 했다.
"호호호, 부끄러움을 많이 타시네요."
강바람이 살랑거리자 여인의 내음이 송현을 휘감고 스쳐 지나갔다.
쿵!
무언가 내부에서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송현은 앞에 있는 여인이 그 소리를 들었을까봐 전전긍긍 했다.
"어디 아프신가요? 안색이 좋지 않네요."
그녀가 송현이 이마를 만지려 하자 송현은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어머 제가 결례를 저질렀네요. 미안해요."
혀를 살짝 내밀고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더 자극적이었다.
"하야"
송현은 주화입마라도 된 것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송현아, 송현아!'
스스로 채찍질을 해 보지만 백 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 온 말의 심장처럼 송현의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처음 느끼는 이상한 야릇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싫지 않은 느낌이었고 왠지 모르게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서희라고 해요."
"네?"
"이름이요!"
그녀의 짓궂은 장난에 송현은 완전히 천국에서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저, 저는 송현이라고 합니다."
"송현, 송현‥‥‥좋은 이름이네요. 한 번 들으면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은 이름이에요."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송현의 마음을 둘러싼 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저항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데
물결은 넘쳐흘러 되돌아오지 않도다.
한스러워라 천지는 장구하여 언제 다하랴마는
그 넋은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리라.
서희의 화답가가 소곤거리듯 흘러나왔다. 뱃머리가가 강물을 차고 나가는 소리에 묻히자 그 슬픔이 같이 녹아들었다.
"좋구나! 황우가 의제(義弟)를 시해한 그 음이 잘 녹아나는구료."
잠시 여인의 향기에 취해서 어지러웠던 시대의 고사를 노래한 시조 한 수에 맑은 정신으로 돌아왔다.
"호호호, 무늬만 학사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네요."
"그렇게 보였나요?" 송
송현이 멋쩍어 하자 서희는 특유의 혀를 살짝 내미는 미소로 사내의 마음을 흔들었다
"요즘은 워낙에 거짓을 말하는 사내들이 많아서 쉬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슬픈 현실이군요."
송현이 개탄하자 서희는 달빛에 드러난 송현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참으로 수려한 외모에 눈에는 정기가 가득하고 음성은 맑고 사심이 없어 믿음이 묻어난다. 보기 드문 사내야.'
송현이 서희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흔들렸듯 그녀 역시 송현의 박식함과 준수함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거기에 달빛이 고고히 흐르는 강물은 운치를 더해 주니 그야말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송현은 이대로 시간이 멈춰 주길 기도했지만 인간사 좋은 일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악!"
이때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송현의 표정이 급변했다.
"타이라?"
소리가 난 곳으로 급히 뛰어가자 서희 역시 그를 뒤쫓아 갔다.
뱃머리에서 내려오니 왕백이 잘 쓰지도 못하는 검을 빼 들고 웬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왕백아!"
송현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송 학사님!"
구경하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니 왕백과 타이라가 겁에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냐?"
왕백의 검을 빼앗은 송현이 몸을 돌리자 낮에 행패를 부렸던 청년들이 야비한 얼굴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저놈들이 타이라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했습니다."
더 듣지 않아도 되었다. 낮에 이미 저들의 성품이 어떤지 알았으니 어떤 짓거리를 하려고 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보아하니 배운 사람들인 것 같은데 이 무슨 행패인가?"
낮게 타이르는 송현이 우스운지 청년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하하하, 오랑캐 계집의 속살 맛 좀 보겠다는데 어린놈부터 학사 나부랭이까지 끼어드니 이거야 원 줄을 서기로 해야 하나?"
"계집질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고 직책이 뭐 대수겠는가?"
"암, 사내구실만 할 수 있다면야 누구든지 줄을 서도 되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말을 너무도 태연히 하는 인간 말종들에게 송현은 자비심을 베풀고 싶지 않았다. 왕백의 손에서 빼앗은 검에 힘을 주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개만도 못한 것들!"
난데없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해하고 있었다.
"서희 소저!"
목소리의 정체를 알게 된 송현이 그녀를 말리려하고 했지만 이미 그녀는 청년들의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오, 경국지색이 따로 없구나!"
서희의 미모에 청년들은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희번득거리는 눈동자에는 추악함만이 가득했다.
"너희 같은 녀석들을 보고 부르는 말이 있다."
서희의 얼굴에서 아름다운 미소가 사라졌다.
퍽!
"으악!"
맨 앞에서 제일 건들거리던 청년이 가슴을 발로 걷어차 여 나가떨어졌다.
"바로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이지."
여자에게 얻어맞은 것이 분한지 아니면 개돼지만도 못 하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난 청년이 악을 썼다.
"저년을 잡아!"
청년들이 데려온 무사들이 서희를 붙잡으려 손을 뻗치자 그들을 비웃으며 그녀의 신형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우당탕!
건장한 사내들이 가녀린 여자에게 휘둘려 뱃전에 나뒹굴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배꼽을 잡았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고 고용인이 청년들에게 욕설을 듣자 무사들이 표정이 험악해졌다.
"어디서 좀 배웠나 보구나! 좋다,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챙! 챙! 챙!
검을 꺼내 들자 구경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송현이 크게 놀라 뛰어들려고 하자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호인‥‥‥ 어째서?"
송현이 의아해하자 영호인은 그저 웃기만 했다. 고개를 돌려 서희를 찾은 송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물 찬 제비처럼 신형을 움직이며 놀라운 실력을 보여 주었다. 한참 동안 용을 썼지만 그녀의 옷깃도 스치지 못하자 무사들은 비겁하게 협공을 시작했다. 세 개의 검이 위아래의 급소를 노리고 찔러 왔지만 서희는 가볍게 피하며 봉추나연의 수법으로 무사들의 손목을 노렸다.
"아미파의 소양검(小陽劍)이야."
"아미파였구나!"
영호인이 서희의 출신 내력을 단번에 알아냈다.
"콕!"
서희를 핍박하던 무사 두 명이 손목에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나자 홀로 남은 무사가 당혹하여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흥!"
화가 난 서희는 무사의 검이 심장을 찔러 오자 비선연회의 수법으로 검을 흘리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무사의 목적을 검 손잡이로 강하게 후려쳤다.
"커헉!"
목을 부여잡고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무사들을 뒤로 하고 서희가 청년들 앞에 섰다. 이제 아까와 같은 떠벌임은 없었다.
"왜 그 입이 조용해졌지?"
서희가 날카롭게 쏘아보자 청년들을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퍽!
"크흑!"
서희의 검집 모서리가 청년의 가슴팍을 짓눌렀다.
"제‥‥‥ 제발!"
청년은 검집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내공이 실린 서희의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한번 잡아봐라. 그럼 용서해 주마."
서희가 검 손잡이를 청년에게 향하게 했다. 청년은 즉시 이를 갈며 검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짝!"
눈앞에서 별이 번쩍였고 고개가 부러질 듯 획하니 돌아 갔다.
"다시!"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른 청년이 오기가 생겼는지 다시 손을 뻗었다.
짝! 짝!
청년은 검의 손잡이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양 볼이 보기 흉하게 부어올랐다.
"아으‥‥‥ 아으."
입 안이 모두 터졌는지 발음이 분명하지 않았다. 입가로 흐르는 피의 양이 제법 많았다. "용서를 빌고 싶으냐?
그럼 저 소녀에게 무릎 꿇고 잘못을 빌어라.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사내구실을 하지 못 하게 만들어 주겠다.
"겁에 질린 청년들이 엉금엉금 기어가 왕백과 타이라에게 용서를 구했다. 왕백의 뒤에 숨어 있던 타이라는 배시시 웃으며 서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타이라의 웃음을 본 서희의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제가 주제넘게 나선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서희가 다소곳하게 말하자 송현은 어떤 모습이 그녀의 진정한 면인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송현이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영호인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아미파의 여협에게 큰 신세를 지었습니다."
영호인이 포권지례를 하며 고마움을 표시하자 그녀의 눈이 낯선 이를 경계했다.
"아, 주 소저. 이쪽은 제 친구 영호인이라고 합니다."
송현이 소개하자 서희도 표정을 풀고 검을 든 채 포권지례를 하였다.
"아미파의 속가제자 서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사매인 하연이라고 합니다."
언제 왔는지 낮에 성질이 괄괄했던 여인이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언지는 마음이 착해서 탈이야. 저런 놈들은 모두 잘라 냈어야 해!"
하연이라는 여인이 정말로 베어 버릴 듯 자세를 취하자 청년들은 아랫도리를 붙잡고 선실로 줄행랑을 쳤다. 사람들이 그 꼴을 보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연 소저는 참으로 호방하십니다."
송현이 칭찬을 하자 그녀는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었다. 조금 전 사내들의 그것을 잘라 버린다고 했던 씩씩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얘가 왜 이러지?"
서희는 평소답지 않은 그녀의 태도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사지를 배배 꼬는 것이 어디가 아파 보였다
"너 어디 아프니?"
"언니!"
머리를 만져 보는 서희에게 팍 하니 소리를 지른 그녀가 토라져 선실로 뛰어 들어갔다. 서희는 당황하여 서둘러 인사를 하고서 그녀를 쫓아갔다.
"역시나 특이한 아가씨들이야."
영호인은 그저 한밤의 소동으로 웃어넘겼지만 송현의 머릿속에는 온통 서희에 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낮을 달려 양자강에 도착한 배는 선착장에서 짐과 사람을 내렸다. 다음 배로 갈아타야 하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강을 건널 뱃길이 끊겼다. 하는 수 없이 객점을 찾아 밤이슬을 피해야 했다. 객잔에는 송현 일행과 같은 이유로 많은 여행자들이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국에서 몰려온 탓에 각지의 사투리가 뒤섞여서 들려오니 귀가 멍할 정도였다. 그런 소란을 뚫고 겨우 한 자리를 차지한 일행은 간단한 소면과 고기볶음을 시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배에서 만난 서희와 하연 두 사람도 일행과 합석하게 되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역시나 일행 중 유일하게 여자였던 타이라였다. 아직도 어눌하지만 수다스러운 것은 한족 여인과 다를 바 없었다. 여자들의 수다가 이어지자 할 일이 없어진 송현을 보며 투덜거렸다.
"어라, 또 안 보이시네. 요즘 무슨 근심이 그리 많은지 말수도 부쩍 적어지셨는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걱정 되네."
왕백이 입 안에 음식을 잔뜩 집어넣고 우물거리자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던 송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라 당황했다. 일행들이 식사를 하는 곳에 영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 았다.
'호북성에 들어온 뒤부터 말문이 닫혔다. 무당산이 가까워지기 때문인가?'
송현이 영호인의 마음을 모두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에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연이 사문을 위해 자신의 딸을 제 손으로 베어 버리는 것을 보며 무림인들에게 사문이 어떤 존재인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속가제자라 할지라도 사문에서 배척당한다면 그 것은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호인‥‥‥"
선착장 근처에서 영호인을 발견하자 반가움과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흐르는 물결에 모든 시름을 실어 보내려는 듯 영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로군."
영호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강물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다들 자네 걱정이야."
"하하하, 그랬어! 이거 미안한걸!"
영호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해하자 송현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우린 친구지?"
뜬금없이 물어 온 송현의 눈을 보고 영호인은 미소 지었다.
"물어보나 마나지. 우리는 친구인 동시에 생사고락을 같이한 동료잖아."
"그럼 내게도 그 짐을 나눠 주라고. 혼자만 짊어지지 말고."
별다른 말은 아니었지만 따뜻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좋아, 아주 팍팍 덜어 주지. 대신 자네도 내 부탁을 좀 들어줘."
"그게 뭔데?"
자신을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를 보며 영호인은 송현의 어깨를 잡았다.
"자네가 좀 둥글게 살았으면 좋겠어.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는 말처럼 조금은 부드립게 말이지."
송현은 영호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최근에 남궁세가와 척을 지고, 주왕부와 원수가 되었으니 언제고 그것이 목을 조르게 될까봐 조심하자는 것이었다.
잔소리를 늘어놓을 줄 알았던 송현이 순순히 인정하자 영호인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럼 자네가 내 짐을 덜어 줄 차례인가? 내 고민을 보여 주지."
영호인은 사람 키만 한 갈대숲으로 들어가 검을 꺼냈다.
"자, 잘 보게나!"
웃차!
영호인 손이 하늘로 올라가며 발을 학처럼 접어들었다.
태을현무검(太乙炫武劍)
아래서 위로 좌에서 우로 공간을 점하는 검은 흔들거리는 몸을 따라서 매섭게 움직였다. 이 장여에 이르는 주변 갈대들이 모두 잘려 나가며 비를 내렸다.
"후우, 어떤가?"
호흡으로 일추천하며 영호인이 송현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네."
송현이 모르겠다고 하는데도 영호인은 환하게 웃으며 재차 태을현무검의 이십사수를 다시 펼쳤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처음보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는 점이다.
"하아, 하아 지금은?"
"더 모르겠어."
"좋아, 마지막이다!"
움직임은 느려졌는데 몇 배나 더 힘들어 했다. 보는 사람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당의 태을현무검을 영호인은 경건하게 펼쳤다.
털썩!
세 번째 태을현무검의 이십사수 시먼이 끝나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바닥을 두 손으로 짚은 영호인에게 송현이 다가와 부축했다.
"이젠 완전히 잊었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영호인의 얼굴이 무척 밝아졌다
"하아, 하아,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에게 보여 줘야만 했어."
"알아, 나 역시 평생 무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뭐 어때, 우리는 친구잖아." 물 먹은 솜뭉치처럼 늘어지는 영호인을 업고 송현은 객잔을 향해 걸었다.
송현은 영호인의 짐을 함께 나눠진 것에 만족했다. 본의 아니게 많은 문파의 무공 중에서 무당의 무공을 더 많이 익히게 되었다. 제운종, 칠성검, 팔괘비룡검 그것은 무극무해의 기운으로 펼치는데 무당의 검법이 잘 조화가 되었기도 했지만 제대로 배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나 칠성검과 팔괘비룡검은 무당제일협인 유자강에게 직접 전수를 받았기에 마치 제 몸처럼 사용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것이 영호인에게 무거운 짐이 된 것이다. 그가 사문에서 받는 오해는 평생을 따라 다닐 것이다. 송현은 태을현무검까지 익혀 있으니 이제 영호인과 똑같이 짐을 나눠 가진 것이다. 무당에 진 빚은 이로서 둘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영호인은 그것이 미안했고 송현은 그렇게 해줄 수가 있어서 고마웠다.
'그렇게 힘들었나? 미안하이, 친구!'
내력을 모두 허비하여 잠에 빠진 영호인의 숨소리가 송현의 귀에는 무척 다정하게 들렸다. 객잔으로 걸어가는 송현의 걸음걸이는 거북이보다 느릿느릿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선착장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은 보부상의 교역로이기 때문에 봇짐을 든 짐꾼들이 대거 몰려든 것이다.
"우와, 정말 대단하네요."
왕백이 인파를 보고 요란을 떨자 타이라는 사람이 많으면 무섭다며 왕백의 등에 꼭 붙어 다녔다. 어제 일로 많이 움츠러드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배가 도착할 시간이 되자 선착장 주변은 야단법석이었다.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구나."
송현도 장날 서듯이 모여든 많은 인파를 보고 일행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괜히 쓸데없는 시빗거리로 여정에 차질을 빚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침을 해결한 일행들도 항주 근처까지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그때 뒤편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며 배를 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고성이 오고갔다.
"또 무슨 일일까?"
서희 소저와 담소를 나누려던 송현의 이마에 주름살이 만들어졌다.
그녀와 깊은 대화를 나누려고만 하면 이상하게 말썽이 일어났다.
도가 계열의 장삼포와 청포삼을 쓴이들이 사람들을 밀치며 선착장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온 자들의 정체를 안 순간 송현은 한숨이 나왔다
"저자들입니다."
송현 일행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청년은 아직도 얼굴에 붓기가 빠지지 않아 볼 만했다.
도사 중 기골이 장대한 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대들이 어제 이 공자들을 핍박한 자들이 맞소?"
예의에 어긋나는 어법은 아니었지만 말투는 상당히 거칠었다. 서희 낭자에게 얻어맞은 청년들은 팔짱을 끼고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마치 '너희들은 이제 모두 죽었어! 라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한심해 보였다
"흥, 공자들 좋아하시네."
서희 낭자의 사제 하연이 비아냥거리자 청년들이 뒤에서 욕설을 퍼부었다.
"비겁한 놈들!"
왕백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일이 커졌으니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무당파의 관할에서 문제가 생겼으니 그대들은 잠시 이곳에 머물며 잘잘못과 시비를 가려야겠소."
도장이 못 박듯이 말하자 여인들이 참지 못하고 반발하였다.
"말도 안 돼요. 먼저 추잡한 짓거리를 한 것은 저들이란 말이에요. 도장들께서는 보는 눈도 없으신가요?"
서희와 하연이 강하게 반박하자 도장도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도 눈이 있으니 공자라고 표현했지만 성품이 좋지 않아 보이는 저들이 여인들에게 수작을 부리다 낭패를 당했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대들이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소, 다만 이곳은 무당의 땅이니 무당의 율법을 따라 주시기 바라오."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시시비비와 잘못은 관아에서 밝힐 일이지 어째서 무당파에서 간섭한단 말이오."
송현이 참지 못하고 나서자 분위기가 일순 흉흉해졌다.
"관례라는 것이 있소."
도장의 말이 맞았다. 호북성 북부지대는 현지사도 무당파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기 때문에 도둑이라든가 죄를 지은 자들을 사사로이 무당파에서 처결하는 것을 관례로 묵인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무당의 도장들이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자 송현은 답답하였다
"모두 그만 하게!"
영호인이 굳은 표정으로 나서자 기골이 장대한 도장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다, 당신은!"
영호인을 알아본 도장이 당황했다.
"이들이 죄가 없다는 것은 내가 보증하겠네."
될 수 있으면 무당파와 엮기지 않으려던 영호인은 일이 커지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도장들 중에 영호인을 알아본 사람들이 아는 체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강녕하셨습니다."
도장들이 영호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청년들이 표정이 급변했다.
"황궁에 계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혹시 유 사숙을 뵈려 오신 겁니까?"
스승의 이야기가 나오자 영호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영호인!"
송현이 깜짝 놀라서 팔을 붙잡자 영호인은 괜찮다며 모두에게 웃어 주었다.
"이 배를 놓치면 열흘을 기다려야 하니 먼저 가도록 해. 항주의 여야홍을 먼저 따면 안 돼."
만류하는 송현을 안심시킨 영호인은 걱정하는 일행들에게 일일이 손을 잡아 주고 무당의 도장들과 함께 떠났다. 소동이 가라앉자 배는 떠날 차비를 서둘렀고 사람들도 관심을 끊고 배에 오르기 위해 줄을 섰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배에 오르려던 송현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송 학사 왜 그러는가?"
양명이 돌아보자 어두운 표정의 송현이 모두에게 부탁했다.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아. 내가 쫓아가 봐야겠어."
송현의 말이 아니더라도 모두들 찜찜해하던 터였다.
"우리도 같은 심정이야. 황궁에서의 일도 있고 해서 무당으로 가 봐야 좋은 소리 듣지는 못할 텐데."
양명이 걱정을 하자 막여위가 불같이 화를 냈다.
"아니 호랑말코 같은 도사 놈들이 누구를 핍박해? 그랬다가는 봐라!"
성정이 괄괄한 막여위의 수염이 떨리자 왕백까지 나섰다.
"우리는 항상 함께했잖아요. 어려움도 좋은 일도 같이 해야죠."
"저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요. 저도 갈래요!"
타이라마저 입술을 꼭 깨물고 나서자 송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좋아, 다 같이 가자!"
주저하지 않고 배에서 내리던 송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볼 수 있겠죠?"
송현의 음성에서 간절함을 느낀 서희는 마음 아려 왔다.
"저희는 항주의 아미파 분타에 머무를 거예요."
서희가 밝게 웃어주자 송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배를 타려던 사람들은 황급히 내려 어디론가 떠나는 송현을 일행을 보며 수군거렸다. 선미의 발판을 치운 선원들이 배가 출발할 것을 알리는 나팔을 불자 돛이 활짝 펼쳐졌다.
"하연아, 아무래도 항주는 나중에 가야 할 것 같아. 미안하다."
서희가 어두운 얼굴로 하연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자 오히려 하연은 좋아했다.
"무슨 소리야 언니. 그런 일은 당연히 도와야지."
"정말?"
하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희는 기쁜 얼굴로 하연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지체하지 않고 배의 난간을 박차고 날았다. 그렇게 서희와 하연이 경신술로 배에서 내려 사라지자 짐이 비에 젖지 않도록 덮어 두었던 곳에서 천막 하나가 들썩거렸다
"휴, 하여간 저 녀석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군."
청죽봉을 든 노인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더니 여인들처럼 배에서 나는 듯이 뛰어내렸다. 말을 타고 떠난 무당의 도장들과 영호인을 쫓아가는 발걸음이 더뎠다. 선착장의 객잔에서 말을 구할 수가 없어서 결국 걸어서 무당산을 찾아가야 했다. 급한 마음에 밤을 지새우며 길을 재촉했지만 왕백과 타이라가 쓰러질 것이 걱정되어 결국 농가를 찾아 들어가 새벽을 보내야 했다.
"송 학사, 너무 심려 말게 설마하니 자기 식솔인데 해치거나 하겠어?"
양명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송현을 안심시켰지만 속사정을 잘 알기에 안심이 되지 않았다. 사문을 위해서 친딸을 무정하게 죽이는 곳이 무림이었다. 송현은 제발 영호인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 배에서 서희 소저를 만났을 때만 해도 참으로 행복했건만 하루도 되지 않아 나쁜 일이 생기니 머릿속에서 호사다마라는 말이 떠나지 않고 괴롭혔다. 때마침 하늘에서 유성우가 나타났다 사라지자 송현의 근심은 더욱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