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四 章 정주부(汀洲部) 사건(事件)
북평에서 시작된 여정은 장안과 난주를 거쳐 감숙성에 이르렀고 다시 대륙을 종단하는 험난한 여정으로 이어졌다. 송현의 다음 목적지가 항주였기에 일행은 말고삐를 동쪽으로 잡았다. 감숙성에서 절강성에 이르는 길은 만리길이라 불리는 대장정이었다. 송현의 부상이 커서 예상보다 휠씬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수개월이 걸려 하남성의 정주에 이르자 송현의 몸도 많이 회복되어 마음에 여유를 갖고 쉴 수 있었다. 일행이 작은 개울가를 건너게 되었을 때 송현은 물가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일 년 전 오늘을 떠올렸다.
처음 비단옷과 비단신을 싣고 나들이에 따라나선 대갓 집 자제 같던 왕백의 모습을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방갓을 깊이 눌러쓰고 말을 능숙하게 다루는 왕백의 모 습은 강호의 경험 많은 무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이는 바로 송현이었다. 자신만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지 일행들은 어느새 송현을 자신들의 대표라고 여기고 있었다. 개울을 건너자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의 관문이 보였다
"후, 드디어 하남성에 도착했군."
송현이 흙먼지를 피하기 위해 얼굴을 가린 가리개를 내리고 멀리 내다보자 다른 이들도 방갓을 올려 하남성의 성도를 바라보았다.
"이제 절반을 온 셈인가?"
“절반이라‥‥‥”
각자 감상을 말하는 얼굴들은 까칠하며 구릿빛이었다. 오랜 여행 탓으로 햇볕에 그을린 탓이다. 하지만 아주 건강하고 사내답게 보여서 왕백은 좋아했다. 타이라가 일행에 합류한 다음부터 왕백의 표정이 밝아 졌다는 것을 아는 송현은 그가 뿌리가 없음을 알기에 가슴 한편이 무거웠다.
사내를 잃은 환관이 여자를 마음에 품으면 고통뿐이라는 것을 알지만 일행 중 누구도 그런 왕백을 나무라지 못했다. 무장을 한 남자 다섯에 여자 하나가 성문에 당도하자 성문을 지키는 위병들의 눈빛이 사나와졌다.
"이상하군. 이곳은 낙양과 가까운 곳이라 외지인에 대해서 너그러운 곳인데 오늘 저 위병들의 태도는 황도를 지키는 병사들처럼 깐깐한데."
막여위와 양명이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 하자 영호인도 방갓을 들어 올려 주변을 살폈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군. 정주, 낙양, 개봉은 무수히 많은 무림 문파들이 있는 곳이라서 병장기를 든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인데 왜 우리를 병사들이 경계하는 걸까?"
성문을 지키는 수비대의 장수가 송현 일행에게 손짓을 했다. 송현이 말고삐를 당겨 앞으로 나가자 주변에서 따가운 기운들이 느껴졌다. 송현은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 챘지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수고가 많소이다."
송현의 평대에 수문장에게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송현이 내민 신분패를 확인하자 그는 몇 번이고 신분패와 송현을 번갈아 보더니 바짝 긴장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병사들도 수문장의 태도 변화를 눈치 채고 재빨리 겨누던 무기를 거두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경계가 삼엄한 것인가?”
신분패를 받아 든 송현이 따지듯 묻자 수문장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간의 사정을 전해들은 송현은 수고하라는 말을 남긴 후 하남성으로 들어섰다. 저잣거리의 많은 인파들 피해서 말을 몰던 송현이 영호인을 찾았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영호인은 송현의 질문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 생각에는 누군가 다른 목적으로 함정을 판 것 같은데?”
“나랑 생각이 같군."
송현과 영호인은 수문장에게들은 하남성에서 발생한 최근의 괴사건들이 누군가의 음모라는 냄새를 맡았다. 최근 한 달 동안 하남성 일대에서 양가집 규수들이 납치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해서 하남성 전체가 어수선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날짜들이 들쭉날쭉 하지 않고 특정한 날에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뭔가 사연이 있다고 생각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운신하기가 어려울 텐데 일부러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거사를 치른다는 것은 이목을 끌기 위한 수작임이 틀림없어."
“나도 송현 자네의 생각과 같아. 필시 누군가 좋지 않은 일을 꾸미고 있음이야."
나름대로 사건을 추리해 본 두 사람은 결론을 내렸지만 자신들과 무관한 일이기에 곧 관심을 접었다. 일행은 정주에서 제법 유명한 객잔을 찾아 들었고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일찍 자리에 들어야 했다. 오랜만에 편안한 잠자리에 든 일행들은 죽은 듯이 수면을 취했다.
비명 소리와 함께 요란한 소리가 늦은 단잠을 즐기려던 나그네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복도에서는 그것에 항의하는 목소리들이 튀어나왔지만 곧 그보다 더 험한 목소리가 나자 다들 조용해졌다.
"저쪽 복도 방들도 모두 수색하라!"
"복명!"
절도 있는 목소리와 함께 관병들이 객잔의 모든 방을 뒤졌다. 아침 해가 아직 산 정상에 걸쳐 있는 이름 아침이었다. 눈곱도 떼지 못한 객잔의 손님들에게 이는 날벼락과 같았다. 원성과 아우성이 빗발쳤지만 기찰포교들의 험악한 기세에 모두들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객잔의 방에서 여행객들의 짐이 복도로 마구 내던져졌다.
“쾅”
"거참, 잠 좀 자자!"
막여위의 걸걸한 목소리가 복도를 뒤흔들자 기찰포교들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막여위를 위압했다.
“닥쳐라! 감히 관의 수사를 방해할 셈이냐?"
보통은 이쯤에서 조용히 수그러드는 것이 정상이지만 상대는 막여위였다.
"관이면 아침 단잠을 깨워도 좋다는 권한이 있다는 말은 내 처음 듣는다. 누가 그러더냐?"
도무지 말도 상대할 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기찰포교들은 막여위에게 오랏줄을 묶으려 했다.
"아니, 이것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으랏챠챠!"
거구의 막여위가 힘을 쓰자 포교들이 맥을 못 추고 복도로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객잔 안은 때 아닌 웃음바다가 되었다. 낭패를 당한 기찰포교들이 호각을 불어 대자 그 숫자가 금세 불어났다. 한 번 혼쭐아 나서 그런지 곤봉을 든 포교들의 표정이 살벌했다
"그만!"
차가운 목소리에 모두의 눈이 향했다.
"누가 포교장인가?"
감정 없는 메마른 음성과 절제된 행동은 관원들에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사십 대 장한이 얼른 나섰다.
"포교장 주윤입니다."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이는 포교장을 보며 영호인은 미소 지었다.
"눈치가 빠른 듯 하니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듯 하군."
영호인은 금이 입혀진 둥근 패를 보여 주었다.
금의위!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쓰여진 세 글자를 보자 포교장 주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모, 몰라 뵈었습니다."
그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자 영호인은 조용히 주윤만을 불러서 방으로 들어왔다. 한바탕 소동에 잠을 깬 송현이 이미 의관을 정제하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막여위는 그놈의 성질 좀 죽이라니까."
송현이 아침부터 잔소리를 하자 막여위는 귀를 파며 딴청을 부렸다. 영호인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고소를 머금었다.
"주윤이라고 했나? 무슨 일인지 이분께 소상히 아뢰게."
포교장 주윤은 금의위의 위사가 이분이라고 말하자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사실은 어젯밤 부윤대감의 집에 괴한이 들어 둘째 따님이 납치를 당했습니다."
포교장의 설명에 송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또?"
책망하는 듯한 말투에 포교장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놈이 하도 신출귀몰하여 주포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궁색한 변명을 하느라 애를 쓰는 포교장을 보며 송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포청은 무얼 하고 있기에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들었나?"
"송구스럽게도 범인은 아무래도 무림인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무림인? 어째서?"
가만히 듣고 있던 영호인이 관심을 드러냈다.
"실은 이것은 비밀이온데‥‥‥실은 네 번째 납치 사건 당시 포청에서 함정을 파 놓고 있었사옵니다. 운이 좋았는지 놈을 함정에 몰아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괴물 같은 녀석은 신묘불측한 신법으로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포교장의 말에 어느 정도 허풍이 보태어졌을 거란 생각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왕백마저 하품을 하며 고개를 저었고 이젠 제법 한어를 알게 된 타이라도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렇게 되자 억울한지 포교장 주윤이 열을 내며 떠들었다.
"정말입니다. 저 혼자 본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던 군관들이 모두 그놈이 하늘을 날아서 도망치는 것을 보았단 말입니다. 저 밖에 있는 놈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너무나 억울해하는 포교장 주윤의 태도에 송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늘을 날아?"
"설마‥‥"
믿기지 않는지 다시 묻다 포교장은 그날의 상황을 아주 소소한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흠, 생각보다 일이 심각한데?"
양명이 잠을 쫓으며 말하자 영호인도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이 잘되지 않을 때의 버릇이었다. 송현은 찻잔을 내려놓고 포교장 주윤에게 말했다.
"자세한 사정을 알았으니 자네는 이제 그만 돌아가게."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포교장은 송현의 말에 무척이나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충고 하나 하자면 놈은 절대로 객잔 같은 곳에 묵을 리가 없으니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른 곳을 찾아보게."
"다른 곳이라 하시면‥‥‥?"
포교장 주윤의 고개를 갸웃거리자 송현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머릿속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대의 말대로 무림인일 수도 있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무림인이라기보다 무공을 배운 고관이나 부유한 자일 것 같네."
"어찌하여 그렇사옵니까?"
포교장 주윤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눈만 껌벅이자 한숨을 내쉰 송현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만일 하남성에 있는 무림 문파의 소행이라면 멍청하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성도 내에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대부분의 정파 무림인들이 익히는 무공은 정순한 내공을 바탕으로 하니 여자를 가까이 하는 자들도 드물다."
송현의 막힘없는 설명에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범인의 행동을 보면 마치 즐기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네. 마치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아!"
포교장 주윤은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거기에 하나 더, 자네의 말대로 납치된 여인들이 모두 절색의 미녀들이라니 취미가 고상한 자임에 틀림없지."
흠잡을 데 없는 송현의 추리에 어느새 빠져 들고 있었다.
"그럼 결론이 나오게 되네.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자신의 그런 실력을 자랑하며 관을 비웃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내는 누굴까?"
송현이 말꼬리를 흐리자 포교장 주윤은 입 안에 침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필시 아주 부유한 집안의 자제일걸세. 그 정도 무공을 배우려면 이름난 사부를 모시거나 명문정파에 속가제자로 들어갔을 텐데. 아마도 돈이 많이 들 테니까 말이야."
포교장은 어두웠던 안개 속을 뚫고 나온 사람처럼 환의에 찬 표정이었다.
"나으리의 밝은 혜안에 감탄하였습니다.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포교장 주윤이 애타게 송현을 바라보자 송현은 그저 됐다며 손을 내저었는데 왕백이 입을 참지 못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나섰다.
"그 유명한 대학사 송현 학사님이시네."
"헉 !"
물론 이런 지방의 한낱 포교장이 송현의 이름을 알 리가 없지만 대학사란 칭호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왕백을 송현이 눈짓으로 나무랐지만 왕백은 그저 혀를 내밀고는 타이라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끙! 내 저 녀석을!"
송현은 이마에 손을 대고 골치 아파했다. 모두가 키득거리는 가운데 포교장 주윤이 몇 번이고 절을 하며 뒷걸음질하더니 결국 문턱에 걸려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푸흣!"
양명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막여위와 영호인도 참지 못했다. 얼굴이 벌게진 포교장 주윤이 얼른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너무들 했어!" 송현이 짐짓 나무라자 막여위는 눈물까지 흘리며 괴로워했다.
"으하하하, 저 꼴을 보고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나?"
송현은 내키지 않은지 웃지 않았다. 그런 송현에게 영호인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자네는 정말로 부유한 집안의 망나니가 저지른 짓이라고 생각하나?"
영호인의 질문에 송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글쎄, 몇몇은 그 녀석 소행 같은데 다른 몇 건은 좀 의심스러워."
"아니, 그럼 범인이 하나가 아니라는 건가?"
다들 놀래서 웃음도 그치고 송현을 바라보았다.
"그래, 아무래도 하남성 성주가 한동안 골치 꽤나 썩겠어."
송현은 피곤한지 하품을 하며 다시 자리에 누우려 했다.
"차라리 이번을 사건 우리가 해결할까? 지금 당장은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항주까지는 여기서 금방이잖아, 어때?"
막여위의 제안에 모두들 송현을 바라보았다.
"안 돼! 난 그림 속의 수수께끼를 푸는 게 더 급해."
송현이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영호인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뭔가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데 피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잖아."
영호인의 진지한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송현은 애써 눈길을 피했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데."
인상을 쓰는 송현을 보며 그가 승낙했음을 안 세 사람은 자신들이 기찰포교라도 된 것처럼 들떠서 떠들며 방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송현은 왠지 아주 귀찮은 일에 말려든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제길, 잠이 달아나 버렸네,"
멀뚱멀뚱 눈을 뜬 송현은 이불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이튿날.
그들의 결심을 마치 듣기라도 한 것처럼 정주의 포청에서 판관 이자웅이 객잔으로 찾아왔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송현이 의아해하자 이자웅은 송현에게 읍소를 했다.
"송 학사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제발 저희 포청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뚱딴지처럼 그게 무슨 소리요?"
이자웅은 송현에게 포청의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송현이 계속해서 거절했지만 이자웅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결이라도 할 듯이 완강했다.
"저는 제 자신의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관직에 나와 판관이 되었지만 이런 일에는 젬병입니다."
이자웅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던 송현은 결국 임시로 그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젠장, 명철보신 명철보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며 스스로를 탓을 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그날 저녁 송현 일행은 정주의 포청으로 숙소를 옮겼고 송현이 정주부의 임시 판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