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걸화불약취수(乞火不若取燧) - 남에게 불을 구하느니보다는 자기 스스로 부싯 일으켜야 한다는 말
큰 소동을 일어났던 객잔의 아침은 부산스러웠다. 객잔의 가족들과 점소이들이 모두 나와서 부서진 집기를 치우느라 한바탕 소란을 벌이는 통에 아침잠이 많은 이들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왕백 역시 퉁퉁 부은 눈으로 비몽사몽간에 비틀거리며 옷을 찾고 있었다.
"송현은 어디 갔지?“
왕백이 잠결에 횡설수설하자 어제 다친 손이 걱정되어 찾아온 영호인은 송현이 방에 없음을 확인하고 서둘러 나갔다.
서툰 묘족말로 찾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아시스 주변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송현을 발견했다.
좀처럼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던 터라 영호인은 그의 변화가 걱정되었다.
스윽!
눈을 감은 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앞을 향해 뻗은 송현을 부르려다 영호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걸음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오면서 황홀한 춤사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산 너머 돌아가는
길물에 의해 홀로 되나니
바람에 의해 낙엽이 지고
가장 아름다운 꽃은 귀하니
진노한 검이 하늘을 들쑤신다.
빗속에서 노한 천둥번개가 울부짖으니
검에 능한 이는 거침없이 나아가리!
낭창하게 구결을 외치는 송현의 음성이 꿈결 같은 가운데 검 대신 손에 쥔 나뭇가지 끝에 경력이 일어나 허공을 벨 때마다 바닥에 빗금이 그려졌다.
차아악! 차아악!
모래를 가르는 소리가 듣기 좋은 가운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은 신선의 검사위를 보는 듯했다.
“타핫!"
자신 있게 내뻗은 나뭇가지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말았다.
“하아, 하아!”
마지막 순간에 뭐가 부족했는지 흐름이 끊기며 나뭇가지가 내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버리자 숨을 헐떡이는 송현의 턱 밑으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직도 부족한가?“
눈을 찡그린 송현이 손에 쥔 나뭇가지를 버리고 돌아서서 객잔을 향해 돌아갔다.
송현이 사라진 뒤 그 자리에 나타난 영호인은 바닥에 무수히 그려진 선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송현은 자기가 지금 무엇을 했는지 알고나 있을까? 나뭇가지에 내력을 싫어 외형의 기로 표출하다니 도대체 송 현이 익힌 무공은 무엇일까?“
영호인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패인 깊이를 손으로 확인 했다.
분명히 영웅대회 때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송현이 방금 전에 펼친 검술은 무당의 칠성검이었다.
그것도 그의 스승인 유자강의 미려한 칠성검의 또 다른 변형이었다.
"서서히 각성하는 것인가? 시타르 그 영감이 송현의 봉인을 풀어 준 거라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겠어."
영호인에게 송현은 친구를 떠나 좋은 상대였다.
송현의 흔적을 따라서 영호인도 칠성검을 전력으로 펼쳤다. 송현을 알고 난 뒤 영호인은 검술에 매진했다.
그동안 관직에 오르기 위해 게을리 했던 마음을 다잡고 영호인은 처음 무당산에 올랐던 마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앗!"
치이 익!
영호인의 검 끝에서 일어난 바람이 송현의 만들어 낸 실선 옆에 또 하나의 그림을 그렸다.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친구가 되어 보이겠다!"
송현과 달리 패도적이고 빠른 검이 아침 햇살을 부수며 오아시스를 깨웠다.
오아시스는 어젯밤 삼묘족의 난동으로 어수선했다. 떠날 채비를 하는 일행들의 눈에 불에 탄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관군은 도대체 뭘 하는 거죠?"
잠을 설친 왕백은 삼묘족의 난동에 분통을 터뜨렸다.
"명조(明朝)에 이르러 사주위(沙州衛)즉 돈황은 현급으로 격하되었다. 관병들이 이곳까지 어우르기에는 인력이 모자랄 것이다. 평소에는 방치해 두었다가, 분쟁이 심해지거나 오랑캐가 침범하면 군대를 동원해 징벌하는 것이 고작이야."
양명의 설명에 왕백은 대명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황제가 모든 지역에서 존경을 받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변방의 소수민족이라면 말하나 마나였다. 그들에게 있어 한족은 영원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낙타가 도착하자 모두들 낯선 동물의 등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고생을 해야 했다.
묘족 안내인이 낙타에 허둥지둥대는 일행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이 녀석이 나를 놀리고 있잖아."
막여위가 엉덩방아를 찧자 그의 낙타가 막여위의 뺨을 혀로 핥았고 모두들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동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올라 아침 일찍 뜨거운 햇살을 피해 도착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묘족 안내인은 늑장을 부린 탓에 고생을 한다며 연신 투덜댔다. 송현은 그런 안내인에게 동전을 쥐어 주며 달래주었다.
"누가묘족에 대해서 물어본다며 난 주저하지 않고 돈만 밝히고 무례한 자들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겠어요."
어제 감정이 풀리지 않은 왕백이 주먹을 휘두르며 분해하자 막여위가 맞장구를 쳤다.
"암, 그래야지! 어제 내게 화살을 날린 놈을 다시 보면 가만두지 않겠어!"
송현이 아니었다면 죽을 뻔했던 막여위는 객잔에 들이 닥쳤던 무리를 가슴에 담아 두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들 뭘 찾기에 그 난리를 피웠을까요?"
"글쎄다, 낸들 알겠냐? 뭐 새색시라도 도망쳤나 보지."
“하하하!"
저마다 추측을 해 보지만 이민족의 속내까지 알 수 없기에 그저 우스갯소리로 어제의 꿀꿀함을 털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묘족 안내인에게 송현이 속사정을 물어보았지만 안내인은 그저 '모른다'로 일관했다.
모래가 만들어 낸 절경은 지친 나그네의 입에서 기어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험준한 사막 길을 몇 달씩이나 낙타를 타고 건너는 상단이 줄지어 비단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명사산(鳴沙山).
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산이다. 사람이 밟으면 모래 소리가 악기처럼 울렸다. 난생 처음 낙타를 타니 모두들 안장 앞의 손잡이를 꼭 잡고 낙타 등에 붙어 있지만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앞뒤로 흔들리는 탓에 고생이 심하였다.
울렁증을 참아 내고 겨우 명사산 밑에 도달하니 묘족 안내인은 여기서부터는 일행들끼리만 가라고 말한다.
모래산을 올라가려고 한 발짝 내미니 두 발짝 미끄러졌다.
어쩔 수 없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어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 올라가려한 왕백이 비명을 질렀다.
"앗 뜨거!"
손을 꺼내 입으로 후후 불며 호들갑을 떨자 막여위가 재빨리 손에 물을 부어 주었다.
"후, 이래서 길잡이가 아침 일찍 떠나자고 했나 보군."
베일 속에서 진땀을 흘리는 막여위가 일찍 출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왕백의 손을 살펴 주었다.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영호인이 밧줄을 어깨에 걸치더니 길게 호흡하였다. "차핫!"
바닥을 차고 몸을 놀리자 소금쟁이가 물 위를 뛰어가듯이 모래 언덕을 가뿐하게 올라간다.
영호인의 경신법은 무림에서 일가를 이룬 무당의 신법이었다.
일행들이 감탄을 하는 사이에 영호인은 정상에 올라 밧줄을 아래로 던졌다.
내력을 끌어 올려 두 발에 힘을 주니 천근추의 수법에 영호인의 몸은 모래 속에 박힌 기둥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덕택에 수월하게 명사산을 오른 일행들. 눈앞에 펼쳐지는 난생 처음 보는 모래 언덕이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저것이 월아천이로구나!"
모래 언덕 아래쪽에 월아천(月牙泉)이라는 작은 오아시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초승달 모양의 호수 주위로 나무에 둘러싸인 오래된 건물이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었다.
"천년의 세월 동안 마르지도 않고 모래 폭풍에 파묻히지도 않았다고 하니 정말 신비의 샘이 틀림없어!"
송현이 자연의 위대함에 감탄하자 다른 이들도 저마다 화려한 절경을 가슴에 담았다.
"어? 저 사람 뭐 하는 거지?"
묘족 안내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더니 외투를 벗어 엉덩이에 깔고 앉았다. 싸아아악!
썰매를 타듯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며 내려가는 길잡이는 신이 나는지 소리를 지르며 내려갔다. 지켜보던 송현과 일행들도 미소를 지으며 길잡이를 따라서 썰매를 타듯 내려갔다. “하하하!"
동심으로 돌아간 네 사람은 진정으로 즐거워하였다.
모래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고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썰매는 눈과 몸을 즐겁게 했다.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온 왕백은 아쉬워하며 더 타 보고 싶어 영호인에게 자신을 업고 다시 한 번 위로 올라가 달라고 떼를 썼다.
"하하하, 원 녀석도. 그리 재미있더냐?"
왕백의 커다란 눈망울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송현은 왕백을 업고 경신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물론 그 마음은 왕백만이 아니었다. 지루한 황궁에 갇혀 지냈던 그들이었다.
서너 번 더 아이들처럼 뒹군 후에야 썰매 타기를 그쳤다. 손님들이 노는 동안 곰방대를 빨며 쉬고 있던 길잡이 노인이 월아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다시 하늘을 향했다.
“날이 지고 있으니 서두르라는 뜻이군."
사막에서 밤을 지새우고 싶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모두들 옷에 묻은 모래를 털고 부랴부랴 월아천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모래산에 둘러싸여 수천 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았다니 , 믿겨져?"
“막여위님, 혹시 이 안에 용이라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끼! 이 녀석아,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게냐?"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송현은 월아천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장정키만 한 갈대와 이름 모를 꽃들이 초승달 모양의 샘을 따라 울타리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완만하게 굽은 샘의 옆에 들어앉은 월아산장(月牙山莊)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존재했던 것처럼 신비한 자태를 자아내고 있었다.
송현이 족자를 펼쳐 그림을 들어 월아천과 겹치게 만들었다.
“하늘이 열리고 천 개의 산이 있으며 물이되 물이 아닌 곳."
송현은 그림 속의 수수께끼가 말하는 장소가 이곳이 아닐까 여기고 있었다.
"송현, 그림 속의 장소가 여기라고 생각하는 거야?"
영호인이 밧줄의 모래를 털어 내며 다가오자 고개를 저었다.
“않은 후보 중에 하나일 뿐이야.”
“그랬군. 그래서 갑자기 사막을 건너자고 한 거였어."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네."
송현이 사과를 하자 영호인은 손을 들었다.
"천만에 이미 너하고는 친구가 되기로 하지 않았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데 송현, 왜 그렇게 그 그림에 집착하는 거지?"
영호인은 송현이 지나치게 그림에 집착하는듯하여 걱정을 하고 있었다.
"글쎄, 왜일까?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당장 뭔가에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이거뿐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송현은 속에 담아 있던 멍울들을 영호인에게 꺼내 주었다.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 괴롭히는 당천악과 사례감 왕유의 모습들!
매일 밤 그들을 뒤쫓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악순환과 고통을 모두 이야기했다.
"게다가 시타르가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 주었는데도 무극무해는 제자리걸음이야. 나는 반쪽짜리 무인이고 반쪽짜리 학사가 되어 버렸어."
허탈해 보이는 송현의 어깨를 영호인이 꼬옥 잡았다.
"소마(小魔) 송현이 왜 이리 나약해졌나? 기운 내라고! 뭐 우리가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둑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떤가? 보물찾기가 될지 그저 어느 화가 의 장난질일지 모르지만 한번 그 수수께끼를 풀어 보는 것도 괜찮겠지."
"자네 많이 변한 거 알아?"
"내가?"
영호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송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맨 처음 자네를 봤을 때 내가 속으로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
"뭐라고 했지?“
"얼음 덩어리!"
"뭐?“
"하하하하!"
두 사람은 진솔한 웃음을 터뜨렸다. 영호인은 벼슬도 마다하고 사문에 등을 돌린 일이 결코 후회가 되지 않았다.
영웅대회가 끝나고 스승 일행이 돌아갈 적에 자신을 노려보던 사제들의 차가운 눈빛과 아무런 말없이 떠난 스승 유자강이 걸렸지만 여행을 하면 할수록 영호인은 자신의 결정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그것은 나의 길이 아니었다. 잘한 거야.'
그림을 들고 월아천 주변을 둘러보는 송현을 쫓아가는 영호인의 발걸음 무척이나 가벼웠다.
출발이 늦은 감도 있었지만, 월아천의 아름다움은 예상보다 더 대단했다.
결국 그들은 월아산장에서 하룻밤을 묵어야만 했다.
길잡이의 투덜거림을 저녁 내내 들어야 했던 일행은 사막의 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발견하고서는 탄성을 자아냈다.
신비의 땅에 장작불을 지피자 어둠 속에서 별이 하나 둘 나오고 서늘한 바람은 나그네의 주변을 서성인다. 길잡이의 투덜거림 쯤은 밤하늘의 별빛이 펼쳐지는 사막의 아름다움에 묻혀 버렸다.
"듣던 것보다는 덜 춥군.'
영호인이 두터운 외투의 깃을 여미며 모닥불을 뒤적였다.
"그렇게 오늘 같은 날이 드물다더군. 그래서 이곳 사람들도 특별한 음식을 준비한다고 저리 야단들이야."
송현이 가리키는 산장 아래에서 모래 구덩이를 파고 숯을 피워 양 한 마리를 둘로 나눠 꼬챙이에 끼워 걸쳐 놓고, 솥뚜껑을 덮어 그 위를 천으로 다시 덮었다. 천위로는 모래가 뿌려지니 그 모양이 모래산처럼 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모닥불 석쇠 위에 닭다리들이 숯불구이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야, 냄새 죽인다."
막여위와 왕백이 참지 못하고 뛰어가자 양명이 고함을 지르며 뒤를 쫓아갔다.
어느새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그들의 전통 악기 리듬에 맞춰 향수와 이국정취에 취한다.
이렇게 그대로 사막의 밤이 저물어 갔으면 감숙성의 여정은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사막의 평화를 깨는 소란이 송현의 감각에 걸렸다.
"카하, 이 마유주 맛 진짜 죽인다."
막여위가 거나하게 취해서 노래 한 소절 꺼내려 하자 송현이 말렸다.
"쉿!"
막여위가 일어서다 말고 엉거주춤한 상태가 되자 조금 취한 왕백이 딸꾹질을 하였다.
그리고 송현과 영호인을 따라서 어둠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들여보내! 피 냄새가 난다."
송현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영호인등은 검을 꺼내 들었다.
즐겁게 저녁을 즐기던 이방인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사막의 저편을 바라보자 월아산장 사람들도 낌새를 느끼고 춤추는 것을 멈췄다.
"온다!"
쇄애액!
어둠속에서 빛줄기 하나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영호인의 검이 움직였고 쇳소리가 크게 났다.
"철시?“
철시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월아산장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고 송현과 일행들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고 철시가 날아온 곳을 향해 마주섰다.
"다섯? 아니 여덟인가?"
영호인이 기척을 느끼려 애를 쓰자 송현이 도왔다.
"모두 스물이다. 앞에서 다가오는 무리가 열이고 언덕 너머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열 명이다. "
송현의 감각이 높아지고 있었다. 물론 무극무해의 힘이었다. 어젯밤 철시를 손으로 잡고 난 후부터 송현의 기세가 크게 변하고 있었다.
"우리도 피해야 할까?" 영호인이 송현에게 묻자 송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그런지 모르지만 저들이 내게 도움이 될 것 같다. "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던 영호인은 송현이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잠들어 있는 능력을 깨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 목숨까지 걸 필요가 있을까?"
영호인이 불안해하자 송현은 그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자네 검 좀 빌려 주게."
"꼭 그래야만 하겠어?"
"그래, 반드시 해야만 해!"
더 이상 송현은 죽은 시타르를 찾으며 울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든 아무도 가보지 않은 무극무해의 끝을 보려는 것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때로는 목숨을 건 도박도 필요한 법이었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였다. 송현이 영호인의 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놀라운 경신법이 펼쳐졌다. 사막의 모래 위로 나는 듯이 달려가는 송현의 경신법은 무당의 제운종이었지만 그것은 무극무해의 풍보(風(步) 속에 담긴 걸음걸이였다. 제운종은 송현만의 풍보로, 풍보는 송현만의 제운종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허, 괄목상대(?目相對)라고 하더니 그건 송현 학사를 두고 하는 말일 거야,"
막여위가 송현의 변화에 감탄하고 있을 때 양명은 산장에서 기다란 보통이 두 개를 들고 뛰어왔다.
"그게 뭔가?'
영호인이 궁금해하자 양명은 콧기름을 엄지손가락에 바르며 씨익 웃었다
"금의위 위사가 폼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란 말씀이야."
“하하하, 역시 내 친구라니까. 오랜만에 솜씨 좀 보여 줄까나,"
막여위는 양명의 의도를 알았는지 어깨에 걸친 외투를 벗어 던지고 어깨를 흔들었다. 양명 역시 외투를 바닥에 내던졌다. 한편 송현은 앞으로 내달리다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철시가 날아와서도 아니었고 겁을 집어먹어서도 아니었다. 거친 낙타의 호흡 소리와 자신의 숨소리 사이에 약하고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털썩!
작은 인영은 힘이 다했는지 송현의 앞에서 쓰러졌다. 일어설 힘이 없어 보이는데도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때마침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보름달이 나오자 어둠 속의 정경이 드러났다. 화려한 유목민 복장을 한 소녀가 일어서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그 뒤로 어젯밤 돈황의 오아시스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삼묘족 전사들이 다급히 쫓아오고 있었다.
철시는 송현 일행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소녀를 노렸던 것이다.
“너를 쫓는 것이냐?”
소녀는 갑자기 어둠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비명을 질렀다.
“다시 묻겠다. 너를 쫓아오는 것이냐?”
겁에 질린 소녀가 고개만 끄덕이자 송현은 소녀의 너머로 달려오는 삼묘족 전사들을 노려보았다
"죄를 지었느냐?"
이국의 사내가 묘족의 말로 물어 오니 소녀는 거짓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저들이 너를 그렇게 찾는 거지?"
소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을 주저했다.
"저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내가 이대로 돌아가길 바란다면 입을 다물 것이고, 살아서 도망치기를 원한다면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어느새 다가온 묘족 전사들의 인기척에 소녀의 마음도 다급해졌다.
"제‥‥‥ 제물이옵니다."
"뭐?"
"소녀는 제물입니다."
어린 소녀의 입에서 제물이라는 말이 나오자 송현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물이라니,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말이냐?"
기가 막힌 송현은 낙타들의 입에 물린 거품 소리가 들리자 눈을 들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삼묘족의 욕설이 들려왔다. 송현과 소녀 그리고 삼묘족 전사들의 묘한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투박한 반월도를 꺼내 든 삼묘족 전사들이 낙타에서 뛰어내렸다. 일부는 삼묘족의 상징과도 같은 철시를 시위에 매기고 송현을 노렸다. 콧수염이 늘어진 전사가 무섭게 다그치자 소녀는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
"그만!"
송현의 비범한 목소리가 울리자 삼묘족 전사들은 크게 놀랐다.
"이방인은 묘족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가던 길을 가라!"
명백한 축객령이었고 살의를 담은 협박이었다. 그나마 송현이 한족의 차림이었기에 그런 것이지 만약 묘족의 복장이었다면 그대로 화살 세례가 퍼부어졌을 것이다.
"너희들의 일이니 상관하지 마라?"
송현의 말투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챈 전사들의 표정도 험악해졌다.
"그러나 내가 배운 학문과 가르침에는 인신공양이 얼마나 나쁜 패악인지 배웠으니 내 모르면 몰랐으되 알게 된 이상 그냥 갈 수는 없다."
송현이 검을 들어 올리자 콧수염 전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리석은 놈!" 고갯짓을 하자 송현을 겨누고 있던 전사들의 철시가 시위를 떠났다.
쐐애액!
겨우 이삼 장의 거리에서 쏘아지는 철시는 벼락과도 같았다. 겨누고만 있어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력했던 살기가 시위를 떠나자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묘족의 철시가 지척에서 날아오자 어제 느꼈던 그 소름이 다시 돋아나며 저 밑바닥에 잠들어 있던 기운이 깨어났다.
"그래, 바로 이 감각이 필요했어!"
송현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캉! 카카캉!
어둠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송현의 검이 묘족 전사들의 철시를 튕겨 냈다.
“말도 안‥‥‥” 전사의 놀람이 끝나기도 전에 송현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마,막아!”
다급한 음성과 동시에 모족 전사들의 반월도가 춤을 추었고 거기에 송현의 검 사위가 더해졌다. 사막의 달은 월광을 빛냈고 송현의 검은 달빛을 받아 춤을 추었다.
가가각!
털썩! 털썩!
모래 바람이 그치자 묘족의 전사들은 볏단처럼 쓰러졌다.
“이......”
눈앞의 현실을 믿기 어려운지 콧수염을 부들부들 떨던 묘족의 전사 하나가 말에서 뛰어내리자 철시를 쏘던 나머지 전사들도 반월도를 꺼내 들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래, 아직은 몸이 뜨겁다. 이 끓는 심장을 데우려면 좀 더 느낌을 유지해야 해!"
무섭게 변한 송현의 기세는 더욱 불타올랐다.
"태산파검(泰山(波檢)!"
무당의 칠성검 초식 중 가장 파괴적인 태산파검이 송현의 검에서 시전되었다 무식할 정도로 패도적인 태산파검에 나머지 묘족 전사들은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후우, 후우!"
거친 호흡을 갈무리한 송현이 검을 허공에 휘둘러 핏물을 닦아냈다.
"모두 급소를 피했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들의 부족으로 돌아가라"
차갑게 내뱉는 송현의 말에 죽은 줄 알았던 묘족의 전사들이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렸다. "저들은 또 있습니다."
소녀가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자 송현은 이미 알고 있기에 피식 웃었다.
"언덕 너머에서 달려오는 저들을 말하는 거라면 걱정 할 필요가 없다. 가까이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송현은 안력을 돋우어 미소를 지었다.
"활은 너희들 묘족만의 전유물이 아니거든."
묘족의 소녀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달빛 아래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저, 저 기 에‥‥‥”
소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송현을 바라보았지만 송현은 검을 거두고 돌아섰다. 소녀는 송현과 쓰러진 묘족 전사들을 번갈아 보다가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서서 송현의 뒤를 쫓았다. 낙타의 발굽 소리가 가까워지자 뒤를 돌아보는 횟수가 잦아졌다.
“저, 저기 공자님! 뒤에 말입니다. 뒤에서‥‥‥”
소녀가 송현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송현은 빙긋이 웃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
다급한 상황인데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는 한족의 공자는 소녀에게 너무나 신비해 보였다. 얼떨결에 송현의 질문에 답을 하고 말았다.
“타이라‥‥ 타이라‥‥‥”
이국의 이름은 소녀의 파란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이름 이었다.
"예쁜 이름이구나! 걱정이랑 말고 어서 따라오거라. 뒤에 따라오는 저들은 내 친구들이 알아서 막아 줄 것이다."
소녀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친구가 있다고 하니 자연히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묘족의 전사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딸꾹! 딸꾹!"
겁에 질린 소녀가 참지 못하고 딸꾹질을 해 댔다. 어찌나 세게 송현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는지 찢어질 듯 했다.
쉬이익 !
피리 부는 소리가 한밤중에 울리자 묘족의 전사가 낙타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다음부터 피리 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모족의 전사도 한 명씩 비명을 지르며 낙타에서 떨어졌다. 송현이 월아산장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는 이미 묘족 전사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돌아선 다음이 었다. 송현이 경신법을 발휘해 돌아오자 왕백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등에 업은 것이 무엇입니까?"
송현은 대답 대신 타이라를 내려놓았다. 모닥불이 타이라의 얼굴을 비추자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특히나 왕백의 반응은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예‥‥‥ 예쁘다!"
송현도 미처 보지 못했던 타이라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이런 아이를 제물로 바치려 했다니 묘족은 의외로 잔인하구나!"
송현이 눈살을 찌푸리자 영호인은 모든 상황을 가늠했다.
"그렇게 되는 이야기였군. 나도 얼핏 들은 적이 있네. 묘족이 인신공양을 한다는 풍월을 말이야."
타이라는 낯선 이들이 자신을 보고 떠들자 두려움에 떨었다.
왕백이 따뜻한 양젖을 건네자 겨우 두려움을 떨쳐 내고 모닥불 옆에 앉았다. 송현은 막여위와 양명이 싱글벙글 하고 있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것이 바로 맥궁(貊弓)이로군. 대단허이!"
중원의 것도 묘족의 것도 아닌 특이한 형태의 궁(弓)을 들고 있었다.
"고구려의 것이라네. 예부터 동이(東夷)들의 맥궁은 신궁이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지."
"암, 오늘 여실히 증명해 보이지 않았나. 그 먼 거리를 날아가 적을 맞추는 위력을 말이야."
영호인은 두 사람이 언제 이런 것을 준비했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하하하, 사실은 말이야 이 모든 것이 임충 교두님의 지시 였네."
웃으며 오래전 일을 이야기하는 두 사람에게서 영호인은 임충 교두가 금군의 궁병 양성을 위해 동이의 맥궁을 연구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크게 놀랐다.
“그런데 어째서 보급이 되지 않았지?”
영호인이 묻자 송현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그게 바로 정치꾼들의 농간 때문이지."
“정치?”
"그래, 그 당시 조정대신들 중 누구도 임충 교두가 공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거든."
송현의 이야기에 영호인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망할 종자들!"
"그래, 정치란 그런 것이네."
송현은 입맛이 쓴지 혀를 찼다. 영호인은 미심쩍은 것이 있는지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것을 자네가 어찌 그리 잘 아나? 나도 모르 는 사실인데?”
막여위와 양명이 자신보다 금의위에 먼저 들어왔으니 그렇다고 쳐도 송현은 금의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영호인의 궁금증은 당연한 것이었다.
"후후후, 곤란한 것을 묻는군. 그건 말이야 맥궁을 추천한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지." "뭐?"
송현의 대답에 영호인은 깜짝 놀랐다.
"결국 나 때문에 임 교두가 곤란해졌지 임 교두나 나나 모두 우국충정에서 벌인 일이었지만 조정대신과 황제께서는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오히려 벌을 받게 되었다네."
"그런 사연이 있었군."
영호인은 안타까워하며 조정의 대신들을 어리석음을 탓했다.
그러다 보니 현 정세에 대한 아쉬움이 쏟아져 나왔고 모두의 표정도 좋지 않게 변했다. 적을 물리치고 소녀를 구했지만 대명 조정의 암담한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단 한 사람을 빼놓고서 ‥‥
왕백은 타이라 곁에서 통하지도 않는 대화를 시도하며 친해지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걸 지켜보던 일행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웃고 있을 일이 아닌 거 같은데."
영호인이 제일 먼저 사태를 깨닫고 주변을 살폈다.
"호인의 말이 옳아. 저들이 쉽게 소녀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송현이 맞장구를 치자 막여위와 양명이 무기를 거두며 모닥불에 모래를 끼얹었다.
"그럼 서두르자고 지금 떠나면 내일 아침에는 감숙성의 경계를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의견이 모아지자 송현은 소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소녀는 주저하더니 송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아이도 같이 간다."
왕백이 제일 좋아했다. 송현은 타이라를 왕백에게 맡기고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아울러 산장 사람들에게도 내일 아침이면 삼묘족 전사들이 들이닥칠 테니 떠나라고 일러 주었다. 잠시 후, 명사산 위에 오른 송현은 월아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림을 접어 품에 갈무리했다. 이제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할 시간인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송현과 일행은 사막을 향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