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章 별리(別離) (10/43)

第十章 별리(別離)

별리(別離)

  풀려난 병부시랑 제태와 한림학사 황자증은 서둘러 건문제를 보살폈다. 큰 충격을 받은 건문제가 불안해 보이자 병부시랑은 가까이 있던 영호인을 불렀다.

  “누가 사례감 왕유의 계획을 눈치 챈 것인가? 총교두 임충인가?”

  “아닙니다. 금의위 창대사 송현 학사입니다.”

  병부시랑 제태가 크게 놀라워했지만 곧 송현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상관이었던 전 병부시랑 송시현을 떠올리고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그 아이가 택한 인물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말이겠지. 믿음직한 위사들을 추려 황제폐하를 모시고 태화전으로 이동한다.”

  “충!”

  영호인이 양명과 막여위를 불러 황제의 호위를 맡겼다.

  “잘 듣게.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썩은 부위는 과감하게 잘라내야 한다. 도찰원을 제압해야 한다.”

  “이미 금의위와 금군이 처리했을 겁니다.”

  “좋아!”

  황궁 내에 적대적인 존재들은 이미 제거되거나 처리 중에 있었다. 곳곳에서 연기가 솟아나는 걸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한 아이로군!”

  황자증은 송현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혀를 내둘렀다.

  건문제를 옮길 준비가 끝나자 병부시랑 제태가 영호인에게 군령패를 건넸다.

  “그대를 임시로 금의위 수장에 명한다. 부상당한 임충 교두를 대신해서 역적의 무리와 간세들을 철저하게 가려내도록 하라!”

  영호인이 고개를 숙이자 병부시랑과 황자증은 흥분한 건문제를 달래며 태화전으로 옮겼다. 전권을 위임받은 영호인이 병부시랑에게 건네받은 군령패를 높이 들어 외쳤다.

  “모두 명을 받들라!”

  내력이 실린 목소리가 건청궁의 광장에 울려 퍼졌다.

  “금군의 궁사들은 무림인을 향한 활을 거두고 금의위 위사들은 죄인들을 압송하라!”

  평소 총교두 임충의 훈련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금군과 금의위 위사들은 무척 날렵했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금군의 활리 거두어지고 긴장이 풀린 무림인들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안도했다.

  “후우, 다행히 최악의 사태는 막았습니다.”

  유자강이 이마에 땀을 훔치며 한숨을 내쉬자 혜승 대사가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이는 유 도장과 제가 미리 약조를 한 탓입니다. 그렇지 않고 경거망동을 했다면 중원 무림은 씻지 못할 과오를 저지를 뻔하지 않았습니까?”  혜승 대사의 말에 유자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파 무림인들은 소림과 무당의 혜안에 크게 감복했다.

  구석에서 이 소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시타르는 콧방귀를 끼었다.

  “왜요, 뭐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크게 상한 사람들 없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저나 좀 잡아 주십시오.”

  연단 아래서 목숨을 건 모험을 한 송현이 숨을 고르며 시타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끙! 그건 네놈 생각이고, 저 흰 수염난 녀석은 아직 볼일이 남았나 보다.”

  “누구......?”  내력을 이용하여 황제에게 충언을 한 송현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시타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고개를 드니 송현에게도 교활한 눈빛을 번뜩이며 한 곳을 노려보고 있는 붉은 장포를 걸친 노인이 보였다.

  “당천악?”

  송현은 의아해하며 그의 눈을 따라갔다.

  “맙소사, 사례감 왕유와 거래한 인물이 바로 당천악이었나?”

  경악한 송현이 영호인에게 경고하려는 찰나 당천악이 한발 빨리 움직였다.

  당천악의 붉은 장포가 펄럭이며 나부끼니 마치 붉은 매가 나는 듯했다. 금의위 위사들이 그 앞을 막아섰지만 사천 당문의 당천악을 막기에는 너무나 무력했다.

  수수깡이 쓰러지듯 금의위 위사들은 제대로 검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당문비침(唐門飛針)!”

  뒤늦게 소동을 알아차린 유자강이 노호성과 함께 십여 장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제운종!”

  무당의 경신법을 알아본 당천악은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장포 속에서 비침들이 벌떼처럼 튀어나왔다. 이에 맞서는 유자강은 검을 사선으로 베며 빙글빙글 돌았다.

  “팔괘비룡검!”

  그 화려한 회전은 난전(亂戰)을 위한 초식이지만 일정한 방위 없이 날아오는 당문비침을 막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흥! 말코 도사 같으니라고.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 보거라!”

  콧방귀를 끼며 그의 소매가 펄럭이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앞으로 뻗어 나왔다.

  “독무(毒霧)?”

  소매를 들어 코와 입을 막은 유자강이 제운종의 신법을 사용하여 뒤로 크게 물러났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독무의 영향권 아래 있던 금의위 위사들은 얼굴이 검게 변하더니 중독 증세를 보였다. 손 쓸 사이도 없이 잠시 괴로워하다가 숨이 끊어졌다. 유자강은 악랄한 수법에 치를 떨었다.

  “이, 지독한! 용서하...... 윽!”

  당천악을 막아서려던 유자강의 신형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단전 아래가 뜨끔하는 느낌이 들며 머리에 어지러움을 느끼자 유자강의 낯빛이 굳어졌다.

  “아뿔싸!”

  뒤늦게 중독되었음을 알고 자리에 주저앉아 내력을 끌어 올려 독 기운에 대항하였다. 이를 본 무당파 문하들이 체면 불구하고 한 명을 상대로 무당검진을 펼쳤다.

  그러나 그것이 오만이었음이 금방 증명되었다.

  여덟 개의 무당 검진이 팔방위를 점하고 당천악을 핍박해 들어갔지만 허무하리만치 너무나 쉽게 파해되고 말았다.

  이에 혜승 대사가 대노하여 금강권을 시전했다.

  퍼버펑!

  장과 장이 충돌하는 타격음이 장내를 울렸다. 폭죽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권풍이 주변에 휘몰아쳤다.

  “대력금강지!”

  웅후하고 심후한 내력이 만들어 낸 대력금강지가 불을 뿜었다. 목에 걸린 염주가 출렁이며 격전을 암시했다.

  삐이익-

  호각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제길! 길을 비켜라! 나는 네놈들하고 볼일 없단 말이다.”

  마음이 급한 당천악은 무리수를 두는 수밖에 없었다.

  소림의 혜승 대사에 이어 정파의 고수들이 점점 더 많이 당천악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호각 소리는 철수하던 금군의 궁병들을 부르는 소리였으니 당천악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으아아, 비켜라 이것들아!”

  당천악의 손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피해라!”

  독질려가 당천악의 소매에서 쉴 새 없이 나오자 정파 무림인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틈을 노리고 뛰어오른 그의 신형이 사례감 왕유를 압송하는 금의위 위사들 사이에 떨어졌다.

  “막아라!”

  용기는 훌륭했지만 병사들이 당천악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수십 명의 병사가 쓰러졌고 사례감 왕유를 호송하던 금의위 위사들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스승님! 놈을 막아야 합니다.”

  송현이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시타르의 신형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겁에 질린 사례감 왕유를 사이에 두고 당천악과 시타르의 무시무시한 대결이 벌어졌다.

  수십 수백 합을 겨루고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시타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네 녀석은 바로 그때 객잔에 있던 당문의 애송이였구나!”

  시타르의 두 눈이 커지며 당천악의 노안에서 과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모든 운명이 시작된 그 객잔에서 무당의 장 도장에게 대들다 혼쭐이 났던 어린 당문의 문하를 기억해냈다.

  마교 교주 장천의 사부인 이름 모를 노인이 무극무해를 전해 줄 때 뒤에 몰래 숨어서 엿듣던 앳된 얼굴이 당천악으로 변했다.

  “당신은 그 동자승?”

  당천악 역시 과거를 모두 떠올렸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책 때문이냐?”

  시타르의 팔이 늘어나며 손톱이 매의 발톱처럼 길어지며 그의 신형이 소름끼치는 전갈의 형태로 변했다.

  “큭큭큭! 정말 질겨도 지독하게 질긴 인연이지 않소? 당신들이 속닥속닥하며 그것을 뒤로 빼돌려서 내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고생했는데. 이제라도 내 몫을 찾아야겠어!”

  당천악이 이를 갈자 시타르는 원수를 대하듯 으르렁거렸다.

  “무극무해를 아는 인간은 모두 죽어야 한다. 그건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인간을 죽이는 마물(魔物)이야!”

  “흥! 그건 가진 자의 비겁한 변명이라고 해 두지. 나를 봐라. 겨우 십분지 일의 깨달음으로 무림의 일대종사가 되었다. 무엇이 마물이란 말이지? 결국 당신도 욕심을 낼 뿐이야. 혼자 독차지하고 싶을 뿐이란 뜻이지.”

  “어리석은 놈! 이미 골수에까지 퍼져서 때가 늦었구나!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번민을 끝내 주마!”

  시타르는 자신의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당천악 역시 숨기고 있던 나머지 일푼의 실력까지 모두 드러냈다.

  “세상에! 당천악의 실력이 저 정도였단 말인가?”

  중독되어 호흡이 가쁜 유자강이 아연실색하자 영호인이 그의 등에 장심을 대고 무당의 심법을 시전했다. 따뜻하고 청명한 기운이 흘러 들어오자 유자강의 눈빛이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갔다.

  “당천악이 이미 현경의 고수였다니, 경천동지할 일이로군.”

  숨을 헐떡이는 유자강의 눈은 두 사람의 대결을 한 동작이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힘을 내서 지켜보았다.

  “심려 마십시오, 스승님! 저 노승의 실력 또한 당천악의 아래가 아니니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실력자들이 나타난 것이냐?”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우선은 기력을 찾도록 하십시오. 저는 금군이 도착하는 대로 당천악과 그의 일당을 주포해야겠습니다. 지금은 섣불리 끼어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유자강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지자 영호인은 내력을 거두고 일어섰다. 물러났던 금군의 궁병들과 창병들이 숨을 헐떡이며 건청궁 광장에 다시 들어서자 영호인은 재빨리 당천악과 시타르가 접전을 벌이는 곳을 포위했다. 일천 궁병의 시위가 당천악을 겨누었다.

  “진무사 천인장인가?”  “그렇사옵니다.”

  궁병을 이끌고 온 진무사 소속의 궁병대장에게 영호인은 병부시랑에게 건네받은 영패를 내보였다.

  “나는 전권을 위임받은 금의위 소속 영호인이다. 대역죄인을 빼돌리려고 하는 붉은 장삼의 노인과 사례감 왕유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반드시 국문에 세워야 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 반드시 명줄을 끊어놔야 한다.”  “복명!”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명을 내린 영호인이 송현에게 다가가자 애를 태우고 있던 송현이 기뻐했다.

  “왜 이제 오는 거야?”

  “미안하네. 폐하를 먼저 대피시켜야 했어. 죄수들도 압송을 해야 했고 설마하니 저자의 신위가 이토록 대단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존장은 무사하신가?”

  “그래, 다행히도 중독된 정도가 미진하네.”

  송현은 심히 안심을 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보고 몸을 떨었다. 단 한 사람이 수많은 정파 무인들을 무력화시키고 금군 백여 명과 수십 명의 금의위 위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인간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송현은 깨달았다. 왜 시타르가 무극무해를 그토록 없애려 했는지 과거 마교 교주 장천이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와아!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자 물샐틈없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금군들 입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손에서 장풍이 나오고 공중에서 제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는 시타르와 당천악의 신위는 그야말로 신선들의 춤사위 같았다.

  시타르의 열 개 손톱은 천근 바위도 잘라낼 기세로 당천악의 급소만 노렸다. 그것을 안 당천악은 당문의 유력한 경신법으로 미꾸라지가 사람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듯 절묘한 몸놀림을 보였다.

  “큭! 쥐새끼 같은 놈! 허나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타르가 독하게 마음을 먹자 그의 몸이 한 차례 더 변화를 일으켰다. 등 뒤에서 두 개의 손이 더 튀어 나왔다.

  “으음, 빌어먹을 천축 땡중 같으니라고, 완전히 괴물이 되었구나!”  “크크크, 네 녀석도 무극무해를 포기하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욕심을 내겠느냐?”  “흥! 그건 미련한 당신의 경우겠지. 나는 천하제일의 비상한 머리를 가졌으니 당신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

  “함부로 장담하는 것이 아니지!”

  네 개의 손이 방위를 점하자 당천악의 몸놀림이 부자연스러워졌다. 당문의 절기인 암기가 시타르에게는 도통 통하지 않으니 당천악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펑! 펑!

  결국 시타르에게 가슴을 허용한 당천악이 서너 장 뒤로 나가떨어졌다.

  “커헉!”

  피를 한 움큼 쏟아낸 당천악이 핏발 선 눈으로 시타르를 쳐다보았다.

  “카학! 퉤! 좋아하기는 아직 일러 이 괴물아!”

  마보자세를 취한 당천악이 양팔을 돌리며 장심을 가운데로 모으자 혜승 대사가 비명을 질렀다.

  “조심하시오!”

  다음 순간 당천악의 장심이 앞으로 내뻗어지자 갑자기 눈앞에서 환각이 일어났다.

  “만천화우(滿天花雨)?”

  당문의 비전 절기인 만천화우(滿天花雨)가 당천악의 손에서 재연되자 무림인들은 숨을 죽였다. 하늘에 꽃비가 가득 찬다는 궁극의 투법.

  인간이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에 시차를 두어 공격하는 암기들 때문에 절대 피할 수가 없다는 당문 최후의 초식이다.

  송현의 눈에는 마치 벌떼가 시타르를 향해 덤벼드는 것처럼 보였다.

  “안 돼!”

  불길한 느낌이 서늘하게 가슴에 스쳐 지나가자 송현은 악을 쓰며 앞으로 내달렸다. 영호인이 미처 붙잡을 사이도 없었다.

  투두둑!

  막아낸 암기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빛을 냈다. 당연히 쇠로 만들어졌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만천화우에 사용된 암기들은 얇고 가늘었으며 투명했다.

  스스스!

  그리고 땅에 떨어지자 연기를 내며 녹아 없어졌다.

  “빙정(氷丁)?”  무리하게 만천화우를 사용한 당천악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아, 하아! 결코 사용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후의 초식을 사용한 것이 분한지 당천악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였다.

  “후후후, 지금 것은 칭찬해 주지. 제법 화려한 꽃놀이였...... 우욱!”

  모두 피했다고 생각했던 시타르의 생각과 달리 만 개의 빙정 중 서너 개가 미세한 근육 사이에 파고 들어갔다.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고 곧 세상이 한쪽으로 기운다고 생각하는 순간 차다찬 바닥이 느껴졌다.

  털썩!

  “시타르!”

  송현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들리자 시타르는 힘없이 웃었다.

  “내 운도 여기까지인가 보다.”

  입에서 진득한 액체가 흘러나와 말소리가 분명하지 않았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말라고!”

  송현이 빙정이 파고 들어간 곳에서 피가 흘러내리자 미친 듯이 지혈을 하려 했다. 하얀 학사복이 금세 붉은 피로 물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송현아,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거라!”

  “안 돼, 안 돼! 더 이상 내 주위 사람이 죽는 건 내가 용서 못해!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야, 왜!”

  송현이 세상을 저주하며 악을 썼지만 잔인하게도 시타르의 몸은 점점 식어갔다.

  “영감, 정신 차려!”

  어느새 쉬어버린 송현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시타르의 의식을 잠시 돌아오게 하였다.

  “하아, 하아, 땡중이 엉터리 학사를 만나 말년이 참으로 행복하였다. 지옥에서도 네 녀석이 해 준 맛난 요리들이 그리울 게다.”  “영감, 영감 죽지 말아. 내가 아직 해 줄 요리가 많단 말이야!”

  “쿨럭! 쿨럭! 그래, 그래...... 송현아, 잘 들어라...... 세상에 무극무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너 이외에 남겨 두지 마라...... 그리고 네가 만약에 자식을 갖게 되면 절대로...... 절대로......”

  채 말을 다하지 못하고 시타르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영감...... 시타르......”

  송현이 그의 손을 잡아 올렸지만 힘없이 내려갔다. 

  “우우욱!”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슬픔을 억누르자 끅끅거리는 울분이 새어 나왔다. 붉게 충혈된 송현의 눈이 분노를 토해 낼 대상을 찾았고 그의 눈에 사례감 왕유의 멱살을 잡고 뭔가를 다그치는 당천악의 모습이 들어왔다.

  “죽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손에 든 송현의 신형이 공간을 접어 이동한 듯 순식간에 당천악의 면전에 도달했다.

  “헉!”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던 학사 따위가 가공할 경신법으로 접근해 오자 당천악은 기겁하고 체면 불구하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서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뇌려타곤(懶驢陀坤)의 수법이었다.

  당천악은 너무도 신랄한 송현의 공격에 그만 무인으로서는 최대수치라 일컫는 뇌려타곤을 시전하고야 말았다. 땅바닥을 마구 뒹굴어서 겨우 목숨을 건진 당천악은 참담하고 부끄러웠다.

  “이, 버러지 같은 학사 나부랭이가 노부를 능멸해!”

  끌어 안고 있던 사례감 왕유를 집어 던진 당천악이 사천당문의 유명한 암기 독질려를 송현에게 던졌다. 검은 비수가 가까이 다가와 바로 앞에서 터졌다. 그 안에 숨어 있던 수많은 강침(鋼針)이 터져 나와 사방 이삼 장(丈)을 뒤덮었다.

  지켜보던 왕백이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였다. 그러나 영호인과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유자강과 혜승 대사는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제운종...... 칠성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세 사람이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물 찬 제비처럼 공중제비를 돌아 독질려의 파편을 모두 피해 내고 가볍게 바닥에 내려앉기 무섭게 검끝이 원을 그리며 당천악의 요혈을 찔러가는 모습은 무당의 장문인 급의 항렬에서나 선보일 수 있는 신위였다.

  “어떻게 저런 신위를 펼친단 말인가?”

  기실 영호인보다 더 놀란 것은 유자강이었다. 그것은 황성에 처음 도착했을 때 송현과의 만남에 대한 선물로 그가 선보인 칠성검을 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무공이라도 그걸 시전하는 사람의 성품에 따라 무공도 변하는 법이다. 송현이 펼치는 칠성검은 영호인의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유자강의 유려한 칠성검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단 한번 보여 주었을 분인데.”

  유자강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무릇 무공이라 함은 각 문파의 비전이며 검을 한 번 내뻗고 거두어들이는 간단한 동작에도 힘의 배분과 호흡의 길이 등 세세한 방법을 명시한 초식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걸 단지 눈으로 보고 쫓아 할 수 있다면......

  “그건 악몽이다!”

  유자강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불길한 생각을 떨쳐 내려는 순간 혜승 대사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매화(梅花)가...... 매화가 피어오른다!”

  혜승 대사의 부상이 심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던 유자강은 송현의 손 위에서 검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광경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화산의 매화검까지란 말인가?”

  매화십이수(梅花十二收)!

  완벽하게 시전하면 천지사방이 매화향기로 뒤덮이고 열두 송이의 매화꽃이 죽음을 선물한다는 화산파의 비전절기다.

  비록 열두 송이는커녕 매화꽃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지만 진한 매화향이 풍겨 나왔다.

  캉캉캉!

  송현의 다양한 공격에 당천악이 당황하며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통에 뒤로 서너 장 물러나고 말았다.

  “큭! 부상만 아니라면 네 녀석쯤이야 일초지적도 되지 않을 터인데.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변명도 되지 못하는 말을 지껄이던 당천악은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금군 궁병을 발견하자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구나. 이렇게 시간만 끌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겠어.”

  눈을 데구르 굴리며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하는 당천악에게 송현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송현은 오로지 시타르에 대한 복수심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지금 무얼 하는지조차 몰랐다. 오로지 검을 휘둘러 자신의 스승을 빼앗은 당천악에게 복수하려는 일념뿐이었다.

  ‘귀찮군. 어디서 저렇게 잡다하게 무공을 익혔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모두 깊이가 없다.’

  당천악은 송현의 실력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내상이 심하기는 하지만 사례감 왕유를 데리고 황궁을 빠져나가려면 무리를 하는 수밖에 없겠군.’

  궁리를 마친 당천악이 소매에 손을 집어넣었다.

  “잘 놀았다! 아쉽지만 여기서 작별을 해야겠어!”

  검은 물체가 송현 앞으로 날아오자 영호인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화탄이다, 모두 피해라!”

  다급하게 경고했지만 그렇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사과 크기의 화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건청궁 광장에 떨어졌다.

  “으아악!”

  모두가 머리를 바닥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

  의당 있어야 할 폭음과 폭발이 없자 고개를 숙였던 이들이 천천히 일어섰다.

  “아니 저자는?”

  화탄을 낚아챈 괴상한 난쟁이가 화탄의 심지를 손으로 잡아 뽑았다.

  “훌훌훌, 위험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구나!”

  비장의 수가 어긋나자 당천악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화탄의 폭발 뒤에 숨어서 도망치려던 당천악은 옆구리에 낀 왕유를 꼭 붙잡았다.

  “네놈은 또 뭐냐?”

  화탄을 갈무리한 난쟁이가 당천악의 말이 거슬리는지 눈썹을 치켜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거드름을 피며 자신을 소개하려던 난쟁이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켜, 혹부리!”

  분노한 송현이 난쟁이를 제치고 다시 당천악에게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다.

  “흑...... 크흑! 아니 저 학사 나부랭이가 나하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름가지고 장난질이지?”

  체면을 구긴 그는 무림인들 앞에서 망신살이 뻗치자 화가 났다.

  휙!

  가볍게 몸을 날려 송현을 멈추게 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

  “당신은 비켜. 이건 내 일이다.”

  송현의 눈이 정상이 아니란 걸 알아차린 난쟁이가 혀를 찼다.

  “쯧쯧쯧,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는 잠시 쉬고 있거라!”

  난쟁이가 가볍게 뛰어올라 송현에게 점혈을 했다.

  “으윽,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나를 풀어 줘!”

  송현이 악을 쓰지 난쟁이는 뺨을 긁으며 인상을 썼다.

  “거, 어린놈이 성질 한번 불같네. 너는 어딜 도망가?”

  당천악이 몰래 도망치려 하자 난쟁이가 손을 뻗었다.

  “마영수(魔影手)!”

  당천악이 기겁할 만도 했다. 사파도 아니고 정파도 아닌 무림의 마두라고 알려진 은거기인이었다.

  “호, 마영수를 알아보다니. 그럼 내가 누군지도 잘 알겠구나.”

  난쟁이가 가슴을 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요절복통 혹부리 영감!”

  “크헉!”

  기절했다가 깨어난 왕백이 점혈 당해 꼼짝하지 못하는 송현을 보고 악에 받쳐 소리친 것이다.

  “우리 송 학사님을 살려 내!”

  왕백이 눈물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것들이 정말 십수 년만에 강호에 나타났다고 나를 완전히 무시하네!”

  난쟁이가 방방 뛰면서 노발대발하자 당천악은 신음을 앓듯 새소리를 내었다.

  “요절복수 흑신마...... 노독물이 살아 있었다니.”

  당천악이 알아보자 무림인들도 경악했다.

  “무림의 공적! 흑신마!”

  주변의 반응이 폭발적으로 변하자 겨우 만족했는지 난쟁이 노인은 흥에 겨워 콧노래를 불렀다.

  “흥흥흥! 이 우매한 것들이 겨우 노부를 알아보다니, 뭐 늦었지만 다 용서해 주겠다.”

  정신 상태가 의심되는 흑신마의 행동에 당천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흑 선배께서는 어인 일로 납시었습니까?”

  천천히 몸을 뒤로 빼며 언제라도 도망칠 준비를 하는 당천악을 보고 흑신마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당문의 아가야, 내 손에서 도망칠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우뚝!

  뒷걸음질 치던 당천악의 이마에 진땀이 흘러내렸다.

  “그 고자 놈을 내려놓아라. 나는 그놈에게 볼일이 있으니 나머지는 너희들끼리 지지고 볶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으마.”

  흑신마의 말에 당천악은 갈등했다.

  무림인들도 무림인들인지만 금군의 궁병들은 자신의 지금 상태로는 빠져나가기 무리였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저를 이곳에서 빼내 주신다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천악이 왕유의 목 언저리를 지그시 눌렀다.

  “흥! 영악한 놈. 지옥에 떨어져도 살아 돌아올 놈이로고!”

  흑신마가 잠시 고민하자 송현이 악을 썼다.

  “안 돼! 절대로 그래서는 안 돼! 영호인, 뭐 하는 거야! 나는 상관하지 말고 어서 활을 쏴!”

  영호인은 송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궁병 대장을 향해 손을 들었다.

  ‘하지만 송 학사도 위험하다.’

  화살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그들과 너무 가까이 있다. 게다가 점혈 당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니 어려운 일이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영호인들에게 유자강이 소리 질렀다.

  “그의 말이 옳다! 어서 군령을 내려라!”

  “스승님?”

  영호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인자하고 공명정대하다고 생각했던 유자강이 송현을 죽이려고 한다.

  왜 그런지 영호인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무당의 제자가 아니 자가 절세기연을 얻었으니 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불심이 깊다는 혜승 대사마저 그저 눈을 감을 뿐이었다.

  저 밑바닥에서 환멸이 밀려 올라왔다. 그가 해 줬던 모든 말들이 가식으로 느껴졌고 뱃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라는 겁니까? 무당의 정신은 공명정대가 아닙니까?”

  영호인이 눈물을 흘리자 유자강은 냉혹하게 말했다.

  “그 무엇도 사문보다 우선 되지 않는다. 너 역시 무당의 제자다. 사문과 제자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간의 정리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유자강이 채근하자 영호인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명을 기다리는 진무사 소속의 궁병대장은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영호인 이 멍청한 녀석아! 어서 활을 쏘란 말이다.”

  송현의 외침이 흑신마의 결단을 도와주었다.

  “좋아, 거래하지!”

  흑신마의 마영수가 당천악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후후후, 학사나리 나중에 또 보자고!”

  흑신마가 송현을 향해 눈을 찡긋거린 다음 뛰어오르려 했다.

  “쏴라!”

  그때 누군가 다급히 명령을 내렸고 기다림에 지친 궁병들은 주저하지 않고 시위를 놓았다.

  “안 돼!”

  영호인이 송현에게 달려가려 하자 무당의 사제들이 그를 붙잡았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비는 높이 솟구쳤다가 무서운 속도로 낙하했다.

  콰콰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수천 발의 화살이 쉬지 않고 날았다. 궁병들은 멈추라는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기계적으로 시위에 화살을 재운 다음 날려 보냈다.

  잠낀 사이에 화살들이 숲을 이루었다.

  “멈춰라!”

  명을 내린 사람은 병부시랑 제태였다. 황제를 태화전으로 피신시킨 다음 서둘러 돌아온 것이다. 사례감 왕유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바로 명령을 내렸다. 화살비가 그치자 송현과 당천악 등이 서 있던 자리에는 수천 발의 화살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금의위 위사들과 병사들이 그 사이로 들어가 시체를 찾았다.

  “없습니다!”

  수십 명이 안으로 들어가 수색했지만 그들이 찾는 시체는 없었다. 영호인은 그 말에 안도하며 주저앉았다.

  “송현 학사님! 정신 좀 차리세요!”

  문득 등 뒤에서 왕백의 목소리가 들리자 영호인은 미친 사람처럼 뛰어갔다.

    점혈 당해 몸이 굳어 버린 송현은 연단 반대편에서 흙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영호인이 얼른 점혈을 풀어 주자 송현은 울분을 토했다.

  “으아아아!”

  그런 송현을 영호인이 끌어안았다.

  “그래, 소리 질러! 다 토해내!”

  송현은 영호인의 등을 마구 쳤다. 피멍이 들었지만 영호인은 입을 열지 않았고 송현을 끌어안은 손을 놓지도 않았다. 송현의 울음이 그치고 팔 힘이 빠질 때까지 그렇게 두 사람은 마냥 움직이지 않았다.

  황궁을 뒤집어 놓은 사태가 끝나고 두 달여 동안 황성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그동안 환관들에게 당했던 억눌린 학사들과 대신들은 가혹할 정도로 환관들과 그들과 결탁했던 무리에게 복수했다.

  황금빛 황성이 피로 물들어 붉게 빛났다.

  그러나 이런 소란과 상관없이 금의위 편전에서 송현은 조용히 책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곁에서 지키던 왕백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침부터 앉아 있었건만 송현의 책장은 전혀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수척해진 영호인이 송현을 걱정하자 송현은 힘없이 웃었다.

  “영감 보낸 지 사십구 일이 되었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남몰래 향을 피워 놓고 사십구제를 보낸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났고 정을 쌓은 자하원에 송현은 작은 사당을 마련하고 남몰래 제를 지내 왔다.

  “떠나려는가?”

  영호인은 짐작하고 있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너무나 간단한 대답에 영호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 싱겁기는, 말려도 소용이 없겠지?”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호인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어쨌든 자네가 잘 되어서 나는 기뻐.”

  역모를 막은 공으로 영호인은 도찰원의 수장이 되었다. 정구품에서 정오품의 각사낭중(各司郎中)이 되었으니 입신양명하겠다던 영호인의 꿈은 이루어진 셈이었다.

  “하하하, 그래도 자네보다는 못하네.”

  건문제는 송현에게 대국사의 칭호를 내렸다. 물론 송현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 부질없는 허울이지. 나는 이제 이 황궁이 너무 싫어. 그래서 떠나는 거지.”

  “그래 갈 데는 있나?”

  영호인의 걱정이 느껴지자 송현은 그저 미소 지었다.

  “이 넓은 천하에 내 한 몸 누울 곳이 없을 까. 평생을 궁에서 갇혀 살았으니 이제 천하를 주유하며 유유자적 살아볼까 해.”

  영호인은 송현의 마음을 알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왕백의 코 고는 소리만이 적막한 편전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이제 막 관리가 된 듯한 앳된 젊은이들이 어색해 보이는 관복을 입고 등청을 서두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송현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웃었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군.”

  간단한 봇짐 하나 등에 멘 송현은 황제의 거처가 있는 곳을 향해 절을 올렸다.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떠나는 불충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부디 만백성에게 존경 받는 그런 군주가 되시기를 바라옵니다.”

  배례를 마친 송현이 눈을 뜨자 비단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응?”  누군지 보려고 고개를 들다가 기겁하였다.

  “아니 너는 왕백이 아니냐?”

  송현이 어이가 없어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비단 신발에 비단 장포를 두른 왕백은 부유한 대가집 자제처럼 보였다.

  “너 예서 뭐 하는 거냐?”

  송현이 다그치자 왕백은 씨익 웃었다.

  “뭐 하기는요. 송 학사님 따라가려고 나섰습니다.”

  “뭐야?”

  송현이 안 된다며 돌아가라고 말렸지만 왕백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관직도 내놓았고 급료도 모두 받았습니다.”

  고집불통의 왕백 때문에 송현의 이마에 주름살이 늘었다.

  “나는 저 바깥 세상에 집도 절도 없는 고아란 말이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

  송현이 타이르듯 왕백을 달랬지만 소용없었다.

  “제가 이 무서운 황실 생활에서 깨달은 진리가 뭔지 아십니까?”

  “그게 대체 뭐냐?”

  “명철보신(明哲保身) 송현 학사님입니다.”

  송현이 기가 막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자 왕백은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바로 송현 학사님 곁이니 저를 내칠 생각일랑 아예 마십시오.”

  제 몸보다 더 큰 봇짐 때문에 뒤뚱거리는 왕백을 보고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허허, 내 졌다, 졌어. 좋아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나중에 고생한다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송현이 짐짓 무섭게 으름장을 놓았지만 왕백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끙! 그동안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송현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려 하자 뒤에서 잡아끄는 소리가 들렸다.

  “호랑이 새끼 여기도 있소이다.”

  화들짝 놀란 송현은 아예 울상이 되었다. 눈앞에 봇짐을 멘 이들이 더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대들은 또 무슨 짓이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제정신이오?”

  막여위와 양명이 사복을 입고 나타나자 송현은 죽을 맛이었다.

  “왕백 이 녀석이야 어려서 그렇다고 치고, 생각이 있는 어른들이 이게 무슨 경솔한 짓이오? 식솔들을 위해서라도 어서 돌아가시오!”

  송현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막여위가 그답지 않게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송학사 말대로 식솔들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오.”

  막여위의 말에 양명이 거들었다.

  “내 이번 일을 겪으며 황궁이라는 곳이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소. 어디 간들 이곳보다 못하겠소? 송학사와 함께라면 그곳에 둥지를 틀고 살고 싶다 이거요.”

  송현은 더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럼 나도 끼워 주게!”

  새로이 들린 목소리에 송현의 표정은 완전히 구겨졌다.

  “영호인 그대마저!”

  송현은 영호인만은 안 된다며 완강히 거절했지만 영호인의 억지에 그만 지고 말았다.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 네가 남든지 내가 따라가든지.”

  송현은 네 사람을 보며 화를 냈다.

  “다들 미쳤어! 미쳤다고! 나중에 딴소리만 해 봐. 난 몰라!”

  송현이 씩씩거리며 오문(午門)밖으로 향하자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같이 가요, 송 학사님!”

  봇짐 하나 달랑 멘 다섯 명이 강호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기약 없는 여행을 시작했다.

(학사 장문인 2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