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무림영웅대회(武林英雄大會) (8/43)

第八章 무림영웅대회(武林英雄大會)

  황성으로 들어오는 오문(午門) 앞에 멈춰 선 십여 명의 장정들은 그 장대하고 위풍당당함 앞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과연 황제폐하가 계시는 곳이로다!”

  노도사가 수염을 매만지며 황궁의 거대함에 새삼 놀라자 영웅건을 질끈 맨 중년인 역시 아는 체를 하며 떠벌렸다.

  “아무렴 달리 황금빛 도시라고 부르겠는가?”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모양새가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성문이 열리고 긴 기다림 끝에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던 그들은 부푼 가슴을 안고 허락된 방문을 시작했다.

  문턱을 넘자 많은 고관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비로소 자신들이 황궁에 입궁했다는 사실을 피부로 깨달았다. 성안으로 들어서자 호리호리한 몸매에 간결한 옷차림을 하고 친절하게 맞아준 것은 젊은 학사였다.

  “자, 어서 오십시오! 무림 동도 여러분 환영합니다.”

  엉성하게 포권을 한 채 인사를 하는 젊은 학사의 호들갑에 그들은 당황하여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재빨리 포권을 하며 화답하였다.

  “저기, 손이......”

  왕백이 눈짓을 하자 손님들의 손 모양과 자신의 손 모양이 다름을 알고 얼른 왼손과 오른손의 위치를 바꾼 송현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동안 수없이 읽은 잡서를 통해 강호에 대해서 웬만큼 안다고 자부했던 송현은 시작부터 삐걱거리자 당황하여 얼굴이 벌게졌다. 

  “하하하, 대명 황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모쪼록 편안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얼른 이 자리를 모면할 속셈인 송현은 첫 방문객들을 서둘러 들여보냈다.

  “후, 진땀 뺐다!”

  “킥! 킥! 무림통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놈이 나를 놀려 먹는 재미가 쏠쏠한가 보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송현 학사님이 무척 긴장하시고 계신 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왕백이 입을 가리고 웃자 송현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사실 떨린다. 책 속에서나 보아 왔던 영웅호걸들을 내 눈으로 본다니 어찌 안 설레겠느냐?”

  “하지만 방금 들어간 사람들은 전혀 영웅호걸로 보이지 않던데요?”

  “그야 당연한 이치지. 모든 학사들이 나처럼 똑똑하다면 대학사가 무에 필요하겠느냐? 그처럼 모든 무림인이 영웅호걸이면 재미없지 않을까?”

  송현이 진지하게 설명하자 왕백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자랑하시는 거죠?”

  왕백의 지적에 송현은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잠시 후 또 한 무리의 방문객이 찾아오자 송현은 얼른 그들을 맞이했다. 왕백은 송현에게 졌다는 듯 머리를 흔든 후 붓을 들어 명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필두로 오후가 되자 초청장을 받은 무림인들이 대거 몰려들어 정신없는 하루가 되었다.

  금의위 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초청받은 무림인들은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 받고 무기를 모두 맡겨야 했다.

  그 과정에서 작은 실랑이도 있었지만 이곳이 어디인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황제의 거처다. 감히 어느 누가 불만을 제기할 것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꼬리표를 단 무기들이 짐수레에 실려 금의위 창고로 향했다. 금의위에서 나온 관리들이 무림인들의 명부를 작성하고 초청장을 확인하는 업무를 맡았기에 관리들이 앉아 있는 책상 앞으로 무림인들이 줄을 서는 생소한 정경이 펼쳐졌다. 각 문파에서 배분이 높은 연장자들은 이런 경험들이 익숙하지 않아 다른 문파의 고수들과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막여위와 양명은 코웃음을 쳤다.

  “저 치들이 아직도 여기가 저희 집 앞마당인 줄 아는군.”

  “흥! 왜 총교두께서 금의위에게 무장 도열하라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

  양명이 무림인들의 거만한 태도에 씩씩거리자 막여위도 맞장구를 쳤다.

  “아무렴. 제아무리 명성이 자자한 영웅호걸이라도 오문을 지나 승천문에 도달하면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을 걸세.”

  양명도 막여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총교두 임충의 명령에 의해서 금의위 위사들 천여 명이 완전무장한 채 무림인들의 숙소로 가는 승천문 어귀에 도열해 있었다.

  관의 힘이 무림의 힘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아주 시의적절한 조치여서 강호에서의 작은 명성만 믿고 거드름을 피우던 무명소졸들은 정예 군인들이 뿜어내는 위세에 크게 기가 죽어 더 이상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는 황실의 위엄을 높이고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취해진 정책 중 하나였다. 황성의 오문들이 지나치게 큰 것도 모두 이런 이유에서였다.

  가슴에 매듭이 다섯 개가 달린 누더기를 걸친 거지가 금의위 위사들이 도열한 것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하다!”

  그러나 걱정이 담긴 노승의 불호가 뒤를 따르자 인상을 찌푸렸다.

  “혜승 대사께서는 어인 일로 이 좋은 날 초를 치는 게요?”

  개방의 성격을 드러내듯 거친 말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허허허, 뭐가 좋은 날이라는 건지 소승은 모르겠소. 개방의 사 장로께서는 무슨 잔칫집이라도 온 것처럼 즐거워 보이오만 소림은 불민한 일이 벌어질까 무섭소.”

  구대문파 중 명망이 두터운 소림의 혜승 대사의 걱정에 사 장로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껄껄’ 거렸다.

  “으하하하, 혜승 대사의 법력이 고명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오늘 뵈니 소문이 과장된 듯하오이다.”

  지팡이로 땅을 치며 으스대는 사 장로에게도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던 혜승 선사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도대체 황상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구료. 아미타불!”

  혜승 선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자들이 누군지 사 장로가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니, 저놈들이 어떻게 이곳에 왔지?”

  기겁하여 소리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결코 밝은 햇빛 아래 나와서는 안 될 사파의 무리들이었다.

  “장강수로채와 녹림 18채 패거리들입니다. 저 무치한 것들이 어떻게 영웅대회에 나선단 말입니까?”

  목에 핏줄이 서도록 고함을 지르는 사 장로를 발견한 그들 역시 좋지 않은 얼굴로 다가왔다.

  “흥! 거지들의 입은 어디서나 지저분하구나!”

  “뭐라? 감히 죽고 싶어서 환장했느냐?”

  정파와 사파!

  기름과 물처럼 상생할 수 없는 존재들이 좁은 길목에서 마주치니 불협화음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평소라면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할 자들이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도발하니 개방의 사대장로 중 하나인 사유강의 속이 끓을 수밖에 없었다.

  “오냐, 내 이것들에게 오늘 거지의 지팡이가 얼마나 매서운지 복날 개 맞듯이 손봐 주마!”

  사유강이 타구진을 출수하려 하자 사파 무리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피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가 금세 드러났다.

  “허허허, 그놈의 매질 때문에 언젠가 개방이 큰일을 당할 게다.”

  높지 않지만 주위로 은은하게 퍼지는 목소리에는 심후한 내력이 실려 있었다. 사유강은 즉시 상대의 실력을 알아차리고 바짝 긴장했다.

  “어느 고인이시오?”

  사유강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을 느낀 개방의 무리들은 크게 놀랐다.

  “클클클! 요즘 얻어먹는 음식이 신통치 않은가 보이. 내 목소리도 몰라보고 말이야.”

  사파의 무리가 두 갈래로 갈라지며 땅딸한 키의 노인이 나타났다. 실로 겉보기에 초라해 보이는 노인이었지만 그를 발견한 정파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헉!”

  헛바람을 들이켠 사유강이 뒤로 비칠 물러선 것만 보아도 그 충격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소림의 혜승 대사 역시 불호를 외우며 눈매가 미미하게 떨렸다.

  “당천악!‘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가 정파의 숨통을 짓눌렀다. 사천성 일대의 패자로서 군림하고 있는 당문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그의 장포가 펄럭이면 죽음의 사신이 찾아온다는 악명을 떨치는 무림의 거두였다.

  “언제부터 내 이름이 그리 가벼웠나? 네놈들이 그렇게 함부로 부를 존성대명은 아닌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는 당천악의 기분이 나빠 보이자 혜승 대사가 서둘러 사유강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아미타불! 당천악 대협께서 부디 아량을 베푸시지요. 사람들 눈이 많습니다. 무림의 명숙으로서 체통을 지키시길 바랍니다.”

  혜승 대사가 나서자 당천악의 기세가 단박에 수그러들었다.

  “흥! 거지 놈이 운이 좋았군. 소림의 화상이 아니었다면 다시는 구걸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었을 터!”

  당천악이 소매를 털자 사유강의 낯빛도 돌아왔다. 그의 장포가 펄럭였다면 아마도 두 다리로 서 있을 사람은 몇 되지 않았을 젓이다. 저도 모르게 흘린 진땀이 등을 전부 적셨을 정도였다.

  당천악을 믿고 거드름을 피운 사파들은 정파가 길을 터 주자 의기양양하게 걸어갔다.

  “크흑! 내 저것들에게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절대로 잊지 않겠다.”

  개방의 사유강이 억울한지 입술을 깨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나 혜승 대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당천악이 이곳에 있는 거지?”

  배분을 생각하면 당천악은 사천당문의 최고 어른이며 금 십 년간은 강호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적수를 찾을 수 없다며 은둔에 들어간 그가 왜 이 하잘것없는 영웅대전에 참가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정파에 있는 그 누구도 당천악 정도의 배분을 가진 고수들은 참가하지 않았을 거란 걸 아는 혜승 대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함께 온 젊은 승려를 불렀다.

  “공아, 너는 숙소에 가서 무당의 유도장께서 도착하셨는지 확인한 뒤 내가 긴히 뵈었으면 한다고 전해라.”

  젊은 승려가 재빠르게 뛰어가자 혜승 대사는 염주를 세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번 여정은 길(吉)보다는 흉(凶)이 많을 듯 싶으이!”

  혜승 대사의 넋두리에 사유강 역시 내심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은은하지만 대장부와 같은 기개가 숨어 있는 향기에 당천악이 눈을 감고 코 밑에서 올라오는 차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래, 입에 맞으신가?”

  가래 끓는 음성에 당천악의 이마에 주름살이 만들어졌다.

  “꼭 그렇게 기분을 망쳐야겠소?”

  막 차를 입에 한 모금 머금었던 당천악이 씁쓸해하며 찻잔을 내려놓자 곰방대의 재를 떨어내던 노환관이 더 듣기 거북한 소리로 웃어댔다.

  “큭큭큭! 당금 천하에 나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대뿐일걸?”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담배가루를 재던 손길을 멈추고 보료에 기대어 고개를 흔들었다. 건넌편 방에서 들려오는 음률을 즐기는 듯했다.

  “흥! 그따위 권력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니 내 앞에서 유세 떨 생각하지 말고 바쁜 사람 불러냈으면 할 말만 하시오!”

  살 만큼 인생을 산 노인들이라서 그런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기 싸움을 벌이는 것이 살벌했다. 빈 곰방대를 빨던 노환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대와의 정리를 생각해서 내가 다 이야기하지. 나를 한 번 도와주게!”

  “어떻게 말이오?”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심드렁한 태도에도 노환관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이번 영웅대회에 참가해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주면 되네.”

  “어떻게 말이오?”

  별 관심 없어 보이는 심드렁한 태도에도 노환관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이번 영웅대회에 참가해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주면 되네.”

  “내가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소?”

  “나 사례감 왕유의 부탁이니까! 그리고 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왕유의 이름에도 당천악은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 나올 말에는 관심을 기울였다.

  “그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책의 행방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협탁의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찻물이 그림을 그렸다.

  휙! 타다닥!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자 십여 명의 사람들이 검을 곧추세우고 뛰어들었다. 왕유가 별일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자 재빨리 사라졌다.

  “키우는 개들이 제법이군.”

  “후후후, 뭐 나도 뒤는 조심해야 하니까. 워낙에 척을 진 인간들이 많아서 말이야.”

  또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사례감 왕유를 노려보는 당천악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당천악과 사례감 왕유의 인연은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강호를 주유하며 명성을 떨치던 젊은 당천악과 황실에서 권력에 접근해 가던 젊은 환관의 만남은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례감 왕유가 자신의 정적을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울 수 있었던 이유는 당천악에게 있었고 사천당문이 사천성 일대의 패주로 군림하는 데 있어서 관(官)으로부터 제지를 받지 않고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이유는 사례감 왕유에게 있었다.

  악어와 악어새 같은 그들의 밀월 관계는 두 사람이 자신의 세계에서 정점에 올라서면서 소원해졌다.

  ‘왕유, 저 능구렁이는 확신이 없으면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는 자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지만 약속만큼은 확실하지.’

  당천악은 결심이 섰는지 다시 의자에 등을 붙였다.

  “훌훌훌, 내 그럴 줄 알았네.”

  이빨 빠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는 듣기 거북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책의 진위 여부는 확실한가?”

  당천악이 재차 확인하려 하자 곰방대에 담배가루를 재운 사례감 왕유는 보료 밑에서 작은 책자 하나를 던져 주었다. 재빨리 책자를 들어 본 당천악의 눈매가 떨렸다.

  “황실 서고 도서 목록?”

  서둘러 책장을 넘기던 당천악의 손이 가운데 부분에서 멈추었다.

  “무극무해...... 정말 있었구나!”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던 당천악의 목소리가 크게 떨렸다.

  책의 제목과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적혀 있는 도서 목록은 급조한 책이 아니었다. 분명히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에 의해서 수결된 진짜였다.

  “행여 하는 말이네만, 훔쳐 달아날 생각은 마시게! 자네가 제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십만 금의위와 도찰원의 고수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벅찰 터이고 그 책은 이미 황실 서고에 없다는 것 또한 자네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미리 언질을 주는 걸세.”

  등잔불에 곰방대 머리를 대고 열심히 빨자 ‘타닥’ 거리는 소리와 함께 담배에 불이 붙었다.

  “후우, 늙으니까 말이야. 오히려 더 욕심이 많아지게 되더라고. 도무지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어. 허나 어쩌겠나? 지켜야 할 것은 많고 돌봐야 할 가족들 또한 기천이니 내가 짐을 지는 수밖에.”

  툭!

  서찰 한 통을 당천악 앞에 던진 왕유는 말없이 곰방대를 빨며 담배 맛을 음미했다. 당천악의 느릿한 손길이 서찰을 집어 펼쳐 들었다.

  “당신 미쳤군!”

  서찰의 내용을 확인한 당천악이 두 손으로 짓이겨 버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나. 세상이 미쳐서 날뛰니 나 역시 그럴 도리밖에 없지.”

  당천악은 구부정한 모습으로 담배에 의존하고 있는 초로의 노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래전 당당하고 준수했던 왕유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의 야망은 그때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차라리 그대가 황제를 하지 그러오?”

  당천악의 비아냥거림에 감고 있던 사례감 왕유의 눈이 떠졌다.

  “입 조심하시게나, 황제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야. 나도 그쯤은 잘 알고 있네. 내 욕심은 여기까지지.”

  황제가 제아무리 많이 바뀌어도 사례감 왕유는 전혀 흔들림이 없을 거란 것을 아는 당천악은 그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되었다.

  “후, 좋소! 어차피 해야 한다면 내가 해드리지. 대신 약조한 것은 반드시 지켜 주리라 믿소!”

  “이르다마다, 그대가 잘만 해 주면 책은 고이 그대의 손에 들어갈 것이야.”

  당천악은 왕유를 믿지 않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드디어, 그 신비의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 무극무해! 무상선사가 끝까지 숨기려 했던 그 책을!“

  당천악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그것은 사례감 왕유보다 더 지독한 욕망의 불길이었다.

  

  자신을 향해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도 모르고 송현은 날이 저물 때까지 오문에서 손님들을 즐겁게 맞이했다.

  “송현 학사님, 이젠 제법 무림인 같아 보이십니다.”

  왕백이 치켜세우자 송현은 허리에 양손을 올려놓고 거드름을 피웠다.

  “정말이냐? 어디 이러면 절세고수처럼 보일까?”

  송현이 붓을 들고 영호인의 칠성검을 흉내 내자 명부를 작성하던 관리들이 고개를 숙이고 키득거렸고 경비를 서던 금의위 위사들은 차마 대놓고 웃지는 못하고 고개를 돌려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때 맑고 청명한 음성이 송현의 광대 짓을 멈추게 했다.

  “칠성검은 그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던 송현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예의 점잖은 학사로 돌아갔다.

  “황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만약에 안면 바꾸기 신공이 있다면 송현의 경지는 십성 이상이라고 왕백은 생각했다. 송현이 맞이한 일행은 검은 도포에 당건을 쓴 중년인과 젊은 도사들 십여 명이었다.

  “무당의 유자강이라고 합니다.”

  정중하고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법도에 송현은 크게 감탄하며 포권을 마주했다.

  “금의위 창대사 송현이라고 합니다. 감히 무당검을 흉내내어 무당의 이름에 먹칠을 하였으니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송현이 황망하게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유자강은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며 고대를 저었다.

  “하하하, 아닙니다. 칠성검은 속가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널리 알려진 검법이니 송 대사께서 익히신다 하더라도 큰 허물이 되지 않사옵니다. 다만 칠성검의 요결은 부드러움입니다.”

  챙!

  유자강은 말보다 행동으로 칠성검을 견식시켜 주었다.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이 허공을 날자 유자강이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검과 나란히 수평이동을 하던 그와 검이 하나가 되자 무당의 간판과 같은 칠성검이 유려하게 펼쳐졌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하고 부드러움 속에 강맹한 기운이 숨어 있으니 천하의 순리 또한 칠성검의 묘리 속에 녹아 있노라!”

  휙휙!

  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고 사람은 검과 하나가 되어 미려하게 움직이니 그 춤사위에 넋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검 끝에 걸리게 되면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베어질 듯 무시무시했다.

  짝짝짝!

  “과연 무당이 왜 무림의 태산북두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 눈이 크게 뜨였으니 유 도장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송현은 진심으로 칠성검에 대해서 감탄하였고 유자강의 검술에 탄복하여 칭찬이 마르지 않았다.

  ‘영호인과는 또 다르구나, 검술이란 그 초식과 요결이 같아도 펼치는 사람에 의해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유자강이 펼친 칠성검의 묘리는 송현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창대사 어른, 날이 저물고 있습니다.”

  왕백이 부르자 송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손님을 세워 두고 이런 결례를 저지르다니. 여하튼 장도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초청장을 보여 주십시오.”

  강호의 예법을 잘 아는 관리가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던 유자강은 새삼 송현을 다시 보게 되었다.

  ‘많지 않은 나이인데 총기가 넘치고 예의가 바르며 눈에는 정기가 가득하니 훗날 큰 인물이 될 자로다.’

  송현이 초청장과 명부를 확인하는 동안 유자강은 송현의 인물 됨됨이를 살피고 있었다.

  “스승님을 뵈옵니다.”

  갑자기 나타난 영호인이 다급히 무릎을 꿇자 유자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너는 영호인이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반갑게 해후하는 모습을 보며 송현은 기뻐하였다.

  “어찌 내가 온 줄 알고 이리 나온 것이냐?”

  “저도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영호인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송현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송현이 위사를 시켜 영호인에게 알린 것이다. 이번에 무당의 대표로 오는 사람이 영호인의 사숙이라는 걸 알고 있던 송현의 배려였다.

  “자, 자! 하고픈 말들이 많으실 겁니다. 제가 따로 숙소를 배정하였으니 편하게 쉬도록 하십시오.”

  송현이 시중 들 소환을 불러 그들을 안내하도록 하자 영호인은 재차 송현에게 고마워했다.

  “친구끼리 감사는 무슨, 오랜만에 사제지간끼리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영호인의 등을 툭 쳐 준 송현은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그들이 멀어지자 송현은 어깨며 목을 주물렀다.

  “아구구, 이것도 못할 짓이로구나. 왕백아, 대충 끝났지?”

  금의위 관리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있었다. 왕백은 초청장의 숫자를 세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말입니다. 한 사람 빼고는 모두 입궐했는데요?”

  “뭐라고? 감히 황제폐하의 부름을 받고 오지 않은 자가 있단 말이냐?”

  송현이 인상을 붉히며 명부를 펼쳐보았다.

  “뭐라고 적혀 있는 거지?”

  눈을 가늘게 떠서 작은 글씨를 보려보는 송현의 입에서 요상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요절복통 혹부리?”  어렵사리 이름을 읽자 주변을 정리하던 관리들의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킥!”

  “하하하...... 악!”

  “윽!”

  웃고 있던 관리들이 하나같이 머리통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왕백 역시 사내의 소중한 곳을 가격당한 듯한 괴로운 표정으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초토화된 광장을 보며 송현은 어리둥절했다. 위사들 역시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며 검을 꺼내 들었다.

  “아니 왜...... 끄으윽!”

  왕백을 부축하려던 송현도 얼굴이 붉어지며 숨을 쉬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파과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송현의 눈가로 희한하게 생긴 생명체가 나타났다.

  “요절복통(腰折腹痛) 혹부리가 아니라 요절복수(夭折伏受) 흑신마(黑神馬)다!”

  얼굴은 백 살은 되어 보였고 키는 칠팔 세 어린아이의 크기인,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이상한 것이 씩씩거리며 송현의 얼굴을 발로 툭툭 찼다.  “감히 노부의 이름을 웃음거리로 만들다니. 네 녀석의 버릇을 고쳐 주마!”

  앙증맞은 발을 들어 송현의 배를 걷어차려 하자 위사들이 달려왔다.

  “멈춰라! 감히 어디서 행패냐?”

  번뜩이는 검이 작은 인영을 후려쳤다. 아니 후려치려했다.

  캉!

  마땅히 살을 베고 지나갔어야 할 위사의 청강검이 흑신마의 머리를 치고 튀어 올랐다. 게다가 그 위사는 검을 놓친 손목을 부여잡고 비칠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개 같은 일이!”

  봉목이 크게 떠지며 악을 쓰자 궁수들이 흑신마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투두둥!

  수십 발의 화살이 흑신마를 노리고 날아갔다.

  타타탕!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찌 사람에게서 저런 소리가 날 수 있지?”

  모두가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지자 여기저기서 호각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침입자를 알리는 신호에 황궁을 경비하는 금의위가 출동하여 흑신마를 둘러쌌다.

  “오호라, 이것들 봐라! 떼거리로 덤비겠다 이거지? 어디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보자!”

  흑신마의 몸 주위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자 금의위의 수비대가 진을 만들어 창을 곧추세웠다. 황궁 앞에서 큰 소란이 일어나려 했다.

  “그만! 그만! 모두 그만 해!”

  엉거주춤 걸으며 사색이 된 송현이 금의위와 흑신마 사이에 끼어들었다.

  “당신! 요절복통이든지 요절복수이든지 간에 감히 황상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그대의 이름이 황제폐하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건가!”

  좀처럼 볼 수 없는 송현의 서릿발 같은 모습에 모두들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대들은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건가? 천하의 주인이신 건문제 폐하의 황궁이다 모두 물러나라!”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 같던 분위기가 송현 때문에 차갑게 식어 버렸다.

  “금의위는 물러가라! 그리고 흑신마 당신도 초청장을 내놓으시오!”

  흑신마가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노려보자 송현도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한참 동안 눈싸움을 하던 흑신마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별종이군! 옛다!”

  품에서 황제의 직인이 찍힌 금박 입힌 초청장을 꺼낸 흑신마는 송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 일격필살을 맞고도 멀쩡하다니! 글쟁이 주제에 제법이구나!”

  흑신마가 투덜거리자 송현이 대번에 노성을 토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요? 나는 황제폐하의 어명을 수행하는 대명의 관리요. 나를 무시하는 것은 위대한 황상을 무시하는 것! 그대는 정녕 대역죄를 짓고 싶은 거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흑신마는 시끄럽다는 듯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짜증을 냈다.

  “원 녀석, 뭘 삶아 먹었기에 그렇게 목소리가 큰 거야? 알았다. 알았어, 내가 졌다. 그런데 네 녀석의 이름이 뭐냐?”

  “흥, 똑똑히 들으시오 나는 전각대학사이며 금의위 창대사인 송현이라고 하오. 명심하시오. 황궁에 머무는 동안 말썽을 부리면 내 용서치 않을 것이오.”

  송현이 우격다짐으로 눈을 부라리자 흑신마는 아이 재롱 보듯이 귀엽다는 얼굴이었다.

  “네,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겁에 질린 소환을 앞세워 숙소로 향하던 흑신마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내 꼭 기억해 두마! 송현 학사님!”

  이를 갈며 주먹을 들어 보이는 흑신마를 보며 송현도 주먹을 들어 휘둘렀다.

  “저기, 아무래도 실수하시는 것 같은데요?”

  왕백이 이마에 큰 혹을 달고 걱정하자 송현은 화를 버럭 냈다.

  “실수라니?”

  왕백은 대답 대신 책자를 건네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뭐야? 요절복수 흑신마는 무림 십대고수 중 하나로 성격이 괴팍하고 손속이 잔혹하기로......”

  송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자 왕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큰일 난 것 같은데요?”

  왕백이 확인을 해 주지 않아도 송현은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

  “설마 내가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을 테지?”

  송현이 모두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다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어쩌다가 강호의 대마두를 적으로 만드신 겁니까?” 

  왕백이 측은해하자 송현은 울상이 되었다.

  “내가 뭘 했다고?”

  송현이 도와 달라는 듯 애절하게 바라봤지만 왕백은 자신의 서류를 챙겨서 일어났다. 한겨울의 삭풍이 무섭게 몰아쳤지만 송현의 마음은 그보다 더 서늘했다.

  초청장의 모든 이들이 입궁하자 무림영웅대전의 행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따분한 황궁의 일상에 지쳐 있던 황족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연단에 자리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도 간호의 무림 고수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나이든 이들부터 어린아이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연단에 자리하니 이처럼 황실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도 드물다 싶을 정도였다.

  대례를 주관하는 예부의 상서가 큰소리로 외치니 황족들이 자리한 연단 위로 환관들이 나타나 죽 늘어섰다. 대부분 도찰원의 고수들이었다. 황제를 둘러싸듯이 보호하기 위해서 연단아래에 인간 벽을 만들었다.

  “위대하신 대명제국의 황제폐하 납시오!”

  굵직한 외침에 이어 곤룡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나타나자 땅을 밟고 선 모든 이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수백 명의 음성이 동시에 터져 나오자 건문제는 흡족한 표정으로 옥좌에 앉았다. 건문제가 자리하자 영웅대전은 바야흐로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사례감 왕유가 황제에게 허리를 숙여 절한 후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건문 사 년 무술년에 황제폐하의 명으로 무림영웅대회를 개최하노라!”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자 건문제도 오랜만에 여흥이 즐거운지 미소를 지었다. 환관이 가져온 비단 위의 패를 집어 바닥에 던졌다.

  “시작하라!”

  령(令)이 적힌 금패가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악사들이 일제히 연주를 시작했다. 많은 사연을 숨기고 있는 무림영웅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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