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 견토지쟁(犬兎之爭)
견토지쟁(犬兎之爭)
- 양자 간의 다툼으로 인해 제삼자가 이득을 취함. 혹은 쓸데없는 다툼을 비유하기도 한다. 횡재를 하였을 경우에도 종종 인용한다.
주원장이 예순다섯 되던 해에 황태자 주표가 갑작스럽게 죽자 장손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삼았다. 그리고 황자나 종손 등 스물다섯 명의 황족들을 번왕으로 삼아 각지에 분봉하여 아직까지 안정되지 않은 명황실을 지지하게 하였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강한 무력을 보유하게 된 번왕 세력들은 이후 필연적으로 황권을 위협하게 될 정도로 세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주원장이 세상을 떠나고 황태손 윤문이 즉위하니 역사상 연호에 따라 건문제(建文帝)라고 하였다.
어느 날 건문제는 병부상서 제태와 한림원 수찬(修撰) 황자증을 불러 날로 세력이 커지는 번왕들에 대한 대책을 토의하였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건문제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황께서 승하하시고 난 뒤로 번왕 숙부들의 폭정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소. 게다가 조정의 법령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으니 심각하다 아니할 수가 없소. 그래서 경들과 이 문제를 의논하고자 불렀소. 어찌하면 좋겠소?”
한림원 수찬 황자증이 대답했다.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연왕의 주변과 여러 번왕들이 꼼짝 못할 죄목을 들이대면 연왕도 섣불리 항의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 번왕들 중 특히 북평 지방에 있는 연왕의 경우, 세력의 강대함도 문제지만, 황실을 대놓고 무시하는 형편이었다.
건문제는 황자증의 의견에 고개를 저었다.
“사사로이 군대를 늘이고 있는 그들이오. 과연 그것이 실효가 있겠소?”
건문제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병부상서 제태가 말했다.
“폐하, 그들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자칫 대명 제국의 몰락을 초래할 수도 있음이옵니다.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나감이 합당한 줄 아옵니다.”
병부상서의 제안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는지 건문제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그 방법이 무엇이오?”
그러나 병부상서는 딱히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회의는 답답한 상황으로 돌아왔다.
“허어, 딱하오! 결국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다느냐 그 문제라는 것 아니오!”
건문제가 노하여 소리를 높이자 두 대신은 고개를 숙이고 황망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건문제는 답답한 마음을 옥좌의 손잡이를 두드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때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례감 왕유가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폐하, 감히 소신이 아뢰올 말씀이 있사옵니다.”
환관이 정사에 끼어드는 것이 반가울 리가 없는 병부상서 제태와 한림원 수찬 황자증의 눈이 매서웠지만 사례감 왕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건문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윤허를 기다렸다.
“말해 보라!”
건문제의 허락이 떨어질 것을 미리 알았는지 사례감 왕유는 주저함 없이 입을 열었다.
“번왕 세력의 중심은 번왕입니다. 바로 그들이 친왕이기 때문에 그 주위에 있는 자들도 겁이 없는 겁니다.”
“친왕이기 때문에 겁이 없다?” 건문제가 의아해하자 사례감 왕유는 불경을 저지른 사람처럼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언제든지 자신이 모시는 분이 하늘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사례감 왕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부상서와 한림원 수찬 황자증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 대역무도한 놈을 봤나!”
“네놈이 정녕 죽고 싶구나! 환관 주제에 감히 폐하를 능멸하다니 당장 참형에 처하겠다.”
대노한 대신들과 달리 건문제는 오히려 냉정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게냐?”
황제의 반응이 침착하자 사례감 왕유는 용기를 내 속내를 드러냈다.
“머리를 제거하면 그런 무리는 오합지졸이라는 뜻이옵니다.”
건문제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흥! 병부상서의 말과 하등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건문제에게 사례감 왕유는 바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허나 소신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방안이 있사옵니다.”
자신이 넘치는 왕유의 말에 대전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방법이 있다?”
“그러하옵니다.”
그제야 건문제의 표정이 밝아졌다.
“말해보라!”
재촉하는 건문제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몰래 지은 사례감 왕유는 누가 들을까 봐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견토지쟁(犬兎之爭)을 취하시면 됩니다.”
건문제는 견토지쟁을 읊조리며 턱을 매만졌다.
“토끼와 개의 다툼에 어부지리를 얻으란 말이렷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허나 개와 함께 경주를 하려는 토끼가 없으니 그것이 문제이지 않느냐?”
건문제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사례감 왕유는 미소지었다.
“황실의 인물들 중에서는 번왕들과 감히 척을 지려는 용기 있는 자들이 없을 겁니다.”
사례감 왕유가 병부상서와 한림원 수찬을 바라보자 그들은 헛기침을 하며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기실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앞에 나서서 일을 도모했다가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번왕들의 보복을 감당할 수 없기에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손을 빌어 저들의 머리를 친다면 설혹 실패한다고 하여 꼬리를 드러낼 일도 없거니와 성공한다면 폐하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일이오니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사례감 왕유가 내놓은 의견은 그야말로 사탕 같은 유혹이었다. 먹자니 이가 썩을지도 모르고 먹지 않자니 그 달콤함이 사람을 괴롭게 만들었다.
“우리가 의심 받지 않고 번왕들의 목을 쳐 줄 이들이 누구냐?”
건문제가 날카롭게 물어 오자 사례감 왕유도 고개를 들어 답했다.
“무림인입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아니면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잊었는지 황제와 대신들은 잠시 동안 아무 말없이 그렇게 서 있었다.
“푸하하하! 이보게 왕유, 그대는 짐의 고달픈 마음을 달래 주려 농을 하는 것인가?”
건문제가 어이없어 하면서도 웃음을 터뜨리자 왕유는 낯빛을 굳히며 다시 진언했다.
“폐하, 그들 개개인의 실력은 상상을 넘습니다. 능히 황제폐하의 근심을 덜어 줄 것입니다.”
사례감 왕유의 간곡한 말에 건문제도 웃음을 거두었다.
“도찰원의 실력자들도 못하는 일을 그들이 할 수 있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건문제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난 믿지 못하겠다.”
냉정하게 말하는 황제의 태도에 주눅이 들 법도 하건만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는지 왕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황제를 달랬다.
“폐하, 무림이란 곳은 참으로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것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중에 자신이 죽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목숨을 빼앗는 살수 집단도 있으며 부처의 말을 공부하는 중들조차 십 장 높이의 담을 뛰어 넘고 바위마저 부수는 그런 절세 신공을 가진 이들이 수두룩하옵니다.”
사례감 왕유의 이야기가 마치 먼 나라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지기에 건문제는 점점 화가 났다.
“그만! 그만! 왕유 그대는 이제 너무 나이를 먹었나보다. 그만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된 것이야.”
전례 없이 강경하게 대하는 건문제를 향해 왕유는 더 깊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 미천한 환관 하나 있고 없음이 무엇이 그리 대수이겠사옵니까? 다만 천하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신음하는 대명제국의 번영과 안위를 위한 소신의 충언을 믿어주옵소서!”
엎드려 읍을 하는 사례감 왕유의 모습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하는 충신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자 난감해진 것은 병부상서와 한림원 수찬 황자증이었다. 한낱 내시따위에게 자신들의 직무를 빼앗겨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후, 고개를 들라!”
한층 누그러진 건문제의 음성에 왕유는 빙긋이 보이지 않게 웃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건문제는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고심했다.
“사례감 왕유, 그대의 말을 내게 증명해 보라. 그렇다면 그대의 의견을 내 고려해 보겠노라.”
“영민하신 결정이옵니다. 신 사례감 왕유 충심을 다하여 명을 받잡겠사옵니다.”
장포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숙인 채 뒷걸음질로 대전을 빠져나온 왕유에게 도태감이 다가왔다. 그가 입을 열려고 하자 사례감 왕유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도태감은 얼른 주위를 살핀 다음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오문을 지나 내금수교(內金水橋)를 건너서 태화문을 통과하자 바로 외조(外朝) 삼대전(大殿)이 나타났다. 삼대전은 모두 한백옥을 깎아서 삼 장 높이의 평평한 기초로 만들어졌다. 기초는 삼 층으로 되어 있으며, 매단이 모두 한백옥으로 둘레의 난간을 제작하였으며, 멀리서 보면 신화에서 나오는 신선이 사는 곳처럼 보인다.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춘 사례감 왕유는 뒷짐을 진 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공공, 어찌하시려고 폐하께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도태감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쯧쯧쯧, 그런 작은 심장을 가지고 어떻게 큰일을 도모하겠다고, 에잉!”
사례감 왕유가 질책하자 도태감은 더욱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했다.
“네 녀석은 내가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 무림에 영웅첩을 돌려라!”
“네?”
도태감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사례감 왕유는 보는 이의 소름이 돋는 미소를 머금었다.
“구대문파부터 십대세가, 거기에 사파는 물론 하오문의 이름 좀 날린다는 놈들까지 죄다 영웅첩을 보내라. 특히 살수 집단은 하나도 빠져서는 안 돼.”
왕유의 말이 농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도태감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정말로...... 그 일을 하실 참입니까?”
“왜 아니겠느냐? 시절이 좋고 시기 좋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다.”
단호히 결정을 내리는 왕유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도태감은 우물쭈물거렸다.
“제가 미진하여 공공의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도태감이 그의 속내를 알고자 물었지만 사례감 왕유는 말없이 그림처럼 서 있는 삼대전의 풍경을 감상할 뿐이었다.
“네 녀석은 장기판의 졸이나 마찬가지다. 그저 내가 가라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고 더는 알려고 하지 마라.”
궁금한 것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도태감은 감히 더 묻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목구멍에 가시같이 껄끄러운 송현 고 녀석도 찍어 내겠구나. 큭큭큭!”
사례감 왕유는 자신의 밑그림이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걸 상상하며 앙천대소하였다.
가래 끓는 웃음소리에 도태감은 그 큰 덩치를 움찔거리며 경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마저도 사례감 왕유의 신경을 거스를까 봐 전전긍긍하였다. 음모와 모략이 싹트는 황금빛 황성이 노을에 물들어갔다.
물기 묻은 손을 펴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현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관복을 입고 있어야 할 그가 왜 주방의 숙수들이나 입는 장옷을 입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송학사님께서 뭘 하고 계십니까? 양파도 까 주셔야 하고 감자도 다듬어 주셔야 하는데요?”
살집이 투실한 주방숙수 하나가 재촉하다 뒤뜰에서 잠시 쉬고 있던 송현은 얼른 손의 물기를 닦고 일어섰다.
“내 곧 감세!” 우울하던 표정을 지운 송현은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선방으로 들어갓다. 한 달 전부터 송현은 외선방에서 요리를 배우고 있었다. 요리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든다 갑자기 요리에 취미가 생겼다든지 하는 고상한 이유는 절대 아니었다.
남모르는 사연을 안고 양파 껍질을 벗기는 송현의 눈에 맺힌 눈물이 매워서 그런 것인지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서 그런 것인지는 본인만 알 뿐이다.
그것을 창문 틈 사이로 보고 있던 교위 삼인방은 혀를 찼다.
“아니, 과거 급제까지 한 학사가 체통머리 없이 저게 뭐하는 짓이람?”
속이 상한 막여위가 성질을 부리자 양명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어허, 이 사람이 송현 학사 심정이야 오죽할까? 괜히 쓸데없는 분란 일으키지 말고 모르는 척 하라구!”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영호인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껍질을 벗기고 있는 송현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지? 정작 무도의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당신의 그 고집이 나는 무섭다.’
영호인은 천축의 노승이 금의위에서 행패를 부린 이후에 부쩍 말수가 적어졌다.
사문을 나온 이후 그처럼 맥없이 당해본 적이 없던 그로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이 무너진 상태였다.
금의위 교위 중 최고의 고수라든가 황궁 무사 가운데 최고의 기재라는 칭호가 이젠 무색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의 수준을 넘어선 세계를 경험한 후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천축의 노승이 보여준 무위는 영호인의 스승보다 더 높은 경지였다. 감히 우러러 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스승의 실력이 초라하게 느껴지자 영호인은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 교위, 뭐 해! 훈련시간이 다 되었네. 서두르자고. 총교두께서 오늘 순찰 나오신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래. 그랬었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영호인은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부끄러워했다.
막여위와 양명은 영호인이 그러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 송현이 노승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예전보다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든 것을 영호인이 아쉬워한다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늘 투덜대며 옥신각신했지만 어느새 정이 들대로 들어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막여위와 양명은 마음속으로 송현에게 힘내라고 소리친 후 어선방을 나와 금의위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히 총교두 임충이 직접 순찰을 나오는 날이었다.
연단 아래 연무장에는 오와 열을 맞춰 숨을 고르고 있는 수백의 금의위 위사들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일정한 리듬에 맞춰 울리는 북소리에 맞춰 위사들이 검을 세우며 기수식을 취했다.
“제일 식, 황룡출해(黃龍出海)!”
총교두 임충의 우렁찬 기합에 위사들 역시 그에 못지않은 함성을 지르며 좌우로 베고 찌르고 재빠르게 뒤로 몸을 비틀며 번개처럼 검을 내질렀다.
“제이 식, 황룡교하(黃龍橋下)!”
초식 이름처럼 용이 다리를 지나듯 위사들은 재빠르면서도 무시무시한 기세로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취하며 좌우로 움직였다. 금의위 위사들의 검술 훈련은 개개인의 결투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로지 황제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검술이었다. 방어를 모르고 오로지 적을 죽이는 것이 소임인 황실 무술을 보며 영호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내가 꿈꾸었던 것이 아니다. 과연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여기 서 있는가?’
천축의 노승 시타르와의 대결은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돌처럼 영호인의 마음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지엄한 교련시간에 이처럼 정신을 놓고 있을 정도였다. 위사들이 집단 검진을 멋들어지게 펼치고 있었지만 영호인의 눈에는 그저 모든 것이 광대놀음처럼 느껴졌다.
‘저건 죽은 몸짓이다! 그 노승의 무공이야말로 살아 있는 무학이었다.’
떨리는 손을 말아 쥔 영호인은 그동안 권력에 대한 출세욕으로 마음 저편 깊숙이 묻어 두었던 무인으로서의 피가 다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하니 애써 잊어버리고 있던 열정이 한낱 학사로 인해 다시 살아날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던 영호인은 송현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든 영호인은 위사들과 교위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왜......?”
그러나 연단을 향해 시선을 옮긴 영호인은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불같이 화가 난 총교두 임충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아뿔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총교두의 불호령이 영호인에게 쏟아졌다. 왠지 하루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에 영호인은 속이 쓰렸다.
한바탕 소란스러운 아침을 보낸 영호인에게 막여위와 양명이 잔뜩 얼어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힘없는 영호인의 물음에 두 사람은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총교두의 호출일세!”
“아침의 일 때문인가?”
“그야 낸들 알겠나?”
오랜만에 강호에서 쓰던 검을 꺼내 매만지던 영호인은 검을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총교두 임충이 부른다는데 늑장을 부릴 수는 없었다. 대명 황실에서 그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인 총교두의 부름에 영호인은 몹시 긴장하며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기척이 나자 안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영호인은 숨을 고른 뒤 안으로 들어섰다. 총교두 임충은 서류에 처결을 위한 수인을 쓰고 있었다. 잠시 말없이 수인을 적던 임충이 입을 열었다.
“자네 춘삼월에 봄바람 든 아녀자처럼 보이는군.”
“네?”
뜻밖의 말에 영호인은 크게 당황해서 무어라 대답할지 몰랐다.
“항시 냉철하고 분명하던 사람이 근래에는 허둥지둥하거나 매사 의욕도 없어 보이고 도통 마음이 떠나 있는 사람 같아 보여.”
임충의 지적에 영호인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는 본인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호인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대로 깨졌다고 들었는데 그랬으면 머리가 맑아져야 정상인데 자네는 꼭 어린아이 투정 부리듯 스스로에게 심통을 부리고 있어.”
임충의 말이 비수가 되어 영호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스스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깨지기 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더군. 내가 세상을 살아보니 말이지, 나라는 존재는 저 사막의 수많은 모래알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건 자네 역시 마찬가지야. 그것을 잊는다면 자네는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게 될 것이야.”
잔인하다고 할 수 있는 충고가 영호인의 가슴을 더욱 찢어 놓았다.
“이번 행사가 자네에게는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군. 내가 보기에 영 교위에게 필요한 것은 동기를 유발할 자극인 것 같아.”
임충이 수인을 끝낸 문서 하나를 영호인에게 건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종이를 펼친 영호인의 눈이 커졌다.
“이, 이것은?”
영호인이 임충을 보며 진위 여부를 묻자 그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무슨 사연에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위에서 결정이 난 사항이니 따라야겠지. 금의위 모든 위사들 역시 행사에 맞춰서 바빠질 것이네. 자네는 명단의 참석자들을 책임지게. 아무래도 강호 밥을 먹은 자네이니 그대가 적임자 같아.”
임충은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잠시 영호인을 보며 마지막 충고를 잊지 않았다.
“다른 무림인들과 어울리다 보면 좋지 않은 기분도 사라질 테고 처음 검을 잡았을 때의 순수했던 마음도 되찾길 바라네. 그리고 금의위로서 남을지 돌아갈지 결정하도록 하게나, 시간은 충분히 주겠네.”
임충이 밖으로 나가자 영호인 혼자 남게 되었다. 임충의 마지막 말이 영호인의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리고 손에 들린 문서의 내용이 그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영웅전이라......”
구대문파를 비롯하여 명성이 쟁쟁한 무림의 명가들이 황제의 명에 의해서 황성으로 초대되었다.
이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 세속에 있을 때는 감히 말조차 건네기 힘든 무림의 명숙을 대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영호인은 임충의 배려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가 나간 방향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제법 진지한 얼굴로 정좌하여 명상에 잠겨 있던 시타르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겨울이 다가오는 때라 날이 덥지도 않은데 무슨 고뇌가 그리 크기에 진땀을 흘리는지 의아했다.
뿌드득!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어금니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러나 어디선가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자 시타르는 주화입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결국 참다못한 시타르가 눈을 살며시 뜨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저 녀석이 또 무슨 꿍꿍이로 나타났지?’
시타르는 요 근래 들어 송현이 나타나면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에게 무극무해를 가르치며 못되게 굴어서도 아니고 수련 시간에 혹독하게 몰아붙여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시타르 자신의 예상보다 송현의 학습 능력이 너무나 뛰어나서였다.
‘저 녀석은 익히는 속도가 너무 빨라, 처음 계획대로 심상편까지만 수련하면 돼. 그럼 주화입마에 걸리지도 않고 무병장수하며 오랫동안 평안할 것이다. 그 이상 나아가게 되면 평탄치 않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시타르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마음속으로 불호를 외웠다.
“식사 안 하십니까?”
오늘 따라 송현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윽!”
고개를 도리질하는 모양새가 재미있는 송현은 입을 막고 키득거렸다.
“요 녀석아, 이 신승께서 참선하는 것이 안 보이느냐?”
“신승은 무슨? 고기 먹고 술 마시고 여인네 목욕하는 것 훔쳐보는 노인이 무슨 신승입니까?”
“저것이!”
발작적으로 일어서려던 몸을 가까스로 참아낸 시타르는 다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뭐 그렇다면 혼자 먹지요. 제가 그동안 배운 요리법에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 새로운 요리를 개발해 보았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힙니다.”
시타르는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
“닭, 오리, 돼지 위, 돼지 족발, 양고기와 스무 가지가 넘는 재료를 소흥주(紹興酒) 항아리에 꽉 채운 다음 중불에 오래도록 고았는데 어선방 사람들도 맛을 본 후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감탄하더라구요.”
송현이 요리를 식탁 위로 가져와 음식 항아리의 뚜껑을 여니 오묘한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시타르 역시 그 향기에 취했는지 몸이 식탁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해산물을 넣어 음식의 향을 더하였고 기름기를 줄여 느끼함을 제거하고 은은한 향과 부드러운 맛이 베게 하였죠.”
침을 흘리던 시타르는 송현과 말을 섞지 않겠다고 한 맹세도 잊고 코를 벌름거리며 요리의 이름을 물으니 송현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그럼 맛을 볼까요?”
송현이 항아리 뚜껑을 열자 그 향기가 사방에 진동했다.
“음! 향긋해!”
어느새 식탁 위에 자리한 시타르는 항아리에 대고 코를 박고 있었다.
“이것이 사람의 음식이냐 신선의 음식이냐, 네놈 같은 글쟁이가 어떻게 이런 음식을 만들었지?”
시타르는 이미 이성을 상실한 듯 보였다. 그런 시타르를 보며 송현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제가 만든 음식을 다시는 드시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시타르는 송현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어 항아리 안에서 고기 한 점을 꺼내자 호흡이 거칠어졌다. 송현이 젓가락을 대니 고기가 두부처럼 부드럽게 조각났다. 그리고 그것이 송현의 입속으로 들어가니 시타르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꿀꺽!”
송현이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이 없자 시타르는 애가 탔다. 자신이 직접 맛을 보지는 못해도 맛이 어떤지 느낌이라도 알고 싶었다.
“아! 이것은 진정 화려한 연회입니다. 고기와 해산물이 한데 어우러진 맛의 향연! 부드럽게 감기는 감칠맛과 후각을 자극하는 이 향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네요.”
송현의 설명에 시타르는 대머리를 쥐어뜯으려 했다. 얼굴이 시뻘개져서 아주 볼 만했다.
“크흑! 조, 조금만 맛보면 안 될까?”
애원하다시피 하는 시타르를 보며 송현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 정히 원하신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무극무해의 고해편에 있는 구결을 풀이해 주신다면 이 항아리 단지는 모두 스승님의 것이 됩니다.”
송현이 뚜껑을 덮으니 시타르는 세상이 끝난 사람처럼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안 될 일이다.”
몸을 홱 돌리는 시타르는 일각도 못 되어 다시 몸이 돌아왔다. 송현이 뚜껑을 여니 더욱 진한 향기가 그의 콧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해도 냄새를 막을 도리는 없었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항아리를 노려보는 시타르의 눈앞에서 송현이 단지를 뒤로 숨겼다.
“어제 보니 사절단을 이끌고 오신 고마르 대사께서 시타르 님의 식단과 외출을 엄격히 금하는 것 같던데 제가 아니면 앞으로 풀뿌리만 드시게 생겼던데요.”
“이...... 독한 녀석!”
시타르가 으르렁거리자 송현은 실실 웃으며 이죽거렸다.
“제 별명이 뭔지 잊으셨습니까? 소마(小魔) 송현입니다.”
시타르는 불경에 나오는 악귀가 바로 송현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저는 배가 불러서 더는 못 먹겠고, 훈련하고 고생했을 금의위 교위들에게나 가져다줘야겠네요.”
금의위 교위들에게 준다며 시타르의 침소에서 나간 송현의 말에 시타르는 펄쩍 뛰었다.
“뭐라고, 그 무식한 놈들에게 그런 훌륭한 음식을 준다니 그건 개에게 주는 것만도 못한 처사다.”
흥분한 시타르가 창문으로 튀어나와 일신의 무공으로 담장을 가볍게 뛰어넘어 금의위로 향하는 송현의 앞을 막아섰다. 씩씩거리는 시타르를 본 송현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쩌시렵니까? 이것과 무극무해의 고해편, 결정하시지요.”
“이놈이 감히 나를 가지고 놀려고 해!”
움찔거리는 시타르의 눈빛이 독하게 변하자 송현은 손을 들어 경고했다.
“아무리 고수라고 하셔도 이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속도보다 빠르실 수는 없겠죠?”
송현이 항아리를 떨어뜨릴 시늉을 하자 시타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만! 내가 졌다. 내가 졌어! 그 음식을 버리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놈아!”
악을 쓰는 시타르는 완전히 포기한 듯 항아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약조하신 겁니다?”
“남아일언......”
“중천금!”
이를 가는 시타르에게 송현은 미소를 지으며 항아리 단지를 건네주었다. 빼앗듯이 단지를 낚아챈 시타르는 화려한 경공을 선보이며 담을 넘어 식탁으로 나는 듯이 내려 앉았다.
잠시 후, 한 입 가득 집어넣은 시타르의 입에서 울음 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욱! 욱! 이건 음식이 아니라, 감동 그 자체로구나!”
단지 안에 들어가기라도 하려는 듯 시타르의 젓가락질은 쉴 새가 없었다. 어느새 쫓아와 그 모양을 구경하고 있던 송현이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음식에 좋은 이름이 생각났습니다.”
“응? 그게 머네(그게 뭔데)?”
음식을 잔뜩 입에 물고 궁금해하는 시타르에게 송현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참선을 하던 스님도 이 향기를 맡고 담을 뛰어넘으니 불도장(佛跳牆)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쿨럭!”
목젖에 고기가 걸려 얼굴이 창백해진 시타르는 사경을 헤매다 겨우 살아난 뒤 송현을 찾았지만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이 녀석 두고 보자! 앞으로 수련은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잠시 이를 갈던 시타르는 다시금 입맛을 다시며 불도장의 깊은 맛에 빠져 들었다.
시타르의 다짐대로 송현은 다음 날부터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시달려야 했다.
실제로 송현을 위로하러 왔던 세 교위들은 송현이 수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누가 봐도 그것은 학대에 가까운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초겨울에서 겨울이 깊어갈 때까지 시타르는 피도 눈물도 없이 송현을 닦달했다.
그러나 송현은 군소리 한 마디, 싫은 표정 하나 없이 묵묵히 시타르의 가르침을 따랐다.
‘독종!’
시타르는 자신이 생각해도 심하다고 여겨지는 수련을 한마디 불평도 없이 수행하고 있는 송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과연 고해편을 가르치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나 역시 고해 편에서 위험하지 않았나? 무상선사도 장 도장도 결국 고해편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저 녀석이라면 가능할지도......’
시타르는 자신의 상념을 부정하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다들 그런 생각으로 무극무해를 펼쳤다가 결국 저주 받았지. 네 녀석의 눈이 붉게 물든다면 내가 직접 너의 목숨을 거둬 주마!’
겨울의 삭풍을 견뎌내며 구슬땀을 흘리는 송현을 보며 시타르는 무서운 얼굴을 하였다.
송현은 시타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극무해의 또 다른 장을 익힐 수 있다는 즐거움에 힘겨운 수련을 묵묵히 이겨냈다.
심신, 심상편에서 풍보를 익힐 때도 그랬지만 무극무해의 수련은 보통 무인들의 수련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조금이라도 무공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이 따위가 무슨 무공 수련이냐며 때려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송현에게는 무극무해의 수련이 신비한 세계였다.
내공을 익히지도 초식을 연마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연에서의 숨 쉬는 법과 걷는 법, 잠자는 법만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는 것이 무극무해였다.
처음부터 무극무해를 보았고 무극무해만 알기 때문에 송현에게는 이런 수련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심상편에 이르자 철학적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고찰로 일관하던 무극무해는 계절따라 바뀌는 여인네의 마음처럼 급변했다. 그것은 송현으로서도 당혹스러울 정도의 변화였다.
시종일관 자연과 사람의 조화에 대해서 고집스럽게 주장하던 무극무해는 고해 편에 이르자 가혹할 정도로 인간을 괴롭혔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발가벗겨 놓은 것도 무극무해의 따뜻함이 매서운 채찍으로 변해 이를 익히고 배우는 자에게 마치 그만 포기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아, 하아 아직...... 아직인가?”
송현의 상체는 군데군데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겨우내 삭풍에 의해서 동상이 든 것처럼 보였다.
겉으로 보이는 것뿐 아니라 심적으로도 한계치를 넘은 상태였다. 보통 사람들이었으면 이미 수백 번 죽음의 문턱을 오갔을 상태였지만 송현은 시타르가 해석해 준 구절을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손과 발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심신편이 일념신해(一念信解) 일념수희(一念隨喜)로서 몸과 마음이 진정으로 무극무해를 향한 수련자의 자질을 시험하는 관문이었다면 심상편은 일백 일 정좌수행을 통하여 무엇이든 한 번 보면 다 기억하는 힘을 길렀다.’
송현은 시타르가 알려주는 대로 숨쉬기와 함께 들이쉰 숨을 체내의 요혈로 보내는 것을 쉬지 않고 계속했다. 그와 함께 송현의 몸에는 더욱 많은 멍이 생겨났다. 골수까지 치미는 고통을 잊기 위해 송현은 무극무해의 구절 속으로 더욱 빠져 들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정기가 맑아지고 마음은 스스로 생겨난 잡념을 쫓고 치달리며 사물을 쫓아 돌아갈 곳을 잊으니 움직이면 마음이 뒤숭숭해지고, 고요하다고 하지만 역시 소란스럽다.’
무극무해의 처음부터 심상편까지 수백 번 되새긴 송현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기운이 독침처럼 온몸의 전신요혈을 헤집고 다니는 고통을 입술을 깨물어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시타르가 매를 들어 때리지 않았으면 벌써 혼절하고 남을 정도로 가혹한 고통이었다.
‘하아, 하아 너무나 힘들다. 죽을 것 같아. 아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스스로 약해지려는 순간 등에서 불이 나듯 강렬한 통증이 송현의 정신을 일깨웠다.
“자연의 숨결을 들이쉬라는 것은 단순히 코로 마시고 입으로 내뱉는 요식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배웠을 터 조금 마음과 몸이 힘들다고 무극무해의 호흡법을 버린다면 너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시타르의 불같은 호령에 송현은 혀를 깨물어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크흑1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자연의 숨결을 몸 안에 갈무리하라! 미증유의 힘은 쌓고 육신의 더러운 숨결은 토해 내라.’
불안정하던 호흡이 다시 안정되니 격하게 떨던 송현의 가슴이 점차 편하게 오르락내리락하였다.
‘고해(告解)가 아니라 고해(苦海)였구나!’
송현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해편의 고해란 말의 의미를 깨달은 송현은 격한 감정의 변화에 빠져들었다.
고해(苦海)!
고통의 세계, 괴로움이 끈이 없는 인간 세상...... 그것은 고하(苦河)였다. 온갖 세상의 추악한 것들이 송현에게 쏟아지자 괴로웠다.
잊고 있던 어머니, 여동생의 울부짖음이 다시 되살아났다. 비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모습이 눈앞의 현실처럼 찾아왔다.
그리고 불구대천지 원수라고 여기는 사례감 왕유가 죽어가는 가족들 뒤에서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송현의 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용서 못해!’
분노!
감당하지 못할 마음속의 병이 곪아 터지듯 그 어디에 그런 악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는지 놀랄 정도로 사악한 기운이 송현을 유혹했다.
그것은 아리따운 여인의 속삭임보다 더 달콤했고 그 어떤 꽃보다 향기로웠다.
절대 악은 송현에게 참지 말라고 했고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하라고 충동질했다.
뿌두둑!
송현의 온몸에 검붉은 혈맥이 튀어나오며 징그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결국...... 네 녀석도 별수 없는 거냐?”
시타르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난 목소리는 누구를 탓하고 있는지 불분명했다. 분명히 알 수 있는 하나는 목이 심하게 잠겼다는 것이었다.
스르릉!
검집을 빠져나온 검이 지독한 한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눈빛이 검의 시린 빛을 덮었다. 정좌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송현의 목 위에 검이 올려졌다.
“우욱! 우욱!”
검붉은 피를 토해 내는 송현의 눈이 떠졌다. 그러나 의당 있어야 할, 검은 동공 대신에 붉게 피로 물든 눈은 양옆으로 쭉 찢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이 저리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다시는...... 무극무해 따위에......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이가 없도록 내 손에 피를 묻히리라.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가 거두는 것일 뿐. 부처의 말씀을 따르는 승려로서 나는 오늘 잠시 악귀가 되노라.”
처연하게 읊조린 시타르의 검이 하늘 높이 들렸다.
당장에라도 내리칠 기색이었으나 시타르의 손은 주저했다. 지난 겨울 송현과의 추억이 그의 냉정함을 가로막고 있었다. 음식 투정을 하는 자신에게 불평하면서도 늘 맛난 음식을 해 오곤 하던 송현이 어느새 자신의 마음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내가 지금 주저하면 또 하나의 괴물을 세상에 내보내는 죄악을 지지르게 된다. 내 너를 베고 평생 참회하며 살겠다.”
시타르의 검이 번뜩였다.
“안 돼!”
끝이 갈라지는 다급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막 후원에 들어서던 영호인이 그 같은 광경을 목격하고 절규했다. 그러나 이미 시타르의 검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