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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5/43)

第五章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 이가 없으면 입술에 의지함. 누군가에게 의지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숨은 잠재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대신 의지 대상이 없어지면,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하게 된다.

  관리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외어선당.

  교자와 만두를 담당하는 소강의 표정은 아침부터 험악하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댓바람부터 불청객이 그것도 혹 하나를 달고 찾아왔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은인이라고 하지만 아침마다 찾아와 요상한 요리를 주문하니 요사이 소강의 얼굴은 송현에게 시달려 나이에 비해 많이 들어 보일 정도였다.

  “하아, 오늘은 또 무슨 일입니까?”

  소강의 떨떠름한 환대에도 송현은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했다. 입가의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하하, 황실 식구들의 식단을 위해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냐? 내 그런 너를 격려 차원에서 방문을 하였다. 그런데 말이지...”

  속에도 없는 말을 꺼내는 송현은 요즘 자신이 얼마나 타락하고 있는지 실감하는 중이었다. 평생 동안 했던 거짓말보다 요 근래 한 거짓말이 더 많았다. 하지만 거짓말도 하다 보면 는다고 하더니 처음에는 얼굴이 붉어져 상대방에게 속내를 훤히 드러냈던 송현도 이제는 어느새 능글맞게 미소까지 지으며 입을 놀린다.

  “하하하, 그래서 말이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오지 않았느냐? 너의 교자에 임충 장군이 상사병이 나실 정도니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구나.”

  “끄응!”

  소강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송현은 미소를 머금고 어깨만 두드려 주었다.

  “혹시 말이다. 남상만두를 해줄 수 있을까?”

  소강의 표정이 완전히 구겨졌다. 말한 송현도 자신보다 어린 소강의 분위기를 살피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 아침에 그리 손이 많이 가는 것을 어찌 만들라고 하십니까?”

  역시나 바로 안 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송현 역시 그것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요리인 줄 아는지라 미리 이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

  “후, 그렇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안 되겠지. 아니 힘들겠지!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구나. 예전에 너와 네 아버지와 동해루에서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교두께 되지도 않는 약속을 하고 말았구나!”

  송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을 본 소강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약점을 교묘히 파고드니 오늘은 절대로 들어주지 않겠다던 소강의 마음도 약해졌다.

  “휴,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한번 해보지요.”

  송현은 얼른 소강의 두 손을 잡고 위아래로 마구 흔들었다.

  “그리 해주겠느냐? 진정 그리 해도 되겠느냐?”

  소강은 반색하는 송현에게 뒤뜰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어선방으로 들어갔다. 소강이 사라지자 송현은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송현, 너 정말 더 이상 타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뒤뜰에 마지막 남아 있던 낙엽이 떨어지자 송현의 시름도 더 깊어졌다.

  아주 특별한 만두인 남상만두는 크기가 크고 그 끝이 회오리바람처럼 말려 올라간 것이 남다르다.

  하지만 남상만두는 그런 특이한 모양 때문에 유명한 것이 아니다. 그 때문이 아니라 그 속을 채운 만두소가 고기가 아닌 국물이라는 것이다. 이 대문에 남상만두는 명성이 자자하다.

  진정한 남상만두는 만두피가 얇아서 영롱한 빛깔을 내며 불울 비추면 그 안의 국물이 비춰질 정도가 되어야 일품으로 친다. 껍질이 두꺼우면 국물이 만두피에 흡수되어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흐음! 좋구나, 좋아!”

  민망할 정도로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에 취한 노승은 더 이상 참기 힘든지 얼른 젓가락을 들었다. 그것을 본 송현이 기겁하고 접시를 빼앗았다.

  “헉! 내 만두. 이 도둑놈아! 내 만두 내놔라!”

  천축의 노승이 장정의 키 만큼이나 펄쩍 뛰어오르며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송현은 그를 무시하고 만두에 갈대를 꽂았다.

  “응?”

  작은 자기 위에 놓인 만두에 갈대 꽂힌 모습을 유심히 보는 노승의 눈에는 호기심이 잔뜩 일어났다.

  “자 드십시오. 남상만두는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갈대로 빨아서 먹는 겁니다.”

  “호오?”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갈대에 입술을 오므리며 눈을 감는 노승을 보니 송현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모금의 국물을 빨아들인 노승은 두 눈을 감고 말수가 없어졌다. 그 기분을 짐작하는 지 송현은 빙긋이 웃으며 조용히 책장을 펼치고 노승을 방해하지 않았다.

  자하원의 정자에는 눈을 감고 만두를 음미하는 천축의 노승과 책을 펼치고 글 읽기에 여념이 없는 학사의 풍경.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이 묘하게 어울렸다.

  갈대에서 입을 뗀 노승의 입에서 한숨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럴 수가! 이것이 진정 사람이 만든 음식이더냐!”

  만두 접시를 들고 감동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노승에게 눈길을 준 송현은 잔잔한 목소리로 만두를 이야기했다.

  “안에 해황이 들어 있습니다. 그걸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갈대 줄기를 이용해서 마시는 겁니다. 예부터 교자를 빚는 것은 복을 비는 것과 같다고 하여 세간에서는 교자를 빚을 때 온 가족이 모여 정성을 들입니다.”

  고소한 국물에 취한 노승은 기분이 좋은지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집안의 어른이 교자를 그릇에 담을 때도 정성을 들입니다.”

  낭창낭창한 목소리가 노랫가락 하나를 읊었다.

  교자 하나에 두 귀가 서고

  가마에 들어가니 수천만이 되네

  금국자로 젓고 은공기로 떠

  밥상에 올려놓고 상제께 드리네

  상제께서 즐거워하시니

  일 년 사철 평안하리라.

  노래가 끝이 나자 마지막 만두도 노승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주름살이 가득하고 거뮈튀튀한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부처와 같은 온화한 미소가 그려졌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만두지만 그 안에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송현은 눈을 들어 밝은 햇살이 드리워진 정원의 아름다운 정취를 즐겼다. 그러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백성들의 신음은 천하에 들끓고 탐관오리들이 고혈을 빨고 있으나 이들을 보살피고 돌봐야 할 군왕께서는 세 불리기에만 여념이 없으니 통탄할 노릇이지요.”

  왠지 처연해 보이기까지 한 송현의 옆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 한 편을 아리게 만들었다.

  “소박하지만 아주 훌륭한 음식이었다.”

  “멀리서 오신 손님이라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만두를 접대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중원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면서 한족의 정서가 담겨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지요.”

  송현의 예의바른 태도에 노승은 껄껄껄 웃었다.

  “내가 미울 텐데 어찌 그런 마음 씀씀이를 베푸는 것이냐?”

  금의위에서 난동을 부릴 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송현도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무뢰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송현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곤란할 정도로 억지 부리는 음식투정에 싫은 내색 한 번도 하지 않고 별식을 가져다주었다.

  빈 접시를 내려놓은 노승은 가사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었다. 결코 승려가 취할 자세는 아니었지만 송현은 이미 익숙해진 듯 책으로 눈을 돌렸다.

  “무극무해를 읽은 놈들 중에서 네 녀석이 제일 별나구나!”

  송현의 고개가 번쩍 들리자 노승은 키득거렸다. 손가락으로 콧구멍 안의 이물질을 동그랗게 만들어 정원으로 날려 보내는 일을 진지하게 하던 노승은 송현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 동작을 멈췄다.

  “하하하! 이 녀석 그 책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는구나.”

  노승은 그런 송현의 반응을 즐기는 듯 했다.

  “선사께서는 어찌 그 책에 대해서 아시는 겁니까?”

  “땡중에게 선사는 무슨, 사부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송현이 다급히 물어오자 노승은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 실수를 깨달은 송현은 재차 그를 귀찮게 했다.

  “사, 사부님!”

  어색해하는 송현의 부름에 노승은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녀석 급하기는 급한가 보군.”

  송현이 어린아이 마냥 고개를 끄덕이자 노승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더니 민숭민숭한 대머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

  “우선 내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순서겠지......”

  이국적인 눈동자가 자신을 보며 뭔가 대단한 것을 이야기하려 하자 송현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꿀꺽!

  “나는 탐나립티국(耽羅立底國) 그러니까 너희들이 사자국(獅子國)이라 부르는 곳의 왕자다.”

  “커헉, 콜록! 콜록!”

  사래가 들린 송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괴로워했다. 핏발 선 눈은 너무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송현이 호흡곤란으로 죽거나 말거나 노승의 회상은 계속되었다.

  “탐라립티국은 주위가 천사백리이며 도성은 주위가 십여 리이다. 해안에 가까워 토지는 습하고 사람들의 성질은 강하고 용맹스러우며 사교와 정법을 모두 믿는다. 가람은 십여 곳으로 승려는 모두 천여 명이다. 수륙이 맞닿아 진귀한 보물이 집산되어 사람들은 대개 부유하다. 그런 곳의 왕자였지만 나는 늘 불행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송현은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본래 나는 천성이 요란한지 따분한 왕실의 생활이 맞지 않았다. 그때 중원에서 온 구법승들을 만났고 그 만남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말았다.”

  구법승이라면 당나라 때부터 천축에 불경ㅇ르 가지러 갔던 고행승들이었다. 그들로부터 천축의 문물이 중원에 소개되었다.

  “야자수가 우거진 항구를 떠나 강과 바다가 만나는 삼각주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고대를 기억하고 있는 신비한 귀인을 만나게 되었다.”

  “귀인?”

  송현의 반문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분은 무척이나 신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희들이 말하는 신선 같은 분이셨다.”

  눈을 감고 회상에 잠긴 노인을 보며 송현은 그가 말한 신비인이 자신에게 해답을 줄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조한 심정으로 노인의 다음 말을 애타게 기다렸다.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한 노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노인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풍경은 송현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낯선 이국의 풍경이었다.

  “그날은 바람이 무척 심한 날이었어......”

  사막의 모래가 돌풍과 함께 외진 객잔에 몰아쳤다. 창문에 덧댄 나무판자에 작은 돌들과 모래가 부딪히자 꽤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배가 떠나지 못해서 몰려든 손님들로 인해 객잔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방을 잡지 못한 이들은 식당에 모여서 따뜻한 차로 돌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삼삼오오 모여서 언제 돌풍이 그칠지, 배는 언제 떠날 수 있을지 정보를 교환하는 사람들은 피부색도 다양했고 언어도 제각각이었다.

  여러나라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인해 시끌벅적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많으면 말뿐만 아니라 말썽도 많은 법이었다.

  우지끈!

  새처럼 날아와 사람들이 모여 있던 식탁 하나를 부숴버린 청년은 아픔이 상당할 텐데도 벌떡 일어나 검을 꺼내들었다. 흔들리는 촛불이 검신에 반사되니 청년의 화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당장에 살인을 저지를 그런 표정이었다.

  “당 시주, 검을 내려놓으시게. 도장께서 많이 봐주신 것을 감사히 여겨야지.”

  그러나 자신을 나무라는 목소리에 실린 보이지 않는 힘에 청년은 흠짓거렸다.

  “하오나 무상선사님, 저자는 저의 사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청년이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자 탁자에 앉아 있던 무상선사가 혀를 차며 일어섰다.

  “사문을 욕되게 한 것은 네 녀석이다. 장 도장께서 손 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면 그대가 살아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하지만......”

  “어허, 그래도 객기를 부린다면 너의 사부를 대신해서 내가 용서치 않겠다.”

  객잔 바닥을 석장(錫杖)으로 내려치니 청년은 중심을 잡지 멋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단한 내력이었다. 다른 이들은 왜 청년이 혼자 넘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여 웃음을 터뜨렸지만 차를 마시던 장 도장은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소림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구나!”

  크지 않은 키에 정갈한 도복을 입은 중년인의 칭찬에 무상선사는 불호를 외며 고개를 저었다.

  “아미타불, 아니올시다. 장 도장의 도력에 비하면 이 노승이야 보잘 것 없는 반딧불에 불과하답니다.”

  “하하하, 천년 소림의 역사 앞에 무당의 이름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하하, 나 원 참. 장 도장께서도 짓궂으십니다.”

  장 도장과 무상선사가 웃음을 터뜨리자 얼어붙었던 객잔의 분위기도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청년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제가 어리석어 도장께 무례를 저질렀사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인 청년에게 장 도장은 너털웃음으로 용서를 대신했다.

  “허허허, 사청당문 당만호 장로의 괄괄한 성격을 그대가 이어 받았어. 때로는 그런 젊은 객기가 통할 때도 있지만 강호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네, 내 비록 그대와 사승 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충고 하나만 하지.”

  “네, 경청하겠습니다.”

  “검을 뽑기 전에 두 번 세 번 생각하도록 하게. 강호란 일단 검을 꺼내면 그 뒤의 일은 모두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당문의 후예인 후기지수가 자신의 충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예상했는지 장 도장은 말을 짧게 끝냈다.

  무상선사는 장 도장이 당문의 실수를 눈감아 주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대문파와 함께 여행을 한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상선사가 다소 피곤한 기색으로 장 도장에게 의견을 묻자 그 역시 수염을 매만지며 뜻을 같이 했다.

  “선사의 말씀대로 해야겠습니다. 지난 번 마교의 도발을 정파의 연합세력이 무마하였지만 그들이 보여준 천축의 무공은 대단하였지요. 그 무공의 근원을 찾고자 이렇게 여행길에 올랐지만 별반 소득이 없었습니다.”

  장 도장 역시 기나긴 노정에 지친 듯 얼굴이 까칠했다.

  “얻은 것이야 있지요.”

  나직이 불호를 외는 무상선사의 탄식에 장 도장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처음 출발했을 당시 늠름,했던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지치고 병들었다.

  제아무리 무공의 고수라고 하지만 기약 없이 떠도는 여정을 감당하기란 내공의 유무를 떠나서 고달프고 힘든 고통이었다.

  “네,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서역의 차 맛이 입에 맞지 않는지 장 도장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찻잔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그때 객잔의 문이 열리며 모래바람과 함께 누군가 들어섰다. 객잔의 주인은 평상시처럼 졸음을 쫓으며 일어나 손님을 맞이하려고 문가로 나섰다.

  “어서 오......?”

  주인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던 이국의 사람들이 무기를 꺼내들고 지금 막 객잔으로 들어선 이들에게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눈치를 살피던 주인은 슬그머니 허리를 숙이고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바람을 피해 잠시 들어온 손님들도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슬그머니 짐을 들고 객잔 이층의 난간으로 올라갔다.

  “마교......”

  분노에 떠는 여인의 음성이 모두를 자극하자 구내문파의 고수들은 전신 내력을 끌어 올렸다. 다음 순간 실내는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공기가 얼어붙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들은 흙먼지에 뒤집어 쓴 일노일소(一老一少)였다.

  “빌어먹을! 찰거머리 같은 놈들!”

  약관의 청년에게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자 무상선사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흥! 마교의 괴수 장천! 네놈을 찾기 위해서 이역만리를 찾아왔다. 얌전히 포박을 받아라. 네 녀석은 무림동도들에게 단죄를 받아야 해!”

  그러나 장천이라 불린 사내는 콧방귀를 끼며 이죽거렸다. 양팔을 가볍게 들어올리자 그의 장포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구대문파의 고수들 역시 출수를 준비하니 객잔은 폭풍이 안으로 몰아친 듯했다.

  “#$$%#^&*%#$#!”

  뒤에 서 있던 노인이 다급하게 외치자 장천은 천축어로 뭐라 대답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재차 노인이 장천을 크게 나무라며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그들이 무슨 속임수를 부릴지 몰라 더욱 긴장하였다.

  그러나 그런 긴장감에 익숙하지 못한 젊은 후기지수 중 하나가 겁에 질려 출수를 하고 말았다.

  “안 돼!”

  무상선사와 장 도장이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곤륜파의 젊은 검객은 이미 장천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분노한 마교의 교주 장천이 장심을 들어 그를 가격하려는 순간 노인의 신형이 빛처럼 움직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왼손으로는 장천의 강력한 장력을 막고 오른손으로는 곤륜파 검객의 검 날을 손가락으로 잡아챘다.

  “저럴 수가!”

  구대문파 원정단의 수장인 무상선사와 장 도장은 경악했다. 구대문파를 괴롭히던 장천의 무시무시한 혈빙장을 가볍게 막아낸 것이나 비록 후기지수라고는 하나 곤륜파에서 내로라하는 검객의 검을 손가락 두 개로 막아내는 것은 자신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

  또다시 노인은 구대문파를 향해서 소리쳤다. 장천이 해석해 주면 좋으련만 그는 내력을  거두지 않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모두 그만 두세요! 저 노인은 싸우길 원치 않습니다.”

  난데없이 뛰어든 천축의 어린 동자승 때문에 팽팽하던 긴장이 깨어져 버렸다. 어눌하지만 분명히 한어로 소리친 동자승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맑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다.

  “저 노인은 제발 싸움을 멈추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무기를 내려놓고 저 노인의 말씀을 들어보시지요. 돌풍이 그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동자승의 말에 장 도장과 무상선사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동자승의 해맑은 웃음이 자칫 험악해질 수 있었던 싸움을 멈추게 만들었다.

  장천과 구대문파는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지만 섣불리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장천은 노인에게 호되게 혼이 났고 구대문파는 무상선사와 장 도장이 안심시켰다.

  잠시 후 노인과 무상선사, 장 도장 그리고 동자승은 객잔의 조용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 지역 특산품이라는 양젖에 술을 섞은 음료가 탁자 위에 있었지만 누구 하나 손을 대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동자승이 양쪽의 눈치를 보다가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구릿빛 피부와 커다란 매부리코를 가진 노인은 뭔가 불안해 보였다. 동자승에게 말하는 내내 한숨을 쉬다가 화를 내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까 이분 말씀은 왜 자신의 제자를 해치려 하는지 궁금하다고 하네요.”

  동자승의 통역에 무상선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장천이 중원 무림에서 마교의 교주가 되어 저지른 수많은 악행과 패악을 나열하자 어린 동자승은 너무나 잔혹 무도한 내용에 인상을 찌푸리며 노인에게 전해주었다.

  노인 역시 무상선사의 말을 전해 들으며 경악하였다.

  그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반복하며 화를 냈다. 그러더니 종국에 가서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그 모습은 결코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기에 무상선사와 장 도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 역시 만에 하나 제자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노인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몇 차례 더 심각한 대화가 오고 갔다. 대부분의 내용을 장천이 중원에서 저지른 일에 대한 확인과 장천의 잘못을 눈감아 줄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물론 무상선사와 장 도장은 펄쩍 뛰며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하였고 노인은 필사적으로 그들에게 사정을 했다.

  그러나 이 일은 처음부처 결론이 나와 있는 일이었다. 무림인이라는 존재들이 원한에 관해서 얼마나 지독한지 노인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대에서 복수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는 무서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결국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의 끝은 파국이었다.

  콰광!

  탁자가 부서지며 노인과 무상선사, 장 도장이 충돌하였다.

  우지끈!

  벽이 부서지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이층에서 떨어졌다. 파편들과 섞여서 내려오는 세 인영은 쉬지 않고 권(拳)과 장(掌)을 교환했다.

  내력이 심후한 고수들이 서로 장풍으로 대결하니 강맹한 권풍을 이기지 못하고 지켜보던 이들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소림의 장법이 부드럽고 웅후하다면 무당의 장법은 정중동의 무거움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장법 속에는 예측불허의 섬뜩함이 숨어 있었다.

  노인의 무공은 중원 각파의 무학과는 전혀 달랐다. 무상선사와 장 도장은 수십여 초를 교환하고도 노인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하자 초조해졌다.

  결국 두 사람은 내력을 더 끌어 올리며 힘을 배가시켰다. 그 바람에 객잔 안의 집기들이 후폭풍에 휘말려 흙먼지와 함께 날아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노인도 견디기 힘든지 수비에서 공세로 갑자기 변화했다.

  노인의 패도적인 장법이 다가오자, 무상선사는 재빨리 왼손으로 일장을 밀어냈다.

  펑!

  큰 소리와 함께 무상선사의 몸이 크게 기울었고 두세 걸음 물러서면서도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모습은 보기 민망했다. 반면 노인은 멀쩡하게 서 있었다.

  소림의 무객승으로 자신의 심후한 내력(內力)에 대해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무상선사로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내력 대결을 하여 패배한 충격이 컸는지 무상선사는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그것을 본 장 도장은 경악했다. 쉽게 생각했던 안이한 마음을 지워버리고 장 도장은 단전의 진기를 모두 끌어 올려 가합성과 함께 쌍장을 앞으로 내뻗었다.

  노인은 이번에도 가볍게 손을 내저어 막아섰다. 그리고 결과는 무상선사와 마찬가지로 큰소리와 함께 장 도장 역시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야 겨우 몸을 바로 세울 수가 있었다.

  손을 가슴에 대고 심호흡을 하던 무상선사는 장 도장까지 패퇴하자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노인장의 실력이 정말 대단하오!”

  입가에 선혈을 흘리면서도 장 도장은 노인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 들 정도로 탄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무상선사는 세차게 도리질 했다. 그는 여전히 중원의 무학이 서역 오랑캐의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때 노인이 외치는 말을 동자승이 다시 들려주었다.

  “서로 다투는 짓을 그만 하자고 하십니다.”

  다급하고 절박하게 외치는 통에 긴박하던 싸움이 잠시 멈추게 되었다.

  “이...... 렇게 신묘막측한 무공은 난생 처음이다.”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넘어지는 추태를 모면한 무상선사는 노인의 신위에 두려움을 느꼈다.

  “저 노인장에 비하면 장천의 무공은 어린애 수준이로군.”

  장 도장 역시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며 이를 악물었다. 무상선사와 장 도장이 낭패를 당하자 구대문파의 나머지 사람들이 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챙!

  차차차창!

  각자의 병기를 뽑아드니 객잔 안은 다시 일대 수십의 대결로 치달았다.

  아미파의 상징인 연꽃무늬를 수놓은 남루한 도복을 입은 여인의 검끝이 분노로 인해 마구 흔들렸다.

  “저 간악한 자가 사제들과 사숙들을 욕보였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연약한 여인들에게 짐승 같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아미파 문하의 말을 동자승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노인에게 전했다. 노인은 여인의 눈물을 보며 깊이 탄식을 했고 장천은 욕설을 퍼부었다.

  여인의 뒤를 이어 한 명, 한 명 장천을 향해 증오와 분노를 퍼부었고 노인은 동자승으로 전해 듣는 내용이 갈수록 참혹한 내용으로 일관하자 갑자기 미친 듯이 광소했다.

  “크하하하하!”

  심후한 내력이 담긴 노인의 사자후에 객잔 전체가 들썩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 모두 기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내공을 익힌 이들은 내력을 돋우어 저항하였지만 결국 몇 명 남기지 않고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제 발로 서 있는 이는 노인과 장천, 무상선사, 장 도장 정도였다.

  나머지 구대문파의 사람들은 내상을 입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장천은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몸에 출수를 하려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것이 평생의 실수가 될 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우드득!

  “커헉, 왜? 왜 나를......?”

  장천은 자신의 맥문을 움켜쥔 노인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노인이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자 기겁하며 그의 손길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다.

  우드득! 두드득!

  노인의 손이 장천의 관절에 닿을 때마다 끔찍한 소리가 났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장천은 입만 크게 벌린 채 빠끔거리기만 했다. 부들부들 몸을 떨며 눈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끔찍했다.

  하지만 노인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온몸의 뼈를 분해하려는 듯 그의 전신을 매만졌다.

  결국 제 힘으로 서지 못하고 장천은 흙먼지 가득한 바닥에 쓰러졌다. 장천의 머리에 이르자 노인은 잠시 주저했지만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 용천혈을 짚었다. 장천은 벼락 맞은 물고기 마냥 한참 동안 경련을 일으키다 잠잠해졌다.

  “우욱!”

  지켜보던 이들 중 몇몇이 참지 못하고 토악질을 했다.

  노인은 무심한 눈으로 장천을 바라보다가 장풍에 휘말려 크게 다친 동자승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다음 그를 안고서 등에 장심을 올려놓았다.

  “저, 저!”

  무상선사가 동자승을 해치려는 줄 알고 기겁하자 장 도장이 붙들었다.

  “내력으로 치료를 하려는 겁니다. 지켜봅시다.”

  “아!”

  무상선사는 안도하며 자신 역시 내공을 일주천 시키며 내상을 가라앉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동자승의 파리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동자승이 가볍게 기침을 하자 노인도 미소지었다.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

  기운을 찾은 동자승이 노인의 말을 전했다.

  “내가 이 아이에게 가르침을 베푼 것은 그 힘을 널리 이롭고 좋은 곳에 쓰라고 함이었소.”

  잠시 폐인이 된 장천을 바라보던 노인은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어갔다.

  “내 사조께서는 늘 이렇게 강조하셨소. 힘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도 수반하는 것이라고 말이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힘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힘이 인간을 지배함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셨소. 나는 그것을 한평생 잊지 않고 살아왔지만 내 대에 와서 결국 악마가 태어났구료.”

  노인은 동자승이 통역을 할 수 있도록 잠시 틈을 주었다. 동자승은 노인의 뜻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부디 이 아이의 손에 희생당한 영혼들이 극락으로 가기를 바라겠소.”

  노인의 말에 무상선사와 장 도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이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때가 온 것 같으니, 선사의 유언대로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리다.”

  노인이 무엇을 되돌려 준다는 것인지 무상선사와 장 도장은 알지 못했다.

  다만 제자를 잃은 슬픔에 겨워 그가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은원이 사라지자 객잔은 평화를 되찾았지만 엉망이 된 객잔에서 쉴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다행히 돌풍이 그쳐 사막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멀리 항구에서도 배들이 출항을 위해 준비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싸움이 끝나고 휴식을 위해 나무 등걸에 기대어 물 몇 모금 마시고 앉나 있으려니 어느덧 야자수 사이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그때 죽은 장천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던 노인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무상선사는 노인이 죽은 제자를 위해 염불이라도 외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인 곁에 앉아 있던 동자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노인의 말을 종이에 적는 것이 수상했다.

  “아이야, 네 무엇을 하는 것이냐?”

  무상선사가 부드럽게 묻자 동자승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분의 말씀이 매우 고매하여 제 공부에 도움이 될까하여 이렇게 적고 있는 중입니다.”

  동자승의 말에 무상선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장 도장은 호기심이 동하여 노인이 뭐라고 하는지 알려 달라 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하시냐 하면......”

  동자승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노인을 흉내냈다.

  “음, 기실 인체의 수많은 혈 중에는 미증유의 힘을 감춰둘 수 있는 혈도 있거니와 혹은 그런 힘을 발끝에서 머리끝으로 자유로이 움직이게 하여 큰 힘을 내게 할 수 있는 신비함이 숨겨져 있다.”

  동자승이 노인의 말을 해석하자 무상선사와 장 도장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런 것도 모르고 동자승은 노인의 중얼거림을 통역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이처럼 신비한 인간의 육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초식과 기법에만 관심을 기울이니 참으로 통탄하고 슬퍼할 일이로다.”

  “내력은 샘물처럼 샘솟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장 중요한 내부에서 흘러나와 끊임없이 흐르는 대해와 같은 것이다. 이를 제대로 다루는 자만이 큰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동자승이 노인처럼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무상선사와 장 도장은 기력을 끌어올려 하나라도 더 듣고자 집중했다.

  ‘이처럼 오묘한 구절이 있다니...... 장경각에 있는 그 어떤 무공서보다도 깊은 고찰이 담겨져 있다.’

  무상선사는 합장한 채 명상에 잠겼다. 그러면서도 귀는 동자승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애썼다.

  “......구법의 실상을 바로 깨우치면 모든 이가 신선이 될 수도 있다.”

  장 도장 역시 동자승의 통역을 통해서 전해 듣는 귀절들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이었다.

  ‘놀랍다. 무당의 사조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정중동의 묘리가 마치 이 귀결에서 나온 듯하지 않은가?’

  장 도장은 무당의 심결과 비슷한 구결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노인의 구술은 밤을 새고 이튿날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자승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마치 이것이 커다란 소임인 듯 곧 쓰러질 듯 지친 몸임에도 불구하고 통역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체력이 다한 듯 결국 모로 쓰러졌다. 무상선사와 장 도장은 크게 놀라 다가와 동자승을 일으키니 몸이 펄펄 끓는 가마솥 같이 열이 대단했다.

  그 지경을 하고도 아픈 소리 하나 하지 않고 버텼다니 정말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뭔가에 취한 듯 동자승이 쓰러진 것도 모르고 계속 알아듣지 못할 천축어로 주절거렸고 동자승 역시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노인의 말에 따라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노인장 이제 그만 하시고 들어가 쉬도록...... 헉!”

  장 도장이 그를 측은하게 여겨 장천을 안고 밤새도록 앉아 있던 노인의 어깨를 만지자 푸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육체가 먼지가 되어 바람결에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래로 만든 조각상이 다시 모래로 산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노인과 장천은 하늘로 사막으로 바다로 사라졌다.

  남아 있던 무상선사와 장 도장만이 넋을 잃고 있을 뿐이었다. 무상선사는 자신의 품에서 연신 중얼거리는 동자승의 불덩어리 같은 머리를 만지며 낮게 불호를 외웠다.

  과거로부터 다시 현실로 돌아온 노승이 눈을 떠보니 송현이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하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딱!

  “윽!”

  이마에서 불똥이 튀자 송현은 학사 체면이고 뭐고 비명을 지르며 정자 위에서 나뒹굴었다. 그런 송현을 보며 노승은 혀를 찼다.

  “이 어른께서 중원의 비사를 들려주면 감격해하지는 못할망정 하품이라니! 당연한 응징이다.”

  감주가 담긴 잔을 들어 만두를 먹은 뒤 입가심을 하는 노승을 향해 송현이 벌떡 일어나 울분을 터뜨렸다.

  “해도 해도 어느 정도껏 농을 하셔야 믿지요. 노인장께서 천축의 왕자라고 하니 이야기 시작부터 집중이 안 된다 말입니다.”

  “쯧쯧쯧, 이렇게 상상력이 없어서야, 한심한 지고!”

  노승은 송현 때문에 감주 맛이 떨어졌는지 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왕자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쫓겨난 왕자지.”

  송현은 부어오른 이마를 매만지며 노승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도 이야기 했듯이 나는 따분한 왕실보다는 바깥세상의 모험이 더 좋았다. 그래서 왕실의 허락도 없이 혼자서 승적에 이름을 올렸다.”

  “맙소사! 그럼 진짜 중이란 말씀입니까?”

  노승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단지 그런 이유로 왕좌를 버렸다는 뜻입니까?”

  민둥한 대머리를 긁적이는 노승을 보며 송현은 기가 막혀 했다.

  “그래, 그래서 나의 왕국에서는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우스갯소리가 있지.”

  “그게 뭡니까?”

  “바보 왕자 신승 시타르!”

  스스로 말해 놓고도 민망한지 노승은 웃음을 터뜨렸다.

  “시타르?”

  송현이 낯선 단어를 궁금해 하자 노승은 바로 풀어 주었다.

  “내 이름이다. 시타르, 빛이 나는 승려라는 뜻이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들은 송현은 비로소 노승의 긴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저기...... 시타르님 그럼 말입니다. 그 이야기와 제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리 괴롭히시는 겁니까?”

  송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자 시타르는 한숨을 내리 쉬었다.

  “네가 정녕 열두 살에 과거에 합격한 신동이 맞는 거냐? 어떻게 이리도 멍청할 수가 있단 말이냐?”

  시타르의 핀잔에 송현의 입술이 한 자나 나왔다.

  “거기서 그 말이 왜 나옵니까?”

  “어쭈, 지금 너의 행동을 이유 없는 반항이라고 해석해도 되겠느냐?”

  송현은 얼른 이마를 가리며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허, 이런 놈을 봤나? 네 놈이 수박 겉핥기로 배운 것이 무엇이겠느냐?”

  시타르의 질책에 송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럼 무극무해가 그......”

  송현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자 시타르는 득의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맙소사! 그럼 그 동자승이 바로 노인장이란 말씀인데, 뭐가 해맑고 총명하다는 겁니까. 도대체 어딜 봐서...... 윽!”

  이마에 난 혹 위에 새로운 혹이 하나 더 만들어지고 나서야 송현은 시타르에게 대드는 것을 멈췄다.

  “어리석은 인간일수록 말보다는 폭력에 순응한다고 하더니 바로 네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렷다.”

  시타르가 뜨거운 콧바람을 내뿜으며 성질을 부리자 송현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무극무해가 황실서고에 있는 겁니까?”

  송현의 굴하지 않는 입심에 시타르는 결국 화도 내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그야 그 멍청한 무상 땡중이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딜까 고민하다가 황제에게 진상을 했겠지. 당연히 이곳 인간들이야 이 책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을 테니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을 테지만, 안 그러냐?”

  고개를 끄덕인 송현은 비로소 무극무해의 글씨가 엉성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바로 어린 동자승이 적은 글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책의 앞에 연자여, 노부의 절대신공을 익히면 지상만인 일인자가 되리라 하고 적힌 글은 무엇입니까?”

  송현의 뜬금없는 질문에 시타르는 짖궂은 표정이 되었다.

  “그건 그냥 심심해서 장난 좀 친 거였다.”

  “헉, 자, 장난!”

  “그래, 무상 그 땡중이 나를 소림사에 삼년이나 가둬두고 책에 내용을 적으라니 어디 보통 심술이 나야지 말이야. 하하하!”

  “꽤나 통쾌한지 노인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무극무해를 익힌 송현은 등골이 오싹했다.

  만에 하나 그의 장난에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흔히 말하는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기에 송현이 시타르를 보는 눈빛이 좋지 않았다.

  한참을 웃어대던 시타르는 송현의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 채고는 정색을 하였다.

  “걱정 마라! 네 녀석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으니까. 서문은 어린 마음에 비슷한 무공서들처럼 흉내를 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용은 이름 모를 노인이 구술해준 것을 정확하게 기입했다.”

  송현은 미심쩍어하면서도 궁금한 것들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토록 고강한 무공인데 왜 소림은 이것이 황실서고에서 썩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버린 겁니까?”

  송현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을 따지고 들었고 시타르는 갑자기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떠오르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버린 것이 아니라 감추고 싶었던 거다.”

  “뭘 감춘다는 겁니까?”

  “무극무해를 소림사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시타르의 분위기가 바뀌자 송현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럴 때의 시타르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송현도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다.

  “왜지요?”

  시타르는 모든 것을 다 말해줄 듯 해왔으면서도 이 질문에는 주저했다.

  송현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고 시타르는 정자 안을 몇 번이나 맴돌다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노려보았다.

  “좋아,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지만 사실을 아는 것이 좀 더 분발할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 모두 알려 주마!”

  뭔가 거창한 비밀을 알고 있는 듯이 분위기를 잡자 송현도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했다.

  “마교 교주 장천의 스승인 그 노인은 장천보다 더 지독한 악인이었다.”

  도무지 알지 못할 말을 하는 시타르 때문에 송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의 회상에서 노인은 공명정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타르는 노기 띤 목소리가 되었다.

  “그가 되돌려 준다고 했던 것은 무공서가 아니라 무림을 파멸에 몰아넣을 괴물이었다.”

  “그게 무슨......?”

  송현이 당황하여 되묻자 시타르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무상선사와 장 도장은 너무 순진했다. 왜 장천이 마교의 교주가 되어 광인이 되었는지 조금이라도 의심했더라면 그 괴물을 가지고 중원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시타르의 섬뜩한 말에 송현은 가슴 품 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무극무해를 꺼내 들었다.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진 책을 본 그의 몸이 격하게 떨렸다.

  그것은 자신이 만든 책과 수십 년 만에 재회하는 감동이라기보다 끔찍한 마물과 재회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만든 괴물을 다시 보니 반갑구나!”

  말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걸 고결한 무공서라고 생각했던 소림과 무당에서 장천보다 더 지독한 괴물들이 태어났다.”

  “설마?”

  겨우 전후 사정을 추측한 송현은 억! 소리가 새어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 얼마나 무서운지 이제야 깨달았느냐? 장천의 사부는 손도 안대고 무림을 멸망시키려 한 것이다. 무림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거지.”

  “상승의 무공절학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 불나방들이 수천, 수만이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군요.”

  송현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자 노인은 쓰게 웃었다.

  “그렇지 몹쓸 전염병처럼 무극무해에 손을 댄 인간들이 점점 미쳐가며 중원을 피바다로 만들어 주길 바랐던 거지. 하지만 천만 다행스럽게도 그날 그 자리에 무상선사와 장 도장이 있었고 그것은 중원 무림의 홍복이라고 해야겠지.”

  송현도 불가와 도가에서 오래 수양한 그들이 불심과 도력이 깊어 사심에 흔들리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무상선사와 장 도장은 사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극무해를 파기했다. 이제......”

  시타르가 송현에게 손을 뻗자 무극무해가 그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말로만 듣던 허공섭물(虛空攝物)!”

  그의 신비한 무위에 송현은 소리를 내어 감탄했다.

  그러나 송현은 무극무해가 구겨지도록 강하게 움켜쥐었다.

  “다 외웠느냐?”

  질문은 차가웠지만 송현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토시하나 틀리지 않게 외웠습니다. 고대 천축어로 쓰인 부분만 빼고 모두 머릿속에 담겨 있습니다.”

  송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안에 있던 무극무해는 재로 변해버렸다.

  “헉!”

  송현은 자신의 손때가 묻은 무극무해가 재로 변하자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시타르의 말에 송현은 딸꾹질이 나올 정도로 놀랐다.

  “네 녀석이 만약에 심상편에서 멈추지 않고 더 익혔다면 내 손에 죽임을 당했을 거다.”

  “그런 말을 어찌 그렇게 쉽게 하는 겁니까?”

  송현이 창백한 얼굴로 말을 더듬자 노인은 비릿한 미소로 대답했다.

  “네 녀석이 괴물이 되는 것보다는 내손에 죽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꿀꺽!

  너무 놀란 나머지 목울대를 크게 울리도록 경기를 일으킨 송현의 등을 두드려 주며 시타르는 송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약속대로 내가 네 스승이 되어 주마, 대신 네 녀석이 마교 교주 장천이나 소림, 무당에서 혈마가 되어버린 다른 녀석들처럼 변한다면 주저없이 목을 벨 것이다.”

  송현의 딸꾹질이 점점 심해져서 몸이 들썩일 정도가 되자 그 모양새가 재미있는지 고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신하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송현은 그의 협박에 치망순역지의 고사를 떠올렸다. 꼼짝없이 걸려든 자신의 처지가 그와 같음을 느끼고 절망했다. 이를 대신할 잇몸도 없으니 홀로 서야만 하는 송현에게 가혹한 운명은 더 많은 짐을 짊어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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