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명철보신(明哲保身)
명철보신(明哲保身)
- 이치에 맞고 사리 분별력이 있어 자신을 잘 보전하는 것을 말한다.
명조 만력(萬曆)년간.
정갈한 차림의 젊은 학사가 황궁의 남쪽 오문(午門)을 지나 한가로이 입궐하고 있었다.
“오늘은 좀 많이 늦으셨습니다. 송 학사님!”
금군 복장의 우람한 사내가 아는 체를 하자 송 학사 역시 크게 반가워했다.
“임 교두! 그대도 오늘 지각이로군.”
짐짓 안됐다는 표정을 하자 임 교두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이미 오전 일과를 끝내고 금군의 오후 훈련을 준비하러 가는 중입니다.”
“하하하, 그런 거였군. 역시 임 교두는 부지런하다니까!”
송 학사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공치사는 부담스럽다며 임 교두가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적인 인사를 나눈 뒤 헤어지자 임 교두 뒤를 따르던 무관이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 교두님, 왜 저런 젊은 학사를 어려워하시는 겁니까?”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무관을 보며 임 교두는 헛웃음을 삼켰다.
“쯧쯧, 자네는 황실에 있으면서도 소마(小魔) 송현 학사의 소문도 못 들어 봤나?”
“아! 설마 그 송현 학사가 아까 저 사람이란 말입니까?”
무관은 믿기 어려운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찾았다.
“그래, 열두 살에 과거에 장원 급제한 천재 중에 천재였지.”
“천재였다고 말씀 하시는 걸 보니 지금은 그렇지 않은가 보군요.”
“글쎄, 그게 말이야 나도 확실치가 않아. 저 순진한 얼굴 뒤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가 없거든.”
휘적휘적 걸어가는 송현의 뒷모습을 보는 임 교두는 과거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여러 가지 소문들을 떠올렸다.
학사 송현!
겨우 18세에 대학사에 준하는 칭호를 받은 천재였지만 그의 아버지 병부시랑 송시현이 음모에 휘말려 참형을 당하자 그 다음날부터 송현은 바보가 되어 버렸다. 이해하지 못할 기행과 사고를 만들어 황제의 진노를 받았다. 그러나 전각대학사들과 한림원 학사들이 상소를 올려 내쳐지는 것은 겨우 면했다. 하지만 이후로 송현은 한림원과 전각학사 어디에서도 학문을 연구하거나 정책을 다룰 수 없었다. 대신 황궁의 한직을 떠돌며 내관들이나 하는 직책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그의 기행은 끝이 없었고 황궁 내의 아주 유명한 명물이 되어 버렸다.
“만에 하나 저 모습이 연극이고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내막과 일치한다면 정말이지 송현 학사는 무서운 사람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 것이 있다. 훈련이 늦을지 모르니 서두르세나!”
알쏭달쏭한 말만 내뱉고 급히 걸음을 옮기는 임 교두 때문에 수하 무관도 송현에 대한 관심을 접고 급히 뒤를 쫓아갔다.
임 교두 일행과 헤어진 송현은 익숙한 길을 따라서 삼층 전각으로 이루어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송현 학사님, 오늘도 이곳으로 등청하시면 어쩌십니까?”
“왕백 욘석아, 내가 어디를 가든 네 녀석이 무슨 상관이냐?”
“염국의 부랑께서 송현 학사님이 이곳에 드시지 못하게 하라고 엄포를 놓고 가셨단 말입니다.”
소환 딱지를 얼마 전에 뗀 환관 왕백은 송현이 나타나자 울상을 지으며 사정하듯 두 팔을 벌리고 막아섰다.
그러나 마치 송현은 앞에 사람이 없다는 듯이 무시하고 지나쳐 이층 서고로 올라가 늘 그랬던 것처럼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저 쇠심줄 고집쟁이 같으니라고!”
왕백이 투덜거리며 방명록에 송현의 이름을 삐뚤삐뚤하게 적자 이층에서 짓궂은 음성이 들려왔다.
“왕백아 다 들린다!”
“헉! 아닙니다. 아무 소리도 안 했어요!”
진땀을 뺀 왕백은 발뒤꿈치를 들고 몰래 건물 밖으로 나왔다.
왕백이 근무하는 능운서고는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웬만한 책들은 이미 한림원의 서고나 국자감이도 있기 때문에 학사들이 이곳을 찾는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능운서고에는 학문 서적보다는 잡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환관들이나 후궁 처소의 시녀들이 들릴 뿐이었다.
다른 학사들은 발길이 뜸한 곳에 송현은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고 밖에 쭈그리고 앉아서 한숨을 쉬고 있는 왕백을 발견한 나이든 환관이 혀를 찼다.
“예서 뭘 하고 있는 게냐?”
“아, 도태감 어르신 어쩐 일이십니까?”
“나야, 밤이 깊어 소소한 이야기책이나 찾아보려 왔지.” “소인이 쓸 만한 걸로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안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냐?”
도태감이 왕백의 어깨 너머로 기웃거리자 왕백이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할 것을 부탁했다.
“소마(小魔)가 지금 안에 있습니다. 괜히 부딪혀 봐야 좋을 것 없습니다.”
소마라는 소리에 도태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황국의 태감들 중에 송현에게 골탕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책을 빌리러 온 사실도 잊어버리고 바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도태감님 책을 가져가셔야죠!”
하지만 이미 그는 외문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았다.
“참나, 송현 학사님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네. 좀 별나기는 해도 좋으신 분인데. 휴, 그때만 생각하면......”
왕백은 송현 덕에 역모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목숨을 건졌다. 그렇게 황궁 내에는 송현의 기지와 앞을 내다보는 혜안에 도움을 받은 이들이 꽤 되었다. 그렇기에 왕백도 송현에게 늘 감사하고 있었다. 아직은 바깥 날씨가 쌀쌀함에도 이렇듯 밖에 나와 있는 것은 송현이 독서하는데 방해하지 않으려는 어린 왕백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였다.
왕백의 배려에 넓은 서고를 혼자 독차지한 송현은 요즘 한창 새로운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학문을 닦는 이들이 멀리하고 심지어 천하게 여기는 무림의 세계였다. 능운서고에는 무림의 비사부터 시작해서 각 문파의 역사와 무공의 특성을 설명해 놓은 기서들이 가득했고 송현은 근 몇 달간 이 새로운 세계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했다.
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서고에는 가끔씩 송현이 책을 보고 감탄하는 음성이 간간히 들렸다.
“흠, 과연 이런 인간들이 존재하는가? 책의 저자도 없고 그저 들은 풍문을 옮긴 것 같기는 하지만 거짓으로 치부하기에는 무공에 관한 묘사가 너무 세세하다.”
요즘 매달리고 있는 책은 무공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이해서와 같아서 송현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단전이 열리고 내공을 쌓으면 추위를 느끼지도 않고 몇날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아도 피로하지 않다니 놀랍구나.”
송현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무림고수처럼 몸을 움직여 보았다.
책 속에 나오는 것처럼 무당의 고수와 아미파의 여고수가 한데 어우러지는 광경을 상상하며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펼쳐보였다.
“국주님!” “으헉!”
“쿠다당!”
갑자기 들려온 고함에 송현은 서고 바닥에 나뒹굴어야만 했다. 기겁을 한 송현이 고개를 들어보니 붉으락푸르락하는 중년 사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난 또 누구라고, 부랑께서 어인 행차신가?”
송현이 학사모를 고쳐 쓰고 옷을 털었다.
“국주님의 근무지는 이곳이 아니라 내직염국입니다. 도대체 얼굴을 뵐 수가 없으니 저보고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나야 나염에 대해서 일자무식이거늘 내가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없지 않나?”
송현의 심드렁한 태도에 내직염국 부랑 하율의 콧수염이 마구 떨렸다.
“그게 지금 내직염국의 국주로서 하실 말씀입니까? 밀린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그보다 지금 내직염국이 생긴 이래 가장 큰일이 발생했단 말입니다.”
“비단이나 나염 하는 곳에 큰일은 무슨?”
송현은 하율이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지만 그이 손에 끌려 내직염국에 들어서자 낯빛이 창백해졌다.
황궁에서 사용하는 비단에 염색을 하는 것이 내직염국(內織染局)의 주소임이었다. 염국의 일꾼들에게 늘 환하게 웃어주던 송현은 염국 마당에 쌓여 있는 물건을 보고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이 비단은?”
“최고급 비단인 당라(唐羅)이옵니다.”
하율의 설명에 송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장안에서도 씨가 말랐다고 들었거늘 이것이 어떻게 열 동이나 염국에 들어온 거지?”
하율 역시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번왕이신 주왕께서 황상께 진상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고 이걸 손봐서 마마님들께 나누어 주는 일을 저희 염국에 맡겼습니다.”
“뭐?”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송현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누구의 명령인가?”
“황제폐하의 교서가 있기는 하지만 실상 일을 꾸민 것은......”
하율은 조심스러운지 주위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사례감 왕유 그 작자의 농간이겠지?”
하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교서를 건네받아 읽어본 송현은 코웃음을 쳤다.
“비단을 나염 처리하여 상 중 하로 평가하여 그에 맞게 진상하라 이거로군.”
벌떡 일어나 마당에 쌓여 있는 비단 더미에 교서를 내던지려던 송현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왕유, 네놈이 기어이 나를 찍어 내려는 것이냐?’
송현의 눈에서 이글이글 불길이 일어났다.
사례감 왕유!
환관으로서 최고의 관직인 사례감에 오른 왕유는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폭정을 일삼는 못된 자였다. 그리고 송현에게도 씻을 수 없는 원한을 가진 자였다.
“국주님 어떻게 할까요?”
근심 가득한 하율을 보며 송현은 고개를 저었다.
“내 오늘 숙고할 테니 일단 나염 작업을 해놓게. 진상하는 일은 내가 결정하겠네.”
“알겠사옵니다.”
무거운 짐을 송현에게 맡긴 것이 미안한지 하율은 잔소리 대신에 고개를 숙인 다음 조용히 물러갔다.
하율이 송현의 방에서 나오자 일손을 멈춘 일꾼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부랑어른, 어찌 하신답니까?”
“당연히 황자애기씨를 잉태하신 여비마마 처소에 보내야지. 암!”
“그렇고말고! 뒷방 신세로 전락한 단비마마 처소에 제일 하등품을 보내는 것이 옳지.”
“그렇지!”
대부분의 의견이 동일했다. 제일 나중에 후궁이 되었지만 제일 먼저 복중에 애기씨가 들어선 여비의 궁에 고관대작들의 출입이 잦다는 것은 궁궐에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나염이나 마무리 해. 처결은 국주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하율이 입방아를 찧는 일꾼들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고개를 돌려 송현의 집무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처결하든 후궁들이 앙심을 품을 것이 틀림없다. 결국 국주님은 외통수에 걸려드신 거야.’
사례감 왕유가 무슨 이유로 송현을 노리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하율로서는 이 일이 내직염국 전체에 피해가 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국주가 바뀌는 것은 상관없지만 자신들이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이 찾아오고 대부분 퇴청을 한 궐내에는 늦게까지 일하는 관리들이 일터에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내직염국 또한 집무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흠, 흠!”
“누구시오!”
“임 교두입니다.”
인기척에 문을 연 송현은 아침에 보았던 임 교두가 찾아온 것이 놀라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대가 어쩐 일이오?”
“술친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찾아 왔습니다.”
술병과 보퉁이를 들어 보이는 임 교두를 보며 송현은 환하게 웃었다.
“잘 됐군요. 마침 친구가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송현의 환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온 임 교두는 책상 위에 있던 물건들을 치우고 제법 그럴 듯한 술상을 차렸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임 교두는 송현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어찌 하실 요량입니까?”
“벌써 소문이 동네방네 다 났나 보군요.”
“벽에도 귀가 달린 곳이 황궁이지 않습니까?”
임 교두의 말에 송현은 키득거렸다. 구중구처 황궁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곳이었다.
“왕유 그 인간이 여전히 제 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예상했어야 하는데 제 실수입니다.”
“그럼 설마 하니 그 동안 똥물을 뒤집어쓰고 한림원에서 책을 불태우신 소동들이 모두 연극이었단 말입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하는 임 교두에게 송현은 대답 대신 씁쓸한 표정으로 대신했다.
‘갖은 기행과 때로는 광인(狂人)처럼 행동하던 것들이 정적의 눈을 돌리기 위한 속임수였다니 정말 무서운 사람이로구나!’
내심 경외감을 느낀 임 교두는 그가 이번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이번 일도 비책이 있으시겠죠?”
그러나 임 교두의 예상과 달리 송현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휴, 이번 일은 어떻게 처리한다고 해도 결국 말이 나올 테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제가 지게 될 겁니다.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곳이 황궁이지 않습니까.”
걱정이 가득한 송현은 그저 술만 들이켰다.
그런 송현을 지켜보는 임 교두의 마음은 착잡했다.
“송현 학사님의 지혜가 아니었다면 지난번 정추의 난 때 역적으로 몰려 참수를 당했을 목숨입니다.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꼭 돕고 싶습니다.”
임 교두의 진심을 느낀 송현은 빙그레 웃었다.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약간 재주를 부렸을 뿐인데. 마치 구명지은이라도 되는 듯이 말씀하면 부끄럽습니다.”
“구명지은이 맞습니다. 송 학사님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이처럼 학사님과 술자리를 하고 있겠습니까?”
너무나 진지한 임 교두의 태도에 송현은 기분이 좋아졌다.
“내 임 교두가 의리 있는 사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처럼 눈으로 확인하니 기쁘기 그지없구려.”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죄송하지만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럽게 의중을 묻는 모습에 송현도 눈을 이채롭게 떴다.
송현이 도포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진지하게 바라보자 허락의 뜻임을 알고 입을 떼었다.
“사례감 왕유가 왜 학사님을 노리는 겁니까? 제가 알기로는 이번만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그런 걸 알면서도 낙향을 하지 않는 학사님의 태도입니다. 제아무리 벼슬이 중요하다 하나 목숨보다 중하지는 않습니다.”
임 교두의 말에 잠시 주저하던 송현은 눈을 들어 창문 사이로 난 틈을 통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던 악몽을 떠올려야 했다.
“그때가 아마도 홍무 이십 년이었을 겁니다......”
넋두리 하듯 이어지는 송현의 회상을 묵묵히 듣는 임 교두의 표정은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때로는 감탄을 했고, 때로는 울분을 토했으며,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병부시랑 송시현 어른께서 그렇게 돌아가시다니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그러나 왕유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모진 세월을 견디셨다니 송현 학사님도 참으로 독하십니다.”
임 교두가 혀를 내두르자 송현은 술잔을 내려놓고 상념에 젖어 들었다.
“후후후, 그때 아버님이 상소에 왕유의 이름을 거론하며 환관정치의 폐단에 대해서 황제께 충언을 올렸던 것이 화근이 되어 가문이 풍비박살 났소. 그날의 참극을 떠올리면 무엇이 두렵겠소. 눈앞에서 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법이라오.”
“남 이야기 하듯 어찌 그리 무덤덤하십니까?” 임 교두의 푸념에 송현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럼 어쩌겠소? 지금 당장은 힘이 없는 걸.”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실 참이십니까?”
“글쎄요. 달리 뾰족한 수가 생각이 나질 않는구려.”
송현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빈 잔에 술을 채워주던 임 교두는 어두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최근 들어 연왕의 군대가 심상치 않다는 풍문이 돌고 있습니다.”
“후후후, 선황께서 후계자 정리를 제대로 하시지 못하고 승하하신 탓인 걸 어쩌겠소.”
“전쟁이 날까요?”
심각한 질문에 송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든 해답은 탐욕이라는 요물 덩어리가 쥐고 있소.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지요.”
“세상에!”
임 교두는 거침없이 내뱉는 송현의 대꾸에 너무 놀라 주변을 살폈다.
혹여 누군가가 듣기라도 한다면 대역죄로 몰려 구족이 참수형을 당할 이야기였다.
“송현 학사님!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하하하, 무엇이 그리 두려워 전전긍긍 하십니까? 대명의 금군 교위가 당당하셔야지요.”
송현의 농에 이번에는 임 교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 역시 큰 뜻을 품고 관직에 올랐지만 미처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실력과 성품보다는 뇌물과 배경에 의해 자리가 정해지니 사실 초심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송현은 다 이해한다는 듯 그를 위로했다.
잠시 의기소침해졌던 임 교두가 고개를 들어 웃었다.
“송현 학사님을 위로하려 왔는데 제가 도리어 위로를 받네요. 한심한 놈입니다.”
“뭐 어떻습니까? 누가 누구를 위로하든지 이렇게 좋은 사람과 맛난 술 한 잔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도 그렇습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당장 내일의 근심거리가 사라질 듯 호쾌하게 웃는 두 사람은 정 줄 곳 없는 삭막한 황궁에서 우정이라는 것을 쌓아가게 되었다.
이튿날, 송현이 퇴청하지 않고 밤을 세운 사실을 안 내직염국 부랑 하율은 송현의 진지한 모습에 감동하여 걸음을 서둘렀다. 염국 일꾼들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집무실로 향한 하율은 안쓰러운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국주 어른 밤새 얼마나......”
“쿨~ 음냐. 마시자고 마...... 셔. 음냐.”
“이...... 이!”
주먹을 말아쥔 하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이런 인간을 위해 잠시나마 눈물을 흘렸다니!’
하율은 참지 못하고 복도에서 물주전자를 들고 와 송현의 머리에 부었다.
“읏, 차가워!”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놀라 뛰듯이 송현이 튀어 올라왔다.
“뭐하는 거야! 지금!”
“정신 차리시라고 그랬습니다.”
하율의 냉랭한 태도에 눈썹이 치켜 올라갔던 송현은 술병과 음식으로 어지러워진 방안을 확인하자 실실 웃어야만 했다.
“하하하, 이거 말이지 어제 손님이 찾아와서...... 하하하!”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송현을 보며 하율은 자신의 관직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한숨을 쉬었다.
“기운 내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나.”
넉살좋은 송현의 말에 하율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늘 오후에는 저 비단들을 마마님들께 보내야 하는데 다음날이면 우리 모두 짐을 싸게 생겼단 말입니다. 뭐가 구멍이 있다는 겁니까? 아침에 등청하다 보니 이청하 장군과 장수들이 성난 얼굴로 입궁하는 걸 보았습니다.”
“뭐? 그들이 왜?”
송현이 젖은 머리를 말리며 놀라자 하율이 방 안을 치우며 주절거렸다.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단비마마를 소원하게 대하는 황제폐하께 따지러 왔는지 아니면 황후 자리를 놓고 담판이라도 지으려고 왔는지 알게 뭡니까!”
“그래?”
갑자기 송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이보게 하율, 자네 건청궁에 친구가 있지?”
“뚱보 주백이 말씀입니까?”
하율이 무슨 일인지 싶어 고개를 들자 송현이 얼굴에 함지박만한 미소를 걸고 하율을 잡아 흔들었다.
“하하하, 잘하면 우리가 모두 살아날 방도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네?”
송현이 술이 덜 깨서 정신을 못 차리나 싶던 하율은 송현이 관복을 정제하고 뛰쳐나가자 깜짝 놀랐다.
그는 하율이 부르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지 금세 염국을 뛰쳐나갔다.
멍하니 지켜보던 하율은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었다.
그날 오후.
내직염국에 다시 나타난 송현은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
“좋아, 상등품은 단비마마의 궁으로 하품은 여비마마의 처소로 보내라!”
“헉!”
일꾼들의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몇몇은 송현에게 달려와 이마에 손을 대어보기까지 했다.
“잘못 말씀하신 거죠? 거꾸로 말하신다는 게...... 그렇죠?”
재차 확인을 하자 송현은 다부지게 고개를 도리질했다. 게다가 자신이 이름 석 자를 적어서 명부에 기록까지 했다.
“여비마마가 이 사실을 아시는 날에는 우리 모두 목이 달아날 겁니다.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숙고해 주십시오!”
내직염국에서 일하는 모든 관리들과 일꾼들이 송현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송현은 매몰차게 뿌리치고 추상같이 명령을 내렸다.
“쯔쯔, 아둔한 작자들 같으니라고. 앞을 내다보지 못하면 말이라도 잘 들어야 할 것 아니냐. 어서 시키는 대로 해!”
한번 마음먹은 일은 절대로 되돌리는 법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내직염국 관리들과 일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단을 손질한 다음 지시대로 비단을 후궁 각처로 보냈다.
이제 모든 일은 활을 떠난 화살이었다. 비단이 출고된 후 내직염국은 살얼음판을 걷는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숨소리조차 조심스럽게 내야만 했다.
송현의 명에 의해서 비단이 출납되고 보름이 지나도록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자 내직염국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오늘도 염국의 국주인 송현은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고 편안한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콰당!
내직염국의 정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큰소리를 내자 가뜩이나 불안한 염국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움직였다.
그러나 소리의 정체가 송현을 따르는 왕백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내 관심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왕백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숨을 헐떡이며 염국 마당을 단숨에 가로질러 뛰어왔다.
“송현 학사님!”
곤히 잠든 송현을 흔들어 깨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송현이 귀여워하는 왕백뿐이었다.
“아함! 이 녀석아, 내가 오수를 즐기는 동안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은 주무실 때가 아닙니다. 하늘이 바뀌었단 말입니다.”
“뭐라? 하늘이 바뀌다니?”
“황후마마께서 승하하시고 단비마마께서 황후에 오르신답니다.”
“난 또 뭐라고!”
송현은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잠을 깨웠다며 왕백을 나무랐다.
그러나 염국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소식이었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와 사실 유무를 확인했다.
“허어, 이런 일이!”
“세상에, 놀라운 일이로세!”
저마다 탄성을 터뜨리던 염국사람들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송현을 보며 새삼 경외심을 느끼게 되었다.
“저 양반이 어찌 일이 이리될 줄 알고 비단을 그리 보냈을꼬?”
“하루에도 수십 명의 목이 달아나는 황궁에서 이날 이때까지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걸 보면 예사분이 아니라고 내가 그러지 않았나?”
“암, 장원급제가 어디 쉬운 일인가?”
보름 전만 해도 이구동성으로 송현이 악귀라며 원성을 터뜨리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의 혜안을 칭찬하기에 앞장섰다.
어린 왕백의 눈에도 송현의 기행은 정말이지 놀랍기만 했다.
늘 어딘가 흐트러지고 어수룩해 보이지만 가끔 내뱉는 말들이 예언처럼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왔다.
‘정말이지 대단하신 분이다. 이분 말대로만 하면 개죽음은 당하지 앟을 거야.’
왕백은 앞으로 황궁에서 무탈하게 지내려면 송현의 곁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 넣었다.
이후로 그 누구도 송현의 명에 토를 달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조금 이상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도 시일이 지나면 그게 옳았다는 것이 결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평온한 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던 송현의 마음과 달리 불청객이 쳐들어온 것은 단비가 황후에 책봉된 지 석 달 열흘이 지난 후였다.
곤녕궁(坤寧宮).
황후가 생활하는 공간이며 그녀의 침궁이기도 한 곤녕궁은 금남의 지역이다.
황제와 태자를 제외한 정상적인 사내들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지만 송현은 이미 허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으므로 간단한 검사를 받은 다음 곤녕궁으로 향하는 후원으로 들어섰다.
“송현 학사님께서는 이제 탄탄대로이십니다. 단비마마 아차, 황후마마께서 어려웠던 시절에 충심을 다했던 사실을 잊지 않고 부르시니 큰 상이 내려질 것입니다.”
왕백이 싱글벙글거리며 잘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송현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웠다.
“글쎄다, 이것이 복이 될지 흉이 될지는 어찌 알겠느냐?”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송현 학사님을 제외한 팔 국의 국주 대부분이 감찰부로 끌려가 치도곤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는 황후마마께서 송현 학사님을 어여삐 보고 계신다는 뜻이 틀림없습니다.”
“복이 곧 흉이오 흉이 곧 복이라 했다. 오늘의 호사가 내일은 악재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을 꺼내는 송현 때문에 왕백은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왕백을 돌려보내고 중궁(中宮)앞에 도착한 송현은 심호흡을 하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복이 흉이 되고 흉이 곧 복이 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로다. 그것을 알면서 당장에 살려야 할 목숨이 많았기에 비단 건은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송현은 누가 들으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하지만 이로서 사례감 왕유는 확실하게 나에 대해서 평가를 내렸을 터이니 이젠 정말 조심해야겠어.”
허리가 구부정한 환관이 나와 송현을 위 아래로 살펴보자 기분이 나빠진 송현이 차갑게 말했다.
“안에 알리거라!”
“네? 아, 네.”
“학사 송현, 황후마마의 부르심을 받잡고 왔단 말이다.”
송현의 거친 태도에 주눅이 든 환관은 재빨리 내당으로 들어가 그가 당도했음을 알렸다.
교태전의 새로운 안주인 황후 단비는 예전과 달리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송현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천세! 천세! 천, 천세! 신 내직염국 국주 송현 황후마마께 문안 여쭈옵니다.”
머리에 황후를 상징하는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단비는 예정에 송현이 비단과 후궁들에게 필요한 물품 때문에 드나들며 알았던 다 죽어가던 여인이 아니었다.
웃음소리에는 교태가 흘렀고 얼굴에는 자신감과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송현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 감춰진 한과 울분을 보았다.
‘후~ 내직염국 식구들을 살리고자 한 일이지만 나는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 셈이로구나.’
황후 단비를 보자 내심 아니길 바랐던 자신의 예감이 들어맞음을 직감하고 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런 송현의 마음을 모르는 황후는 더없이 따뜻한 미소로 송현을 맞이했다.
“그대가 후궁 시절 내내 신경 써주었음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황공하옵니다.”
“내 그대에게 받은 고마움을 모른 척할 수 없으니 소원하는 바가 있으면 말하라. 관직이든 재물이든 어려워하지 말거라.”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 된 송현은 준비해 온 말을 술술 풀어 놓았다.
“소신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고도 중앙에 나가지 못한 것은 건강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황후마마의 하해와 같은 성은이 감사하지만 소신이 불민한 육체로 인하여 그 같은 성은을 받을 수 없사오니 부디 거둬 주시기 바라옵니다.”
송현이 간곡히 거절하자 단비는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호호호, 내 일찍이 그대가 평범한 학사가 아님을 익히 알았노라. 학사이면서 팔 국의 한직에서 묵묵히 일하는 그대가 입신에 뜻이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그렇다면 내 재물로 보답하겠노라.”
황후가 손짓을 하자 환관들이 금이 가득 든 상자를 내려놓았다.
뚜껑이 열리니 누런 금빛이 송현의 얼굴을 물들였다. 평생을 일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엄청난 재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귀영화로 가는 초대장으로 보였겠지만 송현에게는 눈앞의 이 금들이 지옥 유황불로 가는 선고장처럼 보였다. 다급히 표정을 바꾼 송현은 코가 바닥에 닿도록 고개를 숙렸다.
“황후마마, 자고로 공자께서는 학문을 하는 이가 가장 멀리해야 할 것으로 재물을 꼽으셨습니다. 소신 황후마마를 위해 앞으로도 충심을 다할 것이니 부디 과한 재물을 거둬주시옵소서.”
송현이 바닥에 엎드려 간청을 하자 황후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그것을 눈치챈 도태감이 얼른 목청을 높였다.
“감히 황후마마의 성은을 거절할 셈이오!”
남자의 것도 여자의 것도 아닌 환관의 성난 목소리는 웃음을 자아내는 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 한마디에 없는 죄목도 만들어져 참형에 처해지는 곳이 황궁이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소. 다만 신체도 변변치 못한 나에게 과한 재물은 도리어 해가 되어 황후마마께 죄가 될까 두려워하는 말이오.”
황후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을 아뢰는 송현의 태도에 도태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저, 저런 발칙한!”
평소에 감정이 좋지 않았던 도태감이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을 내자 황후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흠, 그대는 마치 마지막 생을 앞둔 이처럼 말하는구나. 혹여 병이 깊어 재물도 관직도 관심이 없는 게냐?”
“황후마마의 깊은 혜안에 신은 감복하였사옵니다. 소신은 그저 남은 생을 황궁에서 폐하와 황후마마께 충성을 다하는 것이 원이옵니다.”
그제야 이해가 가는지 황후와 도태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존귀하신 황제폐하가 머무는 황궁에서 병든 자나 죽음을 앞둔 자는 기거할 수 없는 법이다.
“흠, 그대가 그렇게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그쳤으니 내가 너무했구나.”
황후가 곤란해 하자 도태감이 얼른 그녀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무슨 말이 오고가는지 송현은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나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호호호!”
황후는 도태감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교소를 멈추지 않았다.
“송학사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시오!”
도태감이 미소 짓는 모습이 영 불안해 보였지만 송현은 별수 없이 물러나야만 했다.
돌아오는 내내 뒷골이 당기는 게 꺼림직했지만 어쨌든 정치적으로 주목받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목적은 지켜진 것이다.
만일 높은 관직을 받았다면 당장에 사례감 왕유의 칼날이 자신을 향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송현은 안전제일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모처럼 편히 잠들었다.
그러나 송현이 꿈나라로 갈 무렵 황궁서고인 만서고의 관리들은 밤새 책을 선별하느라 한숨을 이루지 못했다. 황후를 모시는 도태감이 특별한 책을 찾아오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만서고.
기서, 희귀본이나 민간에 유출되어서는 안 될 황궁의 비서들처럼 귀한 서책들만 보관하는 만서고는 퇴청이 훨씬 지난 시간임에도 많은 이들이 불을 밝힌 채 책장을 뒤지고 있었다. 삼층 서고에서 먼지 때문에 눈물 콧물을 쏟던 관리가 참지 못하고 불평을 했다.
“나 참, 이게 무슨 꼬락서니야?”
“쉿!”
동료 관리가 기겁을 하고 아래층의 눈치를 살폈다.
“죽고 싶어서 그래? 입 조심하는 것이 좋아!”
“뭣이 무서워서?”
늦은 시간까지 일해서 짜증이 났는지 여전히 성질을 부리자 그의 동료가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오늘만 해도 황후마마가 후궁시절에 밉보인 내관들과 대신들 여럿이 목이 달아난 거 몰라? 우리라고 다를 것이 뭐가 있겠어.”
자신의 목소리가 크다고 생각했는지 아래층의 분위기를 살핀 후 조용히 속삭였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것이 황궁이야. 모두가 지금 황후마마께 잘 보이려는 마당에 만서고에 직접 명을 내리셨으니 서고장인 이태감 입장에서야 이 만서고를 다 갖다 바쳐서라도 잘 보이고 싶지 않겠어?”
입이 막힌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놓아주었다.
“괜히 눈 밖에 났다가 치도곤 당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쓸데없이 주둥이 놀리다가는 이렇게 되는 거야!”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겁에 질려 침을 꿀꺽 삼켰다. 뒷걸음질 치다 책장을 밀친 관리 발밑으로 오래된 고서가 떨어졌다.
툭.
“이게 뭐지?”
“무극무해(武極武海)...... 이, 이거다!”
드디어 찾던 것을 발견하자 기쁨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만서고에 매달렸던 십수 명의 내관들은 만세를 외쳤고 서고장인 이태감은 이마에 흐르던 진땀을 닦아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기실 도태감은 글공부하는 학사들이 병적으로 싫어하는 태극권 같은 체력 단련서를 보내 그를 골려줄 심산이었지만 이를 오해한 만서고의 서고장은 새 황후에게 잘 보이려는 절박함으로 외부에 유출시켜서는 안 될 책을 찾아내 황후의 거처로 보내고 말았다.
만일 그 책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도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백여 명의 염색공들이 황실에서 필요한 광목천을 나염하기 위해 분주하게 손을 놀리는 동안 송현은 또다시 내승운고에서 책 읽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염국의 누구도 그가 농땡이를 친다고 여기지 않고 열심히 하라고 배웅까지 받았다.
“공공,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보시는 겁니까?”
그러나 송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왕백은 무슨 일인가 싶어 책상 위에 놓인 서책을 살폈다.
“무극무해(武極武海)?”
왕백은 낡은 양피지 표지에 적힌 흐린 글자를 어렵게 읽어 내렸다.
“공공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책자 아니옵니까?”
“그렇게나 말이다.”
근심이 가득한 송현의 얼굴을 보며 왕백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투덜거렸다.
“이런 책은 버리십시오. 너무 낡아서 읽을 수나 있겠어요?”
왕백이 책을 들어 버리려 하자 송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안 돼!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
그 책이 집안 가보라도 되는지 책을 빼앗은 송현은 책장을 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이걸 어떻게 익힌담. 휴~”
나오는 것은 한숨이요, 쌓이는 것은 근심뿐이었다.
왕백이 어깨너머로 훔쳐보니 사람 그림과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몇몇 글자는 고대문자여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음, 공공. 혹시 이젠 금군에 지원하시려고 그럽니까?”
딱!
“악!”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다가 머리를 얻어맞은 왕백은 머리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크흐! 아니면 관두시지 왜 죄 없는 머리에 화풀이를 하시는 겁니까?”
“욘석아, 황후마마께서 이걸 익혀서 건강을 되찾으라고 내리신 하사품이다.”
송현의 말에 왕백은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니 대명천지에 공공보다 더 건강하신 분이 또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황실 약탕고에서...... 읍!”
왕백의 입을 틀어막은 송현은 누가 들었을세라 주변을 살핀 다음 짐짓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 일은 너하고 나만 아는 일이다. 발설하면 어떻게 될지 알지?”
겁에 질린 왕백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자 놓아주었다. 내직염국 이전 근무지가 바로 황실 약탕고의 서기였다. 그 시절에 만난 왕백은 황실 약탕고의 귀한 약재로 차를 끓여 먹는 만행을 저지른 송현의 비리를 잘 알고 있는 유일한 그의 측근이었다.
“그냥 책일 뿐이지 않습니까?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닙니까?”
얼른 화제를 돌린 왕백은 멱살 잡힌 손에서 벗어나자 겨우 안도했다.
“멍청한 소리! 황족의 말은 지나는 농담이라도 허투루 들었다가는 이거다.”
송현이 손으로 목을 그어 보이는 시늉을 하자 왕백은 마치 자신의 목이 달아나기라도 하는 냥 목을 매만지며 침을 삼켰다.
“어느 날 황후께서 나를 불러 송 학사, 내가 보낸 책을 수련한 성과를 보자 하면 어쩔 것이냐? 게다가 더해서 그 장소가 황상께서 나와 계시는 경연장이라도 된다면? 난 황족을 모욕한 셈이 된다.”
“그런......”
“게다가 왕유 그 작자가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으니 그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송현의 말에 왕백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 커져 하루아침에 파관 면직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무극무해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을 바라보며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퇴청 무렵이 되어 염국으로 돌아온 송현에게 염국 사람들도 하나둘 뒷정리를 마치고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불이 꺼진 염국에 홀로 남아 있던 송현은 조심스럽게 첫장을 넘겼다.
휘이잉!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왠지 읽으면 안 된다고 누군가 말하는 것 같아 꺼림칙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팔락!
양피지로 만들어진 책을 읽기 시작한 송현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책머리에 적힌 심오한 글 때문이었다.
연자여, 그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 무극무해를 펼쳐 보았다면 나와 인연이 있는 자이니라. 이 책을 펼친 순간 그대는 대륙 최고의 무인이 되는 길에 들어섰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본좌, 아니 본가의 백년무학의 정수가 담겨 있는 이 책이야말로 무의 끝이고 무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황당하다 못해 광기까지 느껴지는 서문을 보며 송현은 이 일이 쉽지 않음을 절감했다.
“하하하, 이 사람 이 정도면 중증인데, 내승운고에서 보았던 무림에 관한 책들은 재미있기만 했는데 이 책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어쩌면 좋지?”
푸념을 하면서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던 송현은 중간 부분에서 책을 덮어 버렸다.
“이거 미친 사람이잖아? 이런 사람이 쓴 단련서로 연습하다가 몸을 해치는 것은 아닐까?”
송현의 걱정이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장을 펼치는 순간 송현은 숨이 턱 하니 막혔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야?” 생전 처음 보는 문자 때문에 송현은 머리가 아파 왔다. 학문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않는다고 자부했던 송현에게 무극무해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과제였다.
거부감이 들었던 처음과 달리 송현은 신비한 책에 점점 빠져들어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