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제249화
“하아아아아…….”
달뜬 목소리, 희열에 가득 찬 신음이 홍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넘치는 마기의 기운이 홍의 전체를 감싼다.
아름다운 여인이 내는 달뜬 목소리와 옅게 피어난 홍조를 보면 누구라도 음심(淫心)이 꿈틀거릴 만하건만.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졌다.
“……무슨 마기가 저리도.”
당백진의 말처럼 남궁도 역시 기겁한 얼굴로 여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마기의 모습에 침음을 삼켰다.
“말도 안 되는…… 마기로군.”
두 절대 고수조차 처음 보는 마기의 모습에 주춤거렸다.
저벅, 저벅.
“뭘 겁을 먹고 그래. 애들이 안 본 걸 다행이라고 여겨. 쪽팔리게.”
유일하게 단 한 사람.
저 흘러넘치는 마기를 보고도 담담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는 천무린이었다.
“야!”
그리고 천무린의 시선이 닿은 곳에 홍 역시 시선을 마주한다.
“갈천중이냐, 홍이냐?”
“……누구일 거 같아요?”
목소리를 들으니 여인이지만, 말투는 갈천중이다.
“내가 너랑 사이좋게 문제 풀 때냐?”
“즐거워서 그렇죠. 호호호호.”
“……열 받네.”
“갈천중이자 홍이랍니다. 제가 마련해 놓은 안배가 어때요? 깜짝 선물.”
“뭘 어때야. 죽이고 싶지. 뭔 말을 복잡하게 해. 여전히 남자 새끼도, 여자 새끼도 아닌 괴물이란 거잖아.”
그 말에 여유롭던 홍의 표정이 싸악 하고 돌변한다.
“죽고 싶어요?”
“응. 제발 죽여 줘.”
“그 부탁 제가 들어줄게요. 호호호.”
파앙!
홍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동시에 천무린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간다.
콰앙!
“제법이네요. 나름 기습한 거였는데, 잘 막아 내는 거 보니까. 호호호.”
본능적으로 내력을 끌어올려 만든 천무린의 호신강기가 단박에 깨져 버렸지만, 그래도 그 덕에 피해를 최소화했다.
내부가 진탕이 된 것을 느낀 천무린이 입가를 비틀었다.
단 한 수였지만, 천무린은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강하다.
갈천중과 홍.
천마신공과 규화보전, 그리고 구음백골조까지 익힌 저 괴이한 존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틀어 아마 최고이자 최악의 상대이자 적일 터.
이를 상대하기 위해선 천무린 역시 전부를 걸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아까 저 잡는다고 있는 내력이란 내력은 다 쓴 거 아니에요?”
“싸움을 내력으로만 한다고 생각하냐?”
파앙!
천무린의 전신 근육이 약동한다. 그리고 홍이 그랬던 것처럼 자리에서 퍽 하고 꺼지더니 홍의 바로 눈앞에 나타나 천마신권으로 후려친다.
콰앙!
그 모습에 홍 역시 주먹을 맞부딪쳤다.
주르르르륵.
천무린을 지탱하고 있는 뒷발이 점점 밀려난다.
내력과 체력, 속도와 근력.
어느 하나도 천무린이 홍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단 하나.
오로지 단 하나가 더 뛰어났다.
투둑.
천무린의 두 눈의 실핏줄이 툭툭 터져 나간다.
붉어진 두 눈동자와 그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투기(鬪氣).
동시에 홍의 온몸을 연달아 두들기는 그의 두 주먹에는 모든 내력을 끌어다 쓰고 있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잇몸이 없으면 혓바닥으로.
“싸움은 기세거든. 기세.”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그 모습에 홍 역시 천마신권으로 천무린의 공격에 맞섰다.
콰앙! 콰앙!
두 점의 빛살이 되어 버린 두 사람의 신형은 순간적으로 주변의 자연경관을 그대로 휩쓸어 버린다.
일격 하나하나에 가공할 만한 힘이 담긴 채 서로에게 향한다. 충돌할 때마다 그 여파로 주위가 마구 터져 나간다.
“……역시 무신인가요? 그 몸으로 어떻게 이런 신위를.”
홍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는 천무린이 보여 주는 무시무시한 신위에 놀라 평정심을 잃었다.
내력도.
체력도.
모든 것이 자신보다 부족한데, 어떻게 이렇게 밀리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내력과 힘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멍청한 새끼.”
천무린은 천마라는 자리, 그리고 무신이라는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 왔다.
그건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전력을 다해 싸워 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곧 무위만으로 상대를 꺾는 것은 아니란 소리였다.
무수히 쌓아 온 경험과 본능적인 감각이 어떤 무공과 기술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콰아아아앙!
순간적으로 땅거죽이 뒤집히면서 동시에 반탄력을 터뜨리고 빛살로 화하여 홍의 전신을 두들긴다.
뻗어 나간 수많은 일격이 눈 깜짝할 사이에 홍의 온몸을 두들겼고, 홍은 자신의 시야에서 놓친 천무린의 천마신권에 당하고 말았다.
뿌득.
이를 갈아붙인 홍의 전신에서 일어난 마기가 반탄강기를 만들어 내어 천무린의 공격을 막아 냄과 동시에 충격을 흡수하여 그대로 천무린에게 반격했다.
쾅! 쾅!
천무린의 몸 전체가 말도 안 되는 반탄력을 맞이하고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 모습을 본 홍의 두 눈동자가 흔들린다.
규화보전이 만들어 낸 마기와 힘은 의지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마기의 폭풍 앞으로 계속해서 다가올 수 있단 말인가.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이 마기의 폭풍 속에 저리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당백진과 남궁도도 숨을 멈췄다.
천무린의 호리호리한 몸이 마기의 폭풍을 뚫고 홍에게 나아가고 있었다.
표정의 변화 하나 없는 천무린의 그런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이었다.
“사람의 몸으로 어찌 저렇게.”
“……무신(武神).”
아연실색한 남궁도의 반응에 당백진이 읊조린다.
“저게 무신인가.”
천무린의 흔들림 없는 모습을 두 사람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후우우우…….”
홍 역시 일격 하나하나에 마기를 끌어올린다.
“어째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다닥.
뒷걸음질치는 홍이었다. 같은 천마신권을 펼쳐 내면서도 자꾸만 물러나게 된다. 천무린의 전신에서 피어나는 저 투기를 보면 감정이 결여되어 버린 홍의 전신에도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어째서! 네깟 놈 따위가 나를……!”
전혼대법.
규화보전.
천마신공.
구음백골조.
갈천중이자 홍, 홍이자 갈천중인 그녀는 모든 것을 몸에 때려 박았다.
절대 질 수가 없는 싸움이다.
그런데 어째서.
눈앞에 있는 저자에게 이렇듯 밀린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잡종 새끼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야.”
얼마나 두드렸는지 천무린의 두 주먹은 이미 피떡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만년거암을 품은 태산의 굳건함을 몸에 담고.
광활한 바다의 깊이가 두 주먹에 드러난다.
인생 2회 차 무신인 그는 평생을 쌓아 온 무학의 정수를 지금에서야 거대한 적을 눈앞에 두고 드러내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쾅! 쾅!
점차 천무린의 두 주먹에 주입되어 있던 내력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무린은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콰앙! 콰앙!
맹렬하게 쏟아 내는 연격에 일그러진 표정의 홍이 손가락을 꺾더니 그대로 내리긋는다.
다섯 줄기의 음험한 기운이,
구음백골조의 마기가 순식간에 천무린의 천마신권과 맞부딪친다.
콰가가가가강!
“……며, 멸마!”
“……!”
남궁도와 당백진이 눈에 띄게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 공격을 맞이하는 순간, 천무린은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피 칠갑을 한 천무린이.
확연하게 보이던 천무린의 두 주먹의 기운이 사그라든 것을 본 두 고수는 자신들이라도 나서야 되겠다고 판단했지만.
저벅.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간 천무린이 다섯 줄기의 내력을 향해 주먹을 뻗는다.
“마, 말도 안……!”
“……!”
저벅.
투콰아아아아아앙!
비스듬히 세운 주먹으로 기운을 흘려 낼 것은 흘려 내고 벌어진 기운들의 사이를 헤집고 더 나아간다.
빠르고 강하다.
단숨에 천무린을 두 쪽으로 쪼갤 만한 기운임에도.
자신의 앞에 도달한 다섯 갈래의 기운 중 몇 개는 두 주먹을 허공에 수십 번씩 주먹질을 하며 모조리 부숴 버린다.
쩌억.
뼈가 훤히 보일 만큼 주먹의 살갗이 크게 벌어졌지만.
저벅, 저벅.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핏발이 선 두 눈, 섬뜩하리만치 스산하고도 날카로운 눈빛을 한 천무린이 홍에게 계속해서 다가간다.
움찔.
홍은 저도 모르게 움찔한다.
‘……내, 내가 겁을 먹었다고.’
구음백골조의 기운을 저렇게 무식하게 막아 내는 인간이라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마, 말도 안 돼.”
홍은 허공에서 난잡하게 구음백골조를 내리긋는다.
긋고, 또 긋는다.
다섯 갈래의 기운이 대번에 허공을 찢어발기며 천무린을 향해 나아갔고, 당장이라도 그를 육편 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였다.
그런 기운이 홍의 손가락에서 미친 듯이 쏟아진다.
한껏 차올라 있던 마기를 무수히 끌어내 손가락 끝에 담아 내리긋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마구 내리긋는 그녀는 공포가 어린 절규를 내질렀다. 이번에 반드시 천무린을 죽여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앙!
수십 차례를 그어 내고 또 그어 낸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처럼 홍의 단전에 있는 내력이란 내력은 모조리 끌어다 쓰고 나서야 홍은 단내를 풀풀 풍기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이윽고 고갤 들어올려 천무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움직임이 없다.
인기척조차 없다.
“……그, 그럼 그렇지.”
홍이 떨리는 목소리로 기척 하나 없는 곳을 바라보며 일그러졌던 표정을 점차 풀어낸다.
그렇다.
이 공격을 받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말 그대로 천무린이 서 있는 자리를 비롯해 광활한 주변 대지가 온전치 못한 것만 봐도 자신이 익힌 구음백골조는 최강이다.
그런데.
“다 했냐.”
콰앙!
백색과 검은색.
두 무채색으로 혼합된 기운이 홍의 뒤에서 느껴진다.
콰지지직.
고개를 돌리는 순간, 홍의 가슴에서 무언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었다.
뒤에서 뻗어 온 천무린의 권격이 홍의 심장을 단숨에 터뜨려 버렸다.
“……쿨럭!”
무너지지 않을 그녀의 육체가 비틀거린다.
“……어, 어떻게?”
홍의 입가에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온다.
무표정한 천무린이 걸음을 내딛는 동시에 그의 주먹이 백보신권과 천마신권이 어우러진 두 권공을 홍의 육체가 파편이 되도록 거세게 휘두른다.
쾅! 쾅! 콰앙! 콰앙!
그의 주먹에 자비란 없었다.
꾸역꾸역 회복하려는 기운에 다시는 틈을 주지 않는다. 조금의 방심조차 하지 않고 영원히 그 기운이 살아날 수 없게끔.
파아아아앗.
드디어 천무린의 주먹이 멈추자.
허공에 꿀렁이던 기운이 뭉치고 뭉친다. 조약돌만 한 크기로 변모한 그 기운을 바라본 천무린이 발을 들어 그대로 찍어 눌렀다.
쿠웅!
“다음 생에는 평생 속죄하고 살도록.”
아마 평생 못 갚을 죗값이겠지만, 천무린이 아는 저승사자라면 합당한 죗값을 안겨 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