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제246화
파천대구검(破天大九劍) 파천팔식(破天八式).
무의환향(無義還鄉).
수많은 선이 그어진다.
검 끝에서 그려지기 시작한 수많은 선들이 허공에 새겨지길 반복하더니, 그 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스스슷.
평범한 이들의 눈에는 그저 검무를 추는 것처럼 의미 없는 몸동작의 연속으로 보일 테지만.
오소소.
패왕은 솜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희열에 찬 눈빛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경이롭다.”
저 초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등 뒤가 축축해질 만큼 식은땀이 흐르고 시간의 축이 뒤틀리기라도 한 듯 패왕의 시야가 명멸한다.
패왕의 패왕진천권 역시 중원 무림에서 아주 뛰어난 권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파천대구검은 정파 무림 최고의 무인이 갖고 있을 만하다고 평가받을 만큼 뛰어난 절기다.
오죽하면 독고황의 경지가 더욱 높아진다면, 천마신검과 비견될 수 있을 거라고 말들 하겠는가.
패왕의 시야 앞에 아로새겨지는 선들의 향연.
연신 명멸하는 시야 속에서 패왕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멍해졌던 머릿속을 가다듬는다.
마냥 넋을 놓고 있다가는.
과거처럼 또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럴 순 없지.’
여태까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전진해 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다.
눈앞에 있는 이 초식을 깨뜨리고 나아가기 위함이다.
우우우웅!
소름 끼치는 선들이 패왕의 어깨에 닿는다.
피잇!
핏물이 튄다.
피잇!
그어진 선 하나에 허벅지가 베어 갈라졌고.
피잇!
팔뚝이 쩌억 하고 갈라진다.
피잇! 피잇! 피잇!
무심한 선들은 점차 빠르게 패왕의 전신을 난자하고 온몸을 도려낼 것처럼 무섭게 몰아친다. 검기와 검강 따위와는 결이 달랐다.
모든 선은 검 끝에서 시작되어 오로지 패왕을 베기 위해서만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패왕의 전신에서 핏물이 솟구친다. 순식간에 패왕의 온몸이 핏물로 흠뻑 적셔진다.
‘……진짜는 지금부터.’
서서히 조여 오는 선들의 향연이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피잇!
패왕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감을 믿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패왕의 목이 있던 자리에 붉은 실선이 허공에 새겨진다. 아마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패왕의 목은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으리라.
피잇!
동시에 패왕은 자신의 어깨를 틀었고, 어깨에 실선이 새겨졌다. 자칫 어깨가 떨어질 뻔했다.
피잇! 피피피핏!
더욱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는 무의환향의 선들로 패왕은 이를 악다물고 버티기 시작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저벅.
피잇!
패왕의 뺨에 죽 하고 실선이 그어졌다.
주르륵.
걸음을 뗄 때마다 상처가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치명상만은 피하면서 나아간다. 오로지 본능과 감을 믿으면서 위협적인 선에는 패왕진천권의 절기로 상대한다.
저벅.
피잇!
저벅.
피잇! 핏!
결코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더욱 속도를 높이는 선들의 공세에 패왕의 전진이 멈춘다.
처억.
걸음을 멈추고 고갤 든 순간,
서걱.
앞머리가 후두두 떨어지며 패왕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후욱, 후욱.”
혈인(血人)이나 다름없이 된 패왕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두 눈을 감는다.
육감의 영역에서부터 비롯된 무의환향의 초식은 패왕의 죽음이 확실해질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콰지직.
쾅!
본능적으로 움직인 패왕의 옆구리가 한 움큼 베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상은 아니었던 것이 패왕진천권의 왼손이 선에 맞닿아 있었다.
선의 움직임이 멈춘 것이다.
그렇게 패왕은 두 눈을 감은 채 자신이 왜 패왕일 수 있는지.
패왕이라는 이름값을 보여 주는 주먹질을 천천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쾅! 쾅! 쾅!
천붕지음(天崩之音)의 굉음과 폭음이 무수히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왕의 주먹은 거침이 없었다. 확신에 찬 두 주먹이 무수한 선의 향연에 맞서 움직인다.
쥐어진 주먹에 수많은 선이 맞닿으며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패왕의 입가엔 미소만이 감돌고 있었다.
희열에 차 있었다.
통하지 않는다. 분명 십여 년 전에는 감히 이 선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너졌었다.
죽음에 가까워진 순간을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선들의 움직임이 섬세하게 느껴진다. 패왕의 두 주먹이 닿을 때마다 아스라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드디어!”
지난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그것을 느꼈다.
이 무수한 선들의 향연을 부숴 버리고 나아가 독고황에게 패왕진천권을 먹여 주리라.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독고황의 두 눈은 더욱 심유하게 깊어진다. 손발이 덜덜 떨려 올 만큼 패왕진천권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무의환향을 펼친 독고황의 상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코와 입에서 피가 줄줄 나왔고, 무림맹주이자 파천검황이라는 명예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처절한 검객의 모습밖에 남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창 신준건과 낭왕 위사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태양천자 남선과 남해태양궁의 무인들도 아랫입술을 꽉 다물었다.
덜덜덜.
무의환향의 초식이 패왕진천권과 만나더니 허공에서 선의 움직임이 둔화되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흐려지더니…… 패왕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난다.
독고황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코와 입에서 삽시간에 터져 나온 새빨간 핏물을 보노라면 그의 상태가 얼마나 위중한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무의환향을 유지하려는 독고황과.
무슨 수를 씨서든 쳐부수려고 주먹을 휘두르는 패왕.
치열함을 넘어서서 처절한 두 사람의 격전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초식, 그것을 꺼내라. 그렇지 않으면 넌 죽는다.”
아직 초식이 하나 남아 있었다. 패왕은 그 초식을 알지 못한다. 이미 진즉에 무의환향에 한 번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만큼 강인해졌다.
패왕 역시 몸 상태가 온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독고황보다는 한결 나은 상태였다.
몇 차례 적중당한 패왕진천권에다 무리하게 펼쳐 낸 절세의 초식, 그리고 그 초식을 두들기는 패왕의 반탄력으로 인한 후유증까지.
독고황은 그 모든 것을 감당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푸화아악!
“쿨럭! ……쿨럭!”
참아 왔던 핏물을 크게 토해 낸 독고황은 비척거리면서 무의환향에서 벗어나기 직전의 패왕을 바라본다. 패왕 역시 그를 마주 바라본다.
처억.
더는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꽈드드득.
패왕은 독고황의 눈빛을 보자마자 전신의 잠력을 모두 끌어내었다. 검을 쥔 독고황의 눈빛을 보자마자 깨달은 것이다. 최후의 초식을 펼칠 것이라는 사실을.
파천대구검(破天大九劍) 파천구식(破天九式).
무검(無劍).
파천검황 독고황의 최후의 초식이 드디어 세상에 드러났다.
피잇!
패왕과 독고황의 눈앞에.
세상이 분리된다.
* * *
시원스럽고 포악한, 그러면서도 음험하거나 불길하지 않은 기운이 한껏 터져 나와서 갈천중의 어깻죽지를 그대로 날려 버렸다.
콰앙!
하지만.
고오오오오오.
철퍽, 철퍽.
기분 나쁜 검은 기운이 꿀렁거리며 날아가 버린 갈천중의 육체를 다시 복구한다.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오히려 전투를 치르기 전보다 더 말끔한 상태를 보여 주었다.
“2차전이라고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네요?”
“…….”
“하하하하, 말수도 줄어드셨고요. 여유롭던 모습은 다 어디 간 거죠.”
갈천중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는 사라질 기색이 없어 보인다. 그토록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천무린의 상태를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마른 입술, 거친 피부, 바스러지는 옷, 전과 다른 미소.
이것들 하나하나가 천무린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갈천중의 그런 눈빛과 미소에 천무린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내젓는다.
“어처구니가 없네.”
“제가 너무 강해서요?”
“지X하지 말고.”
“이젠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당신이 아무리 발악해도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내겐 만 명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요. 불사(不死)의 몸이 된 거라고요.”
“……말이 많네.”
천무린은 갈천중을 바라보다가 말고 고갤 돌린다.
“왜 어처구니가 없다는 건지 모르나 본데.”
그의 시선에 걸린 곳에 다가오는 열다섯 명의 인영들.
“저것들을 보고 한 말이었어.”
가장 앞선 이는 송무였다. 그리고 그 뒤에 선 태강.
황태, 신혁건, 백리무영, 백리후, 명진, 진무양, 낭소소, 남사익, 설화린, 당지혜, 소화진, 이백, 진량.
사천무관의 생도들이었다.
앳된 얼굴의 생도들이 이 자리에…….
그 모습에 갈천중의 표정에 균열이 생긴다.
쩌적.
“뭐죠, 저 버러지들은?”
아까 분명 경고한 것 같은데, 어째서 애송이들이 여기에 와서 자신의 기쁨을 망친단 말인가.
천무린을 갖고 놀다가, 그것도 질릴 때까지 갖고 놀다가.
이제 지쳐서 벌레를 죽이듯 죽여야 할 때가 점차 다가오고 있는데, 자신의 흥을 망치는 저 버러지들은 대체…….
짜증이 확 솟구친 갈천중의 표정을 보고 천무린이 입가를 말아 올렸다.
“버러지라니. 널 쓰러뜨려 줄 위인들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도가 지나친 장난은 사절입니다.”
“생각을 해 보자고. 우리 쪽수는 맞춰야 하잖아.”
천무린의 능청스러운 말에도 갈천중의 짜증 어린 눈빛은 여전했다.
“네가 만 명이나 되는 영혼을 처먹고 만 명을 대변하고 있는 거라면 스무 명도 안 되는 인원과 같이 싸우는 게 뭐가 어때서?”
“헛소리를……!”
휙.
이으려는 갈천중의 말을 끊고 몸을 돌린 천무린이 생도들을 훑는다.
“죽을지도 몰라.”
그 말에 송무가 애체(안경)를 들어 올리며 고갤 젓는다.
“무린아, 그걸 걱정했으면 여기까지도 안 왔어. 다들 마찬가지이고.”
“하여간 고집불통 새끼들.”
“너만 할까.”
천무린은 갈천중과 대치하는 내내 생도들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막지 않았다.
도리어.
“각자 이백 명씩은 처리해 줘야 수지타산이 맞는 거 알지?”
온 녀석들을 반긴다.
“가뿐하네, 뭐.”
태강이 어깨를 으쓱이며,
“안 그래도 저 새끼 웃는 거 보면 빡쳤는데, 제대로 칼부림 좀 해 보련다.”
황태가 말을 덧붙이고,
“악 교관님이 말씀하시더라고.”
“제대로 복수 좀 해 달라고.”
백리무영과 백리후가 시원스러운 표정을 보인다.
생도들의 말에 천무린은 다른 생도들을 쭉 훑는다. 역시나 같은 생각이라는 듯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인다.
“그러니까 후배는.”
소화진이 한 걸음 나섰다.
“선배한테 기댈 줄도 알아야 한다니까.”
이백이 말을 받았고,
“흥, 발목이나 잡지 마라.”
진량이 코웃음을 쳤지만, 담백한 미소를 짓는다.
처억, 처억.
모두가 천무린을 감싸며 각자 무기를 든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에요.”
“응, 맞아. 그러니까 더는 혼자 애쓰지 않아도 돼.”
설화린과 당지혜의 말을 끝으로, 생도들의 고개가 단 한 곳에 고정된다.
갈천중이 바라보고 있는 그 방향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