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제245화
혜공의 죽음은 모두에게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평생을 무인으로 살았고 절대적인 경지에 오름으로써 굳이 혜공의 죽음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사라진 빈자리에 대한 막연한 책임감.
태산북두처럼 든든하기 그지없었던 혜공의 죽음은 순식간에 중원 무림 전체에 알려졌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이 정마대전의 심각성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핏물이 바다처럼 가득하다.
북해의 소복하게 쌓여 있던 흰 눈밭은 시체의 산과 뜨끈하게 흘린 핏물로 붉게 녹았고.
남해의 뜨겁기 그지없는 대지는 쌓여 있는 시체들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땅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장강과 사천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정마대전의 처음과 끝을 보여 주고 있는 이곳에서.
검마는 몸이 두 쪽으로 갈라져 죽음을 맞이했고, 제왕의 검을 무리하게 사용한 남궁도 역시 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허억, 허억.”
“호흡하고 가라앉혀.”
“……멸마.”
남궁도의 시선이 천무린에게로 가 닿는다.
휘청.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저도 모르게 휘청거리며 땅에 검을 꽂고 억지로 몸을 세우는 남궁도였다.
천무린의 등이 아주 넓어 보인다.
고작 약관에 달한 청년의 등이 이토록 넓어 보일 수가 있는가.
그리고 천무린의 시선을 따라 닿은 곳엔 허공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며 오시하고 있는 갈천중의 모습이 보인다.
마황 갈천중.
아니……. 천마 갈천중.
그를 상대로 천무린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고, 호각지세 그 이상의 위용을 보여 주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다.
내력과 체력의 고갈이 극심할 텐데도 천무린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가 흘러넘친다. 절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투에 능하고, 절대 고수를 상대하면서도 광활한 시야까지 갖췄다.
그야말로 진정한 제왕의 모습이 아닌가.
삼대 무관 비무대회.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재능이 있는, 후기지수에 불과한 녀석이었다.
마공서 회수를 비롯한 여러 사건들.
그때마다 보여 주는 경이로운 무위에 무림에서 그를 멸마신군이라고 명명했을 때도 남궁도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거산도 전위를 꺾자,
약관도 안 된 청년이 보여 줄 수 있는 무위가 아니라며 남궁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더욱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무형노괴를 꺾고 중원 무림 전체에 크나큰 충격을 안겨 준 것이다.
남궁도는 허황된 소문이라며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거산도 전위만 해도 충분히 놀라운 모습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천마를 상대로 그를 압도하면서 자신의 목숨까지 구해 주었다.
‘……넓구나.’
“나도 하나만 부탁하자.”
천무린이 고갤 돌린다. 남궁도의 시선이 천무린과 마주한다.
“사천무관으로 돌아가서 몸을 회복해. 그리고 당백진과 함께 혜공을 죽인 놈, 아니 년이라고 해야 하나. 그년을 막고 있어 줘.”
당백진과 남궁도, 두 사람이라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는 것 이상은 불가능할 것이다.
혜공을 단숨에 죽였다는 것만 봐도 이미 규화보전을 완성한 것일 테니까.
불가에 몸을 담은 소림의 무공으로도 막아 내지 못한 것을 당백진과 남궁도, 이 두 사람이 이길 순 없을 것이다.
“절대 죽지 마라. 내가 갈 때까지.”
그렇게 몸을 돌린 천무린이 한 곳을 바라보며 몸을 움직인다. 갈천중이 있는 곳이다.
“……제법 여유가 넘치시네요. 그 몸으로.”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닐 텐데.”
어깨를 으쓱인 갈천중이 벅차하는 남궁도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규화보전을 익힌 홍을 막을 힘이 있다고 보세요?”
“그럴 리가.”
“당신은 너무 물러요. 불가능한 일에 희망을 거는 것 자체가 무르다는 뜻이죠.”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천무린이 고갤 돌려 바라본 곳에서 남궁도는 산동무관 생도들의 부축을 받고 사천무관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옮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무린은 어깨를 으쓱인다.
“후대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책임감에는 어떤 셈이나 계산은 전혀 중요하지 않거든.”
처억.
“그냥 하는 거야, 그냥.”
천무린의 검 끝이 갈천중에게로 향한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이제 2차전 시작해야지.”
“훗.”
* * *
구유비마와 빙천검 설종량의 결전은 금방 끝이 났다.
검왕이 빙궁의 성벽 아래에서 마인들을 상대로 종횡무진 날뛰기 시작한 모습을 보고 구유비마가 그만 두 손을 든 것이다.
“죽이지만 말아 줘.”
처음으로 항복 선언이 나왔다.
“후우, 후우. 진심인가?”
설종량의 눈에 들어온 구유비마는 싸울 의지가 더는 없다는 듯 두 손을 들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 아래의 상황을 보라고. 나 혼자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잖아? 지금 저 인간을 보면 아주 눈이 돌아가 있는데.”
설종량이 구유비마의 말대로 시선을 옮기자,
서걱! 서걱!
검왕의 검 끝에 뜨거운 핏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저토록 자비 없는 도사의 검은 또 처음이라 무섭거든.”
“……그래서 항복을 하겠다고?”
“네 녀석들도 굳이 피를 더 흘릴 필요가 없지 않나?”
그 말에 설종량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물끄러미 주변을 살핀다.
검왕이 사신을 죽임으로써 비등비등했던 상황이 한쪽으로 승기가 기울긴 했지만, 검왕은 이미 자신을 희생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막아서 검왕의 선천지기 소모를 막아야만 했다.
여기서 전투를 마무리 지어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는 것이 설종량에게도 나은 길이었다. 희생이 더 커진다면 북해빙궁의 회복도 더욱 어려워질 테니까.
“……의미 없는 싸움은 그만하자고. 그리고 저 녀석들도 수습하려면 내가 필요할 거고.”
마인들은 궁지에 몰렸으나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천마재림(天魔再臨)! 만마앙복(萬魔仰復)!”
“천마를 위하여!”
“마도천세! 천천세!”
광기를 드러내는 천마신교 군단을 바라본 설종량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의미 없는 싸움을 멈추려면 구유비마가 나서서 정리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야 저들도 납득하고 물러설 테니까.
“……그리하지. 검왕은 내가 말리겠다.”
“현명한 생각이야.”
구유비마는 그 말을 끝으로 천마신군의 군단을 뒤로 물렸고, 설종량 역시 나서서 검왕의 앞에 섰다.
“뭘 하는 것이오?”
검왕의 스산한 눈빛이 설종량에게 가 닿았다.
“그만하시지요.”
“무엇을? 저리 두면 언제고 또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모르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마교의 버러지들을 모조리 베어 가르지 않으면 안 되오. 지금이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것을 빙궁주도 잘 알 텐데.”
“그만큼 우리 역시 피를 흘려야 하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이라오.”
“……그럼 혜공의 넋은?”
“…….”
“친우의 넋은 대체 누가 기린단 말이오? 저들의 피로, 저들을 모조리 베어 가르지 않고는 절대 채워지지 않을 이 공허감은 어쩔 것이오?”
“혜공 대사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는 것 같으시오?”
“…….”
설종량의 말에 검왕이 우뚝 멈춘다.
“진인, 그대가 정말로 혜공 대사의 친우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 무리를 해서라도 저들과 격전을 치르고 또 치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저들뿐 아니라 우리 역시 그 대가로 피를 흘려야 함을.”
“…….”
저벅, 저벅.
점점 물러나는 마교의 군세를 바라본 설종량은 검왕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양손을 올린다.
“진인.”
“…….”
“더 이상의 희생은 의미가 없소. 그리고…… 검왕, 당신의 몸을 지금 당장 돌보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 수 있소.”
추욱.
“……궁주.”
검을 천천히 아래로 늘어뜨리는 검왕 청강이었다.
“진인.”
그리고 쐐기를 박기 위해 설종량이 고갤 돌려 아군을 바라본다.
물러나는 마도의 군세를 바라보며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허탈감 등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신이 올라선 자리는 저토록 많은 이들이 당신의 행동에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게 합니다.”
“……알겠소.”
그 말에 설종량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맙소. 빙궁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와 준 진인과 수많은 정파 무림 동도들에게 깊이 감사하오.”
그러면서 뒤로 물러난 설종량은 검왕에게 포권을 취한 후 몸을 돌려 정파 무림의 수많은 이들에게도 포권을 취했다.
“다시 한번 감사하오. 북해를 위해 피를 흘려 준 정파 무림 동도들에게 깊이 감사드리외다.”
그렇게 북해에서의 정마대전은 끝이 났다.
* * *
콰가가가강! 콰앙! 콰앙!
파천대구검의 마지막 두 초식만을 남기고 부딪친 독고황의 검격에 맞서 패왕은 일절 물러나지 않고 오로지 전진하여 권격으로 막아 낸다.
쾅! 쾅!
“……파천대구검을 쓰지 않는가. 쓰지 않고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잘 아는군.”
“두 초식으로 파천검황의 자리에 올라선 것 아닌가.”
“후후.”
파천대구검의 후반식, 두 절기는 패왕마저도 긴장해야 할 정도로 강력하다. 그래서 독고황은 때를 노리고 있었다.
패왕이 파천대구검의 두 절기를 막아 내면 패왕의 승리로 끝날 것이고, 막아 내지 못하면 그의 승리가 될 테니.
“……더 지치기 전에 온전한 파천대구검을 보고 싶군.”
“배려하는 건가?”
“승기를 잡은 이의 배려 정도로 해 두지.”
“후후후.”
독고황이 미소를 짓더니 고갤 들어 패왕을 바라본다.
강하다.
지난 십여 년간 병마와 싸워 온 자신과 달리 더욱 강해졌다.
이제는 자신이 약간의 우위조차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고황은.
“지난 십여 년간 병마와 싸워 왔지만, 그동안 세상에 대해 깨달은 점이 많다네.”
무림맹주라는 자리에 올라서 병마를 이겨 내기까지 그야말로 지난한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비록 검을 휘두를 순 없었지만 지독한 병마의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인내해 왔고, 수많은 이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이를 악물고 버텨 온 그였다.
이 정도의 고통쯤은…….
“녹록지 않은 세상일세. 비록 검으로 얻은 깨달음은 아니지만,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네.”
“그럼 보여 주겠나? 자네가 얻은 깨달음의 결정을.”
“그러지.”
후우우우우웅.
독고황의 검 끝에 벼려지기 시작하는 내력.
파천대구검 최후의 초식 중 하나인 파천팔식, 무의환향(無義還鄕).
그 검식이 천천히 검 끝에 담기기 시작한다. 독고황이 평생 동안 얻은 깨달음의 파편들이 차츰차츰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패왕은 두 주먹을 불끈 쥔다.
그래, 저 초식이다.
자신을 무참히 패배시킨 초식.
이번에는 반드시 이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