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제244화
유성(流星).
별 하나가 서서히 떨어지는 모습을 본 두 검객의 손이 멈칫거린다.
으르렁거리던 검객과 차분하기 그지없는 검객. 두 검객의 시선이 허공에서 별의 꼬리가 서서히 떨어져 사라지기까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검을 내리고 침묵을 지킨다.
“……제법 예의를 아는 놈이로군.”
창천검존 남궁도의 말에 검마가 어깨를 으쓱인다.
“배울 만큼 배웠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
검마의 말에 남궁도가 고개를 저었다.
“감상적으로 빠질 필욘 없다. 어차피 네놈 역시 그리로 보내 줄 테니까.”
남궁도는 사라진 별의 흔적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진 않았다. 권왕 혜공 대사와 깊은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서로 가는 길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그의 복수니 뭐니 말하는 것도 이상했으니까.
그러나.
“나에겐 예의를 지켜 주는 방식이 따로 있지.”
후와아아아아앙!
거검(巨劍)의 형상이 검마의 머리 위에서 쏟아지더니, 푸른빛의 입자들이 모여 형성된 거검이 단숨에 검마를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잘 가시오. 혜공.’
권왕 혜공 대사 그리고 창천검존 남궁도.
두 사람은 같은 시대에 태어났지만, 서로 가는 방향이 너무도 달랐다.
혜공은 구파일방의 수좌인 소림의 방장이었고, 남궁도는 오대세가의 수좌를 차지하고 있는 남궁세가의 가주였다.
제각기 정파 무림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힘을 합치기보다는 서로에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에 바빴다.
각자가 맡고 있는 세력의 중심에 서 있다 보니 호감보다는 반감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이 마지막으로 제대로 함께해 본 것은.
‘그놈을 상대할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나.’
천마 천무린.
무려 십여 년 전 천마 천무린이라는, 괴물보다 더한 괴물을 상대로 정파 무림 네 명의 절대 고수가 힘을 합친 적이 있었다.
괴물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부족하지 않은 천무린은 혜공과 청강, 그리고 남궁도와 당백진을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벌였었다.
가문의 수장이자 오대세가의 수좌로서 소림의 혜공을 바라보는 것이 마치 입안에 있는 모래알처럼 껄끄럽기 그지없었지만, 천마 천무린과의 격전에서 혜공이 보여 준 든든한 모습을 여태껏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소림이 갖고 있는 무공의 특성 덕도 다분히 있었겠지만, 그때만큼은 남궁도마저 신분을 잊고 칼춤을 췄었으니까.
‘그 시절도 다 가고, 당신이 먼저 갔구려. 혜공.’
원래 우두머리이자 수좌 그리고 지도자는 늘 외로운 법이다.
보지 않아도 볼 수 있고,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런 묘한 감정을 남궁도는 혜공으로부터 느껴 왔으니까.
‘우리도 슬슬 후대에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된 것이겠지.’
벌써 나이가 여든이 넘은 남궁도다.
남궁세가에 더 남아 있다가는 후대가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듯해 산동무관주로 자리를 옮겼으나 창천 남궁세가에는 여전히 남궁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남궁도는 혜공이 떠나서야 절실히 느낀다.
“가는 동안에도 내게 깨달음을 주고 떠나는 것이오. 하하하하!”
터져 나오는 우렁찬 웃음과 함께 거검이 검마의 코앞에 당도한다.
그 모습에 검마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검에서 피어난 날카로운 예기를 수십 자루의 검영으로 펼쳐 낸다.
콰앙! 콰앙! 콰아아아앙!
발작적인 검영이 허공을 수놓더니 동시다발적으로 남궁도의 거검을 향해 날아간다.
“흠!”
짧은 기합과 함께 남궁도의 거검이 횡으로 그어지자 마주하던 검영의 다발을 하나하나 쳐 내어 닿기도 전에 산산이 부서진다.
“소용없다!”
남궁도의 기세는 검마에게 닿을 때까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검마의 검 끝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마기는.
“초마검강(初魔劍强)!”
검마대주 초우량이 펼치는 초마검기보다 한 단계 뛰어넘은 초마검강이었다.
검강이 단번에 횡으로 베어지며 그 모습 그대로 강기가 응축되어 폭죽처럼 터져 나간다.
거검에 맞서서.
콰가가가가강!
묵빛의 도강이 거검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부딪치자, 허공에 균열이 생겨난다.
쩌저적. 쩌적.
남궁도의 입가가 비틀리더니 격전에서 멀찍이 떨어져 이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남궁세가의 일원들과 산동무관의 생도들에게 소리친다.
“창천 남궁세가의 무사들이여! 그리고 산동무관의 미래여! 잘 봐 두어라. 창천 남궁세가의 제왕검형이 왜 제왕검형인지! 그리고 산동무관의 무관주로서 내 너희들에게 둘도 없는 값진 경험을 하게 해 주겠노라!”
혜공이 죽음으로써 깨달은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림과 남궁.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런 허울 따위에 휩싸여 서로가 서로에게 검을 겨누지 않는 정파 무림.
이제야 깨닫는다.
개인의 알량한 자존심과 자부심만으로 살아가던 강호가 이제는 서로 어울려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지키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그것이 창천검존 남궁도가 택한 검의 길이었다.
‘후대를 위하여.’
콰가가가강!
산동무관의 생도들과 창천 남궁세가를 비롯한 오대세가의 일원들은 푸른빛의 입자로 만들어 낸 거검의 형상을 들고 있는 남궁도의 굳건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수없이 쏟아 내는 검마의 일격 하나하나를 거검으로 모조리 쳐 내면서 전진한다.
제왕검형(帝王劍形).
모두의 눈에는 남궁도가 걷는 걸음 위에 제왕의 길이 아로새겨지는 것이 보였다.
제왕의 길은 모든 이들을 굽어살필 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세차게 부서져 나가는 칼날의 폭풍 속에서 꿋꿋이 전진하여 제왕의 길을 만들어 낸다. 그것을 본 이들은 절로 마음이 따른다.
등 뒤에 서 있는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것이 제왕의 제1 원칙.
콰가가가가강!
거검의 형상이 사선으로 베어 나가며 갑작스레 방향이 뒤틀리자 검마의 검세가 수세로 바뀌면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초마검강이 응축되어 비틀어 흔들린다.
주르르르륵.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거력에 검마는 디디고 있는 곳에서 한없이 밀려난다.
이처럼 역경과 고난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것이 제왕의 제2 원칙.
저벅, 저벅.
“과, 관주니임!”
“태, 태상 가주님!”
“더는, 더는 가지 마십시오!”
제왕의 길을 택하고 혼신의 힘을 불사를수록 서서히 꺼져 가는 촛불처럼 생명력 역시 차츰차츰 깎여 나간다. 생도들과 정파 무림인들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남궁도의 무위가 하늘에서 내려 준 제왕의 모습처럼 빛나고 있지만, 그만큼 온몸을 불태우고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견뎌 내며 후인들을 위해 웃으면서 희생하는 것이 제왕의 제3 원칙.
“걱정하지 마라. 내가 바로 창천검존 남궁도이니라.”
정파 무림 천하제일검이 되기 위해 평생을 바친 남궁도는 강인한 눈빛, 흔들림 없는 자세로 굳건히 나아간다.
“……창천검존.”
“이제야 제대로 나를 부르는군.”
처음으로 검마의 입에서 남궁도의 별호가 흘러나온다. 그가 보여 주고 있는 제왕의 검이 누구보다 뛰어난 검이자 검의 종주(宗主)라고 느껴질 만큼 검의 제일인이라고 순순히 인정한다.
허나.
“나 역시 검의 정점을 바라본 자. 마지막으로 그대의 자격을 묻는다.”
검마의 전신에서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올라서 하늘에 맞닿는다.
그 기운을 따라 남궁도가 고개를 치켜세우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바라본 하늘은 뻥 하고 뚫린 채 마치 짐승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초마검우(初魔劍雨).
검마가 검에 평생을 바치면서 깨달은 심득을 고스란히 담은 단 하나의 초식.
남궁도 역시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검의 비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검의 형상을 한 수백의 검이 남궁도를 향해서 쏟아져 내린다.
“모두 이기어검(以氣馭劍)인가.”
이기어검(以氣馭劍).
의지를 가지고 검을 다룬다. 그것도 자신의 손을 떠난 수많은 검들을.
사천당가가 비수와 암기를 뿌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검의 경지.
말 그대로.
검신합일(劍身合一), 검과 하나가 되고.
신검합일(身劍合一), 자신과 하나가 된다.
단 한 자루로도 펼치기 어려운 것을 수백 자루의 검으로 펼치는 실로 아득한 경지를 보여 주는 검마였다.
“창천검존, 그대가 진정 제왕의 검이라면 나를 꺾고 올라서 봐라!”
무수히 떨어지는 검의 비.
검마의 배려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롯이 자신을 향해서만 떨어져 내린다.
“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궁도의 두 눈이 부릅떠지더니 짧은 기합과 함께 제왕의 검이자 거검이 그에게로 떨어져 내리는 검들을 향해 휘둘러진다.
투콰아아아아아아아!
제왕의 검에 닿자마자 아스라이 부서지는 검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지만.
최라라라라락!
사라지는 검의 숫자 그 이상으로 위에서 쏟아져 내린다.
투콰아아아아아!
무너지지 않으리.
투콰아아아아아!
쓰러지지 않으리.
양어깨에 도달한 두 자루의 검에 꽂혀 남궁도의 신형이 맥없이 휘청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투콰아아아아아!
거검이 움직일 때마다 일어나는 풍압과 거센 위력에 초마검우의 압도적인 물량은 대번에 소멸한다.
닿을 때마다 초마검우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거검의 기세를 보고 생도들과 정파 무림인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비록 부상을 입긴 했지만, 저 절기만 막아 낸다면 남궁도의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인가?”
검마의 나지막한 음성이 담담하게 울린다.
거검을 휘두르는 천신과도 같은 모습이지만, 오로지 전진만을 허락하는 모습, 뒤가 없는 남궁도의 모습이었다.
“나의 모습이 후대에 남겨지길 원한다.”
정파 무림에 나 남궁도가 있었음을.
그리고 어떠한 적을 만나도 결코 물러나지 않았음을.
그 정신이 후대에 전해지기를.
그렇게 거검은 검마의 초마검우를 베어 가르고 검마의 정수리를 향해 빠르게 나아간다.
콰드드드드득!
동시에 검마의 초마검우가 빛살처럼 빠르게 남궁도의 전신을 난자할 것처럼 접근한다.
“나의 의지를 떠난 검들. 창천검존, 너 역시 죽을 것이다.”
“상관없…….”
콰아아아앙!
검마의 정수리를 쪼갠 거검의 형상과 동시에 남궁도의 앞에 드리워진 하나의 그림자.
퍼석! 퍼석!
그 그림자는 단숨에 남궁도에게 도달한 초마검우의 이기어검들을 모조리 받아쳐 낸다.
“염병하네. 후대에게 남길 의지가 고작 그거냐. 상대방 모가지만 잘 따면 자신은 어찌 돼도 상관없다?”
처억.
허공에 떠 있는 갈천중이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천무린은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고는 남궁도에게 시선을 보낸다.
“살아라. 살아서 혜공의 죽음과 너의 깨달음으로 평생 정파 무림이 온전해지고 발전하는 데 힘을 써라. 그게 진정한 제왕의 자리에 오른 이의 책임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