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제242화
치열하기만 한 전투도 언젠가는 끝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게 비록 자웅을 겨루는 상대가 자신과 비슷한 무위를 가진 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검은 물결이라고 표현되는 광적인 기세에다 흡사 피에 굶주린 마교의 무인이라도 해도 결국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고.
용맹스럽게 맞섰던 남해태양궁의 무인들도.
북풍한설처럼 휘몰아쳤던 북해빙궁의 무인들도.
그것은 매한가지였다.
콰아앙! 쾅!
전쟁에서는 이와 같은 폭음과 굉음 속에서 피를 뿌리고 검을 휘두른다. 죽음에 익숙해진 전장에서 생과 사에 초연해질 즈음에 항상 그 끝을 종결 지어 주는 이들이 있었다.
콰앙! 쾅!
북해빙궁주이자 빙천검 설종량은 메마른 입술과 단내가 풀풀 나는 입안을 마른침으로 달래야 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오장로 구유비마 역시 몸 군데군데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를 폴폴 날리고 있었다.
“……정말 지겹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관절 이곳저곳에서 난다.
제아무리 절대 고수라고 평가받는 화경의 경지에 든 이라고 해도.
한 시진 넘도록 절대 고수와 격전을 치르면서 내력과 체력을 고갈한 채 북풍한설(北風寒雪)에 노출된다면 몸에 서서히 무리가 가기 마련이다.
“지긋지긋한 날씨야. 북해.”
“오히려 칭찬으로 들리는군.”
“속 편하게 사는 사람일세. ……이제 그만 끝을 보자고.”
극한의 음한기공을 펼쳐 내는 설종량의 무공은 구유비마에겐 상극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유비마의 표정이 굳어지는 법은 없었다.
“저기도 이제 끝나 가는 것 같은데, 우리도 보조를 못 맞추면 이상하겠지.”
“동감이오.”
설종량 역시 고개를 끄덕거린다.
북해라는 환경.
극한의 음한기공을 펼쳐 내고 자신에게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무공을 펼쳐 내는데도 설종량은 전혀 승기를 못 잡고 있었다.
그것만 하더라도 설종량의 입장에서는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고작 오장로에 해당하는 인물조차 설종량이 이리도 쩔쩔매는데 빙궁의 성벽 아래에서 펼쳐지는 사신의 무위는 대체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설종량 역시 구유비마와의 싸움을 서둘러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손을 도울 필요가 있었기에 말이다.
스르릉.
“오호라, 드디어 제대로 된 검을 뽑네.”
“내가 왜 빙천검인지 알려 주겠소.”
“잘됐네. 한번 보고 싶었는데. 언제쯤 나오나 궁금했어.”
설종량의 검 끝에 순백의 빛이 어린다. 투명하고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 검은 설종량을 화경의 경지에 올려놓은 애병이었다.
“먼저 가겠소.”
“얼마든지.”
구유비마는 온몸을 감싸고 있던 얼음 조각들을 허공에 튕겨 내면서 자세를 잡는다.
그리고!
타앗!
발밑에 디디고 있는 눈덩이들이 파바박 하고 튀면서 서로의 신형이 얽혀 들었다.
콰아아아앙!
* * *
“갈!”
백도 무림의 중심, 소림의 신권(神拳)이라고 불리는 백보신권이 황금색 광채를 뽐내며 직진한다.
중심을 잡은 혜공은 소림의 기본자세로 보이는 마보(馬步)를 취하고 허리를 곧게 편 채 한 손을 옆구리에 올린다. 동시에 다른 한 손은 반장을 하여 정석적인 소림 방장다운 모습을 보이더니, 황금빛 광채가 홍이 있는 자리에서 작렬한다.
콰아아아아앙!
벼락같이 뻗어 나간 권력을 바라보더니 홍의 손가락이 기형적으로 꺾여 날아오는 백보신권의 권력에 달려든다.
그 모습에.
‘……배, 백보신권의 권력에 달려든다니!’
무모하기 짝이 없는 선택을 하는 홍의 모습에 혜공은 입을 앙다물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란 말인가.
쿠콰카카카카카카카.
꾸구국.
쓸어버릴 듯했던 황금빛 광채가 아주 조금씩, 조금씩 기세를 잃고 멈춘다. 권력을 뻗어 내고 있는 혜공의 눈썹이 꿈틀거린 그 순간.
서거걱!
광채가 다섯 갈래로 쩌억 하고 쪼개지더니, 그 기세를 몰아 홍이 도도한 암고양이처럼 빠르게 달려왔다.
“나-무-아-미-타-불-!”
혜공은 혜공.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홍이 달려드는 그 순간, 눈부신 광채가 그의 신형을 감쌌다.
동시에 부처의 형상이 그대로 허공에 솟구쳐 오른다. 동시에 혜공의 몸 역시 떠오르며 다섯 갈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금불(金佛)이 현신하여 홍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시주.”
“호호호호, 스니임, 정말 재주가 좋네. 어떻게 부처님을 저렇게 드러낸담.”
“참으로 악독한 무공을 익히셨구려.”
“악독? 호호호. 고리타분하네. 폭산혈산은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스님은 나한테 잔소리하려고 드네?”
손끝에 넘실거리는 마기부터 심상치 않다고 여긴 혜공이었지만, 그녀가 보이는 간드러지는 웃음과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혜공의 중심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이 규화보전의 힘인 줄 모르는 혜공으로서는 홍에 대한 경계심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방심으로 위험해질 수 있음을 느낀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요망하도다, 요망해.”
웅혼한 황금빛의 서기가 혜공의 전신을 감쌌다가 서서히 그의 몸을 부유(浮游)시킨다.
능공천상제(凌空天上梯).
이윽고 뻗어지는 부처의 손아귀가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져 내린다.
투콰아아아!
소림의 칠십이종절예 중 하나인.
여래신장이 펼쳐진다.
부처의 힘이 깃든 손바닥. 말 그대로 부처의 힘이 고스란히 새겨진 장법이었다. 평생을 쌓아 온 불공과 소림의 정신이 이 손바닥 안에 오롯이 깃들어 있었다.
콰카카카카카카!
“역시 재밌네. 호호호. 저게 다 나를 치장하는 장신구였으면 얼마나 비쌌으려나.”
노도처럼 쏟아지는 황금빛 기세에도 콧소리를 내는 홍이 고갤 들어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부처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그때도 그랬지. 그때도.”
저 손바닥을 보는 순간, 누군가가 떠오른다.
젊은 청년.
무형노괴라는 괴물을 상대하면서 자신을 옥죄고 또 옥죄며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던 그 불쾌한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놈만 아니었다면 이리 먼 길을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을.
그때 그 여인들의 피로 목욕하고 목을 축였다면, 지금쯤 그녀는 더욱 아름다워졌을 텐데.
「 남자도, 여자도 아닌 잡것이 어디서 X랄이야! 징그러워 죽겠어, 아주!」
그런 말을 듣고도 꽁지 빠지게 도망갔던 홍이었다.
까드득.
손가락이 구부정하게 펼쳐지더니 오른손 손아귀의 손톱 끝이 허옇게 변했다. 스산하고도 음험한 기운이 차곡차곡 쌓인다 싶더니 그대로 손톱 끝에 모여들었다.
그러고는 마주 오는 황금빛 여래신장을 향해 그대로 올려 그었다.
스스스슷!
구음백골조의 손톱이 다섯 갈래로 퍼지더니 여래신장의 무거운 광채와 부딪친다. 커다란 돌덩이를 마주한 손톱의 끝을 보는 혜공의 두 눈이 반개한다.
“소용없소. 시주.”
그 모습에 홍의 입가가 뒤틀린다.
“호호호호! 잘난 소림의 무공을 내가 깨부수러 여기까지 왔는데 그 말은 좀 섭한데, 스님?”
끼기기기긱!
마찰음을 내는 다섯 갈래의 손톱이 황금빛의 손바닥에 부딪친다.
“흡!”
그 모습에 혜공은 아예 작심하고 손바닥을 깊게 내리눌렀다.
쿠웅!
무지막지한 압력을 더하여 단숨에 홍을 먼지로 만들어 버리리라!
카가가가가가각!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더니 이제는 혜공의 시야에서 홍이 무슨 짓을 하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래신장의 기운이 지면과 가까워졌다.
“나무아미타불!”
쿠구구구궁!
그리고 손바닥 끝부터 서서히 바닥에 닿기 시작했다.
“부디 다음 생에는 좋은 곳으로 가시길 바라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불광현신(佛光顯神) 그리고 능공천상제에 이어 여래신장까지 초상승 절기를 모조리 끌어낸 혜공이었다.
최아아악!
금불의 현신이 사라지고, 부처가 입자가 되어 허공에 날아가며 서서히 지면에 착지한 혜공은 머금고 있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가가가가각! 콰앙!
콰직!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소름 끼치는 소음이 발생하자마자 그림자 하나가 짓쳐들어오더니 단숨에 혜공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온갖 먼지를 덮어쓴 홍이 치렁해진 머리칼 사이로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호호호호. 정말 짜증 나네. 소림의 무공을 쓰는 놈들은 죄다 이렇게 짜증 나는 녀석들뿐이야?”
“……아미타불.”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해졌지 뭐야.”
홍은 혜공의 가슴을 관통한 손을 후벼 판다.
콰지지직!
“그때 내가 당한 이유가 소림의 무공과 상성이 안 맞아서 당한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니었네. 그냥 그놈이 강했던 거였어. 호호호.”
그 말에 혜공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홍의 어깨를 잡는다.
“비록…… 나는 시주를 막아 내지 못하였을지언정…… 쿨럭! 쿨럭!”
가망이 없을 정도로 가슴뼈를 박살 내고 파 버린 홍의 패악스러운 손길에 혜공은 모든 힘을 끌어올려 홍을 잡고 늘어졌다.
“……바, 반드시 다른 이들이…….”
“호호호. 아유! 질척거려!”
홍이 가슴을 틀어박은 손을 쭈욱 하고 빼내며 혜공을 밀쳐냈다.
쿠당탕 넘어지는 혜공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자신의 오른팔에 뜨끈하게 적셔진 혜공의 핏물을 혀로 할짝거린다.
“네! 누가 스님이 아니랄까 봐 피 맛도 별로네. 정말.”
그러면서 그녀의 눈빛이 한 곳으로 향한다.
삼대 무관 생도들이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아 경악한 표정으로 죽은 혜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공의 또 다른 이름은 권왕(拳王).
왕이라는 별호가 붙은 만큼 그를 당해 낼 자는 전 중원 무림을 통틀어 손에 꼽힐 정도다.
그런 그가.
이름도 모르는 어느 여인에게 몇 수를 못 견디고 죽어 버렸다.
눈앞의 이 상황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저벅, 저벅.
그런 생도들의 반응을 바라보던 홍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덜덜덜덜.
그녀가 다가오는 모습으로 생도들은 죽음을 직감했다.
“호호호호, 얘들아, 얘들아.”
간드러진다. 남자인 생도들이 그 목소리에 동할 법도 하건만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로 그마저도 잊은 듯했다.
“멸마(滅魔). 이름도 재수 없는 그놈 어딨니?”
* * *
슈우우우웅!
천무린의 두 눈이 하늘 위로 향한다.
빛나던 영롱한 별이 호선을 그리며 천천히 떨어진다.
큰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천무린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온다.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리고 그와 반대로 갈천중의 웃음소리는 중원 무림에 크게 울려 퍼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무린은 두 주먹을 천천히 말아 쥔다. 순식간에 사라진 별의 꼬리를 바라보며 그의 마음속에 불길이 피어오른다.
“너무 분노하지 마세요. 당신도 곧 그렇게 될 거니까.”
갈천중이 하얀 이를 드러낸다.
그 모습에 천무린이 굳은 표정을 풀어내며 머금고 있던 한숨을 뱉어 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아까부터 누가 내 욕을 하는지 귀가 더럽게 간지럽던데. 아마 그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새끼겠지?”
천무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두 눈에 귀화를 피워 올렸다.
“좋네. 나한테 기회가 돌아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