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제239화
천마신교의 광신도적인 기세를 맞이하여 남해태양궁 무인들은 마구 도륙당하며 천 갈래, 만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진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단내가 풀풀 나고 당장이라도 꺾일 듯한 무릎을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투욱.
패왕과 맞붙었던 태양천자의 오른쪽 어깻죽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런 남선이 태양궁의 앞에서 버젓이 서 있다. 여전히 패왕과 맞선 채.
남선의 표정에는 그 어떤 후회도,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패왕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해할 뿐.
낭왕 위사검과 신창 신준건 역시 천마신교의 각 무력대 대주들을 맞이하여 고군분투하며 호각지세 그 이상으로 훌륭하게 맞서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해태양궁 전체가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과연 태양천자. 남해의 왕이라더니 투지와 의지가 마치 뜨거운 태양과도 같군.”
아까 전과 달리 승패가 갈렸음에도 불구하고 비아냥거림이나 약자를 향한 비웃음은 찾아볼 수 없는 패왕이었다. 달라진 태양천자 남선은 전력으로 맞붙었고, 패왕과 맞서 단 한순간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그저.
무인으로서 패왕이 좀 더 강했을 뿐.
“……패왕의 칭찬이라니, 기뻐해야겠구려.”
“더 해 볼 생각인가?”
“물론. 나를 쓰러뜨리지 않고는 이 뒤를 넘어갈 생각일랑 마시오.”
이미 한쪽의 팔을 잃은 남선의 안색은 더없이 창백했지만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그의 말에 패왕은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좋군.”
짤막한 말을 뱉은 후 패왕은 남선에게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위대한 무인에 대한 예의이자 배려라고 패왕(霸王)은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내게 넘겨주지 않겠소. 태양천자……. 케케묵은 원한의 끝을 볼 때가 되었지. 패왕.”
남해태양궁에 늦지 않게 당도한 파천검황 독고황은 처참히 무너지고 있는 남해태양궁의 무인들과 태양천자 남선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맹주!”
“그동안 잘 버텼소이다.”
그의 뒤로 천성검협 하후성과 천성검대, 그리고 청룡대와 백호대, 현무대, 마지막으로 주작대가 보였다. 이른바 무림맹의 전력이라 일컫는 모든 이들을 이끌고 온 독고황이었다.
“파천검황.”
“패왕.”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꽈드득.
패왕의 손아귀에 쥐어진 대기가 찌그러지는 듯한 소리를 낸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처음으로 패왕을 패배 직전까지 가게 몰고 갔던 정파 무림의 일인자.
“그때 베어 내지 못하여 결국 이 지경까지 왔구나.”
“……무위를 회복했다더니 정말이었군.”
“그래서 슬픈가?”
“너무도 기쁘다. 나의 이 두 주먹으로 너를 무릎 꿇게 만들 수 있게 되어서. 병마 따위에 무너질 뻔한 네놈 때문에 내 역사에 영원한 오점이 생길 뻔하였다.”
“영원한 오점이라……. 좋군. 패왕에게 새길 수 있는 오점이라니.”
“허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처억.
독고황은 자신의 애병인 청운검(靑雲劍)을 뽑아 들었고, 패왕은 자신의 두 주먹을 가슴팍에 올린다.
남선을 상대한 패왕이었지만, 그을린 자국 하나 없었다.
하지만 독고황의 자존심상 그것 역시 쉽게 허락하지 못할 일.
“선공을 양보하지.”
합의를 본다.
그리고 독고황의 자존심을 아는 패왕은 고개를 끄덕인다.
“사양하지 않겠다.”
파앗!
구척장신은 될 법한 육중하고 큰 키를 자랑하는 패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성처럼 검은빛이 되어 빠르게 달려든다.
패왕진천권(霸王振天拳).
패왕이 자랑하는,
그만이 갖고 있는 패도의 길을 보여 주는 무공.
그것을 고스란히 담은 그의 주먹은 벽력왕처럼 우레를 떨어 울리지도, 수룡왕처럼 심해의 갑갑함을 담지도 않았다.
오롯이 옹축하고 또 응축하여 전력을 솥뚜껑만 한 두 주먹에 담는다.
콰아아아아아앙!
대기를 찢어발기며 나아가는 패왕진천권의 길에 순간적으로 허공이 갈라진다는 착각이 든 독고황이었다. 그의 눈이 심유하게 깊어지더니 서서히 검을 들어 올렸다.
파천대구검(破天大九劍).
고작 검을 들어 올렸을 뿐인데도 전신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발현되어 짓쳐들어오는 패왕을 앞에 두고 도도하게 섰다.
“아홉 수를 받으면 패왕, 자네가 이기는 것일세.”
* * *
설종량과 구유비마는 호각지세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구유비마의 눈에 들어온 태극무늬의 태극 검수, 민머리에 불호를 외는 소림의 십팔나한, 그리고 매화의 향을 진득하게 풍기는 매화검수와 종남의 유운검수가 보였다.
“……많이도 끌고 오셨네.”
“그리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닐 텐데, 구유비마.”
빙천검 설종량의 말에 구유비마가 고갤 돌린다.
쩌저저저적!
극한의 빙공이 기반이 된 빙백신장을 허공에서 몇 번이나 걷어차며 기형적인 각도로 꺾어 낸 구유비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 보통 때 같았으면 제법 난감했을 거야. 여기까진 계획에 없었으니까.”
“항복할 텐가? 적어도 고통스럽게 죽이진 않겠다.”
“에이, 그 얼음장에 얼려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게 어디 있다고 약을 파는 겐가.”
구유비마가 성벽 위로 착지하더니 불리해진 천마신교의 무리를 보다가 지원군으로 온 이들의 수장을 바라봤다.
“……거물급 검왕이 나서셨네.”
“무량수불.”
“이쪽이나 저쪽이나 번거로운 건 매한가지네. 나 원 참.”
그렇게 말하는 구유비마의 모습에 설종량의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이토록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이유. 따로 있는 것인가.’
설종량조차도 정도 무림에서 이토록 많은 지원군을 보내올지 몰랐다.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순간이었다.
북해가 마교의 검은 물결 따위에 휩쓸리지 않아도 되니까.
검왕이 등장한 순간부터 비등비등하던 힘의 균형이 깨지고 승기가 정파와 북해 쪽으로 기울게 되었을 텐데.
‘어째서……. 설마?’
골똘히 생각하는 설종량의 모습을 바라보던 구유비마가 씨익 하고 웃었다.
“빙궁주님이 제법 눈썰미가 좋네. 맞아, 그 생각이.”
그 말에 설종량의 시선이 다급히 돌아간다.
이검과 이용, 이호 형제가 왔던 그 길목에서 음험하고도 음침한 이들이 하나둘 그림자를 드러낸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느껴지는 기운이 누구인지 알려 준다. 하나같이 천마신교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거기다 평범한 무사조차 드러내는 기운에 죄다 마기가 맺혀 있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지?”
구유비마의 말에 설종량이 침음을 흘렸다.
이제야 겨우 지루하고도 지루한 전쟁이 끝나나 싶었더니, 다시금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등장한 마교의 군단 앞에 선 이는 두건을 푹 눌러써서 살벌한 그의 안광만 느껴질 뿐이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안광만을 보고도.
“……설마 사신(死神)?”
“정답!”
설종량의 표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천마가 사라진 천마신교에서 가장 강한 이를 뽑으라고 하면 단연 패왕이다.
그러나 가장 상대하기 싫은 이를 뽑으라고 한다면, 다름 아닌 사신이다.
기괴망측하게 휘두르는 낫 한 자루의 움직임과 사신이라는 별호에 걸맞은 행동을 스스럼없이 한다고 알려진 인물이니까.
“어휴, 저기도 많이 끌고 왔네.”
“…….”
“그러니까 우리 다시 제대로 시작해 보자고.”
구유비마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설종량과 마주한다.
멀리서 설종량과 구유비마가 떠드는 말을 듣고 있던 검왕 청강진인이 고갤 돌려 사신과 마교의 군단을 바라본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지원군의 숫자마저 얼추 비슷해 보인다.
스윽.
헛웃음을 지은 청강진인이 사신을 바라보자,
스윽.
두건 아래 숨겨져 있던 소름 끼치는 안광이 청강진인과 마주한다.
“……부상자를 지원하고 단숨에 밀어붙인다. 무량수불.”
스르릉.
검을 빼 드는 청강진인의 검에 아로새겨진 태극무늬.
태극혜검(太極慧劍).
면면부절의 묘리가 태극무늬를 따라 천천히 새겨진다.
스스스슷.
그리고 검을 뽑는 청강진인의 모습에 사신이 허공에 손을 쭉 하고 뻗자, 자신의 몸통만 한 거대한 낫이 서서히 나타난다.
츠파앗!
그리고 두 사람 역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득달같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크키키키키, 검왕이로구나!”
쇠를 긁는 듯한,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북해에 울려 퍼진다.
“무량수불! 길게 말하지 않겠네. 검으로 이야기하면 될 테니.”
아랑곳하지 않고 청강의 입에서는 도호가 터져 나왔다.
“키키키! 오냐, 간만에 나의 애병에게 도사 놈의 핏물로 밥을 먹일 수 있겠구나.”
“흥!”
콰아아아앙!
* * *
중원 무림에는 수많은 병장기가 있다.
도, 활, 창, 극, 곤을 비롯해 무기의 종류가 즐비하지만, 강호인이라면 가장 먼저 접하고 많이 쓰는 병장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고 불리는 검이다.
호사가들은 말한다.
중원 무림에서 검을 쓰는 무인들 중 누가 최고냐고.
파천검황 독고황.
검왕 청강진인.
천마신교의 이장로 검마.
그리고 검에 대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검의 대가 창천검존 남궁도.
무위가 강한 것과 검을 깊이 있게 잘 쓰는 것은 다르다고 호사가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 의문은.
“드디어 만났군. 마교의 개.”
“……창천검존.”
호기로운 음성의 남궁도가 비틀린 입으로 말문을 열었다.
“궁금하지 않던가. 검이라면 이 창천 남궁세가의 제왕검이거늘 변방의 마교 새끼들은 검 잘 쓰는 놈이 따로 있다고 말하더군.”
“…….”
“그래서 내 일찍이 보고 싶었지.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만나서 그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말이야.”
“입씨름만 계속할 생각인가.”
검마는 짧게 내뱉은 후 검부터 꺼내 들었다.
그 모습에 남궁도 역시 무거운 패검을 마치 가벼운 종잇장처럼 들면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검으로 대화하자는 건가? 맘에 드는 행동이로군.”
“……쓸데없이 시간을 끌 필욘 없겠지.”
“좋을 대로.”
검마와 창천검존.
창천검존과 검마.
검에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마음이 없는 두 사람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그런 두 사람의 검이 얽혀 들자마자 사천 전역과 장강 일부가 마구 요동쳤다.
파천검황과 패왕.
창천검존과 검마.
검왕과 사신.
빙천검과 구유비마.
무려 여덟의 절대 고수가 맞붙었고, 이는 정마대전이 정말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절대 고수의 패배는 곧 승부를 가르는 갈림길이 되기에 무림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내가 말했지? 네 새끼만 대가리가 있는 게 아니라고.”
“……싸움을 어렵게 끌고 가시는군요.”
갈천중을 마주한 천무린의 입가가 마구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