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제237화
만마(萬魔)의 종주(宗主).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그리고.
무신(武神).
천무린을 바라보는 갈천중의 두 눈에 묘한 열기가 감돈다.
그렇다. 그가 확실하다.
그가 아니라면, 이와 같은 신위는 절대 발휘할 수 없다.
그리고 여태까지 걸어온 그의 모든 행보가 이해가 된다.
요술이나 잔재주 따위가 아닌.
정말 천무린이라야 펼칠 수 있는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행동과 파급력, 그 모든 것들이 말이다.
“하아아.”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바들거리는 갈천중이 달뜬 숨을 몰아쉬면서도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정말로 당신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입니다.”
“그렇지. 네깟 놈한테 평가받을 그릇이 아니긴 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그리웠습니다. 제가 얼마나 한탄하고 후회했는지 아십니까.”
번들거리는 열기가 광기로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열망과 광기가 뒤섞인, 그런 눈빛이 천무린에게 닿았다.
“원래부터 정신 나간 놈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결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린 거냐?”
들려오는 귀곡성에 이어 갈천중이 감히 익힐 수 없는 천마신공까지.
어느 하나도 정신 나가지 않은 일이 없었다. 의심 가는 그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천무린은 갈천중을 응시했다.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던 녀석. 그리고 항상 가슴께에 비수 하나는 품고 다닌 녀석이라는 것은 천무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음험하고 뒤틀린 녀석이었을 줄이야.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천중은 고개를 저었다.
“일인지상(一人地上), 만인지상(萬人之上). 품었던 뜻과 대의(大義)를 위한 일입니다.”
“X랄하네. 그 짓거릴 하려고 대체 몇 명을 희생시킨 거냐?”
처억.
검지를 펼쳐 보이는 갈천중이다.
“……백 명?”
“에이, 조금 더 써요. 천무린의 배포가 그 정도밖에 안 되었나요?”
그 말에 천무린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진다.
“……천 명이라.”
“하하하하, 인본주의라도 된 건가요? 왜 그렇게 인색하게 표현하고 그래요. 조금 더 쓰라니까.”
갈천중이 웃음기를 머금고 말하는 순간, 천무린은 발을 들었다가 강바닥을 찍어 누른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천마가 가는 길을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쿠우우웅!
장강의 깊디깊은 강물을 떨어 울리더니 대번에 갈천중이 선 곳까지 쩌억 하고 강물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뒤이어 천마군림보의 진각의 여파가 고스란히 갈천중에게로 향했다.
쿠구구구구궁!
그 모습에 갈천중 역시 다리를 들어 올려 천마의 발자국을 장강 위에 아로새긴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
천무린의 걸음과는 다른 귀기 어린 천마군림보가 터져 나온다.
콰아아앙!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귀곡성이 장강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 귀곡성은 마치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고통 어린 신음처럼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충격파가 일어나며 다가오는 천마군림보의 진각과 맞부딪쳤다.
쿠콰카카카카카!
“으아아아아아! 사, 사람 살려!”
“이런 미친!”
“끄아아아아!”
진각의 충격파에 의해 장강의 물살이 떠 있는 배에 강하게 들이쳤다. 그러자 진천뢰와 함께 장강수로채 수적들이 단숨에 수장되기 시작했다.
수공에 능한 수적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재지변(天災地變) 이상의 크나큰 재앙에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었기에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비명마저 아름다운 선율처럼 들리는 것인지 비음까지 섞어 가며 자못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는 갈천중이었다.
허공에서 흩어지는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져 내리기도 전에.
후우와와아아아앙!
천무린의 검 끝이 하늘을 베어 가른 참격을 형성하며 그대로 나아간다.
천마신검(天魔神劍).
천마멸겁(天魔滅劫).
천마가 나아가는 길에는 오로지 멸망의 겁화만이 있을 뿐.
쏘아진 검격에 아로새겨진 그 기운은 장강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위력을 보였다. 누구라도 적중되면 속수무책으로 소멸해 버릴 정도의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그 모습에 갈천중의 검 끝이 흔들렸다.
천무린이 펼쳐 낸 것은 자신 역시 펼쳐 낼 수 있다는 듯, 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듯 갈천중은 보란 듯이 천마멸겁을 똑같이 펼쳐 낸다.
꿀렁거리며 형성된 만악(萬惡)의 근원이 검 끝에 담긴다 싶더니 그대로 내리긋는다.
쿠와아아아아아아!
파가가강!
한 번 격돌할 때마다 장강 전체에서 용오름이 솟아오른다.
푸화아아악!
용오름이 끝을 모르고 사방에서 터져 나왔고, 천무린과 갈천중이 충돌할 때마다 우렛소리를 동반했다.
콰앙! 콰앙!
“좋네요. 마음 놓고 천마신공을 써 볼 기회가 생긴 것 같아서.”
태연히 말하는 갈천중의 모습.
빠드득.
“네놈의 보잘것없는 목적을 위해 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것이냐?”
천무린은 이가 절로 갈렸다.
만 명.
대체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천무린이 아는 한, 그만한 숫자를 희생시켜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의식이자 대법은 전 중원 무림을 통틀어 단 하나뿐이다.
전혼대법(傳魂大法).
전혼대법을 펼친 미친놈이 바로 저기에 있다.
그런데.
“하하, 그런데 말이에요.”
갈천중의 서늘한 눈빛이 천무린의 가슴을 파고든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부터 따져야 할 텐데.”
“…….”
“당신이 일으킨 혈겁. 그로 인해 죽은 숫자도 결코 만만치 않은데 말이죠. 그렇게 혈겁이나 일으키는 당신과 나는 달라요. 이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느라 어찌나 힘이 들던지. 제 노고를 아시나요, 당신이?”
온몸을 벌레들이 기어가는 듯해 벅벅 긁고 싶은 충동이 드는, 그러면서 거부감으로 몸서리치게 만드는 기운이 갈천중으로부터 천천히 흘러나왔다.
“만 명. 꽤 많은 숫자죠.”
꿀렁거리는 기운이 허공에 피어오를 때마다 터지는 귀곡성에 갈천중은 감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얼마나 달콤하고 좋은지. 만 명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니까요.”
천무린의 신형이 사라진다.
투콰아아아앙!
이내 갈천중의 신형이 포탄을 맞은 듯 거칠게 튕겨 나가더니 배 서너 척을 부숴 버렸다.
배들의 잔해 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아주 서서히 갈천중의 신형이 허공에 띄워진다.
갈천중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언가가 그의 신형을 잡아 끌어올리는 듯 허공에 점점 뜬다.
천마등공(天魔騰空).
천마의 의지대로 움직일지니.
“크웃……. 내력 소모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오롯이 천무린이 가진 내력만으로 갈천중을 천천히 옥죄어 허공에 족쇄를 채우듯 팔다리가 떠 있었다.
“많이 화나셨나 보네. 우리 천마…….”
“내가 많이 얕보였나 봐. 아직도 내 앞에서 이렇게 주둥이를 나불거릴 수 있다니.”
“……후후후, 당신.”
옥죄어지던 갈천중의 고개가 꺾여 천무린을 직시한다.
두 눈에서 소름끼치는 핏빛의 광기가 줄기차게 새어 나왔다. 섬찟한 그 혈광은 새하얀 그의 피부와 뚜렷이 대조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로 심장마저 얼려 버릴 정도였다.
“약해졌군요.”
“……뭐?”
“쓰잘머리 없는 감정 따위가 생겨 버렸어요. 당신.”
갈천중은 몸을 옥죄는 천마등공의 힘 앞에서도 쉬지 않고 입을 연다.
“내가 아는 당신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었어.”
“…….”
“천무린.”
어둑하고 음산한 그림자들이 서서히, 아주 서서히 갈천중에게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기묘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에 천무린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어요. 말 그대로 천마라는 이름에 어느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지. 그런데, 지금은…….”
줄기차게 뿜어대던 혈광이 천무린의 시선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모습에 천무린의 오른손이 주먹을 꽉 쥔다.
“닥쳐.”
콰아아아아아아앙!
천마억겁(天魔億劫).
감히 천마에게 대적한 죄, 목숨으로 갚아라.
갈천중의 전신을 옥죄던 천마등공의 기운이 폭사하더니 순식간에 검은 염화(炎火)에 뒤덮여 버렸다. 억겁의 시간 속에서도 절대 꺼지지 않을 수라의 화염(火焰)이 이글거리며 갈천중의 몸을 불태운다.
세상이 무너질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장강 주변을 누비던 소용돌이가 미친 듯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용권풍(龍卷風)이 난잡하게 일어나며 장강 위에 떠 하던 모든 배들을 우악스럽게 집어삼켰다.
동시에 갈천중의 모습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마 용권풍에 쓸려 가 버린 듯했다.
육체의 흔적조차 모조리 먼지로 산화되었을 터였다.
천무린은 비집고 새어 나오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천마신공은 강력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다시없는 절세의 무공이다. 그러나 그만큼 신체에 가해지는 부담도 컸기에 체력적인 안배도 고려해야만 했다. 최강의 무공을 펼치는 것인 만큼 반발력과 반탄력 역시 결코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지 말고 지체 없이 죽이는 걸로.
저승사자의 말대로 천마신공의 마공이 돌아옴과 동시에 살생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졌다. 저승사자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후우. 제길, 간만에 신나게 써 버렸더니 제법 과부하가 걸렸군.”
천무린은 확실히 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생의 천무린과 비교한다면.
“아직 한없이 멀었지.”
그래서 무리한 감도 있었다. 어려운 싸움으로 끌고 갈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렇게 비척거리는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운 그 순간.
“나약하기 그지없는 버러지가 되어 버렸군. 시시해져 버릴 만큼.”
소름 끼치는 음성과 함께 온몸을 엄습하는 오싹함.
그것을 느끼자마자 천무린은 본능적으로 전신에 잠재되어 있는 내력을 끌어올렸다.
투콰아아앙!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천무린의 몸을 완전히 뒤틀어 버리겠다는 심산인지 단숨에 옥죄어 온다.
스윽.
스스스슷.
모습을 드러내는 갈천중.
무려 천마등공에 이어 천마억겁이라는 절세의 초식에 당했음에도 생채기 하나 없어 보였다.
처억.
그의 뻗은 오른손을 따라 무형의 압박이 천무린의 온몸을 옥죄어 왔다. 이제는 네 차례라는 듯.
“……이따위 것이 내게 통한다고 생각하나.”
허공에서 무형의 기운에 의해 옥죄어지자, 천무린의 미간이 좁혀진다. 갈천중이 보여 주는 모든 초식 하나하나가 천무린의 연계와 똑같았다.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당신도 알잖아요. 전혼대법이 왜 삼대 금기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지.”
꾸구구국.
견딜 만했던 무형의 압박이 천무린의 심장을 단숨에 옥죈다. 온몸에 있는 숨구멍이란 숨구멍은 모조리 막아 버리겠다는 듯 압박하는 기운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큭.”
짧은 신음이 새어 나온다.
꾸구구국.
“거봐요. 쉽지 않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