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제232화
검은 물결(黑波).
십여 년 전, 정마대전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도하고 패악적인 물결이 새하얀 눈밭 위를 빠르게 밟아대며 지나가고 있었다.
적설량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데 거침이 없는 검은 물결.
“마도천하(魔道天下)!”
그리고 그 검은 물결의 선두에 선 검마대주 초우량의 외침이 크게 울려 퍼진다. 그 외침을 들은 검마대를 필두로, 모든 마도인들의 음성에는 광기가 일렁거렸다.
“마도천세(魔道千歲)! 천천세(千千歲)!”
“천마지존(天魔至尊)! 천마천세(天魔千歲)!”
북풍한설에 정면으로 맞서는 그들의 광기로 인해 몸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한기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이느니라! 새외에 처박혀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놈들이!”
그의 말대로 정면에는 새하얗기 그지없는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엄하기 그지없는 순백의 성벽은 천마신교의 천마전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웅장하고 거대했다.
심지어 성벽 위에서 자신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빙궁의 무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두려움에 발길을 멈출 터였다.
하지만.
스르릉.
초우량의 검 끝이 짙고 짙은 묵색의 검기로 휘감겼다. 저 장엄하고 거대한 성벽을 보고도 초우량과 그의 뒤를 따르는 마도인들은 주춤거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초우량의 절기 중의 절기인 초마검기(初魔劍氣)가 대번에 쭈욱 하고 뻗어나간다.
콰콰콰콰콰!
묵색으로 번들거리는 반월형의 검기가 순식간에 성벽 위에 도달하니 빙궁의 무인들은 이렇다 할 대처조차 못 하고 그저 성벽 뒤로 황급히 숨었다.
콰아아아앙!
먼지를 일으키며 성벽 위에 있던 무사들에게 선전포고를 한 초우량은 단 한 번도 멈춤이 없었다.
“나를 따라 북해의 버러지들을 정리하고 천마께 돌아간다!”
초우량은 다시 한번 검은 유성과도 같은 초마검기를 빼내 들었고.
스르릉!
스릉!
순식간에 검은 물결의 마도인들은 각자 검과 도, 활을 꺼내 든다.
우우웅!
백여 명이 넘는 절정 고수들이 보여 주는 묵색의 검기.
이에 질세라.
“흥! 검마대 따위에게 질 생각일랑 말도록!”
“애먼 화살에 맞지 말고 움직여라. 멍청하고 아둔한 놈들아.”
횡으로 베어 가르는 도에서 뻗어 나오는 무식하리만치 강압적인 기운이 폭사되더니 위협적인 도기가 쏟아져 나와서 북해빙궁의 성벽을 향해 무섭게 날아갔다.
또한, 핏빛 기운이 팽배한 화살이 팽팽하게 당겨져 북풍한설을 뚫고 날아오는 모습까지 보이는 패도적인 모습에 빙궁의 무인들은 도망갈 곳이 전혀 없어 보였다.
“으아아아! 도, 도망가! ……마, 마교야!”
“하, 하나같이 모두 절정 고수……. 마, 말도 안 돼!”
“무, 무슨 수로 막아 낸단 말이야!”
무려 삼백여 명이 넘는 인원들이 쏟아 내는 기운의 폭풍. 거기다 초절정 고수가 셋이나 되는 압도적인 기백.
매 순간 실전에 실전을 거듭해서 두려울 것이 없는 광신도적인 신앙심으로 무장한 마도인들을 상대하기에 북해빙궁의 무인들은 여러모로 부족해 보였다.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던 북해빙궁의 무인들은 천마신교에 대한 소문과, 그 소문이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들과 대적해야 한다는 생각이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이길 수 없어.”
“구,궁주님은!”
쿠과카카카카!
초우량을 필두로 한 검마대, 마궁대, 혈영대의 마교인들은 전투 의지를 잃은 북해빙궁의 무인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날쌔게 움직였다.
그동안 수많은 전투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초우량이다. 정마대전 때도 최전선에서 싸웠던 인물인 만큼 어떻게 전투를 해야 할지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이번엔 이쪽.’
후우우웅!
초마검기가 다시 한번 귀곡성을 내지르며 묵빛 검기로 북해빙궁의 무인들을 향해 나아갔다.
쩌저저적!
바로 그때.
극한의 음한기공(陰寒氣功)이 성벽 안에서 터져 나오더니, 백색의 기운이 초마검기를 향해 날아가 충돌하였다.
그저 충돌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초마검기를 단숨에 얼려서 허공에서 얼음 조각으로 산화시켜 버리더니 그대로 초우량을 향해 앞으로 뻗어나갔다.
“헙!”
감당할 수 없는 기운.
그것은 초우량을 넘어서는 고수의 기운이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기운.
이를 깨달은 초우량은 막아 내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고갤 돌렸다. 어차피 막아 낸다고 한들, 이 정도 극한의 음공에 당한다면 대번에 온몸이 얼어 버릴 터였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극한의 음한기공을 막아 줄 해답이 있었다.
“쳇!”
짧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비조(飛鳥)처럼 허공에 뛰어오른 인영이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음한기공을 막아 냈다.
콰가가가가가!
허공에서 몇 바퀴나 회전하며 음한기공에 맞아서 튕겨 나가면서도 초우량의 뒷덜미를 잡아서 검마대를 향해 던져 버렸다.
절대적인 빙공을 막아 내면서 여유롭게 초우량까지 신경 쓸 정도의 고수는.
“검마대주, 말이랑 다르지 않나. 벌써 궁주란 놈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죄송합니다! 오장로님!”
그는 다름 아닌 오장로, 구유비마(九游飛魔)였다. 그리고 구유비마의 눈길이 성벽 위에서 턱을 치켜든 채 마도인들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왕에게로 향했다.
빙천검(氷天劍) 설종량과 구유비마의 첫 대면이었다.
“감히 천마신교 따위가 북해에 발을 들여놓다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설종량의 목소리에 구유비마가 씨익 입가를 올렸다.
“어쩌나. 그렇게 우리를 내려다볼 때가 아닐 텐데.”
구유비마의 고개가 양옆으로 돌아갔다.
“……그쪽은 어떨지 몰라도 여긴 제법 쓸 만한 놈들이 차고 넘치거든. 정상적인 구조였으면 네가 아니라 쓸 만한 수하 놈들이 뛰쳐나왔어야지.”
설종량은 그 말에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내심 이를 갈아붙이고 있었다. 북해빙궁에는 초절정 고수의 수도, 절정 고수의 수도 크게 부족했다.
북해빙궁의 실권을 두고 피바람이 불었고, 설종량은 그 실권을 잡으면서 반대파에 대한 숙청 기간이 과하게 길어졌기 때문이다.
설종량을 위한 북해빙궁이 되었으나, 문제는 빙궁을 믿고 맡길 수하들이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절정 고수의 숫자도 부족하긴 했지만, 등을 믿고 맡길 만한 초절정 고수의 숫자는 거의 전무했다.
그런 반면, 눈앞에 있는 검마대주 초우량을 비롯하여 혈영대주와 마궁대주 역시 초절정에 달하는 고수였다.
구유비마를 궁주인 본인이 상대하더라도 쉬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텐데, 초절정에 달하는 초우량과 다른 두 명의 대주가 날뛰기 시작하면 북해빙궁의 피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질 터였다.
속으로 침음을 삼키고 있는 설종량이 구유비마와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우우우웅!
저 멀리서 초우량과 비슷한 검기가 터져 나오며, 빙궁과 마교가 대치하고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쿠과카카카카!
흡사 초마검기와 비슷한 묵빛의 검기가 날아왔는데.
설종량이 의아하다고 여길 만큼 한 방향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분명 기운은 마도인과 비슷한데.
어찌 된 일일까.
쿠콰카카카캉!
콰지지직!
구유비마가 다리를 들어 올려 진각을 밟아 대자, 새하얀 눈발이 허공에 흩어지며 묵빛의 검기를 막아 냈다.
“……웬 놈이냐?”
구유비마의 눈빛이 한 곳에 가 닿았다. 검기가 날아온 방향에 등장한 일단의 무리를 보았다.
대략 서른 명이 조금 넘는 인원.
그 앞에 선 세 명의 사내와 흑의무복에 흑면으로 가린 서른 명의 사내들이 빙궁의 성벽으로 다가왔다.
삼백여 명이 도열한 천마신교와 비교하면 거의 조족지혈에 불과한 적은 숫자였지만, 묘하고 이질적인 분위기에 설종량과 구유비마, 마도인들은 모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저벅, 저벅.
“누구냐고 물었을 텐데.”
구유비마의 표정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분명 마도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이기에 이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렇기에 섣불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 구유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벽 아래까지 다가온 사내들이 고개를 들어 설종량을 올려다봤다.
“설종량 궁주님.”
“……말하시오.”
설종량 역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적아가 구분되지 않는 상대에게 자칫 방심해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설화린.”
사내가 내뱉은 이름 석 자에 설종량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갑자기 이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설종량의 금지옥엽이자 빙화라고 불리는 딸의 이름이.
“그녀의 요청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게 무슨?”
“아오! 답답하네. 이검 형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냥 시원하게 주군께서 시키셨다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팡팡 치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 옆의 세 번째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는 듯.
“주군께서 주모의 이름을 말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용 형님!”
“……아아, 맞다. 맞아. 주모.”
……이게 대체 무슨?
주군은 누구고.
주모는 누구인가.
하지만 저들이 떠드는 모습으로 짐작건대.
“……내 딸이 혼인이라도 했단 말이오?”
설종량의 온몸에서 극음의 기운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세 남자가 당황하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은데…….”
“……저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이용, 이호 형제는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고.
“하아.”
졸지에 두 형제의 큰형님이 되어 버린 사내, 천살대주 이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꼬여도 제대로 꼬여 버린 이 순간.
이 난관을 대체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한단 말인가.
이 빌어먹을 새끼들 때문에.
빠득.
* * *
북해가 구유비마와 검마대주 초우량이 이끄는 마교의 습격을 받고 있을 때, 다른 새외 역시 적의 침공을 받고 있었다.
태양천자 남선은 무시무시한 기세와 압도적인 기백을 뽐내며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며 침음을 삼켰다.
“……패왕(霸王).”
모습을 드러낸 천마신교 일장로 패왕은 남해태양궁을 철저히 부수며 남선에게까지 도달했다.
“남해의 왕, 태양천자라고?”
“긴말은 필요 없다. 네가 가진 모든 절기를 꺼내라. 대우해 주마.”
패왕의 전신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투기(鬪氣)가 줄기차게 뻗어 나왔다.
같은 화경의 경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숨이 턱턱 막히는 기운에 남선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숨 막히는 기운에 남선이 주춤하는 사이, 패왕의 뒤로 삼백에 가까운 무리들이 도열한다. 질서정연한 그 모습에 더욱 숨이 막혀 왔다.
반면, 남해태양궁의 무인들은 적들의 기백에 그만 압도되어 남해를 주름잡는 이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
“……친구, 우리 잘못 온 거 아닌가?”
“무엇이 말인가?”
“남해에서 제일가는 태양궁이 저 천마신교 버러지들 앞에서 비에 쫄딱 맞은 개새끼처럼 꼬리를 말고 벌벌 떨고 있지 않은가.”
등 뒤에 창을 매단 노인이 친구라고 부른 노인에게 말을 건다.
말을 받은 노인이 미소를 띠며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너무 그러지 말게. 우리가 도우면 될 일 아닌가.”
두 사람밖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남해태양궁 뒤에서 여유롭게 이 모습을 지켜보는 두 노인은 다름 아닌.
“……태양궁주, 주군의 요청에 따라 지원을 왔습니다. 낭왕(狼王) 위사검이라고 합니다.”
“신창(神槍) 신준건이라 하오.”
남해에 모습을 드러낸 낭왕 위사검과 신창 신준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