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제231화
추욱.
당백진의 온몸이 마치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 그지없었다. 파건량이 쏟아 내는 투명했다가도 먹색 물빛을 보이는 내공이 어느새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로 인해 형성되는 뿌연 안개.
장강 위에 어스름히 내려앉는 물안개처럼 수룡왕 파건량의 신형이 그 안개 속에서 흐릿해진다. 안개가 당백진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게다가 눈마저 침침하게 만들고, 움직임을 어색하고 힘겹게 했다.
우우웅!
그 속에서 당백진은 여섯 자루의 비수에 의지하여 안개를 걷어 내기 위해 내력을 끌어올렸다.
비수의 회전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휘리리리릭!
안개를 걷어 내는 비수들의 유영으로 당백진의 눈앞이 환해지자마자!
쐐애애애액!
다섯 손가락을 구부린 파건량의 손길이 당백진의 안면을 향해 쭉 뻗어 왔다. 바로 코앞까지 당도했는데, 안개와 어스름한 기운이 만들어 낸 파장이 그의 기척을 지워 버렸던 것이다.
화라라락.
당백진의 허리가 뒤로 눕듯이 젖혀졌고, 반동을 이용해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파건량이 아쉬움이 담긴 표정과 쌤통이라는 표정을 연이어 지었다.
“아쉽네. 그걸 피하고. 조금만 늦었어도 머리통을 부숴 버렸을 텐데.”
“…….”
“뭐, 그래도 괜찮아. 안 그래도 나랑 싸우는 동안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옮기질 않았더라고. 열 받게. 그러니 지금 뒤로 물러선 것만 해도 이미 목표는 달성했으니 말이야.”
그의 말마따나 당백진은 수룡왕 파건량과의 격전 동안 마흔 자루의 비수를 활용했을 뿐, 단 한 번도 제자리에서 움직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혈투 중에 처음으로 그의 신형이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당백진의 모습에 파건량이 천천히 걸어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나저나 저긴 이미 끝났나 본데. 누가 이겼으려나?”
그 말에 당백진의 시선이 느릿하게 향한다.
조용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천지를 떨어 울리던 우렛소리가 멎었다. 충돌음이나 굉음도 없었고, 진천뢰의 포격도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격전 속에.
‘……유일하게 진도를 못 나가고 있는 건 나 하나인가.’
자신만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 만독암제 당백진이 말이다.
피식.
이래서는 안 된다.
당백진의 입가가 비틀어지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차갑고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던 그의 표정에 변화가 생기자, 수룡왕 파건량이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어?”
“물론.”
“묘수라도 떠올랐나? 혼자 실실 쪼개게.”
“내가 녀석들의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거든.”
그렇다. 이래서는 안 된다.
사천무관 관주인 자신이 나아가는 생도들 앞을 진두지휘하지는 못할망정 발걸음도 못 맞추고 있는 실정이라니.
특히나 천무린 그 녀석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두고두고 놀릴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뭔 소린지? 근데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자고?”
수룡왕 파건량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멸마인가 뭔가 하는 생도 나부랭이랑 어울리더니 아주 감성적으로 되셨네. 그렇게 강한 척하면 뭐가 달라질 줄 아나 봐?”
남은 비수는 여섯 자루. 게다가 맹렬하게 회전하던 비수의 위력이 줄어들어 있었다.
거기다 지쳐 버린 당백진과, 그와 반대로 자신의 영향권 안에서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파건량.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은 상반된 모습이었다.
이 결전의 결과를 굳이 지켜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고 여길 터.
“……고맙군.”
“뭐?”
당백진의 희미한 미소에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은 파건량이 오른손 손가락을 구부렸다.
대번에 찢어발기고 비수를 모조리 부수어 한 줌의 가루로 만들어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똑똑히 알려 줄 참이다.
꽈드드득.
손을 쫘악 하고 펼쳐 내더니 그대로 내리그으려던 파건량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칫한다.
멈칫.
경직된 파건량이 고개를 내리고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
어색하리만치 손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력을 끌어올린 파건량이 호흡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쳇, 독이냐.”
파건량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 정도의, 당백진이 가진 또 다른 무기.
그것은 다름 아닌 독(毒)이었다.
“산공독(散功毒)과 마비독(痲痹毒)을 섞어서 흩뜨려 놓았지. 모두 네놈 덕분이다.”
당백진이 입가를 비틀자, 파건량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안개 속에 독을 풀어 놓고 그 독이 아주 천천히 스며들도록 만들었다.
그것을 깨달은 파건량이 소맷자락을 흔들어 기껏 형성한 안개의 영역을 모두 걷어 내 버렸다.
후우우웅!
휘몰아친 풍압에 단숨에 안개가 옅어지더니 종래엔 사라졌다.
“귀찮은 짓을 해 버렸군.”
“강한 척할 만했지 않은가.”
“……기가 살았군.”
다 잡은 승기를 잠깐 놓친 파건량으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마뜩잖았다. 고작 독 따위로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속을 배배 꼬이게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마디 말도 떼지 못하던 놈이.”
“아아, 그것 역시 잘나신 수룡왕 덕분이지.”
꿈틀.
파건량의 손아귀가 구부러진다.
“언제까지 잘난 척 혓바닥을 놀릴 수 있는지 두고 보지.”
일신의 무력만으로 장강수로채의 수장이 되었으며, 중원 무림에서 탯줄과도 같은 장강을 차지한 수룡왕의 기세는 점차 커졌다.
독.
그래, 독 따위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중독되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에 이놈을 갈기갈기 찢어서 사어들의 먹이로 줘 버리리라.
알싸한 독 맛에 사어들이 제법 죽어 나가겠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당백진의 비수 여섯 자루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그어지는 파건량의 손아귀에 맞춰 쏘아진다. 빠르게 나아가는 비수들의 길에 엷은 빛무리가 일었다.
가공할 정도의 빠르기와 신속함을 담아서 수룡왕의 압박에서 벗어나 대번에 그를 관통시키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비수들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수룡왕의 몸은 오히려 더욱 다가서면서 양손으로 허공을 찢어발긴다.
찌지지직!
맹렬하게 다가오는 비수들의 가공할 속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쇄애애애액!
드디어 수룡왕에게 닿았다고 판단한 그 순간!
우웅.
회전하는 속도가 다시금 현격히 줄어든다.
“학습 능력이라고는 없는 새끼, 나한테 비수 따위가 통할 거라고 여기는 것인가……!”
그리고 바로 그때.
수룡왕 파건량의 두 눈이 갑자기 커졌다. 비수의 끝을 보았기 때문이다.
퍼엉! 펑펑펑!
비수들 끝에 달린 독주머니가 회전을 멈춤과 동시에 제각기 터져 나갔다.
무려 다섯 자루의 비수가 폭발적으로 비산하자, 그에 따라 독무(毒霧) 역시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흥! 이따위 걸 비장의 수라고!”
수룡왕이 진각을 밟았다.
쿠웅!
굉음과 함께 다가오는 독무의 전진을 막아섰고, 몸을 빼는 파건량이었다.
우웅!
“회심의 일격. 뭐 그런 거였으려나?”
이제 당백진의 주변을 맴도는 단 한 자루의 비수를 제외하고 그를 지켜 주는 것은 없었다.
“어쩐다. 좀 더 일그러진 만독암제의 모습을 내 눈에 각인시키고 싶은데.”
“……이거야 원,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 건가.”
파건량의 말마따나 당백진이 일순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상황대로 풀리지 않으니 얼굴이 일그러졌으리라.
“그래. 마지막 유언 정도는 내 기억해 둘 테니 뭐라고 말하려나.”
“애송이들한테 남길 말은 없는 거냐? 애석하여라. 비통하여라. 관주란 놈이 애들한테 이렇게 관심이 없어서야.”
“……후후.”
파건량의 호들갑에 당백진이 미소를 짓는다.
우웅!
그러고는 당백진의 주위를 맴돌던 비수 한 자루가 딱 하고 멈추더니 파건량을 직시한다.
“뭐, 고작 한 자루로 날 어떻게 해 보겠다고? 구차하네, 정말.”
비수의 끝에 담긴 녹빛의 기운이 점차 짙어졌고, 파건량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괜히 힘 빼지 말라는 신호까지 보낸다.
“어차피 안 될 걸 알면서 왜 그래?”
쇄애애애액!
“넌 나를 뚫지 못해.”
마치 물 위를 나는 제비처럼 날쌔고 세차게 비수가 녹빛의 선을 그리며 쏘아진다. 그 비수를 바라보던 파건량은 한껏 여유로웠다.
마지막 수다.
저것만 막아 내면 당백진에게 더 이상 남은 수는 없다.
그러니 저, 남은 찌꺼기 같은 희망을 아예 눈앞에서 깨끗이 지워 주리라.
후우우웅!
찌직!
수룡왕 파건량의 오른손에 선연한 살기가 감돌더니, 아래에서 위로 그대로 그어 올렸다.
가공할 기운이 순식간에 압축되었다가 터져 나가면서 손가락의 형상에 맞춰 눈앞에 있는 공기가 찢어졌다.
아니.
찢으려고 한 순간.
푸슈욱!
이게 대체 무슨?
파건량의 움직임이 딱 멈춘다.
천천히 고개가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 가슴을 관통하고 저 멀리 나아가는 녹빛의 기운에 감싸진 비수를 바라본다.
움직임이 더 빨라진 것도 아닌데, 갑자기 멈출 수가 없었다니.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당백진을 바라본다.
“……상처는 독에 치명적이지. 아까 분명 고맙다고 한 것 같은데.”
그러면서 당백진의 시선이 한곳에 머무르자, 파건량의 시선 역시 그를 따라 움직인다.
다름 아닌 자신의 옆구리였다.
파건량의 옆구리를 관통했던 상처 주위가 검게 변해 있었다. 아무런 고통도, 제약도 주지 않았던 이 상처가 어떻게……!
“독이라는 게 참 요상하지. 이래서 참 재밌고.”
꿀럭꿀럭 솟구치는 핏물이 구멍 난 가슴으로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갑작스럽게 퍼져 나오는 독의 향연에 파건량의 몸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아직 안면 근육을 움직일 수 있는 파건량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 설계됐던 건데?”
“처음부터.”
“방심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본인이 방심을 안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자 방심을 하기 가장 쉬운 순간이지. 사람은 늘 방심하기 마련이거든.”
파건량은 입을 쩝 하고 다시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
“할 말은?”
“무슨 할 말?”
“말했잖나. 아까 전엔 남길 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더니.”
수룡왕 파건량은 점차 파래지는 안색으로 허공을 한 번 훑더니 까딱거리지도 않는 손을 보기 위해 눈을 겨우 내리깔아야 했다.
“향이, 송이 엉덩이나 만지고 싶네. 참 기가 막혔는데.”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하겠지?”
당백진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지친 표정으로 고갤 저었고, 파건량은 어느새 자신의 몸을 잔뜩 휘감은 독기에 중독되어 입조차 뻐끔거리지 못하게 되었다.
발작적으로 움직이는 그는 초인이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심장이 관통당한 이상, 대라신선이 온다고 해도 그를 살려낼 순 없을 터.
털썩.
그리고 그 생각을 끝으로.
장강을 호령하고, 사파 제일을 노렸던 수룡왕 파건량은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치렁치렁하던 머리칼은 지독한 독기로 순식간에 빠져 버렸고, 탄탄하던 몸은 칠십 대의 앙상한 노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당백진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야단났군. 한 소리 듣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