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제228화
쓰러진 악교운과 담진을 둘러업은 소화진과 배단아, 그리고 이백과 진량이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 수룡왕과 만독암제, 즉 파건량과 당백진의 격전을 지켜봤다.
이를 질끈 깨문 담진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도우러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후웁, 후웁.”
파건량의 손바닥 한 방에 가슴팍이 거의 으스러진 담진이 겨우겨우 가쁜 호흡을 했다.
“돕자고요? 방해하자는 게 아니고?”
“저기에 끼어들면 관주님이 우리 때문에 더 곤란해지는 거 몰라요?”
초절정의 고수라는 경지가 무색해진다.
혹독한 수련을 거쳐 오른 지고한 경지였으나, 저곳에서 보이는 두 사람의 격전은 초인(超人) 간의 대결.
감히 어쩔 방도가 없었다.
그저 당백진이 이기길 기원하는 방법밖에는.
바로 그때.
“악 교관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소화진의 등에서 한 움큼의 피를 쏟은 악교운이 겨우 정신을 차리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전을 바라보더니 상황 판단이 끝난 표정으로 입을 연다.
“멍청하긴.”
대뜸 멍청하다고 일행에게 일갈한다.
“예?”
“진천뢰를 파괴하러 가야 한다.”
“……하지만 악교관님.”
“하지만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한다. 관주님을 직접적으로 도울 수 없으면 다른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게 맞다.”
그 말에 소화진과 배단아, 이백과 진량.
그리고 수룡왕의 일장에 가슴팍이 함몰되어 겨우 숨만 몰아쉬고 있는 담진까지 모두 악교운을 바라본다.
“배 교관은 담 교관을 데리고 복귀한다.”
“알겠습니다.”
“화진, 이백, 진량, 몸이 성한가?”
소화진은 몸이 가장 성했다. 그렇기에 그는 용기백배하여 대답했다.
“예!”
이백과 진량 역시 대답한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 상태였지만, 쓰러질 수 없었다.
“거뜬합니다.”
“안 그래도 찝찝했는데, 잘됐죠.”
세 생도의 용기백배한 대답에 악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윽 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은 소화진이 입을 뗐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악 교관님은 가장 후미에, 이백과 진량이 각각 허리에서 중심을 잡는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예에, 선배가 그리하자면 해야지 뭐. 후배가 뭔 힘이 있나.”
“……움직이자.”
그러면서 다들 불을 뿜어대는 진천뢰를 바라봤다. 포격이 무차별적으로 쏘아지며 사방을 초토화시킨다. 마치 사천 전체를 초전박살을 내겠다는 듯이.
대체 사정거리가 얼마나 길면.
“……당장이라도 사천무관까지 진격할 기세로군. 진천뢰만으로도 사천무관을 초토화시키겠어.”
“거기다 한 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교관님.”
“적어도 세대. 많으면 다섯 대. 제법 시간이 걸리겠어.”
생각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결론을 내린 일행은 땅을 박차고 움직였다. 배단아와 담진은 사천무관으로 이동했고, 일행은 전력으로 불을 뿜는 진천뢰를 향해 달려간다.
타다다다닥!
그리고 그때.
“응?”
“어?”
“뭐야.”
“너도?”
“어, 설마 선배도?”
소화진과 이백, 진량을 비롯한 악교운이 용트림을 해 대는 진천뢰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만난 일행은 다름 아닌 녹림을 상대하러 간 8기수로 구성된 이들이었다.
“그럼 저기엔 누가…….”
태강의 물음에 이백이 나직이 이야기한다.
“관주님.”
“아아, 역시 그렇구나.”
“그럼 저기는 역시……?”
“말해 뭐해요? 사람 새끼 아닌 놈이지.”
“하긴, 수룡왕도 사람 새낀 아니더라.”
“벽력왕은 더하던데요?”
태강과 이백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사방에서 가공할 만한 위력을 뿜어내는 네 명의 절대 고수의 힘을 절실히 느꼈다.
이미 무형노괴와 천무린의 싸움에서 진즉에 느낀 바가 있는 두 사람도 있었다.
“그땐 우리가 너무 무지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특히, 설화린과 당지혜가 느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전에는 무력한 자신을 욕했지만, 지금은 그 격전에서 본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무한한 감사를 느낄 정도였다.
몰랐기 때문에 운남혈투, 그 격전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 있었다. 자칫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조차 그 무위의 수준으로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벽력왕 정말 강하던데, 이길 수 있겠지?”
“……말이라고.”
“미안.”
그리 말한 일행이었지만, 곧바로 사과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천무린이 패배한다.
혹은 천무린을 걱정한다.
두 문장은 말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일맥상통했다. 적어도 일행에겐 그랬다.
그와 함께 지내 오면서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 낸 일행이다. 그 덕에 초인적인 인내력과 드높은 무위를 얻었다.
그리고 그런 오십여 명의 고수들을 키워 낸 장본인이 천무린이다.
오십여 자루의 칼부림을 매일같이 감내하면서 오히려 몰아붙인다.
미래에 대한 불안.
강해질 수 있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
할 것을 하지 않으면서 하는 막연한 고민.
성공했을 때의 자신의 모습보다 실패했을 때를 두려워하게 되는 흔들림.
「 어쭙잖은 대가리로 자신의 범주를 정한 자들이 최선을 다한다고, 다했다고 말하는 건 어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이야기다. 」
남만의 폐관 수련에 들어가면서 꺼낸 천무린의 이야기는 오십여 명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 최선을 다하면 흔히 한계를 깰 수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족할까. 」
담담히 꺼낸 천무린의 검 끝이 살랑이며 움직였다.
「 한계를 깨고, 다시 또 깨고. 밤잠을 설쳐 가며 또 깨고. 그렇게 깨고 또 깨나가는 그것이 너희들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나는 이렇게 불러. 」
살랑이던 검 끝이 멈추자, 순간적으로 하늘에서 검이 만들어 낸 검로(劍路)가 눈에 들어왔다.
혼신(渾身).
그리고 일행들의 눈에 그 검로가 눈에 들어오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혼신이라는 두 글자가 일행에게 비로소 새겨졌을 때, 남만에서의 폐관 수련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수련을 직접 진두지휘한 녀석이 다름 아닌.”
“그 사람 새끼 아닌 놈이지.”
태강과 황태의 말에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닌 말로 놈을 걱정하는 건.”
“우리를 무시하는 거라고 할까.”
백리무영과 백리후가 담담히 이야기를 꺼냈다.
“고로.”
악교운이 일행을 쭉 훑더니.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지난 폐관 수련에서 겪은 것처럼 최선을 다해. 아니, 혼신의 힘을 다해서.”
“예!”
* * *
천지를 부숴 버릴 것 같은 일격에 벽력(霹靂, 벼락)의 힘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 힘에는 수십 년간 쌓아 온 사파 제일의 자부심 역시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일행 중 어느 누구라도 봤다면 주먹을 움켜쥐고 식은땀을 흘리며 바라보거나 달아났을, 실로 위력적인 주먹질이었다.
그런 주먹질을 눈앞에서 보는 천무린은 어떠한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방어도, 회피도 아닌 그저 막연한 눈빛만이 그 주먹에 대한 답인 것처럼.
하지만 벽력왕은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주먹질 한 방으로 천무린의 온몸을 단숨에 육편으로 만들어 버리리라.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보여 주리라.
무형노괴를 꺾었다던 애송이는 벽력왕의 주먹질 한 방에 한 줌의 핏물로 산화되었다고.
사천무관의 당백진을 쳐 죽이고, 창천검존을 박살 내서 정파 무림은 더 이상 사파 무림을 향해 고개조차 못 들도록 만들어 주리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늘어져 있던 천무린의 주먹이 승천(昇天)하듯 마주 올려 친다. 찰나의 순간에 쇄도하는 주먹에 벽력왕은 팽팽하게 당겨진 육체에 더욱 힘을 주었다.
퍼억!
여태 들려왔던 벽력의 소음과는 달리 둔탁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들렸다. 천무린이 올려 친 승룡권 정도로는 벽력왕의 진력을 고스란히 담은 주먹에 못 미친 것이다. 맥없이 힘이 풀린 천무린의 주먹이 다시금 움켜쥔다 싶더니.
쾅! 쾅! 쾅!
보다 빠르게.
더욱 빠르게.
떨어져 나가는 주먹에 담긴 힘이.
미미하기 그지없었던 주먹의 힘이.
폭음을 만들어 내면서 벽력왕 주먹의 진전을 막아 낸다.
눈으로 좇을 수도 없는 빠른 속도의 주먹에 담긴 거력을.
똑똑히 지켜보면서 그 주먹을 향해 난타한다. 그저 은은하게 담긴 청명한 기운의 주먹으로.
쾅쾅쾅쾅!
마주할 때마다 벽력왕의 주먹에 담긴 거력이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깎여 나간다.
단단한 껍질로 둘러싼 새하얀 속살이 드러나듯, 벽력왕이 평생을 쌓아 온 기운이 깎여 나가면서 벽력의 기운이 해소될 때.
비로소 그의 주먹이 갖고 있는 민낯이 보였다.
전력으로 뻗어간 주먹이.
그의 주먹의 반의반도 안 되는 조막만 한 주먹에 적중되어서는.
빠각.
손목이 뒤틀리는 충격을 받았다. 벽력왕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진다.
하지만 그의 이성보다 본능이 더 앞섰다.
뻗어 간 오른손이 제 기능을 상실한 것을 느끼자마자 회수하며 반대로 왼손을 뻗어 간다. 더 이상 밀리게 되면 벽력왕에게 주어지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하지만.
“느려.”
빠각!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뻗어 오는 주먹을 향해 유령처럼 다가선 천무린이 새하얀 이를 보인다. 더없이 새하얀 이를 보자 벽력왕의 전신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적어 갔다.
왼손마저 기형적으로 뒤틀리며 부러졌다. 너덜거리는 주먹에 발작처럼 기함한 벽력왕이 오른발을 구르며 왼발로 그대로 걷어찬다.
“흐으으으랴아아아압!”
다리를 뻗어 낸 우레와 같은 기운이 땅거죽을 모조리 뒤집는다. 왼손과 오른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물러나는 일이 없는 벽력왕은 역시 벽력왕이었다.
누가 말했던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눈앞의 이 인간에게 두 손목이 부러졌다고 한들 무너지지 않는 사파 제일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벽력왕은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그 다리를 마주해 오는 천무린의 얇디얇은 다리.
빠각!
부딪친 충격에 벽력왕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까뒤집으며 몸을 덜덜 떨었다. 두 손이 부러지고, 이젠 자신을 지탱하는 다리 하나마저 고장이 났다.
“……으어어어.”
빠각!
틈을 주지 않고 천무린이 남은 다리를 걷어찼고, 두 다리가 부러진 벽력왕이 그대로 무릎을 털썩하고 꿇었다.
‘……도, 도대체.’
벽력왕으로 인해 천지사방이 모조리 쑥대밭이 되었다. 자라나던 잔디와 푸성귀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들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아름드리나무와 잘 닦인 도로는 이미 모래와 자갈, 흙 따위로 뒤덮여 알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무려 백 장 가까이 말이다.
자연마저 이러할진대.
대체 그런 위력의 주먹을 맞이하면서 한 차례도 물러나지 않는 이놈은…….
“니들 돈 많냐? 왜 애꿎은 땅에다가 X랄이야. 뭐? 돈이 없다고? 안 되겠다. 녹림 쳐들어가서 1전 나올 때마다 산적 새끼 목 하나씩 따야겠다.”
이렇게 삥을 뜯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