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제222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는 이들이 있는 막사 안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크하하하하하.”
“큭큭큭.”
사천전선에 대치해 있는 녹림칠십이채의 산적들을 이끄는 두 사람.
혈웅채의 혈웅사자(血熊使者)와 광우채의 광혼마도(狂魂魔刀).
두 사람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니까 거산도가 지금 꽁지 빠지게 후퇴하고 있다는 말 아니오.”
“큭큭큭, 벽력왕의 총애를 받더니 결국 정신적으로 해이해진 것이지. 고작 무관 애송이들에게 무너졌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오.”
“이제야 다시 균형이 잡히는구먼. 진작에 이랬어야지. 이제는 벽력왕도 거산도에게만 편의를 봐주는 일은 사라질 테지.”
혈웅사자 조웅과 광혼마도 상환.
두 사람은 일찍이 후계자 다툼에서 거산도 전위에게 밀려난 이들이었다. 거산도 전위와 비교해 무위는 큰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녹림 수하들을 부리는 것이 서툴고 거칠어 군주가 될 그릇이 아니라는 벽력왕의 일갈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어디까지나 벽력왕이 전위를 총애하기 때문이라고 여긴 두 사람은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벽력왕의 눈이 잘못된 것이지. 아무리 그래도 녹림의 수천 동도를 다스리는 자리를 어찌 그 애송이 놈에게 물려준단 말이오. 말이 안 되는 소리지.”
“암, 그렇고말고! 그놈의 손에 맡기는 게 어디 말이 된단 말이오. 무관의 애송이들에게도 무너지는 놈인데 말이야. 큭큭큭.”
두 사람의 앙천광소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아차, 산동에서 지원군이 온다고 들었소이다.”
“산동이라, 남궁도인가.”
광혼마도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머릿속으로 남궁도를 떠올렸다. 젊었을 적에 남궁도와 붙어서 생긴 옆구리의 상처가 여전히 욱신거렸다.
겨우 살아남아 도망쳤던 기억이 광혼마도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상관없소. 남궁도가 오기 전에 이곳 모두를 불태워 버릴 테니. 우리는 전선에서만 우위를 차지하면 될 것이오. 벽력왕께서 오셔서 이곳 전장의 우위를 직접 보시고 판단하시면 될 테니.”
“그렇지. 거산도보다 나은 공적을 쌓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눈도장을 찍읍시다.”
“저어기, 저 옆에 대치하고 있는 수적 놈들에게 공로를 뺏기지 않도록 긴장을 절대 풀지 말아야 할 것이오.”
“그래서 내일이라도 당장 움직일 생각이오. 더 이상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끄는 것도 지겨우니 말이오.”
“아주 좋은 생각이오. 수적 놈들보다 빨리 움직이고, 거산도보다 큰 공을 세우기 딱 좋으니.”
행복회로를 열심히 돌리고 있는 두 사람이 다시금 술잔을 기울이던 그때.
촤락!
막사 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온 산적이 사색이 된 얼굴로 외쳤다.
“채, 채주!”
그 반응에 두 채주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냐?”
“저, 적습입니다!”
적습?
사천무관에 적습을 할 전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혹 있다고 하더라도 큰 위협이 될 리 없었다.
혈웅사자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고작 놈들이 적습을 했다고 이 난리를 친단 말이더냐! 고작 식량이나 불태우려고 그러는 것이겠지. 놈들이 시간을 벌려고 하는 수작일 뿐이다!”
그 말에 산적이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그, 그것이 아니라……!”
다급하게 답하는 산적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콰앙!
낙뢰라도 떨어진 듯 고막이 얼얼해지는 굉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 굉음을 들은 순간, 두 채주는 몸을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선 후 산적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크아아아아악!”
“도, 도망쳐라! 도망쳐!”
“으아아아아!”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주독(酒毒)을 단숨에 몰아낸 두 채주가 전황을 살핀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실제로 적습을 해 온 이들의 전력은 고작.
“……스무 명?”
그렇다. 고작 스무 명에 불과한 전력에다 하나같이 얼굴이 앳되다.
젊디젊은 청년과 여인들.
그런 이들이 산적들을 상대로 한바탕 난리를 치고 있었다.
혈웅채와 광우채의 전력을 모두 더하면 삼백이 넘는다. 그런 곳에 고작 스무 명이 침입해 어지럽히다니.
“갈!”
혈웅사자의 눈에 흉포한 노기가 어렸다. 터져 나오는 사자후에 혼비백산하던 산적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 새끼들아! 정신 똑바로 차려라! 놈들은 애송이에 불과하다!”
혈웅사자에 이어.
“모조리 찢어 죽여라! 저놈들의 목의 개수마다 십 금자씩 하사하겠다!”
광혼마도가 조건을 내걸었다. 정파 무림인이라면 목숨이 걸린 일에 돈을 건다는 사실에 절로 눈살을 찌푸렸겠지만.
멈칫.
그 말에 산적들의 두 눈은 욕심과 광기로 번들거리더니 물러나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적습을 해 온 사천무관 일원들을 향해 몸을 돌린다.
“십 금자다! 십 금자!”
“십 금자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새끼들아! 모조리 생살을 찢어 씹어 먹어 주마!”
광기가 폭발하더니 그때까지 유린당하던 산적들이 갑자기 살기를 내뿜었다. 그러자 그 광기를 지켜보던 한 청년이 목을 풀더니 입가를 비틀었다.
“……킥.”
산적들의 두 눈에 깃든 광기보다 더한 광기가 청년, 황태에게 깃들어 있었다.
군데군데 이가 나가 있는 무딘 검을 어깨에서 들더니 산적들을 향해 쇄도했다.
쇄애애애액!
콰직! 콰직! 콰드드득!
빛살처럼 움직이면서 산적들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라 무딘 검으로 잡아 뜯어 버린다.
“죽어도 곱게 죽지 마라. 감히 사천을 농락한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산적들은 거침없는 황태의 과격한 몸놀림에 깃들어 있는 광기에 놀라 움찔거렸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저리 광기 어린 잔혹함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정파 무관의 생도라기보다는 사파에 가까운 광기가 아닌가.
그뿐 아니라.
촤르르르륵.
검 끝에서 피어난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매화의 꽃잎이 산적들의 두 눈을 현혹시킨다. 사뿐히 내려앉은 듯한 매화의 꽃잎이 산적의 어깨에 닿을 때쯤.
서걱.
“크아아아아아아아!”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고통스런 비명.
그 꽃잎 하나에 평생을 함께해 온 오른쪽 어깻죽지가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수많은 꽃잎이 피어나기 시작한 두 청년의 사방에 매화의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서걱! 서걱! 서거걱!
마치 자아를 갖고 있기라도 한 듯 매화의 꽃잎이 나풀거리며 산적들을 마구 유린하기 시작했고, 현란하기 그지없는 꽃잎의 움직임에 현혹되어 제대로 된 환검에 반응하기도 전에 산적들은 목숨을 잃어 갔다.
“내 발목을 잡으면 너부터 베어 버릴 것이다. 아우야.”
“누가 아우래. 고작 일각 일찍 태어난 주제에.”
백리무영과 백리후, 매화쌍절이라 불리는 두 형제가 본격적으로 검을 들어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화려하게 펼쳐 냈다.
그뿐 아니라.
타다다다닥! 부우웅!
한 사람이 산적 한 명의 어깨를 밟고 허공에 높이 뛰어오르더니 원심력과 무게중심을 이용하여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속력을 더한다.
퍼버버벅!
빠각!
그리고 뻗은 발로 산적들의 턱주가리를 그대로 돌려 버렸다. 그런 후 다음 산적들에게로 발을 뻗어 허공에서 내려오지 않은 상태로 산적들 사이를 빠르게 오간다.
태강의 현란한 각법에 산적들은 검을 허공에 뻗었으나 그는 뛰어오른 탄력으로 허공에서 몇 바퀴나 회전하며 이를 피해 냈고, 유려한 발차기를 이어 가 밟아 버린 어깨를 탈골 시켰다.
“으, 으어어억!”
“컥!”
“억……!”
턱주가리가 돌아간 산적들은 하나같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다.
태강이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던, 육중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표홀한 움직임을 선보이는 근육질의 청년이 봉에 빛바랜 기운을 응축하더니.
“으랴아아아아아!”
기합과 함께 휘둘러지는 봉을 막으면 막는 대로 산적들의 검과 도, 도끼들이 맥을 못 추고 그대로 부서져 버린다.
쾅! 쾅! 콰직!
청성파 출신의 명진이지만, 소화진과는 전혀 다른 무공을 뽐내는 그의 절기는.
붕붕! 부웅!
육중한 곤봉이 그대로 바람 소리를 가르더니 산적들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타고난 능력과 단련된 근육에서부터 발휘된 힘은 곤봉에 고스란히 실리더니.
콰직!
봉신곤(封神棍)을 휘둘러 순식간에 산적들을 쓸어버렸다.
“멋있는 척하기는!”
타다다닥!
황태, 백리무영과 백리후, 태강, 명진에 이어 진무양이 검을 가슴팍으로 끌어올리더니 원을 그린다.
그러고는.
후우웅!
달려드는 산적들을 지나치는 진무양의 검 끝은 유연하고도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위력은 부드럽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음과 양, 하늘과 땅의 기운을 하나로 합하여 태극의 기운을 고스란히 담은 태극혜검이 산적들 사이를 오간 그의 검결에.
스스슷!
“컥!”
“크으…….”
“마, 말도 안…….”
순식간에 예닐곱 명의 산적들이 절명하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뿐 아니라.
쩌저저적!
북풍한설(北風寒雪)과도 같은 한기를 사방으로 진동시키는 설화린의 빙백신장이 쏘아져 나가더니 달려들던 산적들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쩌저적.
얼어 버린 그들에게 설화린이 다가가 가벼운 손놀림으로 그들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산적들의 모습에 그 옆에 서 있던 산적들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아! 사, 살려 줘!”
“살고 싶어! 제, 제발!”
“아, 안 돼애애애!”
몸을 돌려 도망가려는 그들은 순간적으로 훅! 하고 들어오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화르르르륵!
작열하는 태양에 닿은 것처럼 순식간에 몸이 화상을 입기 시작하더니.
“어딜 가려는 것이오. 아니 될 일이지. 산적 나부랭이는 여기서 모조리 죽어 마땅하니까.”
적화객 남사익의 등장으로 도망가려던 산적들은 발끝부터 불타오르더니 마침내 호흡조차 가빠져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그대로 쓰러졌다. 마치 사막에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목이 타서 죽은 이들처럼.
“나 원 참, 이렇게 되면 내가 할 일이 없어지는걸.”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피핏!
뱀의 유연한 몸놀림처럼 요사스럽고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 주는 빛살이 낭창하게 산적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낭소소의 연검이 산적들을 파고들며 정확하게 목젖만을 노리는 잔혹함을 보였으나, 낭소소의 눈빛에서 흔들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무, 무슨 여자애의 검이 이리도 살기가 가득……!”
“여자애? 여자애애~? 미쳤구나, 이 새끼들이.”
낭소소의 두 눈이 살벌하게 빛나더니 입을 열었던 산적을 마구 난도질하여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들었다.
“흥!”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무린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옆에 서 있던 당지혜를 바라봤다.
“……왜 저래?”
“흥. 왜 저러긴. 소소가 잘한 일이지.”
“……그렇구나. 미안.”
“그나저나 저 인간들 도망가는데?”
당지혜의 말에 천무린의 시선에 들어온 두 사람.
혈웅사자와 광혼마도가 흘러가는 양상을 보더니 그만 사색이 되어 슬그머니 몸을 빼고 있었다. 자신의 수하들을 희생시키면서.
씨익.
“아이쿠야, 이거 어쩌나. 도망갈 궁리를 하는 새끼들한테 내 주먹은 자비가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