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제221화
개방의 방주인 협견(俠犬)은 수천 명의 거지들을 이끄는 수장이자 개방의 주인이다. 그런 그가 십여 년 전 이후로 오늘 가장 큰 소리를 내었다.
“……검마대주 초우량이 이끄는 검마대뿐만 아니라 혈영대, 마궁대가 모두 북해로 향했으며!”
“사검대, 묵검대, 적파음대가 남해로 움직였습니다, 방주!”
“……이에 맞춰 북해의 빙천검 설종량 궁주는 미리 전선을 펴기 위해 빙천검대를 움직였다고 파악되었습니다만! 북해의 추위에 더 다가갈 수가 없어서…….”
“남해태양궁주 태양천자 남선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그 아래 남해태양궁 무사들은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정도만 확인되었습니다.”
“섬서무관 기수들 중 최정예 기수들이 모두 차출되었으며, 이를 검왕 청강진인이 직접 이끌고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소림의 십팔나한과 무당의 태극검수, 화산의 매화검수, 종남의 유운검단까지 뒤따르고 있습니다.”
“산동무관의 창천검존 남궁도 관주를 필두로 남궁의 창천검대와 모용, 황보, 팽가에서 차출된 최정예 무사들이 직접 사천과 대치 중인 전선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차 한 잔조차 마실 여유가 없을 정도로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듣고 중원 무림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전달하는 건데, 제대로 된 정보로 갖춰서 와야 할 거 아니야!”
협견의 고함에 보고를 하던 개방의 장로들조차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보가 무의미해질 정도입니다. 지금은 속도전 아니겠습니까.”
“에잇, X! 갑자기 왜 전쟁을 하고 X랄이야!”
“…….”
으르렁거리는 협견이었지만, 그의 두 눈은 거친 욕지거리와 다르게 차분했다.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개방 방주의 혜안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마교와 사파가 손을 잡았다. 즉, 한 세력으로 묶어서 봐야 한단 이야기가 되겠지.”
변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마도와 사도를 따로 볼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힘을 합쳤다는 것.
두 세력은 광기(狂氣) 그 자체다.
그런 세력이 어떻게 하나로 뭉칠 수 있었을까.
“천마신교는 여전히 천마의 부재로 인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을 텐데, 이것이 어찌 가능했단 말인가.”
협견이 아는 한, 천마신교는 기형적인 구조를 가진 세력이었다.
천마가 없으면 천마신교는 가진 절대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힘을 낼 수 없다는 것. 천마가 죽거나 사라지면 다음 천마가 등장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런 기형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의 천마신교이니만큼 지금 그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방주.”
“왜?”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타구봉으로 좀 맞아 볼래?”
“……마황 갈천중.”
“응?”
“그자가 직접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고 개방의 분석조에서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협견의 눈빛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황 갈천중.
천마신교의 인물들 중 가장 파악하기 까다로운 작자를 꼽으라면.
‘천마 천무린이 아니라 마황 갈천중이다.’
정마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천마가 직접 일으킨 천마신교의 군대는 말 그대로 검은 물결이자 거센 파도였다.
막을 수 없는 저력을 보여 주어 정파 무림을 마구 난도질을 했고, 천마의 위엄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정파 무림 네 명의 최고수를 상대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대해 자신하는 아주 호쾌한 작자였다. 걸어오는 승부는 절대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맞선다.
그의 절대적인 무력이 변수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속내를 읽지 못할 작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에겐 그런 모습이 그를 파악하기 좋았지.’
거기다 천마 천무린 아래 여섯 명의 장로 역시 자신들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었다.
무형노괴는 자신의 색욕에 눈이 뒤집혀 구파일방 중 아미파를 멸문 직전까지 몰아갔을 정도였고.
구유비마는 정파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경공을 펼친다는 곤륜의 운룡대팔식을 견식 하고 싶다며 곤륜파에 홀로 쳐들어갔다.
그처럼 천마신교는 무력에서만큼은 압도적인 강함을 보였으며, 그런 만큼 자신들의 무위와 성향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마황 갈천중은 다르다.’
직접적으로 본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부교주이자 마황이라 일컫는 갈천중은 천마 천무린의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혼란스런 천마신교를 수습하면서 뒤로 물러나 보여 준 모습이 전부였다.
“……후우, 그런 마황이 직접 천마의 자리에 오른다.”
제 실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천마의 자리에까지 올라설 수 있는 무력이라면.
협견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가장 까다롭고 곤란하다.
“개방의 모든 동도들에게 전해라! 사파와의 격전에 3할, 정파에 2 할, 그리고 나머지 5할은 모두 마교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힘쓰라고!”
협견의 외침에 개방의 장로들은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 * *
“……젠장.”
입에서 절로 나오는 욕지거리를 뱉어낸 청년은 언제 잠을 제대로 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연이은 전투에 몹시 지쳐 있었다.
“평지, 조금이라도 자고 오도록 해라. 여긴 내가 지킬 테니.”
“아! 교관님.”
사천무관 5기수 임평지는 핼쑥해진 얼굴로 정면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 준 이는 다름 아닌 사천무관의 부교관 자겸이었다.
“아닙니다. 어찌 제가…….”
“자네가 조금이라도 자고 와야 다른 이들도 편히 쉴 거다.”
“……알겠습니다.”
피로가 누적되어 자신이 몸을 이끄는 건지, 몸이 자신을 이끄는 건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지친 상태로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는 임평지였다.
그런 그가 사라지고 난 뒤에 자겸은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정면을 바라봤다.
대치 중인 전선의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자겸의 온몸 곳곳에 핏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욱신거리는 상처뿐 아니라, 그가 상대한 산적과 수적의 핏물도 고스란히 옷감이 빨아들인 흔적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쳐들어오는 산적과 수적의 공세에 맞서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극적이기만 했던 공세가 갈수록 거세지니 사천무관 기수들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저벅, 저벅.
그런 자겸에게 다가온 인물이 있었으니.
“……자네도 좀 쉬어야 되지 않겠나.”
부교관 고윤이 말했다.
“아이들이 너무 많이 지쳤네.”
“……그렇지.”
고윤 역시 이 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사천무관의 전력으로는 그저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반격은커녕 제대로 된 방어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천무린이 정리해 버린 장로들 한 명, 한 명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사천무관 8기수와 7기수, 5기수 중에 정예로 꼽히는 이들은 죄다 차출되어 운남으로 향했고, 악교운과 담진, 그리고 배단아마저 빠진 상태였다.
고작 그 정도의 부재가 그리 큰 차이를 낳겠느냐고 하겠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치니 그들의 부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청성파, 그리고 당가에서 지원을 와 줘서 그나마 버티고는 있지만 그조차도 힘들지 않은가.”
“놈들의 대가리 수를 보게. 그나마 청성에서 보내 준 청운적하검대와 당가에서 암기에 능한 사람들이 대거 투입되어 공방을 오가고 있는 것이지만.”
이젠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한 주먹에 부서질 모래성처럼 위태위태하기 그지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 산동에서 이쪽으로 지원을 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게 더 문제일세.”
“무슨 뜻인가?”
“그들이 어디 좋은 뜻으로 여기에 오는 것이겠나. 그들이 사천의 양민들을 걱정한다고? 전혀!”
자겸은 콧김을 뿜어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올 거면 진작에 왔었어야지, 이제야 지원 온다는 의미가 대체 무엇이겠나. 영웅 놀이라도 하겠다는 심산이겠지.”
“…….”
고윤 역시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파 무림은 아직까지 하나가 되지 못했다.
“……어쩌겠나.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지. 우리가 먼저 자존심을 내려놓으세. 도와준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지.”
고윤과 자겸의 한숨이 깊어졌다.
무겁게 드리워진 밤하늘의 그림자처럼.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똑같이 지루한 공방전이 펼쳐질 거라고 여겼던 고윤과 자겸의 눈앞에.
“……허 참, 여전하네, 여전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제까지 퍼질러 잘 거예요?”
“……이, 이 목소린?”
“설마……?”
찰싹, 찰싹.
멍해진 머릿속에 겨우 정신을 차린 두 부교관은 정면을 바라봤다.
“뭐야, 자고 있었어요? 이래 놓고 어디 생도들이랑 후보생들이 맘 편하게 쉬겠어요? 나 원 참.”
낯익은 목소리에 낯익은 미소가 보인다. 경박스럽기 짝이 없는 말투에다 장난기 어린 표정이 이토록 반가울 수가 있을까.
“……처, 천무린 생도?”
“정녕 천무린이 맞는가.”
“아직도 꿈에서 못 깨셨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맞이한 천무린의 모습에 부교관 두 사람과 다른 기수들이 설마 하는 얼굴로 하나둘 모여든다.
“아니, 다들 밥도 못 먹고 살았나. 무인은 밥심인데, 뭘 먹지도 않고 산 거야, 뭐야? 다들 하나같이 죽상이네. 설마 저 도적놈의 새끼들한테 밀려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죠? 쪽팔리게.”
그의 말에 하나둘 얼굴에 생기가 되살아난다. 죽어 있던 눈빛이 천천히 살아난다. 그제야 깨닫는다.
천무린이라는 존재가 등장만으로도 그들에게 크나큰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천둥벌거숭이 같은 천무린이 등장함으로써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고윤과 자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 온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언제 온 것이냐?”
“아유, 뭐 어디 산동 나부랭이 새끼들이 와서 거들먹거릴 것 같다고 소식을 들어서요.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까지 그런 꼴은 못 보지. 여기 있는 선배들과 교관님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내가 아는데 말이야.”
시원스럽게 한 번 웃어 준 천무린의 뒤로.
저벅, 저벅.
“그간 고생 많았다. 자겸, 고윤. 그리고 모두들.”
악교운이 등장했고.
“다들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잘하고 있었던 것 같네. 하하.”
“어유, 담 교관님도 참. 애들 피죽도 못 먹어서 골골대고 있는 거 안 보여요?”
검귀 담진과 배단아가 나섰으며.
“아직까지 날 뛰어넘는 녀석은 없는 것 같군.”
5기수이자 사천무관 제일의 후기지수라고 평가받던 소화진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뿐 아니라.
“고맙습니다. 여러분. 잘 버텨 줘서.”
“흥! 이제야 제대로 활약을 할 때인가.”
사일검룡 이백과, 진량이 차례로 등장했다.
“음, 이번에는 우리가 주인공 자리를 빼앗긴 거 같은데.”
“……어쩌겠어. 우리가 막내잖아.”
8기수들이 우르르 등장한다.
“자, 자.”
천무린이 고갤 돌리더니 입가를 비틀었다.
“재회 인사는 이쯤 해 두고 본격적으로 움직이자고요. 우리 무관은 우리가 지켜야지, 다른 놈들 공 세우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어떻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