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제220화
“정말로 마교가 움직이는군요.”
“제발 그 존대 좀 안 하면 안 되나요? 어색하잖아요.”
“……주군.”
“아니, 그러면 족보가 꼬인다니까요.”
천무린이 신창을 힐끗 쳐다보더니 위사검에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신 어르신께는 존대하고, 어르신께는 반말해요? 무슨 그런 경우 없는 일이 다 있겠어요?”
그 말에 듣고 있던 공야찬과 조수강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우 없는 일을 제일 많이 보여 준 사람이 대체 누군데.
이제 와서 신분 세탁을 하려 하다니.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무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게 어떤 마음으로 그리 표현하시는지 알겠는데,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야죠. 제가 뭐 어르신을 제 수하로 만들기 위해서 그런 거겠어요.”
“……그럼.”
“그러니까 제발 편하게 해 주세요.”
간곡한 천무린의 말에 위사검은 난색을 표하더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마음을 굳게 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또, 또.”
“아, 알겠네. 자, 자네 말대로 그리하지.”
어색한 위사검이었지만, 천무린은 그제야 옳다구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넘어갔다.
“그보다 시급한 문제는…….”
천무린의 옆에 안절부절못하는 두 사람의 표정이 보였다.
다름 아닌.
꽃봉오리에 불과했고, 개화하지 못했던 소녀.
그러나 이제는 만개하여 아름다움으로 사방을 빛나게 만드는 여인.
빙화(氷花) 설화린.
그리고.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케 하는 적염(赤炎)의 머리칼을 뽐내는.
한층 더 강인해지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를 보여 주는 듯한 청년.
적화객(赤火客) 남사익.
이 두 사람이었다.
설화린과 남사익이 공야찬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 말이 사실인가요? 마교가 북해와 남해를 먼저 공격하려고 움직였다는 것이.”
“네, 맞습니다.”
그 말에 설화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남사익이 나서서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흥! 고작 마교의 버러지들이 북해와 남해를 넘볼 수 있을 리가 없소. 제깟 놈들이 그 기후에 적응해 제 실력을 발휘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득의양양한 그의 태도에 천무린은.
“멍청하긴. 고작 그것도 생각 안 하고 걔들이 움직이겠냐? 마교 새끼들이 아무리 대가리가 없어도 말이지.”
“…….”
“북해와 남해의 전력 중에서 쓸 만한 건 단 두 사람뿐이야. 빙천검 설종량, 그리고 태양천자 남선. 너네 아버지이자 궁주인 두 사람뿐이다.”
그 말에 호기롭게 말하던 남사익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장 우리가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설화린의 말에 천무린이 고갤 주억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애먼 놈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이는 게 맞겠지만.”
“……애먼 놈들이요?”
“어. 그런 놈들이 있어. 아주 득실거리지.”
“어디에…….”
“내가 짜 놓은 판에 혹 자기들만 늦을세라 조바심이 난 놈들. 민심을 얻으려고 용을 쓰는 놈들.”
천무린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무언가를 직감한 설화린의 표정이 애매모호해지더니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벌써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니 우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고.”
“설마…….”
“어. 그 설마가 맞아. 장단에 맞춰 주자고.”
입가를 말아 올리며 씨익 웃는 천무린이었다.
* * *
“……우리가 직접 움직여야 합니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이번마저 우리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천무관에 공을 모조리 뺏길 것이오!”
“……아미타불.”
청강진인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혜공대사를 바라봤다.
“멸마신군……. 아니! 멸마! 멸마라고 하더이다. 전 중원이 붙여 준 그 이름이오. 지금 한가하게 아미타불 타령이나 할 때가 아니란 말이오!”
촤르륵.
청강진인의 말에 혜공대사가 염주를 손끝으로 돌리며 두 눈을 반개했다. 한동안 대꾸하지 않고 염불을 외다가 청강진인의 부글거리는 속마음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쯤.
“……진인.”
“말씀하시오.”
“진인의 말씀대로 마교의 악적을 물리치는 방향으로 정하겠습니다. 섬서무관의 모든 기수를 집합시키시지요.”
“……잘 생각하셨소!”
만면에 드러난 밝은 표정이 지금 청강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가 원했던 대답이 속 시원히 나온 것이다.
“보조로 소림에서 십팔나한을 함께 출두시키겠습니다.”
“……무량수불! 대사의 의기에 이 청강! 진심으로 탄복하였소이다! 그렇다면 무당뿐 아니라 화산과 종남에서도 무인을 차출시키도록 하겠소!”
부리나케 움직이기 시작한 청강이 관주실에서 벗어나자마자 혜공의 두 눈이 창가를 통해 청명한 하늘을 바라봤다.
“다시 시작되려는가.”
정마대전. 전 중원이 불타올라 세상 모든 것이 멸할 듯했던 마도와의 전쟁을 치렀지만.
그때만 해도 사도는 자신들의 몸집을 키우느라 급급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도(邪道), 마도(魔道) 그리고 정도(正道), 이 세 갈래가 부딪치는 순간이 도래하는가.”
몸집을 키운 사도까지 합세하여 모든 세력이 한꺼번에 부딪히려고 움직인다. 또다시 전장의 피비린내 나는 광기(狂氣)가 세 갈래로 나뉜 세력에 무섭게 약동하고 있다.
“과연 이 선택만이 정답인 것인지…….”
혜공 역시 안다. 전쟁이란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산골짜기에서 무섭게 떨어지는 계곡물을 무슨 힘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의 순리와도 같은 흐름인 것을.
“……멸마. 멸마 천무린.”
멸마라고 불리는 천무린이 등장했고.
그의 등장과 함께 마도와 사도가 손을 잡았으며.
정도의 수좌라고 불리는 파천검황이 제 무위를 되찾았다.
파천검황이 정상적인 무위를 회복하면 정도 무림에 끼치는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파천검황 독고황은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 말인즉슨, 여태까지 본인이 당해 온 수모를 되갚아 주기 위해 칼춤조차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
내부를 단속한 후.
외부로 눈을 돌려 정도 무림을 다시 규합해 낼 것이다.
그리되면 정도 무림의 삭초제근과 동시에 악적을 물리치기 위한 단합된 정도 무림을 이끌 수 있을 터.
……마치 누군가가 미리 구상한 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가.
어찌 이럴 수 있을까.
혜공의 근심은 깊어졌지만,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러니 움직이지 않으면 섬서무관은 정도 무림으로부터.
그리고 수많은 민초들과 양민들의 민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명분이 없는 황하강 오리알 신세가 될 뿐.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디.
부디 이 전쟁이 잘 끝날 수 있기를.
* * *
콰앙!
“뭐라? 섬서가 움직여? 어디로 움직인단 말이오!”
남궁도의 솥뚜껑만 한 주먹이 탁자를 내려치자 그만 부서져 주저앉아 버리는 탁자였다.
“북해와 남해, 세외이궁으로 움직일 것 같다고 개방으로부터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산동무관의 일장로인 황보충이 나직이 말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딱 그 꼴이군! 도도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이 얌생이같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어!”
씩씩거리던 남궁도가 콧김을 흥 하고 내뿜더니 황보충을 바라봤다.
“그들이 차출한 전력은 어느 정도라고 하오?”
“……제법 많습니다. 섬서무관에서 꾸릴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다 끌어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소림의 십팔나한.
무당의 태극검수.
화산의 매화검수.
종남의 유운검단.
각 문파에서 차출할 수 있는 정예 중의 정예.
그리고 섬서무관의 기수들 중 최정예만을 규합하여 정도 무림의 3할에 가까운 전력을 투입했다.
괜히 섬서무관이 사천이나 산동보다 뛰어나다고 일컬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쾅!
“그놈들이 세외로 간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방향을 돌려 벽력왕과 수룡왕을 칠 것이오!”
그 말에 황보충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지더니.
“아, 아니 될 말입니다! 현재 녹림과 장강의 전력은 산동의 모든 전력을 합친다고 해도 비등 혹은 전력이 더 위입니다. 무림맹에 지원을 받아 가시는 것이……!”
“황보 장로! 지금 세상의 모든 민초들이 우릴 지켜보고 있소! 현재 사천은 사파의 빌어먹을 놈들과 대치 중이고, 사천무관 출신의 멸마라는 애송이는 무형노괴를 꺾었다는 이야기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지.”
그러면서 이글거리는 눈빛을 드러낸 남궁도가 입가를 비틀었다.
“섬서의 놈들이 마치 꼬리에 불붙은 똥개처럼 움직이는 것도 다 그 때문이오! 누구보다 신속하게! 누구보다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이지 않으면 우리 산동은 지나가는 개도 비웃을 정도로 나락에 떨어질 것이오!”
절대 그럴 순 없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쥔 남궁도의 기세를.
“사천무관 놈들이 있는 곳에 우리가 지원을 가는 모양새이니 명분 역시 좋을 것이고, 그 사실 역시 개방을 통해 널리 알리시오. 산동의 움직임과 우리가 펼치는 활약상을 전 무림에 자세히 알리란 말이오.”
“……알겠습니다. 대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황보충은 도저히 말릴 도리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전력을 투입시킬 생각을 하시오! 한 문파도 빠짐없이 정예 중 정예들을 골라서 차출해야 할 것이오! 공격적인 자원을 투입시켜 단번에 불길을 잡을 수 있어야 하니!”
남궁도의 외침에 황보충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충실히 명에 따랐고, 그에 따라 산동무관과 관련된 모든 문파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동무관 역시 남궁과 황보, 모용과 팽가까지 나서서 제각각 정예의 무사들을 차출하였고.
또한, 산동무관의 역대 기수들 중 실력이 뛰어나고 무명을 드높인 이들을 모조리 선발하여 선봉대를 결성했다.
“……사파의 버러지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산동이야말로 정파 무림의 대들보라는 인식을 제대로 심어 주러 가자꾸나.”
창천 남궁세가라고 불리는 안휘의 패자.
검으로는 무당과 화산, 종남과 견주어도 절대 밀리지 않는 최강의 세가.
창천검대의 최정예 무사들과 창천검존 남궁도.
그는 사자와 같은 갈기를 휘날리며 가장 선두에 서서 남궁세가를 필두로 한 창천검대를 진두지휘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남궁도의 패도적인 기운에 매료된 모용세가의 도월검단, 황보세가의 낙뢰권수, 하북팽가의 오호도영대의 수백의 무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다름 아닌 사천무관과 대치하고 있는 장강수로채와 녹림칠십이채가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