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제218화
천마전(天魔殿).
이백 장(600m)은 족히 넘을 넓이의 공동.
그 공동의 끝에 서 있는 석상은.
다름 아닌.
천마(天魔) 천무린.
가장 위대한 천마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석상. 사람이 몸을 뒤로 젖혀 마음먹고 보지 않는 이상 석상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컸다.
그의 위신이 천마신교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도 그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레 사라진 천무린의 행방을 천마신교의 일원들이 몇 년이나 찾아 헤맸지만, 시신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정마대전 중에 깨달음을 얻어 우화등선(羽化登仙)하였다고 추측만 할 정도.
그런 천무린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곳 천마전은 천하의 그 어떤 곳보다 을씨년스럽고 조용하다.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 그곳에.
저벅, 저벅.
자욱하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 들어오는 다섯 명의 인영.
천마신교의 다섯 장로들이었다.
천마신교의 장로들이 모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천마의 부름이 아니면 더더욱 말이다.
그들을 모을 수 있는 유일한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천마가 없는데, 우릴 불렀다는 건…….”
“비루한 노인네가 죽었기 때문이겠지.”
“부교주의 직권에 장로를 호출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던가?”
“호랑이가 없는 곳에는 여우가 왕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쩌겠나. 그 직함에 걸맞게 대우해 줘야지.”
천마가 없는 지금 그들을 부를 수 있는 이 역시 단 한 사람뿐이었다.
장로들은 자리에 앉아서 자신들을 호출한 이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금세 나타나지 않았다.
무료했던 이들은 한마디씩 했다.
“무형노괴가 죽었다고 말하겠지.”
“즈흐흐흐.”
“안타까운 일이야.”
“무형노괴가 죽었다라. 하지만 쓸모없는 녀석이었어.”
장로급들은 하나같이 절대자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중 오장로인 구유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겨 놓고 간 것 따윈 없더군.”
“바랄 걸 바라야지. 비루한 노인네가 갖고 있을 만한 게 뭐가 있겠나.”
“네놈이 갖고 간 건 아니고?”
그 말에 피식 웃은 이장로 검마(劍魔)가 마주 바라본다.
“만약 그렇다면?”
“죽여야겠지.”
“네깟 놈이? 나를? 즈흐흐흐흐.”
검마가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의 표정은 구유비마의 도발 따위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다들 혈기가 넘치는군요.”
목소리가 들려온다.
구유비마와 검마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천마전에서 단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는 그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구유비마가 속으로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누가 봐도 진즉부터 앉아 있었던 모양새가 아닌가.
그런데도 자신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니.
그럴 수가 있는가.
표정을 고친 구유비마가 다시금 그림자에 가려진 이를 바라봤다.
어둑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는 시뻘건 자위에 검은 동공만이 가득했다. 그 동공이 구유비마에게 향했다.
마황(魔皇), 갈천중.
비록 천마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천마 천무린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천마신교의 교주에 올랐을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신교의 모든 교인들은 여전히 천마 천무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신선, 아니 마선(魔仙)이 되어 버린 천무린이 천마신교를 굽어보고 있다고 믿으며.
“유구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혈기가 넘치는 것을 보아하니 천마신교의 교세가 기울진 않은 모양입니다.”
미소를 흘리는 갈천중의 모습에 구유비마와 검마가 서로 으르렁거리던 것을 멈추고 몸을 휙 하고 돌렸다.
그러면서 구유비마 역시 마황을 힐끗거렸다.
‘……기분 나쁘군.’
구유비마의 차가운 눈길이 마황에게 닿았고, 마황 역시 장로들을 굽어본다.
마치 자신이 위, 장로들은 아래라는 듯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천마 천무린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교주의 직까지 올라온 이다.
천마 천무린은 마도관 시절부터 성장세가 남달랐고 천부적인 자신의 재능을 숨김없이 표출하며 천마신교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호쾌하고도 또라이(?) 같은 성격을 바탕으로 천마신교의 모든 난관을 이겨 내고 정점에 올라섰다. 그런 그에 대하여 일부 질투와 시기 어린 시선은 있어도.
절대적인 강함에 반해 종래엔 수긍하고 그를 천마이자 교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작자는 다르다.’
마황은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천마신교의 교인이자 마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보다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만, 사파보다 더욱 모략이 넘쳐나고 정파보다 한 단계 위의 명분을 찾기도 한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천마신교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처절한 혈투는.
높은 위치에 다다른 이들에게는 보인다.
평범한 이들은 결코 겪지 못할.
아니, 겪을 수조차 없는 암중모략(暗中謀略)이 난무하는데, 그중 단연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이가 바로 마황 갈천중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더니.
천무린이 교주로 등극했을 때, 당대의 부교주를 상대로 승부를 갈랐다.
「 뭐야, 너. 다음은 네 차례야? 」
천무린의 물음에.
쿠응!
「 ……천마를 모시겠습니다. 마도천세(魔道天世)! 천천세(天天世)! 」
마황 갈천중은 자신은 딱 여기까지라는 듯, 천무린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더 욕심 내지 않는다. 마도인이라면 충분히 욕심을 낼 그릇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이상한 새끼네. 하여간 다들, 이 새끼 조심해. 」
그리 말한 천무린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 뒤로 마황 갈천중은 천무린의 명령을 결코 어기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구유비마는 저도 모르게 마황을 볼 때마다 침음이 흘러나왔다.
‘혹시 이와 같은 상황이 될 거라고 예견한 것은 아니겠지.’
“……우릴 왜 불러 모았는지 들어 볼까?”
일장로 패왕(霸王)이었다. 그의 기세나 위엄은 마황에게도 전혀 꿀리지 않는 바, 그는 마황의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 물음에 대답하기보다 마황의 눈길이 검마에게 닿았다.
“이장로.”
“음.”
“시킨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마황의 말에 패왕과 구유비마, 두 장로의 시선이 이장로 검마에게로 향했다.
시킨 일?
당최 무슨 말인가.
마황이 검마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장로들은 부교주의 명을 듣지 않는다.
설마?
“……검마대, 마궁대, 혈영대, 세 부대에 지시를 내렸다.”
“잘했네요.”
“북해빙궁, 남해태양궁을 먼저 공격하라는 게 맞는 말인가?”
“정확해요.”
사실이었다. 검마가 공언했다. 부교주의 명에 따라 움직였다고.
천마전 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면서 장로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구유비마가 나서며 이게 무슨 일이냐고 한 소리를 하려는 찰나.
스릉. 후웅!
구유비마의 옆에 서 있던 폭산혈산의 주먹이 핏빛으로 물들더니 순식간에 구유비마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콰앙!
“……뭐, 뭣!”
폭산혈산의 주먹 한 방에 구유비마의 온몸이 어그러지더니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구유비마는 구유비마. 장로라는 직함이 허투루 단 것이 아니라는 듯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마치 허공에도 벽이 있는 듯 박차더니 금세 자세를 정돈했다. 동시에 폭산혈산을 노려봤다.
“이게 무슨 짓이냐! 사장로!”
“……아아, 역시 제법 날쌔네요. 폭산혈산은 좀 더 민첩할 필요가 있겠어요.”
물음은 사장로를 향한 것이었으나, 대답은 다른 이로부터 흘러나온다.
이 거대한 공동의 주인인 것처럼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로부터.
그러자 이장로 검마, 삼장로 사신, 사장로 폭산혈산 세 사람이 천천히 마황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자연스레 몸을 숙였다. 일장로 패왕과 오장로 구유비마, 이 두 사람은 그 광경에 놀라 얼어 버렸다.
“하하, 두 분 표정이 제법 볼만하네요. 목을 베어 그 표정 그대로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얼어 버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연 마황이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일어나 높은 계단에서 한 걸음씩 내려왔다.
“북해빙궁과 남해태양궁을 먼저 칠 겁니다. 지금은 비록 세 무력대를 투입했지만, 장로님들 중 한 명이 직접 움직여 줬으면 좋겠거든요.”
잠잠하던 천마신교다. 무형노괴가 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유비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그것은 패왕도 마찬가지인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른 세 장로의 얼굴을 훑었다.
“잘도 저 세 사람을 꾀어냈군.”
“아아, 원래는 두 장로들에게도 회유와 권유를 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부족해져서요.”
온화한 인상이다. 겉보기에는 암중모략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일 정도로 유순하고도 천진한 표정을 짓는 마황이다. 나이가 일흔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십 대로 보이는 인상은 그의 무위를 언뜻 보여 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북해빙궁주와 남해태양궁주의 목은 두 분이 가서 갖고 오셔야겠어요. 두 사람의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충성심이라고.”
패왕의 두 눈이 깊어졌다.
패왕의 기운이 서서히 흘러나오더니, 천마전 공동 전체를 떨어 울리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금강석보다도 단단하다는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바닥이 순식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감히 내게 충성심을 요구하다니. 내가 왜 부교주를 때려죽이지 않고 있는지 아는가?”
패왕의 두 주먹에 응축된 기운이 사방의 공기를 일그러뜨린다.
“그따위 감투는 내게 필요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라고는 한 올도 느껴지지 않던 패왕의 얼굴이 처음으로 노기를 띠었고, 그 노기는 패왕의 기세를 더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마황이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래서 시간 낭비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라?”
“돈과 명예, 부, 권력.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당신을 부리기가 힘들다고 판단했거든요. 그래서 가장 후순위로 당신에게 접근하려 했던 것인데, 지금 생각해도 현명했다고 느껴지네요. 그때의 내 판단이 아주 뛰어난 것이었죠.”
“하잘것없는 것들이지.”
그러면서 패왕의 무시무시한 눈길이 세 장로를 향했다.
패왕이 일장로인 이유.
말 그대로 다섯 명의 장로 중에서 가장 강했기 때문에 일장로인 것이다.
누구보다 강직하고.
누구보다 강함에 집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패왕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면.
완벽한 무력행사가 필요한 것이다.
“……뭐 저도 간만에 몸 좀 풀어 볼까요?”
마황 갈천중이 이를 훤히 드러내자.
씨익.
천마전(天魔殿)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