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제216화
“……그러니까 이제 맹주님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오?”
“아오, 그렇다니까 어디 속고만 사셨나. 사람 말을 더럽게 못 믿어요.”
그 말에 사족을 다는 이들은 따로 있었다.
“원체 믿을 수가 있어야지. 너라면 믿겠냐?”
“내가? 누굴? 저 사람 새끼도 아닌 놈을? 어휴.”
두 사람의 말에 천무린이 두 눈을 부라리자 찔끔한 청년들, 황태와 태강의 입이 그만 합죽이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본 하후성이 가볍게 한숨을 푹 하고 내쉬더니 천무린이 건네주는, 목함 안에 있는 영단을 받았다.
“이걸로 고쳐지지 않는다면…….”
“그럼 별수 없죠.”
그 말에 하후성이 미간을 좁히자,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요? 믿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천무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화답했다.
능청스러운 대답에 하후성이 피식 웃더니 고갤 끄덕였다. 하후성의 반응에 되레 천무린이 엥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에? 그냥 믿는다고요?”
“혹 거짓이오?”
“거짓은 아니긴 한데…….”
“그럼 됐소.”
시원스레 웃은 하후성이 천무린을 한층 더 심유하고도 청명한 눈길로 바라봤다.
“천 소협.”
“네?”
“소협은 절대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오. 비록 방정맞고 경망스러울 순 있어도.”
“에……. 그거 칭찬 맞죠?”
천무린의 뚱한 표정에 하후성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한쪽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그러면서 그의 눈길이 뒤에 도열된 백여 명의 천성검대를 훑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치열한 전장에서 죽다 돌아온 하후성보다 더 꼴이 말이 아닌 백여 명의 검수들.
자신의 수하들이기 이전에 백여 명이라는 절정 검수들을 혼자 쓰러뜨렸다는 것부터 이미 하후성 본인의 무위를 능가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하후성 본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수하들이 죽자고 덤벼들면 절반도 상대하지 못할 터.
그것을 아주 손쉽게 해낸 천무린의 무위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후성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무린이 그 손을 잡으며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리 고맙담. 제 수하들 쥐어 팬 건데.”
“……맹주님께서 좋아하실 걸세.”
하후성이 일순 미소를 짓더니 고갤 돌려 부대주 팽경을 바라봤다. 팽경 역시 하후성의 눈빛을 느꼈는지 고갤 들었다가 금방 돌려 버렸다.
“뭐, 원래 주인이 힘이 없어지면 가끔 경우 없는 개X끼들은 주인도 못 알아보고 물어 버리려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다른 누구도 아닌, 천성검대 부대주 팽경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누굴 말하는 건지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다.
“그간 고생 많았어요. 이번 계기로 싹 다 물갈이하고 제대로 구성하라고 하세요.”
하후성이 천무린의 말에 저도 모르게 생각에 잠겼다. 천무린이 팽경을 본보기로 무력진압을 했지만, 하후성은 그 일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천성검협 하후성.
천성검대주 하후성.
정파 십대고수라는 반열에 오른 자이자 정파 무림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하우성이다.
그런 그가 무림맹주 독고황의 직속 무력대의 대주이자, 실질적인 오른팔로 있었지만.
무림맹의 맹주인 독고황은 몸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이 지독히도 작아졌다. 물론 몸에 이상이 있음을 숨기고자 삼대 무관 비무대회나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여지없이 참석했고, 성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무림맹의 눈치 빠르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던 이들은 독고황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바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천성검대라는 무림맹주의 직속 무력대가 만들어질 때, 그 눈치 빠르고 기회만을 엿보는 늙은 여우들이 몇몇을 강제로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홱.
고갤 돌려 버린 팽경이었다.
하후성에 대한 동경과, 늙은 여우들의 사주를 받아 부대주라는 자리에 앉아 있는 팽경은 하후성을 무인으로서 흠모했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지 않았다.’
노선을 확실히 정한 팽경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이제야 제대로 직시한 하후성이었다.
본래 같았으면 팽경에 대한 배신과 노선의 향방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테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꾸욱.
하후성은 품 안의 목함을 힘주어 안았다.
무림맹주 독고황이 다시금 옛 무위를 회복할 수 있다면.
전과 같은 신위를 발휘할 수 있는 젊을 적에는 청운신룡(靑雲神龍)이자, 나이가 들어서는 파천검황(破天劍皇)으로 불리던 독고황으로 되돌아온다면.
어긋났던 무림맹의 위치도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할 일이 많았다.
팽경을 시작으로 모든 꼬리를 잡아내고, 그 일부를 도려낼 것이다. 무림맹에 해가 되는 싹을 모조리 잘라낼 것이다.
그런 그의 의지를 느낀 것인지.
“시간이 별로 없어요. 알죠?”
천무린이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이 하후성의 상념을 깨웠다.
그가 말한 시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네.”
“자타가 공인하던 무림맹주의 실력은 한번 봐야 되지 않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여전히 경망스럽고 감히 무림맹주를 입에 올리기에는 생도라는 직위가 까마득히 낮았지만, 하후성은 거기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타공인 정파 무림 1인자.
파천검황(破天劍皇) 독고황.
정마대전 이전부터 독에 중독된 탓에 실력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이미 당백진과 남궁도, 혜공과 청강을 뛰어넘은 이로 정파 십대고수 중 가장 수좌를 차지하고 있는 무림맹의 맹주다.
그런 그를 보고자 한다는 천무린의 말이 진심임을 느낀 하후성이었기에.
“……우리도 준비를 하고 있겠네.”
“할 만큼 했다고 전해 줘요.”
“이미 이 영단만으로 충분하네. 어떻게 만든 것인가?”
영단에 대해 묻자, 천무린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휴, 그거 만들려고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그랬는가. 자네…….”
천무린의 말에 하후성이 그저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는지 고개까지 숙이며 예의를 표하려는 찰나.
“당가에 나이 처먹고 일은 안 하려고 하는 그 인간들 쥐어 패고 갈구고 일 시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 원 참.”
……그랬구나.
쥐어 패서 일 시켜 나온 결과물을 마치 자신이 고생한 것처럼 말하다니.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어찌 됐든 고맙네.”
“어서 가요. 무림맹 직권이라면 섬서랑 산동도 움직일 수 있겠죠.”
“걱정 말게. 사천무관의 상황은 알았으니, 섬서와 산동에서도 움직일 것이네.”
“개방은요?”
“각 지부에 있는 개방에 언질을 해 놓을 걸세. ……아무래도 개방은 지정해서 자네들을 돕는 이가 있으면 좋으련만.”
누가 좋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 하후성에게.
“탁궁, 탁궁 그 거지 놈이면 될 것 같아요. 이번에야말로 밥값 제대로 하게 해야지.”
천무린은 씨익 웃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
부르르.
“에취!”
“겨울 다 지나가는데 무슨 기침을 하고 그러나?”
“그러게 말이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으슬으슬하니, 귀도 간지럽고 몸이 조금 이상하네.”
“누가 자네 욕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누가 날 욕하겠는가. 이 사결개 탁궁을 말이야.”
탁궁이 자신의 가슴을 쭉 펴며 짐짓 늠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방주께서도 이번 사태에 대해 심각히 여기시는 모양이야. 장강과 녹림이 힘을 합친 데다 곧장 전선을 구축하였으니 말이야.”
개방의 거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탁궁이 고갤 끄덕거렸다.
“혹시 아는가. 마교도 움직일지.”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는 이야기일세.”
사결개, 개방의 차기 후계자라는 높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거지들과 급을 나누지 않는 탁궁에게 다른 거지들도 맘 편히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각자 귀는 열어 두고, 입은 적재적소에, 다리는 많이 움직이세. 그리고 수많은 동도들을 우리도 불러 모을 때가 된 것 같으니 미리미리 대비를 하자고.”
탁궁은 젊은 나이로 개방에 끼치는 영향력은 비록 적지만, 젊은 피답게 젊은 거지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뛰어난 무공 실력과 정보를 추리해 내는 능력이 탁월함을 이미 여러 번 입증한 바 있었다. 아직은 영글지 못했다는 주변의 평가가 있었지만, 다른 젊은 거지들은 언제고 탁궁이 힘차게 날아오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어디로 가면 되려나?”
“나는 섬서로 가지.”
“그렇다면 나는 산동!”
“음, 그렇다면 나는…….”
후다다닥!
깊이 고민하고 있는 탁궁의 앞에 산동의 개방 지부를 담당하고 있는 이가 달려왔다. 탁궁보다도 직급이 한 단계 높은 이가 직접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탁궁은 심상치 않다고 여기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무,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 그게!”
숨을 헉 하고 들이마신 거지가 탁궁을 바라보더니.
“너를 필요로 한단다.”
“응?”
“멸, 멸마신군이.”
그 말에 탁궁의 표정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그게 당최 무슨 말인가.
갑자기 멸마신군이 왜 나온단 말인가.
“무림맹에서 직접 협조문을 보냈네. 정확히 자네의 이름을 언급했다더군.”
탁궁이 얼어 버린 모습으로 가만히 있자, 다른 젊은 거지들이 부러운 눈길로 탁궁을 바라봤다.
“와, 역시 뭘 해도 될 놈은 되우?”
“그러니까 말이야. 곧 천하제일인의 비호를 받는 거지라니, 정말 부럽소!”
“나 참, 그런 건덕지가 있으면 나도 좀 데려가지 그랬소!”
“하여간에 자기 좋은 것은 남한테 주질 않는다니까! 뭐 빠지게 일해도 부하들 챙길 생각은 안 하고!”
거지들의 반응에 탁궁은 그만 울고 싶은 표정으로 냅다 소리치고 싶었다.
‘미친놈들아!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그 악마 새끼가……! 그 악마 새끼한테 잡혀 가면 너희들 다 죽는 거야!’
세간에 알려진 천무린.
멸마신군에 대한 평은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나이에.
아직 약관이라는, 그저 젊다는 말로도 부족할 시기에.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 우승하고.
마공서를 회수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고작 후보생인 시절에 쌍용검 파평을 꺾어 버렸다.
사천무관에 있는 썩은 이들을 물리쳐 기치를 바로 세우고.
섬서에서 보낸 구원 요청에 따라 상대하게 된 녹림과의 혈전에서 거산도 전위를 꺾었으며,
종래엔 운남에서 무형노괴라는 말도 안 되는 거악(巨惡)을 상대로도 이겼다고 일컬어지는 가히 신화적인 인물이다.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동경하게 되고.
여인들이라면 널리 알려진 천무린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으며.
나이 든 무인들은 그와 자웅을 겨뤄 소문이 실제인지 알고자 했다.
그만큼 중원 무림의 모든 이목이 천무린에게 쏠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천무린의 부름에도.
절망에 빠진 이가 있었으니.
“난 X 됐다. 씨X알……!”
고개를 떨군 탁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