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제215화
마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 것처럼.
위사검은 모든 업무와 책임을 내려놓고 오로지 단전을 수복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단전이 망가진 뒤로 잃어버린 십여 년을 되찾기 위해 그는 사활을 걸었다. 그리고 어떤 불평과 불만도 없이 운남을 지키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던 위사검의 노고를 기억한 천무린 역시.
전부를 걸고 그의 단전을 복구하기 위해 도왔다.
위사검의 간절함을 읽었기 때문이다.
“……정말 가능한 일인가?”
신창 신준건은 가부좌를 틀고 내력의 흐름에 집중하기 시작한 위사검과 그 뒤에서 함께 가부좌를 틀고 등에 손을 올려 도인을 하는 천무린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위사검이 얼마나 간절한지는 안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하다고 해도 망가진 단전을 수복하고 깨진 그릇을 다시 원상 복구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혹여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기껏 무공 없는 삶을 살기 시작하며 마음을 다잡은 위사검이 더욱 끝없는 절망의 나락 속에 빠지게 될 테니까.
신준건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걱정 마십시오. 어르신.”
신창에게 악교운이 말했다.
“걱정이 안 될 수가 있겠는가. 어쩌면 생사를 걸고 하는 싸움일 텐데.”
“지난 일 년 넘게 우릴 가혹하게 굴렸던 만큼이나 녀석이 신경 쓴 일입니다. 비록 경망스러운 점은 있으나 행하고자 하는 일에 거짓이 있거나 허투루 행동할 녀석은 절대 아닙니다. 확신이 없고서야 어르신께 저리 담담하게 권하진 않겠지요.”
천무린을 옆에서 가장 오랫동안 봐 온 사람이 바로 악교운이었다. 그의 확신은 신준건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주었다.
악교운이 보여 주는 내력과 은은하게 발산되는 기운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느낀 영향도 컸다.
“……그리 말해 주어 고맙네.”
그러면서 신준건의 시선이 악교운에게 계속해서 닿은 채 있었다.
“궁금하신 게 있으십니까, 어르신?”
“너무 노골적으로 본 겐가. 미안하이.”
“아닙니다. 물으신다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민망하다는 듯 신준건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지만, 악교운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지었다.
악교운의 그런 행동에 신준건은 용기를 얻은 듯 말했다.
“내 알기로는 일 년하고도 조금 더 지난 시간 만에 지고(至高)한 경지에 올랐다고 들었네.”
지고한 경지.
그것은 초절정을 뜻했다.
일반적인 무인이 초절정이라는 경지에 다다른다는 것은 더없이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평생을 절정이라는 경지에 머무르며 초절정을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쳐다보는 이들도 많았다.
신준건 역시 지고한 경지에 오르기까지 절정이라는 경지로 수많은 전장을 전전했어야 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목숨을 오락가락하는 사선을 수십 번이나 넘나들었다.
그런 그가.
지고한 경지에 올랐던 그가 바라보기에.
“……내가 여태 살아오면서 자네들처럼 말도 안 되게 빠른 성취를 이뤄 냈다는 이들은 들은 바가 없다네. 아마 난생처음이겠지.”
남만에서 폐관 수련에 들어간 이들 중 대다수는 일류 혹은 절정급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이 대부분 최소 절정, 나아가 초절정이라는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은 신준건의 상식으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겐가?”
“……그 마음 이해합니다.”
신준건의 진지한 눈동자에 악교운이 담담하게 미소를 짓더니.
“……응? 자네 지금 우는 건가?”
“아, 아닙니다. 잠깐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악교운의 눈가에 맺힌 것은 분명히 이슬이었다. 신준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초절정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올랐으면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해도 모자랄 판에 왜 눈물을 흘리는 건지.
기쁨의 눈물인 건가.
그리 생각하는데, 악교운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사선(死線). 죽을 고비를 얼마나 넘어 보셨습니까, 어르신?”
그 말에 신준건의 두 눈이 게슴츠레 변했다.
지금 자신을 두고 사선을 몇 번이나 넘었는지 묻는 건가.
악교운이 던진 물음의 저의(底意)가 이해되지 않아 신준건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악교운의 얼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르신께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제가 겪어 온 바를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궁금해하셨으니 말입니다.”
“일 년 반 동안 죽을 고비를 단 하루도 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정확히 오백 일하고도 오십 일이 조금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또르륵.
“……자네, 진짜 우는 거 아닌가?”
스윽.
옷소매로 닦더니, 악교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오, 오백 일하고도 오십 일이 조금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단 하루도…….”
“단 하루도……? 설마 매 순간 죽을 고비를 넘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매 순간, 매일같이 사선을 넘나들었습니다.”
신준건은 그게 말이 되냐는 듯 아리송한 표정, 아니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겠는가.
하루에 온 전신의 잠력을 터뜨려 훈련을 하고, 이틀을 넘어 사홀, 그리고 나흘까지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칠 주야가 넘고 한 달이 되면 사람은 미쳐 버리기 마련이다.
그런 훈련을 일 년 반 동안 해 왔다고?
하지만 악교운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온몸이 부서지고, 삭신이 망가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고 느낄 때 녀석은 제 입에다 뭘 넣어 줬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뜨니 멀쩡해졌습니다.”
“…….”
“오십여 명이 넘는 인원을 하루 온종일 패더군요. 교관이라는 사실도, 제가 녀석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신준건이 놀라 할 말을 잃고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하하, 생각해 보니 다른 생도들이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 미친 새끼야! 사람을 패도 적당히 패야지! 이러다 다 죽이려고!」
「이것도 못 견딜 거면 그냥 뒈져. 뒈지고 다음 생에 태어나자. 히히.」
“아까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으나, 사람 새끼가 아니었긴 합니다.”
악교문의 두 눈에 다시금 이슬이 맺혔다. 그 이슬을 보고 차마 또 눈물을 흘리느냐고 말할 수 없었던 신준건은 조심스레 품속에서 무명천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더 하지 않아도 되네. 내가 미안하구먼.”
“아닙니다. 어르신. 말하기 시작했는데 멈추면 되겠습니까. 더 들어 보십시오.”
아, 아니.
그만해도 된다니…….
「으아아아! 이 개X끼야! 뒈져! 뒈져어어어어!」
「나불나불하는 게 아주 입이 야무지네!」
「내가 오늘 너랑 동귀어진하고 세상과 이별하련다!」
「어이구, 그러려면 멀었지. 대신에……. 좋다! 마음가짐이 아주 듬직~해진 게 오늘은 좀 더 패도 되겠어! 강도를 높여 볼까!」
“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강도를 높이더라고요. 사람을 복날에 개 패듯이 패고, 또 패 놓고 무슨 이상한 영약을 먹이면 다음 날 멀쩡해지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아십니까?”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말하는 악교운의 모습에 신준건은 입을 닫았다. 말수가 없는 데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악교운이 보이는 이런 모습은 신준건으로서는 그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짧은 시간에 겨우 안면을 튼 정도에 불과했지만, 대번에 악교운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신준건의 고개가 살짝 돌아가 천무린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이길래 저 악교운을 이리 만들어 놨단 말인가. 속에 차 있는 울분이 아직 해소가 되지 않은 듯 보였다.
우웅웅!
하지만 지금은 그저.
위사검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 헌앙한 청년이자 중원 무림에서 멸마신군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후기지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자신의 손자를 이토록 높은 경지로 이끈 이가 저 천무린일 테니.
할아버지가 된 도리로 어찌 기쁘고 좋게 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리고 그때.
“푸휴!”
천무린이 진을 다 뺐다는 표정으로 뒤로 넘어가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 죽는다……! 에고고.”
곡소리를 내는 천무린과 반대로.
스윽.
몸을 일으키는 위사검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폭사된 두 눈빛에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터져 나오면서.
“……정말로 무위를 회복한 겐가?”
신준건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위사검을 바라봤다. 위사검 주위에 흐르는 은은한 기운은 낭인 시절과는 다르게 청명하고도 심유했으며, 거기에 특유의 투기(鬪氣)가 섞이면서 더욱 정광이 넘치는 기운이 되었다.
“왜 말이 없는가? 말 좀 해 보게.”
신준건의 다그침에도 위사검은 말없이 자신의 두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는 행동을 반복하며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힘이, 힘이 아주 넘치는구먼.”
망가졌을 뿐이지 단전으로 향하는 통로와 기혈은 완성되어 있던 위사검이었다. 단전이 복구되자마자 이미 뚫려 사지백해로 들어오는 내력의 충만함에 위사검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군, 그랬어. 이게 원래 무인이 바라보는 세상인 게지.”
그리 말하는 위사검이 아랫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의 모습에 신준건은 짓궂은 장난을 칠 생각도 못 하고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인이 무공을 잃는다는 것.
그것은 세상 전부를 잃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지 않은가.
대장장이에게 쇠와 불을 다루지 못하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학자에게 붓과 벼루를 뺏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들과 다를 바 없이 평생을 바쳐 온 무인의 삶이다.
그러니 삶 자체를 잃어버린 것과 무엇이 다르랴.
그런 삶을 되찾을 수 있다면.
지옥의 아수라에게 영혼이라도 되팔 사람도 여럿 있을 터.
그 정도로 갈증이 심했던 위사검이었으니까.
이어 위사검은 자신이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 찾았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고맙네.”
천무린을 향한 것이었다.
“뭘요.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모든 것을 다 떠나 고맙네. 정말로 고마우이.”
너스레를 떨려던 천무린의 두 손을 꼭 잡은 위사검이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 예가 과하다고 여긴 천무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만하라고 말하려는 찰나.
또옥.
또옥.
굵은 이슬이 천무린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뜨거운 눈물이었다.
“……어르신.”
제아무리 무위를 회복했어도 북받쳐 오르는 마음까지 감출 수는 없었는지 위사검의 음성이 잘게 떨려 왔다.
그리고 천무린에게 허물어지듯 안기더니.
“이…… 낭왕(狼王) 위사검, 부탁이 있네.”
처억.
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포권을 취했다.
“나를 받아 주게. 아니…… 받아 주십시오. 멸마신군이여.”
과한 예의로 보였으나, 그것은 진심으로 우러나온 반응이었다.
충성을 바치겠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