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제214화
그 말에 팽경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지더니 발검(拔劍)했다.
그와 동시에.
반월형의 검강이 검에 아스라이 맺혀 그가 초절정의 경지에 든 고수임을 입증했다.
“초절정 초입 정도인가?”
“……이제 와서 빌어도 소용없소!”
팽경은 자신의 무위를 뽐내며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고 그와 맞겨뤘을 때 천무린이 힘겨워하면 그때 조금 봐줄 요량이었다.
넓은 자비심으로 말이다.
그러나.
후웅!
콰앙!
반월형의 검강을 대번에 부수고 팽경의 턱을 돌려 버린 천무린은.
순간적으로 놀라서 굳어 버린 백여 명의 천성검대원들을 바라보며 흉신악살과도 같은 미소를 씨익 하고 지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
“……그러니까.”
“하아.”
“오자마자…….”
“하아아.”
“또…….”
“하아아아아.”
경악과 한숨이 뒤섞였다.
생도들은 물론이거니와 악교운을 비롯한 이들마저 입을 쩍 하고 벌리고 말았다.
눈앞의 장면을 본다면, 어느 누구라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끄으응.”
“으으윽.”
“드, 등이 부러진 것 같…….”
“나, 나는 파, 팔이 움직이질 않아.”
멀끔한 영웅건을 차고 하나같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던 백여 명의 검수들은 다 어딜 갔는가.
무림맹이 자랑하던 백여 명의 절정 고수들이 흡사 천재지변을 만난 듯 바닥에 널브러져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어디 하나 성해 보이는 곳이 없었다.
그에 반해.
“끄응, 손 풀기도 제대로 안 되었어. 젠장.”
몸의 먼지를 툭툭 털어 낸 천무린이 되레 기분이 나쁘다는 듯 눈앞에 있는 천성검대원 한 명에게 걸어갔다.
퍼억.
“꾸엑!”
“하여간 끈기가 없어요, 끈기가.”
“…….”
“저 부대주라는 새끼가 입을 나불거릴 때 보니까 아주 의기양양해 있던데?”
“제, 제가 아닙…….”
“아니긴, 뭐가 아니야.”
퍼억!
“너 맞아.”
“진짜 아니야?”
퍼억!
“……어억!”
“어억이라고? 너 맞다는 거지? 거 봐, 너 맞잖아.”
퍼억!
아예 말을 안 하는 게 상책이었다.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귀청 떨어질 것 같다고 또 두들겨 맞을 게 뻔했다. 지금 그렇게 해서 더욱 쓰라린 고통을 맛보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니까.
천성검대원은 맞은 곳을 부여잡으며 억지로 고통을 참았고.
“쳇, 잘 참네.”
그리고 그 모습에.
“하 씨, 왜 나 눈물이 나지.”
“……나, 남만에서 저 사람 새끼 아닌 놈한테 두들겨 맞은 거 생각하면……. 하씨.”
“젠장, 왜 서글퍼지는 건데.”
생도들은 하나둘 눈물을 글썽거리며 천성검대원들을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지난날이 마치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겪어 온 일 년하고도 반년을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놈에게 사로잡혀 매일같이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어쩐지 조용히 넘어간다 싶더라니.”
“사파 새끼 조지는 대신에 여길 조지는 걸 택한 거지.”
“하기야 절정 고수 백여 명 두들겨 패는 게 더 손맛이 낫지?”
“사파 새끼들은 너무 쉽잖아. 그냥 목만 따면 되니까.”
부르르.
대체 이게 무슨 정신 나간 대화란 말인가.
생도들의 말이 천둥소리처럼 무섭게 들린 천성검대원들은 결국 꼬르륵 흔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악교운이 한숨을 푹, 하고 내쉬더니.
“모두 의원에게 데려가라. 수고스럽겠지만, 당가 어르신 두 분이 계시니까 잘 부탁드리고.”
악교운이 천무린을 노려봤다.
“……대체 무슨 짓을?”
“걱정 마세요. 아마 독고황은 저에게 고마워하게 될 테니까요.”
“푸흐히히힛, 뭘 뜯어 볼까. 이번엔.”
희희낙락하는 천무린을 바라보면서 악교운은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았다. 지난 일 년하고도 반년 동안 눈앞의 녀석에게 훈련을 받았고, 그때는 누구보다 섬뜩하리만치 자비가 없더니.
폐관 수련을 마치자마자 사람이 이토록 돌변할 수가 있는 게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어떻게 하긴요. 움직여야죠. 지금쯤 당 관주님 입에서 곡소리가 나올 텐데 슬슬 움직여 줘야죠.”
천무린의 말에 덧붙이는 이가 따로 있었다.
“안 그래도 지금 막 사천무관에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하여간 양반은 못 된다니까. 그 인간도.”
전욱이 천무린의 말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서한을 건네주었다. 벽력왕 금태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모양이다.
“위사검 어르신을 한번 보러 가야겠네요.”
* * *
“……자네.”
“크흠.”
“결국 일을 냈더군.”
“크흠흠.”
위사검은 아까 전 악교운처럼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으며 지끈거리는 두통을 호소해야 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이 폐관 수련에서 나오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고를 친단 말인가.
어깨를 으쓱인 천무린이 어쩔 거냐고 배를 쓱 내민다.
더욱 분통이 터지는 위사검이었다.
저런 녀석을 위해 자신은 혼신의 힘을 다해 운남을 지키려고 용을 썼다니!
“어억!”
급격하게 오른 혈압 때문에 뒤로 넘어가려던 위사검을 부축한 공야찬과 조수강이 천무린을 째려봤다.
“주군!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허? 요 녀석들, 나랑 잠깐 떨어져 있었다고 사람 서운하게 만드네? 확 쥐어 패고 싶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천성검대원들 쥐어 팰 거면 저희에게 미리 언급을 해 주지 그러셨습니까. 제 선에서 천성검대원들에게 호통을 크게 쳤을 터인데!”
“헤헤. 그렇지? 그런 거지?”
“암요! 그렇고말고요!”
“낄낄낄낄.”
“킬킬킬킬!”
고혈압으로 쓰러져 입에 게거품을 무는 위사검을 뒤로하고 희희낙락하는 천무린과 공야찬, 조수강의 모습에 악교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푸후, 그래서 지금 전황은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것이오?”
태세 전환이 장난 아닌 공야찬과 조수강을 바라보며, 악교운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문을 열었다.
그 말에 공야찬이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대답했다.
“벽력왕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공야찬이 슬쩍 고갤 돌려 천무린을 바라봤다.
“감추려 애를 썼던 사실이 알려져서입니다.”
“감추려고 했던 사실?”
“주군께서 무형노괴를 꺾었다는 소식이 결국 중원 무림 곳곳에 퍼진 모양입니다. 최대한 입막음을 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운남성 양민들과 상인들이 있다 보니…….”
소문이란.
사람의 말과 말을 통해서 퍼지는 법이다.
상단은 상행을 해야 벌어먹고 살고.
표국은 표행을 해야 벌어먹고 산다.
결과적으로 상단과 표국은 자신의 고객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큼 그들의 이목을 끄는 좋은 방법은 없었다.
더군다나 칼밥을 먹고사는 세상에 함께 있지 않은가.
그렇다 보니 그들의 눈과 귀도 중원 무림에서 벌어지는 일에 활짝 열려 있었다.
운남에서 뻗어 나간 상인들이 운남혈투가 끝나자마자 먹고살기 위해 절강성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결국 무형노괴 이야기가 흘러 들어간 것이다.
“어차피 귀에 들어갈 사실이었어. 그게 뭐 대수라고. 뚫린 입과 뚫린 귀가 있는 게 다 그런 이유지 뭐.”
“문제는…… 마교에도 이 소식이 들어갔을 겁니다. 사파와의 전쟁에 대비하느라 수많은 정보원들이 그쪽에 쏠려 있다 보니 개방을 통해 이야길 들었는데…….”
천마신교에까지 그 이야기가 전해졌다면 확실히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무려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는 교주, 부교주 다음으로 제일가는 여섯 장로들이다.
물론 부교주가 현재 교주 대행을 하고는 있지만, 그에 대한 신앙심은 교주와 감히 비할 바가 못 되니까.
한 문파가 보유하고 있는 전력으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전력이니 말이다.
“반응? 반응이 아니라 기어 나와야지. 기어 나와서 나한테 두들겨 맞고 사라져야지.”
“……물론 그렇게 따로따로 움직여 준다면 좋겠지만.”
그 말에 들어가 있던 천무린의 배가 서서히 나온다.
“대가리를 깨부수고.”
또 스윽 배가 나온다.
“쥐어 패고 아가리를 털어서.”
더 이상 나올 수 없을 것 같은데, 계속해서 배가 나온다.
“천마신교가 한 백 년은 못 기어 나오도록 만들어 줘야지. 낄낄낄.”
배가 천장을 쳐다볼 정도로 허리가 뒤로 꺾은 천무린이었다. 대체 어딜 보고 저리 웃는 것인지.
공야찬과 악교운, 그리고 위사검 세 사람이 서로 시선을 마주하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가 저런 인간을 자신들의 수장으로 삼고 따라다니고 있는 것인지.
괜스레 자신들의 처지가 서글퍼지는 세 사람이었다. 아니, 세 사람뿐 아니라 여기에 있는 전원이겠지.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다네.”
위사검이 정신을 차리고 말문을 열었다. 그의 말에 천무린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사파, 그리고 마교가 우리의 입맛에 맞춰 움직이진 않는다는 거겠지.”
“그 말인즉슨, 벽력왕은 벽력왕대로 우리를, 그리고 천마신교는 천마신교대로 또 정파를 괴롭힐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결과적으로 그리될 걸세. 최악의 경우엔 두 세력이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고.”
위사검의 말에 악교운과 공야찬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정파 무림에는 그야말로 절망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게 된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벽력왕은 절대 누구와도 손을 잡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현재 수룡왕과 손을 잡았다. 거기다 천마신교라는 거대 세력과도 손을 잡는다면?
정파 무림에 드리운 암운(暗雲)은 보지 않아도 알 법했다.
벽력왕.
수룡왕.
천마신교의 부교주.
천마신교의 오 장로.
거기다 제각기 모여 있는 세력의 무력대들까지 충원된다고 한다면…….
“아마 정파 무림이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제아무리 주군과 다른 분들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그 이야기에 천무린이 고개를 젓더니.
“말이 너무 많아. 좀 닥쳐.”
공야찬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감당해 낼 수가 없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덩치를 키우면 되지 대체 뭐가 문제야?”
그리 말한 천무린은 품속에서 목함을 열어 환단 하나를 꺼냈다.
청아하고 고고한 향이 사방으로 퍼진다.
“……영단?”
“네, 맞습니다.”
그리고 천무린이 그 영단을 건넨 곳은 다름 아닌.
“……자네?”
“어르신, 드십시오.”
위사검에게 향해 있었다.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설마 남만에 간 이유가?”
“비단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겸사겸사.”
위사검이 떨리는 눈으로 목함에 담긴 영단을 바라봤다. 청아하고 고고한 향을 맡고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했다.
“……이걸로 망가진 단전을 복구할 수 있겠는가?”
“단전이 깨진 게 아니라면 복구는 가능합니다. 단,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겠지만요.”
“두 가지 조건?”
“단전의 수복을 위해 끝까지 도인해 줄 고수의 존재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투자.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천무린이 씨익 웃는다.
“……이 두 가지 모두 저희에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