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제213화
강호는 적자생존(適者生存), 강자지존(强者至尊).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강한 자만이 우뚝 설 수 있다.
소년이 청년을 이기든.
청년이 장년을 이기든.
장년이 노년을 이기든.
이긴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고, 이기는 자가 곧 강자가 되는 곳이다.
그렇기에.
왼쪽 어깻죽지가 날아가 버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풍산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에도 수적들과 산적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승부는 끝났다.
쓰러진 신혁건이 있었고, 부상당한 풍산이 보였지만.
풍산을 위해 움직였다간.
슬쩍.
오십여 명이 넘는 검귀(劍鬼)들이 자신들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까딱 잘못하다간 목숨이 순식간에 날아갈 터.
풍산과 전위가 두 생도와의 격전을 벌이기 전에도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 해 보고 모조리 쓸려 나가 이미 수적과 산적들의 숫자가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었다.
사실상 남은 이들의 목숨마저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다 보니 그저 눈치만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
“킥.”
짧고 굵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사방이 조용한데, 그 웃음소리가 모두의 귀에 천둥처럼 울렸다.
“자기 대장이 죽어 가는데, 제 목숨이 아까워 똥 마려운 똥개 새끼처럼 가만히 낑낑대고 있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
황태의 비아냥거림이 들린다.
그의 적나라한 말을 듣고 수적들은 모멸감으로 얼굴을 붉혔다.
날이 어두워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크아아아……!”
그리고 그때.
울부짖던 풍산이 시뻘겋게 충혈이 된 두 눈으로 몸을 부스스 일으키더니.
처억.
거치검을 거칠게 들고 피를 뚝뚝 흘리는 왼쪽 어깻죽지로 신혁건을 향해 다가갔다.
저벅, 저벅.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어. 감히! 가암히! 애송이 따위가!”
악에 받친 풍산의 살기 어린 음성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일행들이 하나둘 풍산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퍼억!
풍산의 등 뒤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 하나.
그리고 나타난 그 그림자가 풍산의 목덜미를 손날로 강하게 후려쳤다.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의 풍산이었다. 갑작스레 날아온 손날. 그것도 익숙한 기운에 딱히 경계하지 않았던 손날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전위였다.
“그만해라. 꼴사납다.”
“뭐, 뭣!”
털썩.
정확하게 급소가 명중된 풍산은 그대로 혼절하듯 쓰러졌다. 대체 왜 그랬냐는 눈빛을 보내는 풍산이었지만, 전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전위가 손을 들어 올려 풍산의 왼쪽 어깻죽지를 급하게 지혈한다.
파바박!
그런 후 전위는 수적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서 챙기지 않고 뭘 하는가?”
전위는 전위였다. 수적들은 전위의 서슬 퍼런 기세에 놀라 황급히 기절한 풍산을 둘러업었다.
전위가 일행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일행들 역시 전위를 마주 바라봤다.
“……보내 주겠는가?”
“허, 참. 패배자들 주제에 살려 달란 말을 왜 그리 당당하게 하는 거지?”
7기수 진량이 혀를 차며 입가를 비틀었다.
“지금 여기서 당장이라도 너희 모두의 목을 베면 모든 것이 수월해질 텐데,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느냔 말이다.”
진량의 말이 맞았다. 지금 이곳에서 이 모든 전력을 벤다면.
적어도 장강수로채와 녹림칠십이채의 전력의 일부가 뭉텅 썰려 나간다.
“……뻔뻔하기 짝이 없군. 모조리 죽여 버리자.”
“심지어는 하후성 대협을 말려 죽이려고 했잖아?”
“그걸 떠나서 운남성을 모조리 불태우려 했지.”
“도저히 살려 둘 수가 없는데?”
그 말에 반응하는 생도들이었다.
당장 정사대전이 벌어질 판이었다. 살려 준다면 곧바로 자신들의 적으로 등 뒤를 노리는 칼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
절대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가시오.”
악교운의 음성이 담담하게 울려 퍼졌다.
“교관님?”
“안 됩니다!”
“그게 무슨!”
“그, 그 사람도 아닌 새끼가 절대 살려 보내지 말라고……!”
격정적인 반응이 터져 나오며, 모두 악교운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교운은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가시오.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거든 지체 말고 가시오.”
그 말에 전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면서 몸을 돌려 산적들과 수적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금의 패배?
물론 낙인처럼 남을 것이다.
뜨거운 불에 지져진 화상 자국처럼 남아 이 쓰라린 기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전위는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자신은 미래에 수백, 수천의 녹림을 이끌어 나갈 사람이니까.
조금 더 성장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말이다.
“그런데 말이오.”
산적들과 수적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따라 움직이려던 전위의 뒤로 악교운의 음성이 들린다.
“녀석이 그러더이다. 한 번 빚진 것은 돌려주는 게 이치라고. 원래 본인이 좀 세게 갚는 편이라고.”
그 말에 전위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아마 전에 섬서에서 벌인 혈투 때문이겠지. 그때 우리 생도 하나를 보내 주었다지.”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
호량채와 전위가 천무린을 습격한 날.
그때 천무린과 격전을 벌이기 전에 옆에 있던 소화진을 그냥 보내 주었던 기억이 전위의 머릿속을 짧게 스쳐 지나갔다.
……강자의 배포였고, 그 정도는 얼마든지 베풀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행인 줄 아시오. 그때의 그 알량한 배려가 당신에게 돌아온 것이니까. 그 이외에 당신과 사파 새끼들을 살려서 돌려보내 줄 일은 없다고.”
반대였다.
정확히 상황이 역전되어 전위가 이제는 전장에서 벗어난다. 과거 자신이 베풀었던 그 자비가 고스란히 되돌아와서.
그렇군. 그랬어.
전위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수치스럽다. 모멸감에 온몸이 절로 떨려 왔다.
아랫입술을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걸레짝이 될 만큼 핏물이 터져 나왔지만.
“……배려에.”
꾸우우욱.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전위는 열리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벌려 말해야 했다. 전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뒤돌아서 이 모멸감을 깨끗이 털어 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개죽음만 당할 뿐일 테니까.
그 모습을 지켜본 악교운은 전위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뗐다.
“날이 춥구나. 어서 돌아가자.”
“예.”
* * *
운남으로 돌아온 천무린은 환대를 받기도 전에 먼저 움직인 곳이 있었으니.
“이 양반들, 정말 대~단들 하시다. 결국 자기들 대가리가 이렇게 개박살이 난 걸 봐야 속이 시원한가 보지.”
위사검과 공야찬, 조수강, 전욱에게 신창 신준건을 맡겨 놓고 걸레짝이 된 하후성을 천성검대로 데려갔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천성검대 부대주, 팽경은 고개를 떨궜다.
하후성을 볼 낯이 없었다.
하후성이 어디 이리 쉽게 당할 존재인가.
적어도 팽경은 정파 무림 십대고수의 반열에 들어가는 하후성이 어디 가서 당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아하, 나한테 구태여 그런 소리 들을 필욘 없다는 표정이네?”
“정확히 보셨소.”
팽경이 고갤 들어 분노로 타오르는 눈길로 천무린을 마주 바라봤다.
“아이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인간이 제풀에 쓰러져 기절해서 다행이야.”
그러면서 천무린이 둘러업고 있던 하후성을 천성검대원들에게 던졌다.
후웅!
“우웃!”
“미, 미친!”
화들짝 놀란 천성검대원들이 황급히 하후성을 받고서 천무린을 매섭게 노려봤다.
“진즉에 이렇게 될 줄 알고 내가 말 한마디 남기고 오길 잘했지.”
「 자,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한따까리 하겠다니 어디서 누구랑……? 」
「 아휴, 자기들 명예에 도취돼서 자기 할 일 안 하는 놈들 있잖아요. 식충이 새끼들. 밥값도 제대로 못 하는 놈들은 조져 놔야 다음부터 재깍재깍 움직일 것 아니에요! 」
「 서, 설마 천성검대를 말하는 겐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그들과 한바탕 하겠다는 게 무슨……? 」
「 어르신, 지원을 온 건 고맙지만 결과적으로 식객으로 온 꼴이 됐잖아요. 그 녀석들은 무림맹에서 지원을 온 겁니다. 다름 아닌 제 이름을 걸고 말이죠. 게다가 여기서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 주고 있는데, 그들과 한바탕 하는 게 뭐가 대숩니까. 」
「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
「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손찌검을 할까요? 아무리 그래도 저 이래 봬도 생도입니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라고요. 」
마지막에 침묵과 더불어 의심 어린 눈빛을 보내는 위사검을 애써 무시한 것이 생각났지만.
천무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식충이 새끼들, 배때기에 기름칠만 하다가 돌아가서 맹주한테 ‘사파 새끼들이 우리를 보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더이다!’라고 보고하려고? 아유, 창피해! 아유, 쪽팔려!”
그의 경박스러운 말투에 팽경뿐 아니라 천성검대원들 모두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언제 이런 취급을 당해 봤겠는가.
천성검대라고 하면 정파 무림에서는 누구나 우러러보는 단체 중 최고가 아닌가.
그런데 눈앞에 저 약관의 청년은.
자신들을 우롱하고 있다.
“……지금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오?”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건데, 반박할 수 있어?”
“그대를 보호해 줄 이는 대주 말곤 운남 어디에도 없소. 그런데 대주가 기절해 있지 않소. 즉 지금 그대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지.”
“안 그래도 잘되었지. 녀석들이 원체 쌓인 게 많아서 그거 풀어 주느라고 양보했더니, 좀이 쑤셔서 말이야.”
그 말에 팽경이 입가를 비틀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그대가 무형노괴를 꺾었다는 그런 헛소리를 내게 믿으라는 소린 아니라고 믿겠소.”
거산도 전위를 꺾었다고?
그 사실조차 믿기 어려웠지만, 천무린이 보여 준 무위라면 그럴 수 있다고 애써 수긍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형노괴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하후성도.
거산도 전위도.
신창 신준건도 무형노괴의 상대로는 힘들었다.
무형노괴에 필적할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운남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정파 무림을 통틀어도 몇 되지 않는다.
운남 사람들끼리 쉬쉬하더니 불과 며칠 전부터 공공연히 떠도는 소문으로 그 대단한 무형노괴를 천무린이 꺾었단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운남에 온 뒤로 가장 크게 웃은 날을 꼽자면 바로 그 이야기를 들은 날이었다.
“그런 새빨간 거짓말로 우리를 긴장시키거나 실수를 유발하고자 꾀하는 거라면…….”
“아오, X나게 시끄럽네. 남만에서 닥치고 애들 패다 보니까 여기서 날파리들이 왱왱거리는 거 정말 못 참겠네.”
천무린이 잔말 말고 공격하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까딱.
까딱.
“사내새끼가 달고 태어났으면 지금은 말로 할 때가 아닌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