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제212화
전위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모두 이렇게 강해졌는가?”
전위의 말에 송무를 업은 청년, 태강이 씨익 웃는다.
“그쪽이 생각한 것보다 더 강해졌을걸요. 아마도.”
태강은 피투성이가 된 송무의 맥박이 불규칙적이지만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것을 느끼곤 전위를 바라봤다.
그러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송무와 최선을 다해 싸워 준 적장에 대한 예의, 딱 그 정도의 인사였다.
“죽이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다면 당신과 당신의 수하들은 이곳에서 더욱 처절하게 도륙을 당했을 테니까.”
그리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태강이었다.
바로 뒤에 전위라는 거대한 적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등을 보이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전위는 일행들 사이로 이동하는 두 청년을 바라다봤다.
‘……죽이지 않았다라.’
죽이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이겠지.’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틀어박힌 서른여섯 개의 점에 적중당하는 순간, 모든 기경팔맥이 뒤틀렸다.
쏟아 내던 자신의 모든 힘이 쭉 빠지면서 마지막에 제대로 된 일격을 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검이란 사람을 해하고자 만들어진 병기이나.
전위 앞에서 보여 준 송무의 검은.
살검(殺劍)이 아닌, 활검(活劍)에 가까웠다. 사람을 해하는 검으로 검술을 펼침으로써 또 다른 검을 살린다.
진정한 승자는 송무라는 사실. 그리고 아마 전위는 전위 자신만이 아는 이 승부의 전말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겠지.’
‘천무린에게 졌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납득했다.’
하지만 눈앞의 저 생도이자 송무에게까지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그 패배를 시인하는 순간, 전위는 더 이상 전위가 아니게 될 테니까.
* * *
“으아아아아아아!”
“흐랴아압!”
일순 내지르는 고함과 병장기가 부딪치며 튀는 불똥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어둠을 걷어 내고 있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콰가가강! 꽈앙!
끼이이이이!
창날과 톱니처럼 생긴 기형검이 맞부딪치면서 만들어 내는 굉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온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부딪치는 격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온몸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하게 만들 정도로 치열해 보였다.
‘……푸, 풍산 부채주님께서?’
‘저, 저 생도 따위와…….’
수적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푸르죽죽하게 죽어 갔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다. 전위가 생도와 맞붙어 패배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어디까지나 외인인 전위가 진 것과.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풍산이 약관의 청년과 맞붙은 접전은.
수적들의 마음속에 불안의 씨앗을 심었다.
“후우웁.”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신혁건이 창을 휘돌렸다.
신혁건은 마주한 풍산을 본 순간부터 자신의 온몸을 짓누르는 갑갑한 공기 때문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전장에서 적을 만나 싸우게 되면 진득한 살기로 인해 이처럼 가슴이 답답해지는 경우가 있으나.
지금 이 순간은 궤가 달랐다.
‘마치…… 깊은 물속에서 싸우고 있는 것 같군.’
심지어 톱니의 기형검을 사용하는 풍산의 위세는.
포악한 심해(深海)의 포식자와 같은 모습으로 신혁건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부우우우웅!
바닷물을 찢어발기는 듯한 묵직한 파공음과 가공할 만한 힘을 담아 쏟아 내는 변칙적인 참격들이었다.
그 참격과 마주한 순간.
상산창법(常山槍法).
비응뇌조(飛鷹雷鳥).
한 마리의 새가 벼락으로 화하여 세찬 날갯짓을 하더니 금세 심해의 포식자를 향해 맞부딪쳤다.
콰가가가강!
콰아아앙!
다시 한번 폭음이 터져 나오면서 두 사람의 몸이 순간적으로 꺾였다.
타다다닥! 타닥!
충격파가 번지면서 두 사람에게 고스란히 충격을 안겨 준 것이다.
“푸흐흐흐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격전 중에 터져 나온 웃음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풍산이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풍산의 이가 훤히 드러났다.
그 모습에 수적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풍산이 자신의 적수를 만났을 때마다 보여 주는 저 웃음. 그 웃음을 볼 때마다 잔혹한 그의 성정이 유감없이 드러났으니까.
이번에도 필시 그러리라고 여기며 수적들이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큭크크큭큭!”
반대편에서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응?
수적들의 시선이 반대로 향한다.
풍산과 마주하고 있는 신혁건 역시 무엇이 그리 좋은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상대의 목을 떨어뜨리기 위해 필사의 격전을 치르면서 서로를 향해 저리 웃음을 짓다니.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저리 행동할 수 있겠는가.
수적들은 황망한 눈길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동시다발적으로 두 사람은 삽시간에 땅바닥을 박찼다.
대번에 거리가 좁혀진다고 생각했는데, 신혁건의 창이 유연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 오며 거리의 이점을 살리는 순간.
풍산은 허공에서 한 번 더 땅을 박찼다.
파앙!
창을 쓰는 무인에게 거리 조절은 필수였다.
거리를 내주지 않으면서 창으로 뿜어대는 막강한 원심력의 휘두르기나 꿰뚫고 들어오는 관통력이 창이 가진 최대 장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창으로 지고한 경지에 올랐던 신창과 맞부딪치면서 풍산은 대번에 거리를 좁힌 것이다.
내리쳐 오는 창대를 풍산은 그대로 어깨와 등을 앞세워 타격 지점을 높여서 충격을 완화시키더니 동시에 긴 창대를 타고 파고들었다.
흡사 물속에 사는 뱀처럼 요사스러운 몸짓으로 말이다.
그때.
터억.
마주 창대를 끌어당긴 신혁건의 한쪽 무릎이 공중으로 도약하며 짓쳐들어온 풍산의 턱을 노렸고.
설마 박투술을 펼칠 줄은 몰랐는지 풍산은 짓쳐들어오는 무릎을 황급히 한 손으로 막아 내면서 다시금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타다닥.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서로 세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다시금 서로를 향해 맞부딪친다.
콰앙!
바들바들.
창과 검이 부딪친 상태로 서로에게 이를 훤히 드러낸 채 입을 연다.
“할아비와 손자가 같은 창법인데, 어째 손자 쪽이 살기가 더 짙어.”
“좀 더 실전적이라고 해 두지.”
“할아비 창법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아니고?”
풍산이 혓바닥을 날름거리자, 신혁건이 피식 웃는다.
“후달리나 봐? 혓바닥이 길어졌네.”
“입심은 제법이야. 그 할아비의 그 손자구먼.”
“어디 가서 말싸움으로 져 본 적이 없지.”
“그런 것치고는 이미 네 녀석의 친구는 죽기 직전인데?”
태강에게 업혀 가는 송무를 보고 한 말이었다.
그렇게 위풍당당하게 덤비더니 결국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진 저 애송이의 모습처럼.
아마 네 녀석도 그리될 거란 의미를 내포한 풍산의 말이었지만.
“뭐, 어쩔 도리가 없지.”
그 말에 신혁건이 어깨를 으쓱인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 조금이라도 흔들릴 줄 알았는데, 전혀 흔들림이 없다.
“무인이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는 거겠지. 오히려 저렇게 살려 두는 게 멍청한 짓 아닌가? 끝을 맺지 못한 걸 보니 오히려 저 산적 새끼가 대가리가 없는 거겠지.”
신혁건의 두 눈이 휘었다.
“저 녀석이 깨어나 이번 싸움을 몸으로 체화할 텐데, 그러고도 너희가 발 뻗고 편안히 잘 수 있을 것 같으냐?”
일순 할 말을 잃는다. 패배를 해놓고, 협박을 한다.
“애X끼 하나 이겼다고 기고만장할 일이냐? 부끄러움도 모르는 새끼.”
그 말에 풍산의 두 눈에 짙은 살기가 묻어났다. 결국 말로 흔들려다가 되레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었다.
“……후후, 거참.”
“왜? 이제 좀 쪽팔린 걸 알았어?”
“미안하게 됐군. 알량한 짓거리를 해서.”
“알았으면 됐고.”
“그래서 덕분에 알게 되었다.”
“뭘.”
신혁건의 뚱한 표정에 풍산이 다시 한번 어금니를 드러냈다.
“네가 말한 산적 새끼처럼 어중간하게 너를 죽이지 않겠다. 갈기갈기 찢어서 장강의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놓겠노라. 내 그리 다짐했다.”
“킥.”
풍산의 말에 짧게 웃음을 지은 신혁건 역시 두 눈이 깊어졌다.
“네놈이 할아버지를 건드린 순간부터 넌 오늘 여기서 절대 살아 나갈 수가 없다. 이 새끼야!”
타앗!
신혁건의 창끝이 흔들리더니 한층 유연하게.
그리고 맹렬하게 십 연격이 터져 나온다.
파바바바박!
풍산이 거치검을 들어 낭창거리며 뻗어 오는 창끝을 마주하는데, 그저 쾌속하고 강맹하기만 했던 창끝이 순식간에 변칙적인 공격들로 변모한다.
“……흡.”
짧은 신음을 흘리며 거치검으로 십 연격의 창격을 쳐 내면서 충격을 흘려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생각이 없었는지 더욱더 속도를 높여 연환참격을 쏟아 내는 신혁건이었다.
정작 신혁건은 힘을 최소화하며 창대를 잡고 원심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니,
공격 하나하나에 담긴 강맹함.
그리고 어느 쪽에서 뻗어 올지 모르는 변칙에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게 되는 풍산이었다.
한 수가 있었다, 이건가…….
그러면서 풍산은 침착한 눈으로 주변을 쭉 훑었다. 모든 전투가 멈춘 채 모두 이 격전을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패배로 인한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 잘 안다.
어쩐지 다른 초절정급 고수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적어도 중간에 끼어들어 이 격전을 방해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눈앞에 이 녀석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인질로 삼는다.’
풍산이 혹여 이 격전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빠져나가려면 다섯은 넘는 초절정의 고수들을 뚫어 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
결국 눈앞에 있는 이 생도를 인질로 삼아 빠져나간 후 뒷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생각은 짧고.
행동은 신속하게.
풍산의 거치검에서 짙고 어두컴컴한 묵색의 강기가 순식간에 터져 나왔고, 신혁건의 두 눈이 커지면서 이에 대비하려는 순간 풍산이 먼저 사선으로 그어 버렸다.
후우웅!
쾅!
“쿨럭……!”
갑작스레 터져 나온 강기의 충격에 한 차례 휘청거린 신혁건의 몸은 왼쪽 어깨부터 가슴팍, 그리고 오른쪽 허리까지 마치 상어의 이빨에 살점이 뜯겨 나간 것처럼 생살이 떨어져 나가서 뼈가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그와 동시에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풍산이 씨익 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게 바로 경험이라는 거다. 애송이 새끼야.”
이를 훤히 드러내며 뱉은 풍산의 말에 신혁건이 입가에 핏물을 울컥하고 뱉어 내더니.
“……그렇겠지. 경험. 근데…… 너무 무방비네.”
“무방비?”
푸욱!
한 줄기의 뇌전이 득의양양하게 입가를 올리던 풍산의 왼쪽 어깨에 내리쳤다.
“끄으아아아아아아아아!”
풍산의 왼쪽 어깻죽지부터 팔이 떨어져 나가 그대로 몸이 휘청거린다.
“왜 또 경험 운운해 보시지. 쿨럭. 쿨럭.”
신혁건이 몇 차례나 뒤로 물러나면서 피를 토해 냈다. 두 눈에 핏발이 선 풍산이 자신의 잘려 나간 왼팔을 보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왼팔을 잘라 낸 신혁건의 창을 바라봤다.
“……언제?”
“키, 키킥. 그러게 경험 좀 더 쌓지 그랬어…….”
푸화아아악.
그 말을 끝으로 신혁건은 땅에 쓰러지더니 그만 혼절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