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제209화
섬찟하다.
사람의 목이 이리도 쉽게 달아날 수 있는가.
달빛으로 겨우 식별될 정도로 어두운데도 산적과 수적들의 목이 너무도 쉽게 분리된다.
서걱.
천살대의 살수들 서른 명이 보여 주는 무저갱 같은 살기는 두려워 숨을 멎게 만들었다.
푸욱.
찰나의 시간조차 주지 않고 짧게 쥔 단검을 들어서 적의 경동맥을 찔렀고.
“……억.”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
죽음의 사자(使者)를 목도한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던 산적과 수적들은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허물어졌다.
천살대가 보여 주는 저릿한 살기와 무정한 검격은 그 자체만으로도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지만.
정말로 몸을 더욱 굳게 만드는 것은.
히죽.
자신들의 눈앞에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청년들과 여인들이었다.
“전에 만났던 그 산적 새끼들이네.”
“……아아, 그 호량채인지 뭔지 하던 것들?”
“우리 단체로 떼죽음을 당할 뻔했던 그때, 기억하지?”
“하여간 비겁하게 도끼 던지고 X랄 염병을 떨던 새끼들.”
“에이, 다 떠나서 화린이한테 홀딱 빠져서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았어?”
“맞아요. 저를 희롱하고 난리 났었죠.”
생도들이 입가를 비틀었다. 하나둘씩 비틀어진 그 입가를 마주한 호량채의 산적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분명 자신이 아는 얼굴들이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하지만 무엇이 다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주춤.
산적들이 기세에 밀려 주춤거리고 있을 때.
“갈!”
모두가 동요한 것은 아니었다.
웅혼한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온다.
전위가 동요하기 시작한 호량채 산적들을 바로잡아 주었다.
“똑바로 봐라. 여전히 핏덩이들이다.”
단호하고도 묵직한 음성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동요하던 이들이 한 차례 움찔거렸다. 그러면서 그들의 시선이 전위를 따라 눈앞에 선 이들의 얼굴을 훑는다.
확실히.
그래, 확실히.
하나같이 애송이 티도 벗지 못한.
솜털이 여전히 뽀송뽀송한.
녹록지 않은 강호를 제대로 경험했다고 볼 수 없는.
약관의 천둥벌거숭이들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호량채의 산적들은 하나둘 자신의 병장기를 고쳐 잡으며 힘을 내었다.
“어라.”
“이 아저씨들, 해 볼 생각인가 본데?”
“어차피 조졌어야 돼. 아까 그 사람 새끼 아닌 놈의 말 못 들었어?”
“들었지……. 한 명이라도 놓치면.”
누군가의 음성에 생도들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남만에서 겪었던 천무린의 흉신악살(凶神惡殺) 같은 모습을 일 년하고도 반년을 더 봐야 했다.
원래도 사람 새끼가 아니라고 느꼈지만.
남만에서는 거의 지옥에서 현신한 아수라나 다름없었다.
오죽했으면.
“지혜야.”
“왜?”
“네 백부님이랑 숙부님은 괜찮으셔?”
“…….”
당지혜의 백부이자 숙부인 당가의 두 어른은 골병으로 시름시름 앓을 정도였다. 남만 전역의 모든 독초란 독초, 모든 약초랑 영초를 골라내며 하루 온종일 약 냄새를 맡으면서 영단을 만들어 내게 했기 때문이다.
「 히히, 그 이야기 못 들었나? 당백진 관주님이 저한테 두 분의 생사여탈권을 주셨다는 말을?」
그 말에 어림도 없다는 듯 난리를 친 당가의 두 어른을 마치 개 패듯이 패서.
말 그대로 장유유서(長幼有序) 따윈 개나 줘 버린.
그야말로 패륜의 현장을 만들어 낸 천무린이 일 년 반 동안 당가의 두 어른을 마구 굴러 댔다.
물론 결과적으로 지옥과도 같은 훈련과 수련을 거친 이들은 하루를 멀다 하고 몸에 좋다는 것들을 먹을 수 있었다.
제아무리 굴려도 다음 날이 되면 멀쩡해지니.
어쩔 수 없이 불쌍한 두 사람을 외면하고 만 생도들과 일행들이었다.
“……난 죽어도 그렇게 되기 싫어.”
“그렇지. 나 역시.”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 괴로워하다가 골로 가긴 싫다…….”
생도들의 잡담에 산적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꽈악.
이들이 보여 주는 행태.
이는 자신들을 향한 명백한 무시이자 도발로 보였다.
그와 동시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호량채의 산적들은 도끼와 검을 들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단번에 이 기세를 역전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푸욱!
누군가는 그랬다.
세간에 알려진 평가 따위보다 자신의 감을 믿으라고.
무인이라면 자기가 느끼고 있는 감이 반드시 있을 거라면서.
하지만 그것을 애써 무시한 산적들의 대가는 실로 컸다.
막광야 다음으로 인정받는 호량채의 절정급 고수들이 먼저 생도들의 기세를 죽이고자 뛰어들었고.
동시에 신호라도 맞춘 듯 그들은 하나둘 남은 생과 이별을 해야만 했다.
솨라라라락!
그들은 하나둘 자신의 목젖을 꿰뚫는 무정(無情)한 검의 향연에 그만 넋을 놓아야만 했다. 빛살처럼 쾌속한 검 끝이 산적들을 마주하며 그들을 마구 난자하기 시작한다.
푹푹푹! 푸우욱!
번쩍인다 싶더니 어느새 자신의 목젖 앞에 닿아 있는 검에.
“……뭐, 뭣! 이런 말도 안 되는!”
푸욱!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산적들의 목을 꿰뚫는 생도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언제 그들이 시끄럽게 잡담을 하고 떠들었냐는 듯.
일검(一劍).
일살(一殺).
한 번의 검격에.
한 번의 죽음을 선사한다.
검을 들어 적을 베기 시작한 그들에게 자비 따윈 없었다.
푸욱! 푹푹!
산적들이 동시에 떼죽음을 당하기 시작하자, 수적들은 돕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산적과 수적들 앞에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뻗어 내고 휘두르는 검들이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눈앞의 어린 생도들이 펼칠 수 있는 검이 절대 아니라는 것.
그럼에도 주저 없이 검을 휘둘러 전장에서 맹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신준건과 하후성을 맞이하여 싸울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절정의 고수들보다 더욱 치를 떨게 만드는 존재들이라니.
그리고 그 모습을 쭉 훑어보던 풍산의 두 눈이 바다 저편의 깊은 심해(深海)처럼 가라앉았다.
돌아가는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기세에서 밀렸고.
검술에서도 밀린다.
저 애송이들이 어떻게 저와 같은 놀라운 무위를 갖출 수 있는 건지.
그것을 알 수 없었으나.
‘멸마신군……. 그놈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그의 눈에 전위의 모습이 들어왔다.
전위가 패배하고 돌아왔다고 했을 때.
대체 어떤 상대를 맞이했길래 그 대단한 전위가 패배를 했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상대가 채 약관도 안 된 청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풍산은 코웃음을 쳤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전위라면 그런 허황된 이야기는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정파 나부랭이들이 터뜨린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수십의 검귀(劍鬼).’
검귀들이 날뛰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어야만 했다.
생전 본 적 없을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검술을 펼쳐 내는 것이 현묘하고 신묘했다. 아니, 오히려 영민하고 교활하게 검을 휘두른다는 말이 더 정확할까.
산적들의 절반 이상이 생도들의 검에 목숨을 잃었고, 수적들 역시 수십이 살수들의 손에 단번에 이생을 하직했다.
게다가 초절정 고수들이 움직이지 않고 그저 현재 상황을 낱낱이 살펴보고 있으니.
“……좋지 않군.”
“나서야 할 것이다.”
풍산의 말을 전위가 받는다.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생도들과 살수들을 향해 쭈욱 나아갔다.
적어도 추가적으로 발생할 산적과 수적들의 피해는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때.
“……으음.”
“이거, 우리가 무시당해도 너무 무시한 거 같은데.”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은 풍산이 저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자신과 전위의 앞을 가로막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풍산의 앞에 선 청년.
그리고 전위의 앞에 선 청년.
둘 모두 생도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보시다시피 다들 손이 바빠서 말이야.”
창을 붕붕 돌리던 청년이 몸을 가벼이 풀고는 히죽 웃는다.
그는 천무린이 업고 간 신준건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봤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자 정신적 지주인 할아버지가 겨우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상태였다.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고.
당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오냐. 맘대로 놀아라.”
악교운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창을 휘돌리던 청년, 신혁건은 누가 봐도 상황을 주도하고 이끌었던 이의 앞에 섰다.
“……하하, 정말 어이가 없군.”
그러자 전위의 앞에는 일여 년 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진 듯한 큰 키와 훤칠해진 모습으로.
스윽.
애체를 들어 올린 청년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추풍검 송무라고 합니다.”
처억.
포권을 하며 전위를 바라본다.
“……지금 내 앞을 가로막은 건가?”
“그럴 때 무린이가 하는 말이 있죠. 두 눈은 옹이구멍이냐고.”
송무의 미소는 여전했다. 그리고 그 미소에 전위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에 힘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모멸감이었다.
멸마신군.
그를 따라가 일대일로 생사결을 겨루자고 말하고 싶었으나.
호량채 산적들을 모두 버리고 갈 수가 없었기에 이 자리에 남았을 뿐이었다.
대번에 이들 중 수십을 박살 내고 갈 수 있으리라고 여기던 전위에게.
그와 맞선다고 나선 생도는.
기억에도 없는 유약한 녀석이었다.
“꺼져라.”
“하하,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순박한 웃음에 전위는 자신의 거산도를 꺼내 들었다.
“……대번에 때려죽이고 멸마신군에게 이에 대해 단죄하겠다.”
“가능하다면 언제든지요.”
파앗!
몸을 띄운 전위가 순식간에 송무의 앞에 다가섰다. 제대로 된 반응조차 할 수 없었는지 송무의 손은 여전히 아래로 늘어뜨린 상태였다.
후우우웅!
거산도 전위가 몰아치는 도격(刀擊).
아마 이 청년의 몸은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격에 쪼개지리라.
그 모습을 목도한 수많은 산적과 수적들은.
이를 계기로 분위기가 반전되고 전황이 크게 바뀔 거라고 굳게 믿었다.
콰아아앙!
짓쳐들어온 거산도의 거력(巨力)은 단숨에 송무를 짓눌렀고, 터져 나온 파공음과 진동음은 보지 않아도 무지막지한 힘이 담겼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카가가가각!
고통 어린 비명과 신음이 아니라 병장기와 병장기가 부딪치며 내는 소음이 발생했다.
전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송무가 들고 있는 얇디얇은 검으로 자신의 거산도를.
그것도 무시무시한 일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어휴, 확실히 장난이 아니네요.”
송무의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땅바닥이 움푹 파인 현장에서 송무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이런 괴물 같은 인간을 무린이는 그 전에 이겼단 말이지. 괴물은 역시 괴물이네.”
카앙!
송무는 마주하고 있던 거산도를 튕겨 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싱긋 웃었다.
“천하삼십육검이라고 해요. 종남파 최고의 비전절기죠.”
그리 말하는 송무는 중단세를 취하며 호흡을 골랐다.
눈앞의 전위를 바라보며.
“후우우.”
후보생 때부터 혹독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천무린에게 마구 굴려졌다.
삼 년이 넘도록 굴려진 혹독한 결과물을 이제는 보여 주어야 할 때.
대기만성(大器晚成)이 아닌.
세상을 빛낼 검호이자 종남 검성을 뒤이을 새로운 검객의 등장을 알리는 시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