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제202화
절강성에서 쳐들어온 녹림채와 운남혈전이 벌어지기 석 달 전.
하남에 위치한 무림맹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천성검대주.”
무겁고도 중압감 있는 목소리.
그러나 어딘가 힘이 빠져 있어 알맹이가 없어 보이는 음성이었다.
“……예! 맹주님.”
“지금 당장 장강에서 운남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향하여 전선을 구축하도록 하라.”
“예?”
하후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눈앞의 거인(巨人)을 바라봤다.
무림맹주 독고황.
한때는 청운검을 들고 강호를 유랑하며 정파 무림의 최고수로 불리던 사내이자, 지금은 정파 무림을 호령하는 무림맹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남자.
하지만 하후성은 독고황의 거무죽죽하게 죽어 가는 안색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삼대 무관 비무대회 이후 독고황은 두문불출하며 무림맹에서도 자신의 최측근이 아니면 얼굴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독고황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자 최측근인 하후성에게 출진하라고 명하다니.
그렇다면 누가 아픈 독고황을 지킨단 말인가.
“후후……. 천성검대주.”
“예…….”
“어리둥절한가.”
“아무래도 맹주님께서 내린 명이 이해가 가질 않아서…….”
“흠. 자네도 내가 많이 약해진 것 같은가. 이제는 내 명에 대꾸도 하고 많이 바뀌었군.”
그 말을 들은 하후성이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맹주님.”
“후후후. 농일세, 농. 그리 놀라지 말게나. 자네는 놀리는 재미가 제법 있단 말이야.”
“…….”
“이걸 보겠는가.”
꾸깃.
촤락.
독고황은 몇 번이나 꾸깃꾸깃하게 접었다 폈던 서한을 하후성에게 건네주었다. 하후성은 감정의 동요가 보이지 않는 무심한 독고황의 표정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전달받은 서한을 읽어 봤다.
「 나 천무린이오. 」
도발적인 필체와 그 내용.
“……이런 무례한!”
일개 무관 생도가 무림맹주에게 보낸 서한치고는 그 내용이 상당히 불량하게 느껴졌다. 본래 같았으면 대번에 찢어발겼을 버릇없는 첫 문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고황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계속 읽어 보게.”
그 말에 어렵사리 흥분을 가라앉힌 하후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그가 다음 줄로 시선을 옮겼다.
「 정마대전 당시, 무림맹주라는 작자가 꼴사납게 뒤로 물러나서 그저 전황만 지켜보고 말이야. 쪽팔리지도 않나. 」
“……정말 이 작자가 미친 것인가! 속사정도 모르고 어디 감히!”
십여 년 전 정마대전 일을 들먹이면서 이젠 아예 무림맹주를 욕보이기까지 한다. 하후성은 대번에 서한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 노기를 띠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자네, 요즘 늙어 가는 모양이네. 다 읽지도 않고 그리 흥분하지 말게나. 그다음부터가 더욱 흥미로우니 말이야.”
씩씩거리던 하후성은 독고황의 말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정말 천무린이 눈앞에 있었다면 대노하여 큰 벌을 내렸으리라.
하지만 독고황의 말마따나 다음 줄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런 서한을 받고도 독고황이 침착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윽.
「 그 이유는 병마(病魔) 혹은 항거 불능의 독에 의한 중독(中毒). 」
멈칫.
하후성은 저도 모르게 그 대목에서 멈칫했다.
「 무림맹주가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거나 독에 중독되었다고 소문이 나면 정파 무림인들에게 더욱 혼란을 가중할 수도 있었기에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이었겠지. 정파 무림의 정신적 지주인 당신이 쓰러진다면 품고 있던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
단정하여 말하는 듯한 천무린의 서한에 하후성은 순간 딱 굳어 버렸다. 십여 년 전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이 생도는 알고 있는가.
독고황이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후성과 독고황이 믿고 있는 식솔 몇뿐이었다. 즉,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것.
하지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고, 화제는 바뀌었다.
「 내가 판을 짰는데, 제법 규모가 크거든요. 」
이젠 존댓말이다. 이렇게 갑자기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다니.
문득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 보여 준 행동력과 치밀함을 떠올리며, 하후성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 그 판에 무림맹도 끼어 주셔야겠습니다. 끼여서 함께 칼춤 한번 추시지요. 」
무림맹이 끼어서 함께 칼춤을 추자니.
그리고 그 판과 칼춤이 무엇인지 대번에 파악한 하후성은 굳어진 표정으로 독고황을 바라봤다.
“맹주님…….”
“재밌지 아니한가?”
“이거 설마 장강수로채와 녹림칠십이채를 말하는 것입니까?”
“후후후.”
독고황은 그저 웃는다.
“……결국 이 생도의 손에 중원 무림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
“그 판에 우릴 보고 도와 달라는 것도 아니고, 끼여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정말 재밌는 친구일세. 비무대회 때부터 범상치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맹주님, 무림맹이 나서면 오히려 일이 더 커지게 됩니다. 강호의 은원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 작자가 정파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자네, 서한을 끝까지 읽지 않았구먼. 모두 읽고 말하게.”
그 말에 하후성은 입을 꾹 다물고는 서한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 남만으로 갈 겁니다. 준비 기간이 꽤 길겠죠. 」
“……남만.”
「 그곳에서 맹주님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한 해답을 찾을지도 모르고요. 」
“……!”
하후성의 두 눈이 커졌다. 결국 이것이었나.
천무린이 먼저 독고황의 병마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읽고 노발대발했던 하후성이었지만, 병마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된다면 말이 달라진다.
“하지만 맹주님을 치료하던 의선(醫仙)까지 고갤 저으며 방법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독고황 역시 고갤 끄덕인다.
“알고 있네. 말이 안 될 수도 있지. 그런데 천성검대주.”
“……예.”
“내가 검을 놓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네.”
“…….”
“검을 그만큼 잡고 싶다는 말이지.”
“……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정마대전 이전부터 겪어 온 병마로 인해 독고황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거무죽죽하게 죽어 가고 있는 안색을 보면 아마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어렵겠지. 하지만 사람이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제법 놀라운 힘을 주더군. 이 서한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없던 희망이 생겼으니 말이야.”
“…….”
“이 생도가 걸어온 행보. 약관도 되지 않은 이 청년이 보여 준 말도 안 되는 행보가 날 끌리게 만들더군.”
“…….”
“천성검대주, 우리 역시 이 판에 낄 것이네. 그리고 이 생도가 말한 대로 시간을 벌어 주어야겠지.”
“……명을 받듭니다.”
그리 말하며, 하후성은 마지막으로 써 놓은 천무린의 글을 읽었다.
「 일 년, 아니 그보다 조금 더 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좀 막아 줄 수 있죠? 간만에 감춰 놨던 보따리 좀 풀라고요. 놈들이 활개 치는 것을 막아 주세요. 괜히 바라만 보다가 또 때를 놓쳐서 정마대전 때처럼 되지 말고요. 이번에도 무림맹이 안 나서면 더럽게 욕 처먹을 걸요?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겠죠? 」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반말, 존대, 이젠 장난스럽기까지 한 말투.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해 버린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이 말투에 하후성은 정신마저 혼미해졌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화살은 그의 손을 떠나 버린 것을…….
* * *
“열 받는군.”
교룡검 풍산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바로 코앞이었다. 아마 하루 반나절이면 운남성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까지 왔다.
그런데 눈앞에 웬 훼방꾼들이 자신들이 갈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처억!
질서정연한 모습을 갖춘 채 검을 가슴께 앞으로 내밀고 도열한 백여 명의 검객이 마치 한 몸인 듯 서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도를 보이는 이들.
교룡검 풍산의 가느다랗게 뜬 실눈에 보이는 네 글자.
“……천성검대(天星劍隊)?”
“무림맹 천성검협 하후성이 이끄는 천성검대다.”
“하후성? 그 인간이 왜? 무림맹이 갑자기 이 판에 왜 낀 건데?”
“……나도 모르겠군.”
“정파 새끼들의 이기심이라면 이 판에 안 낄 거라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짜증 섞인 풍산의 말투에 전위는 눈앞에 도열한 천성검대와 그 선두에 선 하후성을 말없이 바라봤다.
결코 비켜 주지 않을 기세다.
“……어려운 길을 가게 생겼군.”
“열 받네. 안 그래도 운남에 신창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하후성까지? 이게 무슨 난리냐고!”
풍산의 말마따나 생각보다 상황이 어렵게 흘러간다. 단숨에 운남을 쳐부수고 천무린의 목을 베어 녹림과 장강의 위대함을 알리고 돌아올 계획이었거늘.
신창 신준건에 이어 이번엔 천성검협 하후성까지.
하후성 뒤에 도열한 백여 명의 천성검대를 보아하니 하나같이 절정급의 고수들이 틀림없었다.
호량채와 귀왕수룡대의 절반밖에 안 되는 인원이지만, 그 수준은 현저히 높았다. 아마 전투를 벌이게 되면 어찌어찌 승리를 거두더라도 막심한 피해를 각오해야만 할 터.
“……어떻게 할 건데?”
“군주께 이 상황을 알려야겠지.”
“이봐, 전위.”
풍산의 타오르는 눈길이 전위에게로 향한다.
“장강이 이 판에 끼는 순간, 피해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죽음을 당할 이유도 없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다가 결국 고갤 먼저 돌린 것은 풍산이었다.
“난 너와 입장이 달라서 말이야. 호량채는 네 녀석이 이끄는 것이지만, 귀왕수룡대는 수룡왕의 직속 무력대 중 하나다. 네가 벌인 짓에 대한 책임은 너 혼자 지면 되지만, 난 아니라는 뜻이야.”
“…….”
그 말에 전위가 고갤 끄덕였다.
“일방적인 희생은 없을 거다. 걱정하지 마라.”
“걱정은 개뿔. 내가 처맞을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수룡왕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지?”
“……벽력왕이 더 무섭다.”
“뭐? 이 새끼……? 풉, 푸흐흐흐.”
그렇게 농담을 따먹으며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어 보려 했지만, 전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눈앞에 있는 무림맹으로 인해 이 판이 결코 문파 대 문파가 아닌, 정파 무림과 사파 무림의 정마대전으로 번질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시발점이 바로 지금 여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