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제201화
“고생했네.”
“고생하긴. 당연한 일 아닌가. 자네야말로 어쩌자고 그리 나섰는가.”
“늙는다고 호승심이 줄어드는 건 아니라네. 허허허.”
서로 살기 위한 전투였다고는 하나, 이곳 운남성 앞에서 벌어진 격전으로 인해 무려 삼백에 가까운 인원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런 곳에서 공치사를 나누거나 반가운 해후를 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위사검은 숨을 헐떡거리는 공야찬과 조수강, 그리고 전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친구에게 현 상황을 들려줄 겸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구먼.”
비록 치명상을 당하진 않았지만, 진득한 살기의 폭풍 속에 범인에 불과한 몸을 내던진 위사검이었다. 제아무리 과거에는 노련한 고수였다고는 하나 그 기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터.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듯한 위사검의 지친 모습에 공야찬과 조수강은 지체 없이 고갤 끄덕였다.
“예, 어르……. 아니, 장주님, 당연히 그리하셔야지요. 어서 가서 쉬고 계십시오. 전욱, 자네가 장주님을 모시도록 하게.”
“됐네. 전욱이 자네도 뒤처리를 돕게나. 난 아직 멀쩡하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가 아니네. 표국과 상단, 그리고 우리의 식솔들이 떼죽음을 당했네. 따로 장례를 치러 줘도 모자랄 판국일세.”
“……알겠습니다.”
“나 역시 금방 돌아오겠네.”
그리 말하며 위사검은 몸을 돌려 천가장으로 향했고, 그를 따르며 신준건은 공야찬과 조수강, 그리고 전욱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예를 다했다.
“우리도 인사를 조금 있다가 나눠야겠구려. 양해해 주시구려.”
“시, 신창 어르신!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장주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고맙소이다.”
못해도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이십여 년은 더 강호에서 생활했을 신준건이다. 그런 신준건이 반존대를 하며 이들을 대하니 공야찬과 조수강, 그리고 전욱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몸을 돌린 신준건은 위사검을 따라 천가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네가 와 줘서 천만다행이네.”
“돌아가는 상황이 꽤 급박한 것 같은데, 먼저 상황부터 이야기해 주겠는가?”
거두절미하고 상황을 물어보는 신준건의 말에 위사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를 하자니, 먼저 사천무관과 생도들의 이야길 안 할 수가 없겠구먼.”
응?
사천무관……?
갑작스레 나온 이야기에 신준건의 귀가 쫑긋거리며 고갤 돌렸다.
“사천무관이라고 했는가? 삼대 무관 중 하나인 그 사천무관?”
세상과 단절했어도 삼대 무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신준건이었다.
“……세상사에 초연한 자네가 그걸 어찌 아는가?”
“어찌 알기는. 내 핏줄이 거기에 있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아!
그제야 위사검의 두 눈이 커지며 신준건을 마주 바라봤다.
“혹시 자네 손자가……?”
“손자 놈이 어찌나 삼대 무관에 대해 떠들던지. 사천무관, 섬서무관, 산동무관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리 말하는 신준건을 위사검은 묘한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손자가 어느 무관에 입관했는지는 아는가?”
“운남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무관이 사천이라고 알고 있네. 안 그래도 여기 일을 마치면 그곳부터 찾아가려 했지.”
“……허허, 이것 참.”
위사검은 신준건이 손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그 순간, 머릿속의 퍼즐 조각 중 하나가 맞춰지는 느낌을 받았다.
신준건.
……그리고 신혁건.
신준건의 상산창법(常山槍法)을 쏙 빼닮은 창법을 쓰던.
신혁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허탈하기도 하면서 뭔가 묘한 위사검의 미소를 보고 신준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해 주게나.”
“자네가 찾던 그 손자가 바로 이곳에 있단 말일세. ……정확히는 남만에 있지만.”
“남만?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무관에 있을 줄 알았던 자신의 손자가 운남도 아닌 남만에 있다니.
“……풀어서 설명해 주겠네. 제법 긴 이야기가 될 걸세.”
위사검은 초췌해진 자신의 몸 상태를 가누기보다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와 준 신준건의 궁금증을 신속히 풀어 주는 쪽을 택했다.
“멸마신군이라고 들어 봤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시작된 위사검의 이야기에 신준건은 듣지 못했던 그간의 중원 무림 이야기를 간략하게나마 훑으며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멸마신군 천무린과 마공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쌍용검 파평으로 인해 위험한 상황에서 천무린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일화까지.
실타래처럼 풀려 나오는 이야기에 신준건은 홀딱 빠져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귀를 기울였다.
녹림의 거산도 전위.
천마신교의 육장로 무형노괴의 등장.
그리고 천가장이 세워지면서 자신이 여기에 오게 된 경위까지.
어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녹림과 장강이 손을 잡으면서 당장 정사대전이라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말했다.
“……그렇게 된 걸세.”
긴 이야기를 마무리한 위사검이었다.
“허어…….”
홀린 듯 이야기를 듣던 신준건은 고갤 끄덕이며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 멸마신군이란 친구가 보고 싶구먼.”
“……왜인가.”
“향후 천하제일인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다들 입을 모으고 있으니 어찌 보고 싶지 않겠는가. 대단한 협객이자 호걸이 아니겠는가.”
기대 가득한 신준건의 말에 위사검은 저도 모르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허허허, 역시 중원 무림에 나온 건 잘한 선택이었구먼. 허허허. 멸마신군이라!”
……누군가 그랬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모르는 게 약이라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신준건은 한동안 즐거운 표정을 짓다가 위사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상황은 모두 들었고, 이제 자네 이야길 해 보게.”
“…….”
“내가 자넬 모르는가. 어떤 상황인가.”
“심각하네.”
장강과 녹림이 손을 잡고 파견한 무력대와 교룡검, 그리고 거산도 전위까지.
초절정의 경지 중에서도 완연한 고수일 거라고 파악되는 두 고수와 함께 파견된 이들만 대략 2백여 명.
신창 신준건이 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고무적인 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창 혼자서 어느 정도까지 해결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정사대전에 대비하여 다른 이들이 얼마나 지원 병력을 보내 줄지는…….”
심지어 쳐들어오겠다고 적군이 대놓고 행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군이라는 작자들은 눈을 질끈 감고 모르는 체하고 있다는 것.
그 상황을 위사검은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고, 신준건은 안 들어도 다 안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허허.”
가벼운 미소를 짓는 신준건이다.
“그들이 그렇게 강하다면 나 혼자서는 당해 낼 수 없겠지. 허나.”
신준건의 정광이 넘치는 두 눈이 위사검에게 향했다.
“내 손자가 여기 코앞에 있고, 자네가 여기 있는데 무엇이 대수이겠나. 힘닿는 데까지 거드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그렇다.
신준건의 말마따나 위사검은 천가장의 임시 문주이자 장주이고 그런 그를 도와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게 본인이 해야 할 의무이자 할 수 있는 전부이기에.
* * *
하루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다시 서른 날이 지난다.
그 서른 날이 다시 지나며, 천가장은 나름의 대비를 할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장강의 물살을 헤치고 쳐들어올 거라고 전달받았던 천가장과 운남의 모든 이들은 바짝 긴장한 채 만반의 준비를 갖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현검 안벽이 죽어 생긴 대현문의 공백은 위사검이 완벽히 채웠고, 대현문의 식솔들까지 흡수하면서 운남의 모든 이들은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위 장주님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장주님이 모이라면 모여야지요.”
“천가장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버텼겠소!”
표국과 상단에서 상당수 죽은 표사, 쟁자수, 그리고 호위 무사들의 가족과 식솔을 챙기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마음까지 얻었다.
거기다.
“위 장주야말로 무인 중 무인이지 않소!”
“……어느 누가 감히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단 말이오!”
“나는 위 장주가 가자고 하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이미 운남성의 모두가 위사검이 보여 준 용기와 지휘자의 면모에 반해 크게 감화를 받았다.
대현검 안벽이라는 절정 고수마저도 적의 한 수에 머리가 두부 깨지듯 박살이 난 상황에서.
모두가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칠 때 운남을 지키기 위해 제 한 목숨 아끼지 않고 적에게 달려든 그 용감한 모습을 보고.
어느 누가 따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게 운남은 하나가 되어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그런데…… 어째서?”
위사검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운남성 위에서 저 너머를 바라본다.
“……오질 않는단 말인가.”
“와도 문제고, 오지 않아도 문제라면 후자가 낫지 않겠는가.”
신준건의 말에 위사검이 고갤 저었다.
“우리가 모른다는 게 문제일세. 적들이 와야 그 대응 방법도 알 것 아닌가.”
“걱정 말게……. 정보라면 빠삭하다고 자네가 말해 준 공 장로와 조 장로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신준건의 말마따나 공야찬과 조수강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장주님! 장주님! 어디 계십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공야찬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여길세! 이리로 오게나.”
“……헉헉! 여, 여기 계셨습니까.”
“사람 죽겠네. 호흡 좀 고르시게. 아무리 정보를 다루는 데 빠삭하다지만, 자네도 무림인이라면…….”
살을 빼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신준건이었다. 그 이야기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파악했는가.”
“……그, 그게.”
가쁜 숨이 진정이 안 되는지 허리를 반쯤 숙이고 호흡을 가다듬는 공야찬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진정할 수 있도록 가볍게 등을 어루만져 주는 신준건이었다.
“천천히 말하시게.”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의 손길에 진정이 된 공야찬이 심호흡을 하더니 위사검과 신준건을 바라본다.
“……무림맹.”
응?
방금 뭐라고…….
“무림맹이 나타나서 그들을 막아 주고 있었습니다. 운남에 당도하기 직전, 전선을 구축하여 전진을 못 하게 대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천성검협 하후성 대협이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답니다.”
무림맹…… 이라고?
그게 당최 무슨 말인가.
위사검과 신준건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눈만 끔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