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제197화
천가장과 상단 및 표국, 그리고 대현문이 함께한 약 삼백 명의 인원과 약 이백 명의 산적 떼. 머릿수만 따지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보다 해몽인 이야기였다.
퍼석!
호언장담한 안벽이 대현문의 문도들만을 이끌고 단숨에 정리하고 오겠노라고 앞장서서 정면으로 맞부딪친 순간.
마량채주 돌마권 양적의 주먹에 안벽의 머리통이 두부처럼 으깨지고 나서야 눈앞에 당도한 산적 떼가 피에 굶주린 이리 떼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나마 한 명 있는 절정 고수 안벽의 머리통이 단숨에 날아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모두들 바짝 얼어붙어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푸흐흐흐흐, 대현검이 뭐가 어쩌고 어째?”
마량채주 양적은 피식 웃으면서 자신의 주먹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러고는 겁에 질린 상대편 인원들을 스윽 훑었다.
양 떼나 다름없는 이들.
그중 몇몇은 참혹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전혀 위협이 될 인물이 없군.”
“낄낄, 고작 그런 놈 하나 처리하고 우쭐대는 꼴하곤!”
“너무 쉽게 죽여서 재미가 하나도 없어.”
마량채주 양적뿐만 아니라 백마채의 채주와 토룡채의 채주까지.
절정 고수들이 하나같이 군침을 흘리며 삼백여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의 전투로 인해 그들은 저들을 마구 도륙하면서 느낄 희열에 벌써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타고난 산적의 운명이 가진 빈곤함을.
식량과 재물, 여자들을 낚아채서 풀 수 있는 모든 욕구를 풀어낼 것이다. 가뜩이나 절강성 귀퉁이에 처박혀 여자 그림자도 볼 수 없었던 환경이었다.
게다가 이번 공적으로 녹림의 벽력왕에게 눈도장까지 찍을 수 있다면.
“내가 먼저 가지.”
“어허! 무슨! 항상 선봉은 우리 백마였네.”
“육X랄! 두 새끼 다 모가지를 비틀기 전에 입 닥치고 있어라.”
세 명의 채주가 격전을 눈앞에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상대할 사람들은 바짝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위사검의 가슴에는 열화처럼 불길이 피어올랐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리도 무도하게.”
으득.
온몸에 흠뻑 뒤집어쓴 핏물을 보아하니 화전민 마을에 살아남은 이들은 아마 단 한 명도 없으리라.
“……으, 으어어.”
“아, 아으으……. 이, 이길 수 없어.”
“아, 안벽 대협이 단 한 주먹에…….”
“아아아…….”
하지만 위사검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는 전의(戰意)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안벽의 죽음을 목도한 순간,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 이성이 마비되고 만 것이다.
심지어는.
“무, 문주님이 주, 죽었어. 도, 도망가야 해.”
“으아아아아!”
“모두 도망가! 주, 죽을 거야!”
“비켜! 비키라고! 이 새끼들아!”
대현문 문도들은 마비된 이성으로 기어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말았다. 옆에 서 있던 천가장과 다른 무사들을 밀쳐 내더니 운남성 안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이들은 운남성 성벽을 따라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며 제 살길을 찾아 달아났다. 그러자 다른 상단과 표국의 무사들, 천가장의 일원들도 하나같이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비웃음을 흘리기 시작한 산적 떼.
“큭큭큭!”
“푸흐하하하하하!”
“꼬랑지를 말고 도망가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로구나!”
“캬하하하하하!”
광소(狂笑)를 참지 못하고 크게 터뜨리면서 굶주린 이리 떼들은 군침을 줄줄 흘렸다. 채주들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대번에 저들을 마구 유린하리라.
“그러게 왜 남아서 저 고생을 해? 속상하게.”
“킬킬킬, 멍청한 새끼들이 멍청한 짓을 한 건데 뭐라 하겠나.”
“저 눈앞에 있는 재수 없는 눈깔의 영감은 내가 맡도록 하지.”
그저 느긋하기만 하다.
세 채주들의 표정은 손주들이 노는 재롱을 지켜보는 듯한 할아버지처럼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세 채주들의 모습에 산적 떼의 군세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전욱!”
“……예.”
“자네의 날랜 다리로 저들의 시선을 피해 운남성 외곽으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예?”
“신창(神槍), 그 친구가 까막눈이야. 특히 누구보다 길치지.”
“아……!”
그렇구나! 신창 어르신!
전욱의 절망적인 표정이 금세 희망으로 바뀌었다.
말로만 듣던 신창이라면 어쩌면 이 전세를 역전시켜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전욱이었다.
“……대충 인상착의는 장로들로부터 들어 알 테니 주변을 둘러보고 어서 데려오게나. 상황이 급박하니만큼 조금 속도를 높이고.”
“……하, 하지만.”
“시간은 끌어 주겠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어서 가게.”
스르릉.
위사검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에 전욱은 아랫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런 위사검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적랑문 사람이었던 그는 위사검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하해와도 같았다. 그런 그가 보여 주는 결연한 모습에 전욱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시선을 끌어 주겠네. 그 틈을 타서 저들에게서 벗어나 주게. 그리고 꼭…… 신창 친우를 데려와 주게.”
그러면서 위사검은 고갤 돌려 약 삼백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인원을 바라봤다. 현저히 줄어든 숫자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아랫배에 힘을 단단히 주고 소리쳤다.
“모두들 들으시오. 몸이 바짝바짝 굳고 손끝부터 저려서 검을 제대로 들지도 못할 것이외다. 눈앞의 산적들은 하나같이 우리보다 잔인하고 거칠기 짝이 없을 것이오.”
사기 진작을 위해 소리를 쳐도 모자를 판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뱉는 위사검이었다.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르오. 오늘로 세상과 단절될지도 모르지. 허나 말이오.”
처억!
검 끝을 허공에 천천히 올리더니 검의 손잡이를 꽉 쥐어드는 위사검이었다.
“그럼에도 결코 물러설 수 없소이다. 왜냐고? 우리마저 달아나면 운남 안에 있는 우리 가족들은! 누가 지킬 것이오! 우리가 여태 가꿔 온 터전은! 저들에게 마구 짓밟히도록 그냥 둘 것이오?! 살기 위해서는 도망을 가는 게 아니라 저들을 저지해야 하는 것이오!”
그의 우렁찬 외침에 뒤에 서 있던 백오십여 명의 무사들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의와 협을 행하라고는 하지 않겠소! 그따위 것으로 허무맹랑하게 죽으라고 하진 않겠소! 하지만!”
위사검이 한 걸음 나서더니, 그 디딤발을 시작으로 산적 떼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닥! 타다다닥!
“자신을 위해 싸우시오! 여러분들을 위해 싸우고! 악착같이 버텨 내시오! 내가 가장 먼저 죽을 테니! 내가 죽기 전까지 먼저 죽지는 마시오!”
위사검의 고함에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하나둘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위사검의 걸음은 일반인의 그것과 다름없었고, 이젠 노쇠하여 검조차 쥔 지 오랜만이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갔다.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싸워야 하기에 싸우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서 신창이 오기를.
아주 약간이나마 틈을 벌려서 운남성 안에 남아 있는 다른 이들이 다른 대처를 할 수 있기를.
한시라도 늦춰서 이 상황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를.
그렇게 위사검의 검이 마주하는 산적을 향해 검을 뻗었다.
‘베, 베었……!’
팅!
“아이고, 노약자 어르신. 왜 선봉에 나서서 개죽음을 당하려고 이러시나.”
검을 뻗기 무섭게 튕겨 나간 위사검의 검이었다. 내력 한 푼 쓸 수 없는 위사검의 검이 산적의 몸에 닿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킬킬,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카앙!
토룡채주가 한 걸음 나서서 위사검의 검을 후려쳐 완력만으로 쥐고 있던 검을 놓치게 만들었다.
“크으윽.”
무기력하게 검을 놓친 위사검을 바라본 토룡채주가 한껏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늙은이는 가장 나중에 죽일 것이다. 네놈의 그 알량한 통솔력으로 인해 다른 놈들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 똑똑히 지켜보도록 하여라. 킬킬킬!”
그 말에 위사검의 두 눈에 겁화(劫火)가 피어오르더니 놓친 검을 다시금 잡아 위로 올려 벴다.
“이노옴! 내가 죽기 전엔 그 누구도 죽지 않는다!”
“푸흐하하하하! 오냐. 내 한번 놀아 주마!”
토룡채주는 자신의 검조차 뽑지 않은 채 위사검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충돌한 산적 떼와 운남의 무사들이었다.
카가가강!
콰앙!
“모두 죽여 버려! 싹 쓸어버리고 단숨에 운남으로 진입한다! 마음껏 즐겨라! 이와 같은 축제는 매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 닥치는 대로 죽이고! 겁간하라! 주머니를 채우고 배불리 먹어라!”
마량채주 돌마권 양적의 외침에 산적 떼들의 눈은 흉포한 광기로 번들거렸다.
* * *
심장이 터져라 뛰어가는 전욱의 고개는 쉴 새 없이 주변을 훑었다. 사람이 보이면 시선을 주어 창을 든 나그네들을 찾았다.
“……대체 어, 어디 계시는 것인가?”
타다닥!
전욱이 자랑하는 날랜 걸음과 신법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창객은 없었다.
“제X랄! 제X랄!”
지금 이 순간에도 마구 학살을 당하고 있을 운남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신창 어르신! 신창 어르신! 어딨소이까!”
이젠 대놓고 신창의 별호를 목청이 터져라 외치며 찾았다. 전욱의 이런 급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지나갔다.
“젠장! 젠장! 신창! 이 새끼야! 대체 어딨는 거냐고오!”
조급한 마음에 욕지거리까지 내뱉은 전욱이 이를 악문 그 순간.
“……젊은 양반이 그리 욕을 하고. 어째서 내 별호를 부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왜 그리 날 찾으시오? 그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급해 보이는구려.”
헉헉거리고 있는 전욱의 뒤에 웬 누더기를 걸친 이가 등 뒤에 긴 포대기 하나를 메고 다가왔다.
그의 인상착의를 꿰뚫고 있던 전욱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시, 신창! 신창 신준건!”
신창 신준건.
그가 전욱의 앞에 나타났다.
“우, 운남이! 위, 위사검 어르신이! ……크흑.”
터억.
신창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전욱이 휘청거리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신준건이 그의 팔뚝을 잡아 부축해 주었다.
“많이 급한가 보오. 하지만 내가 길 찾는 일에 아주 젬병이라서. 대충 위치가 어디쯤인지 말해 줄 수 있겠소.”
그 말에 전욱이 거친 숨을 몰아쉬다 말고 자신이 나아온 방향을 향해 검지로 가리켰다.
“저쪽이구려. ……그렇다면.”
스르륵.
포대기를 푼 신창 신준건은 거두절미하고 창을 감싸 쥐더니 전욱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팽팽하게 당겼다가 그대로 허공을 향해 날려 버렸다.
피잉!
슈와아아아아아!
나아가는 창을 바라보던 신준건이 말문을 열었다.
“잘 잡으시오.”
어딜 잡으란 말인가.
하지만 물을 새도 없이 전욱의 뒷덜미가 잡힌다 싶더니 그대로 창 위에 올라타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