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제196화
“그런데 절강에서 산적들이 그리 들이닥친다면 사실상 선전포고 아니, 선제공격이나 다름없는데, 정파 놈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말 그대로 정사대전의 시작이 아닌가.”
교룡검 풍산의 물음에 전위는 고개를 무겁게 저었다.
“참세상이라면 그렇겠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인가?”
“놈들에게 운남의 천가장은 그저 눈꼴만 시린 곳이네. 멸마신군의 활약으로 수많은 정파인들과 협객들의 명성이 희미해지고 있지. 가뜩이나 천하제일인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까지 퍼지고 있고 말이네.”
“……그렇긴 하네만,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천가장이 피해를 입고 사라지면 누가 가장 피해를 보고 누가 가장 이득을 보겠는가?”
“…….”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사천무관의 피해는 커져서 좋고, 그에 따른 복수랍시고 움직이기 좋은 명분도 얻을 수 있는 놈들.”
“……다른 정파 무림을 말하는 겐가.”
섬서와 산동은 장강의 압박과 대치에 따라 발목이 잡혔다고는 하나, 무관을 비롯한 다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마저 발목이 잡혔으랴.
그 점을 콕 짚은 전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징글징글하구먼. 하여간.”
“자네가 감을 잃은 것이지.”
“놈들과 칼을 겨누지 않은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낸들 어찌 알겠는가. 잔머리만 굴리고, 제 손익이라면 남의 마누라 속곳까지 들쳐볼 놈들이잖은가.”
“……뭘, 그렇게까지.”
“비유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고.”
“…….”
* * *
때마침 조수강 역시 뛰어 들어오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당황해하고 있는 천가장의 수뇌부에게 정연하게 풀어냈다.
“절강성 귀주 인근에 머물고 있는 마량채(馬粮砦), 백마채(白馬砦), 토룡채(土龍砦)의 산적들일세. 무려 백칠십여 명 정도 되는 인원일세.”
“……배, 백칠십.”
엄청난 숫자였다. 현재 천가장의 식솔을 모두 합해도 백 명이 채 되지 않는데, 이백에 가까운 숫자라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절정의 고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겠지.”
“……아, 아니 그들이 대체 왜 온단 말입니까?”
조수강의 말에 이은 전욱의 당황스러운 질문에 위사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전력 파악을 위한 허수아비들이로군.”
“……그렇습니다.”
공야찬과 조수강 역시 위사검의 생각과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대충 파악한 정보로도 절정 고수 다섯에 그 이하 일류급 무인들이 무려 백오십이 넘어간다.
당장 눈앞에 들이닥칠 산적 떼를 떠올리니 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그리 큰 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빈집이나 다름없는 운남과 양민들에게 일류급 무인들 백오십이면 절망적인 전력이나 다름없었다. 수련을 하고 있는 이들의 일부만 오더라도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없겠지만 말이다.
“……최악이로구나.”
그렇다고 수련하고 있는 이들을 귀환시키자니.
기껏 수련의 절정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을 그들을 부르는 것은 마치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르지 않으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이미 늦었다는 점이지.”
“검을 들 수 있는 이들을 모두 준비시키게.”
“……예?”
“운남에 위치한 상단과 표국에도 연통을 넣어 쓸 수 있는 전력은 모두 편입시키게.”
“그래 봐야 오합지졸에 불과할…….”
위사검의 두 눈은 굳건했다. 그의 굳건한 눈빛이 황망한 눈빛을 한 세 사람과 마주했다.
“두려운가?”
“…….”
“나도 두렵네. 어쩌면 개죽음이 될지도 모르지. 모든 식솔들을 이끌고 차라리 해남으로 도망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지도 모르네.”
그 말에 세 사람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일단을 살고 봐야 그다음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천가장의 식솔은 모두 데려갈 수 있네. 그러나 운남의 다른 양민들은? 그들은 어떻게 할 텐가?”
“…….”
“버리고 갈 텐가?”
속으로는 그들을 버리고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양민들, 그들이 지금 당장 무슨 상관이 있으랴.
“태생적으로 녹림은 사파일세. 천가장이 비어 있다면 우릴 쫓아오려 하겠는가. 아니, 전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위사검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운남에 있는 모든 양민들을 마구 유린하겠지. 아녀자들은 수치와 치욕에 못 이겨 자결을 할 테고, 아이들은 떼죽음을 당할 걸세. 사내들은 제 가족을 지키고자 검을 들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할 테고.”
어디까지나 가정이었다. 하지만 그 가정이 낳은 결과는 그야말로 끔찍함의 끝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인망을 쌓고 덕을 쌓는 것은 오래 걸리네. 천가장이 운남에 자리 잡은 지도 일 년이 다 되어 가지. 천가장이 어떻게 이리 빨리 자리를 잡았는지 자네도 잘 알잖은가.”
양민들을 위하겠다는 일념으로 천가장은 운남에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그 신념을 이루는 데 위사검은 한몫 단단히 했으며, 양민들에 대한 위사검의 배려와 사랑으로 천가장은 이곳에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대현검 안벽에게 연통을 넣게.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니 도와 달라고.”
그렇게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 * *
불타오르는 마을.
운남성에 도착하기 전 곳곳에 보이는 화전민 마을이 모조리 불타올랐다. 그 화마(火魔)를 일으키는 자들은 다름 아닌 치렁치렁한 호피와 여우가죽 등으로 몸을 감싼 이들이었다.
다름 아닌 절강성 귀주에서부터 천천히 전진하고 있는 산적 떼였다.
“지렁이 새끼들보다 늦으면 죽을 줄 알아라! 이번에야말로 우리 마량채가 절강성 제일의 녹림채임을 보여 주자꾸나!”
마량채주 돌마권(突馬拳) 양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이에 용기백배한 마량채 산적들은 화전민 마을에 있는 아녀자들을 희롱하고 사내는 모조리 베어 죽였으며 노인, 아이 구분 없이 제 맘대로 한풀이를 해 버렸다.
붉은 화마 속에서 사람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지옥의 모습을 펼쳐 놓았다.
그야말로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이, 이노옴들아. 끄으으으. 우, 우리가 무슨 잘못을……!”
“푸후후하하하! 잘못? 무슨 잘못? 네놈들이 약한 게 잘못이고 죄다.”
원한 가득한 눈길로 양적을 노려보던 노인은 겨우겨우 말문을 열었다.
“……우, 운남에 처, 천가장이 있, 있으니 그들이…….”
푹! 푸욱!
입가에 우악스럽게 틀어박히는 검이 노인의 목을 꿰뚫고 튀어나왔다. 그대로 절명한 채 축 늘어지는 노인은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한 채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죽어 가야 했다.
“천가장이 어떻다는 것이냐. 벌써 세 번째 듣는 것이다. 그놈들이 뭐라도 된단 말이냐? 아주 지겨워 죽겠구나.”
“채주!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듣자 하니 녹림 본채에서 거산도 전위 님께서 직접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아차! 그렇지, 그렇지. 저, 전위 님은 앞으로 차기 녹림을 이끌어 가실 분이다. 그분께 잘 보인다면 우리가 절강을 넘어 전위 님의 옆을 보좌할 수도 있겠지!”
방금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이들이 내뱉는 말로는 적절치 않을 수 있으나, 산적들은 이와 같은 상황이 아주 익숙했다.
“아무래도 좋으니 속도를 더욱 높여라! 토룡채 놈들과 백마채 놈들에게 따라잡히면 안 된다!”
“예!”
“어여, 갑시다! 채주!”
운남성 바깥에서부터 수많은 화전민들이 떼죽음을 당하였고, 화마 속에서 지옥도를 맛본 이들의 처절한 비명이 크게 울려 퍼졌다.
피 맛을 보기 시작한 산적들은 잔뜩 흥분한 채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정파와 사파가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장기간 살육을 벌이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표국과 상단에게도 어지간해선 약탈 이상의 악행은 저지르지 못했고 말이다.
그렇게 광기에 띤 산적 떼들이 하나의 군세(軍勢)가 되어 운남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와 주셔서 고맙소.”
“당연히 와야 할 일이지요.”
위사검의 환영에 응당 와야 할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안벽이었다. 대현검 안벽은 절정 고수로서 운남성에 있는 무인들 중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신감 역시 있었다.
‘고작 산적들 따위에게 밀릴 내가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대현검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대현문이 어떤 곳인지 보여 줌으로써 천가장 따위보다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주겠노라.’
형형하게 빛나는 안벽의 눈빛을 보고 위사검은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다. 연유야 어쨌든 도우러 와 준 이였으니 말이다.
일 년간 대현문 역시 놀고 있진 않았다는 듯 무려 백여 명이 넘는 문도들을 이끌고 이곳에 왔다.
타다다닥!
“어, 어르……. 아니, 장주님!”
위사검의 명에 따라 운남성 외곽을 둘러보고 온 전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보고를 하려다가 안벽을 보고서 급히 호칭을 바꿨다. 아무리 그래도 현재 위사검은 천가장의 장주이자 문주이니까.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
“……현재 운남 주변에 존재하던 화전민 마을 일곱이 불탔습니다.”
참혹한 결과를 보고로 듣는 것만큼 무기력한 일은 없었다. 위사검의 이가 절로 갈렸지만, 그는 꾸욱 참았다.
핏발이 섰고 손톱 끝이 손바닥 안의 살갗을 파고들 만큼 꽉 쥔 주먹을 가까스로 펴며 위사검은 띄엄띄엄 말했다.
“어디까지…… 당도했느냐?”
“이틀 내로 운남성 앞에 당도할 것입니다.”
“공 장로와 조 장로는?”
“두 장로께서는 상단과 표국을 설득하여 상단을 책임지고 있는 최소한의 인원수를 제외한 모든 호위 무사들과 표국의 표사, 그리고 쟁자수들을 데려오고 있습니다.”
“인원은?”
“대략 팔십여 명 정도입니다.”
“……도합 삼백 명 가까이는 되는구나.”
천가장의 칠십여 명, 대현문의 백이십여 명, 그리고 표국과 상단의 힘을 빌려 팔십여 명까지.
모은 인원은 쳐들어오는 산적 떼들보다 많았다.
하지만.
‘정예 숫자가 모자라다. 절정 고수는 안벽 하나뿐.’
안벽을 제외하면 다른 절정 고수를 막아 줄 이들이 전무했다. 심지어 산적 떼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기세로 보아 일류급에 다다른 산적들이 대다수일 터.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위사검이었으나.
탕탕탕!
“걱정일랑 마시오! 우리 대현문이 있지 않소이까!”
안벽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외쳤다. 그 우렁찬 소리는 주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겐 제법 위안이 되었는지 사색이 된 이들의 표정이 약간이나마 밝아졌다.
“내 반드시 이번 산적 떼들을 격퇴해 이 중원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반드시 입증하겠소이다!”
호언장담하는 그의 모습.
위사검과 전욱 역시 아랫입술을 깨물 따름이었다.
부디 정의가 살아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