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제194화
찰박. 찰박.
눅눅한 물기를 머금은 습도 높은 공기가.
그곳의 메마른 기운과 섞이더니 언뜻언뜻 스치는 바람 속에서 서늘한 냉기가 느껴진다.
가을이라기보다는.
혹은 추위가 매서운 겨울이라기엔.
어느 것 하나 확실치 않은 그런 계절 속에 머무는 이가 있었다.
솨아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날씨에 구애받지 않은 채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어제 잡아 놓은 멧돼지 한 마리 중 남은 부위에다 빻아 놓은 약초를 섞은 후 내력을 끌어올려 뜨겁게 달군 물을 부어서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한 끼 식사를 마친 장년의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름 만족스런 식사를 끝낸 그는 오두막 옆에 놓인 흑단목을 집어 들었다. 흑단목 수십 개가 마치 창대처럼 잘 정렬되어 늘어서 있었다.
집어 든 창대를 돌리더니 착 감기는 손맛에 빙긋 미소를 지은 사내가 허리를 쭉 펴고는 자연스레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휘두르기 시작한 창대를 쥐고서 하루도 빼먹지 않고 향하는 수련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휘리리릭! 파앙!
유연하고도 날렵한 창대의 손놀림.
단순히 기술이 현란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파아앙! 파파파파팡!
허공을 때릴 때마다 공기 터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휘돌리는 창대의 돌개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점차 용권풍을 만들어 낼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쿠콰카가가강!
단순히 창대가 만들어 냈다기엔.
파아앗!
사방을 짓누르는 풍압이 소멸하면서 허공에 녹아든다. 그리고 이어진 참혹한 현장.
거센 폭풍우가 한차례 지나간 것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우거진 숲을 말 그대로 처참하고 황량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의 흑단목의 창대 끝이 만들어 냈다기엔.
믿기 힘들 지경이었다.
장년의 사내는 흑단목을 쭉 끌어당겼다가 허공에서 사라지듯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그의 발이 당도한 곳은 바로.
“……나오시게. 남의 훈련을 왜 지켜보는 겐가? 불문율이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행동인 건가.”
아름드리나무의 나뭇가지 위였다.
“……나오래도.”
흑단목으로 한 곳을 가리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결국 내가 창을 들어야만……!”
그때.
푸드덕! 푸드덕!
소리가 들린다.
“옳지. 이제야 나오시는…….”
장년인은 그만 말을 딱 멈췄다. 아주 자그마한 생물. 그것도 맹금류도 아닌 작은 조류였다.
“……전서구?”
발목에 쪽지를 매단 전서구를 보고 장년인은 입을 꾹 다물더니.
“크흠흠.”
민망한 듯 전서구가 매단 서한을 빠르게 낚아챘다. 그러자 그제야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전서구.
“……사, 사람을 본 지 너무 오래되어 작은 기척에도 그만.”
누구에게 하는 변명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다급히 중얼거린 장년의 사내가 가볍게 몸을 튕겨 바닥에 착지했다.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였지만, 어쩌겠나.
다행히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
아마 손자가 봤다면 원 없이 놀렸을 테지만.
이미 하산하여 무관에 들어간 지 오래이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곱게 접힌 쪽지를 펼쳐 서한을 읽는 장년의 사내였다.
촤락.
“……응?”
「 그간 잘 지냈는가. 나 위사검일세. ……도와주게. 」
위사검.
그의 둘도 없는 친우이자, 한때는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사이였다. 비록 친우가 제 삶을 위해 나아간다고 하였고, 그의 결정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며.
그저 잘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도와 달라……. 벗이 많이 급했나 보구먼. 그간 연통 한 번 없더니 대뜸 도와 달라고 이리 서한을 보내니.”
반갑긴 했으나, 웃을 순 없었다. 오랜 벗이 적어 준 서한에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기 때문에.
장년의 사내는 천천히 몸을 돌려 오두막으로 향했다. 정마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이곳에 머물렀으니 못해도 십여 년은 살던 곳이다.
하지만 그 세월이 무색하게.
“들고 갈 짐은 이거 하나뿐이구먼.”
먼지 가득하던 자신의 애병인 녹슨 창의 거무튀튀한 날이 보였다. 자신이 늙어 버린 세월만큼 애병 역시 세월을 정통으로 맞아 힘겨워 보인다.
“후후, 그래도 네놈은 좀 더 나와 함께하자꾸나. 친우가 부르는데 나만 달랑 갈 순 없지 않느냐.”
묘한 미소를 띤 장년의 사내가 창을 쥐자.
부르르.
자신의 애병이 흡사 대답이라도 하듯 부르르 떠는 듯한 묘한 착각이 인다. 단순한 착각으로 치부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이 녀석과 함께한 세월이 길었기 때문이다.
“……간만에 나서려니 떨리느냐. 나 역시 그렇구나. 운남이라. 제법 먼 길이 될 테지만, 간 김에 손자 놈 얼굴도 한 번 보고 성취도 얼마나 했는지 보고 오자꾸나. 혹 그동안 놀지는 않았는지 할아비로서 혼쭐 한번 내주러 가야겠지.”
등 뒤에 애병인 창을 포대기에 싼 후 매듭을 지어 묶고는 아주 천천히 오두막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본다.
단출하기 그지없는 공간이었지만, 나름 애착이 가는.
또 정감이 가는 곳이었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가 만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이곳에서 은거를 시작한 그는 굳건한 눈빛으로 오두막을 천천히 훑어보면서 지나간 10여 년 세월을 더듬었다.
“다른 이유도 아닌 친우의 부름에 내가 가는 것이니 너무 아쉬워 말거라. 때가 되면 다시 찾아오겠지. 오지 못하면 더욱더 나를 응원해 주면 고맙겠구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지 않던가.”
허공을 향해 중얼거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길을 떠난 그는 얼마 안 가서 맞닥뜨려야 했다.
중원 무림이 지난 십여 년 동안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 말이다.
* * *
촤아아아!
장강을 헤치며 나아가는 배 위에서 두 세력이 마치 대치하듯 앉아서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사이.
다름 아닌 장강수로채와 녹림칠십이채의 일원들이 현재 한배에 올라타서 뱃길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 비루먹은 산적 새끼들 냄새가, 킁킁.”
“아이고, 누가 강물에 머리를 감았나. 아주 비린내가 사방팔방 진동을 하는구먼.”
“뭐? 이 새꺄?”
“이 육X랄 놈이! 어디서 새꺄라고!”
눈만 마주치면 이 지경이었다. 어깨라도 부딪치는 날에는 그날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싸움판이 벌어졌다.
그토록 사이가 안 좋은 녹림과 장강이었으니, 그들을 바라보는 우두머리들은 그저 골치 아픈 표정만 지을 따름이었다.
“……뭔 생각으로 배를 탄 거냐?”
“군주의 지시다.”
“그러니까 그 군주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호리호리한 몸매에 날렵한 말상의 얼굴을 한 꽁지머리가 한숨을 푹 하고 내쉬더니 거산도 전위를 바라봤다.
“지금 벽력왕께서 잘못하셨다는 것이냐? 불경스럽게.”
“……오해야, 오해.”
전위를 마주 보고 있는 이는 장강수로채의 수뇌부에 속한 인물로, 교룡검(蛟龍劍) 풍산이었다.
녹림에 거산도가 있다면.
장강엔 교룡검이 있다고.
녹림 거산(綠林巨山).
장강 교룡(長江蛟龍).
그리 표현되는 두 거파의 최고위가 신임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각자 다른 군주를 모시느라.
“너까지 왜 그러냐? 넌 나를 이해해 줘야지.”
교룡검 풍산의 한탄 아닌 한탄에.
“…….”
전위는 굳게 다문 입술로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어떻게 구워삶은 건데? 수룡왕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사람일 텐데.”
“……내가 구워삶은 게 아니라 왕의 생각을 전달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 생각이란 게 대체 뭐냐고? 뭘 알고 움직여야지.”
“우린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산에서만 살더니 대가리도 산처럼 굳어 버렸나.”
교룡검 풍산은 진심으로 탄식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돈 아니었던 거 같은데.
“상관없다. 녹림의 왕이 곧 천하제일인이 될 터이니.”
“장강은 뭐 노냐?”
장강과 녹림은 양대 사파라는 자존심 때문에 대립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서로 마주치는 일도 흔치 않았다. 거대한 장강을 차지하고 있는 수로채가 약탈 및 노략, 그리고 세금을 받는 대상은 장강을 이용해야 하는 상단과 표국, 양민들이었고.
녹림 역시 중원 전토에 있는 산이란 산을 통해 통행세와 약탈을 일삼지만, 아무래도 장강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니 딱히 사이가 나쁠 까닭도 없었지만, 둘 중 누가 더 강한 사파인가를 놓고 떠드는 호사가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이와 같은 경쟁 구도가 구축된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교룡검 풍산이 묘한 눈빛으로 고갤 돌려 태산같이 굳건한 자태를 뽐내는 전위를 훑었다. 전보다 성취가 높아진 듯한 모습이다.
“그 말 사실이냐?”
“무엇이 말인가?”
“애송이한테 졌다는 거. 무관의 생도한테.”
“…….”
“아니지?”
교룡검 풍산은 중원 무림을 놓고 봐도 자신과 검을 겨룰 만한 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큼 격이 높아진 것이다.
전위라고 다를쏘냐. 그 역시 중원 무림을 통틀어도 견줄 수 있는 이들이 그리 많진 않을 것이다.
그런 그가 고작 학관의 생도 따위에게 졌다는 소문이 믿기지 않았다.
“……맞는다.”
“역시. 아닐 줄 알았……. 뭐?”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맞는다고 했다.”
“……애송이 새끼한테 진 게 맞는다고? 지금 네 이름을 걸고 말하는 거냐?”
“그렇다.”
그 말에 풍산은 깜짝 놀란 시선으로 전위를 쳐다봤다. 저 전위가 약관도 안 된 청년에게 졌다고? 제아무리 방심했기로서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완벽한 패배였다. 그리고…… 방심하지도 않았다.”
전위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그는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고, 자신의 패배를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천무린과 싸우길 원한 것은 다름 아닌 전위였고, 수많은 호량채의 일원들이 둘러싼 공간에서 서로 전력을 다해 싸웠다.
그러니 무슨 변명을 하랴.
“…….”
교룡검 풍산은 그만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전위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만큼 혹독한 수련을 쌓아 왔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전위는 쓰라린 패배 직후 스스로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물론.
「 전위야. 내 오늘부터 정파 무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자 하니 네가 선봉에 서라. 」
전위가 천무린과의 격전에서 패배한 이후 정신이 들자마자 들었던 벽력왕의 한마디에.
「 군주이시여, 제게 패배를 곱씹을 시간을 주시옵소서.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군주께서 절대 실망치 않도록 달라져서 돌아오겠습니다. 」
녹림이 전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정파 무림과 사천무관에 전쟁을 선포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패배한 전위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벽력왕에게 폐관 수련에 들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벽력왕은 전위의 그런 마음을 알고 이를 허해 주었다.
「 오냐. 내 너의 갸륵한 마음을 이해하니 다녀오너라. 허나, 허투루 시간을 쓰지 말아야 할 게다. 나의 분노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져 갈 테니 말이다. 」
「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