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제187화
전서구 하나를 받아 든 악교운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웬 전서구?”
“관주님께 그간의 상황에 대해 알려 드렸다.”
“어지간히 잘 돌아갈 텐데, 무슨?”
“너나 나나 사천무관 소속이다. 지금이야 의뢰라는 명목으로 나와 있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너와 나는 사천무관의 생도와 교관이란 말이다.”
“……칫.”
당백진이 친필로 쓴 서간 내용을 읽으며 악교운이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을 본 천무린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뭐래요?”
“뭐긴. 열심히 뛰라는 말이지.”
“아니, 말만? 말만!”
“……왜 또 발작을 하는 것이냐?”
당백진 말만 나오면 미치고 팔짝 뛰는 천무린의 모습에 이젠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악교운이었지만, 그래도 게거품을 무는 것까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하라면서! 열심히 하게 할 거면 뭐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어? 적독단이라도 주든지! 어!? 내가 투자한 게 얼만데!”
펄쩍펄쩍 뛰는 천무린이었지만, 송무도, 태강도, 신혁건도 없는 지금 그를 막아설 수 있는 이들은 단둘뿐이었다.
“본인이 사고 친 거 막으려면 당 관주님이 얼마나 고생해야 하는데…….”
설화린과…….
“할아버지는 대체 왜 가만히 두나 몰라.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당지혜였다.
두 여인이 발작하는 천무린의 양옆에 서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천무린의 몸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는 악교운이었다. 그는 쓰게 웃으며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봤다. 천무린을 내리누르면서 거의 안주인 행세를 하는 두 여인에게 이미 천가장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응당 당연하다는 듯 깍듯이 대했고.
“흠흠, 스무 살까지는 혼인 안 된다고 했어요.”
“나, 나도 할아버지께 허락받아야 하는데…….”
천무린은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을 쳤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후우우. 제기랄.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누가 이런 코흘리개들하고……!”
“그런 것치고는 전처럼 주먹을 들진 않는구나.”
“……뭐? 아오, 말 안 듣는 놈들 데리고 와서 먼지 나게 패 줬어야 하는데!”
천무린이 그리 말하고 있는데, 악교운이 서간을 쭉 읽어 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곧 올 게다.”
“에? 누가 와요.”
저벅, 저벅, 저벅.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왔구나.”
끼이이익.
천가장의 정문이 열리면서 우르르 한 무리가 들어왔다.
“어?”
낯익은 녀석들이네?
“무린아!”
“때깔 좋게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운남에서 자리를 잡았으면 자릴 잡았다고 말을 해 줘야 할 거 아냐!”
“아고고, 우리는 섬서에 냅 두고 죽도록 훈련시키라고 해 놓고 자기는 두 다리 쭉 펴고 잘 쉬고 있었구먼.”
8기수 송무와 태강, 신혁건과 낭소소, 황태와 백리후, 백리무영, 명진과 진무양, 남사익까지.
그리고 5기수 소검귀 소화진이었다.
“뭐, 뭐야, 이 새끼들?”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온 일행을 바라보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씨익 웃었다.
“이백 선배랑 진량 선배도 곧 올 거다. 담진 교관님과 배단아 교관님도 같이.”
그 말에 천무린이 악교운을 바라봤다.
“사천무관 텅 비는 거 아니에요? 이러다가?”
“걱정하지 말거라.”
“정말로 괜찮겠어요?”
“……관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미리 연통 넣어 놓으세요. 졸업하기 전에는 돌아간다고.”
이미 계획과 구상은 마쳤다.
못해도 2년.
자신이 직접 작심하고 키운 녀석들이다.
조금이라도 연이 닿은 이들이라면 모조리 데리고 가야 한다.
그래서.
찾아올 위협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여야만 한다.
그 상대가 마교가 되었든 사파가 되었든.
천무린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고, 그는 직접 친필로 편지를 작성하였다.
파다다닥!
전서구가 그의 친필로 작성된 종이를 물고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올랐다.
* * *
천가장.
불과 반년 만에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규모의 장원이었다.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적랑문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언제든 양민들의 도움 요청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문턱을 낮췄으며, 표행과 상행으로 거둬들인 통행세와 세금도 반절 이상 내렸다.
그에 따라 상단과 표국 관계자들은 더할 나위 없이 표정이 밝아졌고,
상단주를 비롯한 봇짐장수 등 무공 하나 배우지 못한 양민들은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금전의 액수가 커진 것을 보고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뿐 아니라 표국에 거하는 표사들과 쟁자수들의 주머니도 두둑해지니 상행과 표행을 마치면 운남에 자리 잡고 있는 객잔과 기루에 들러서 쌓인 여독을 풀었다.
이는 운남 전체의 내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일이었다.
또한, 천가장이 직접 공표하여 도박장과 술집, 정보 단체 같은 각종 유흥거리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을 만들어 점차 자리 잡게 만들면서 양민들의 주머니를 절로 열리게 했다.
본래 중원 무림에서 생산되지 않거나, 열대야나 다름없는 남만에서도 겨우 볼 법한 약초와 재료들로 인해 운남에 있는 양민들은 타 도시보다 더 부유할 수 있었으나.
‘가치를 모르면 제대로 된 값어치를 받아 낼 수 없는 법이지.’
자신들이 가진 물건들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타 도시의 상인들과의 협상에서 번번이 손해를 보고 말았으나.
“이럴 때 쓰려고 인맥이 있는 거 아니냐.”
“이런 미친놈이……! 우리 상단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냐!”
그리 소리치면서도 태강은 전서구에 자신의 친필이 담긴 내용을 적고 있었다.
‘아부지, 운남에 똑똑한 협상꾼이 필요합니다. 기린상단에서 재주꾼들 몇몇만 보내 주십시오.
-하나밖에 없는 아들, 태강.’
사천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명 상단인 만큼 재주 좋은 이들이 어디 한둘일까.
특히, 운남의 물건을 주로 갖고 향하는 곳이 사천이다. 사천당가가 독에 일가견이 있고, 남만에서 나오는 약초 대부분이 독을 머금고 있는 것들이 많기에 운남의 물건을 구입하는 당가 일원들도 제법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강을 통해 기린상단의 협상꾼을 불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당지혜에게 천무린의 시선이 향했다.
“당가라며? 당가면 힘을 좀 써야 하는 거 아니야?”
“……말해 놨어, 이미.”
“기특하네.”
“……기, 기특?!”
당지혜가 천무린의 등짝을 후려치면서 민망해했고, 당지운이 아닌 당지혜를 본 일행은 놀라서 넋을 놓아야 했다.
“예쁘장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지, 진짜 여자일 줄이야.”
“……정말 놀랍고 당혹스럽다.”
황태와 백리후, 낭소소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정작 태강과 진무양, 명진은 다행이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 여자였어. 그래, 여자였어. 내가 괜히 좋아했던 게 아니라고.’
‘하아아, 정말 다행이다. 내 취향(?)이 그쪽이 아니라서.’
‘크흑, 어무이! 소자 다행히 남색이 취향은 아니었어라!’
당지운이 아닌 당지혜라고 밝혔지만, 그 어색함은 하루도 안 가서 사라졌다. 낭소소는 설화린과 더불어 여생도가 많아졌다는 사실에 즐거워했고, 남자 생도들 역시 아름다운 당지혜의 모습이 남자 행색을 할 때보다 자연스럽고 좋다고 느꼈다.
반년 만에 본다는 것.
누군가에겐 얼마 안 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사천무관에 입학하면서 무려 6여 년을 함께했다.
한날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매일같이 훈련과 교육을 함께 받았다.
그런 이들이 반년이나 떨어진 뒤에 재회한 것은 서로에게 큰 기쁨을 주는 동시에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나저나 섬서무관에서는 어떻게 된 거야?”
설화린의 물음에 신혁건이 창을 빙그르르 회전시키며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섬서무관? 송무야, 말해 줘라. 우리가 어떻게 해 줬는지.”
“아아, 섬서무관?”
애체를 들어 올려서 콧대에 끼운 송무가 손가락 8개를 펼쳐 보였다.
“섬서무관 8기수와 총 10전 10승.”
7개를 펼쳐 보이며 다시금 말했다.
“7기수와 총 10전 10승.”
6개를 펼쳐 보이며 또다시 말했다.
“6기수와 총 10전 10승.”
그 말에 설화린과 당지혜의 두 눈이 커졌다.
으응?
6기수까지 모두 전승이라고?
8기수와 6기수의 실력 차이는 분명 하늘과 땅 차이일 텐데.
“뭐, 섬서무관은 곧 문을 닫을 위기야. 낄낄.”
“올해 삼대 무관 비무대회는 아마 안 열리지 않을까 싶은데?”
“의미가 없지. 그거 아마 소문 금방 다 날 거야.”
담진에게서 본격적으로 훈련을 받기 시작한 8기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섬서무관의 생도들과 크나큰 격차를 보이게 되었다. 천무린에게 허구한 날 두들겨 맞으며 훈련을 받았고, 녹림과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르기도 했으며, 교관이라는 직위 따윈 개나 줘 버리겠다며 계급장을 떼고 본격적으로 아이들에게 검을 가르치기 시작한 담진의 훈련까지 더해져.
섬서무관의 생도들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작심하고 훈련을 받은 사천무관의 8기수들을 이기긴 힘들었다.
“뭐, 그중에 당연히 발군의 실력을 보인 건 화진 선배였고.”
“크흠흠.”
5기수인 소화진은 단독으로 섬서무관 생도 5명을 꺾어 버리는 놀라운 위용을 뽐냈다. 그 모습에 담진은 자신이 아니라 이젠 소화진을 검귀라고 불러야 한다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줄 정도였다고 했다.
뿌듯해하는 일행의 실력은 그야말로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단적인 예로.
붕붕붕-!
창을 돌리는 신혁건과 송무, 백리무영, 백리후, 황태는 이제 일류를 넘어서 절정의 경지에 다다랐다.
“엄연히 절정의 반열에 든 고수라 이 말씀이야! 에헴.”
그 모습에 설화린과 당지혜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무관 1학년 생도가 절정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그들이었기에.
한 기수에, 그것도 1학년 과정을 밟고 있는 이들 중에서 5명이나 절정의 반열에 든 것이다.
물론.
후비적, 후비적.
괴물은 따로 있었지만 말이다. 천무린이 귀를 후비면서 일행에게 다가왔다.
천무린의 시선 끝에 걸린 신혁건과 송무, 백리무영과 백리후, 황태는 확실히 내력과 기운이 갈무리된 것이 느껴졌다.
그뿐 아니라 진무양과 낭소소, 명진, 남사익, 태강 역시 절정의 반열에 들어서기 직전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긴 하지만.
천무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누가 보면 잘생긴 귀공자가 기분이 좋은가 보다 하겠지만.
“……조, 조졌다. 왠지…… 서늘한데.”
“너, 너도? 나, 나도…….”
“저, 저 새끼 갑자기 왜 웃어…….”
생도들은 순간 불안감을 느끼며 주춤주춤 물러났지만.
뚜둑, 뚜둑.
이미 늦은 뒤였다.
“아직 도착 안 한 인간들이 있으니까 폐관 수련에 들어가긴 당장 어렵고.”
뚜둑, 뚜둑.
목과 손목, 발목을 가볍게 돌리며 풀어낸 천무린이 기지개까지 켰다.
“제대로 훈련해야지? 그 정도로 만족하려고 한 건 아니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