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제185화
천무린은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짓다가 고갤 돌려 뒤따라온 중년인에게 예의 바른 자세로 포권을 취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어르신.”
“허허, 아닐세. 그보다 이 늙은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이리 불렀는가?”
“하하하. 한때 낭인들의 세상을 주름잡으셨던 위사검 어르신이 그리 말씀하시면 온 세상 사람들은 다 쓸모가 없어지는데, 그렇게 말하시기 있어요?”
중년인은 다름 아닌 위사검이었다.
정마대전이 일어났던 때에 수많은 낭인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전했던 장본인으로, 지금은 비록 내공을 잃었으나 절정의 고수로 널리 이름을 떨쳤던 이였다.
쌍용검 파평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던 위사검이었지만, 천무린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은혜를 잊지 않고, 요청 한 번에 이리 먼 걸음을 달려온 것이었다.
“위사검 어르신의 위명도 필요하고, 거기다 위사검 어르신의 통솔력도 좀 필요하다고 할까요?”
천무린이 씨익 웃자, 위사검도 마주 바라보며 웃는다.
“허허. 자네. 못 보던 새에 더욱 능글맞아졌구먼.”
그러면서 위사검은 자연스레 천무린의 뒤에 서 있는 이들에게 고갤 돌렸다. 제법 많은 인원들이었다.
“……지금부터 이 운남을 거점으로 우리의 구심점을 세울 겁니다.”
“구심점?”
“말하자면 미래를 대비하는 일이 되겠지요.”
그 말과 함께 적랑사객이 없는 적랑문의 문도들과 이검, 그리고 이용과 이호 형제가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낙양의 암흑가를 주름잡던 방식으로 운남에서 정보를 다루고, 어르신께서 뒤에 있는 이놈들을 이용해서 구심점을 세우시는 겁니다. 재물이라면 충분하고, 상행과 표행이 있기에 자리를 잡기 손쉬울 겁니다.”
이어지는 천무린의 말에 위사검이 고갤 주억거리며 쭉 들었다.
“비어 있는 땅이다 보니 노른자 부분이 제법 많습니다. 위사검 어르신의 인망이라면 그럴듯하게 구성하는 데 얼마 걸리지 않으시겠지요.”
“구심점이라 하면…… 아무래도 문파가 되겠구먼.”
“그리 생각하시는 게 편하다면 방향을 그리 잡으셔도 무방합니다.”
“정녕 나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전적으로 어르신께 맡기려 했습니다. 어르신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맡기지 못할 일이지요.”
천무린이 현생에 환생하여 인정하는 사람들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이 바로 위사검이다. 비록 내공을 잃었지만 무림에서 여전히 알아주는 인망과 두터운 인맥, 그리고 은원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천무린은 높이 샀다.
아니나 다를까. 요청하자마자 천무린의 한마디에 만사를 제쳐 두고 이리 달려오지 않았는가.
천무린의 대답에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위사검이 이내 허허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것 참, 말년에 제법 많은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구먼그래.”
“잘 부탁드립니다.”
“편히 쉬지도 못하게 해 놓고서 넉살은…….”
“대신에 쓸 만한 놈들을 제법 뽑아 놨으니 마음껏 쓰십시오.”
그의 말과 함께 뒤로 시선을 주자,
처억.
처억.
처억.
이검과 이용 그리고 이호까지 절정의 세 고수가 자리를 잡고 위사검을 바라봤다.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하구먼.”
극의에 달한 절정급 고수인 이검과, 그에 못지않은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두 형제의 모습에 짧게 감탄한 위사검이었다.
“체계를 잡아가시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자네가 문파의 문주가 되어야 하지 않고 말인가?”
“저는 일개 무림학관의 생도일 뿐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무림학관의 생도를 떠나 이미 자네의 명성은…….”
말문을 연 김에 더 말하려다가 위사검은 이내 입을 꾹 하고 다물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천무린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단단함이 엿보이는 미소.
확고해 보이는 그 미소을 보고 위사검은 더 이상 말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
저 아이는.
아니, 저 무인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자신을 부를 때부터 이 모든 것을 짜고 계획했다. 더 나아가 밑바탕을 어떻게 그리고, 어떻게 할지까지 머릿속에 그려 냈다.
그렇기에 저리 확고한 미소를 보일 수 있을 터.
“감투는 충분합니다. 이 생도라는 자리로.”
그렇다.
무림학관의 생도.
누군가에겐 보잘것없는 신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자리이고, 사명감 하나로 충분한 자리이자 자격이지요.”
악교운과 설화린, 당지혜를 따라서 움직인 운남의 양민들은 그들이 무림학관의 생도, 교관이라는 사실만으로 굳게 믿고 함께 움직였다. 양민들에겐 더없이 우러러 보는 자격을 지닌 이들이면서 강호 무림을 이끌어 갈 대들보가 바로 생도인 것이다.
그래.
지금의 나에게 이보다 더 적합한 자리는 없다.
다른 누구에게 잘 보일 자리도.
누군가의 위에 서서 군림하는 자리도.
이번 생에서는 필요 없는 자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번 생에서 나는.
지난 상처를 보듬고 자라나는 새싹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그런 거름과도 같은 존재로 살아갈 생각이니까 말이다.
그래야만 한다.
“자네의 생각이 그리도 확고하다면 이해함세. 그러나 아직 대답해 주지 않았네.”
위사검의 투명하고도 맑은 눈빛이 천무린에게 와 닿았다.
전생의 천무린에 비하면 그리 많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이건만.
어째 몸이 어려졌다고 해서 마음도 어려진 것인지.
그도 아니면 위사검이 겪은 고초가 천무린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던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으나 위사검이 담고 있는 눈빛은 천무린을 꿰뚫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을 벌이는 이유를 물어보시는 거겠지요.”
“……말해 주기가 껄끄럽다면 이해함세. 다 자네의 뜻이 있는 것일 테니. 자네가 옳지 않은 일을 행하리라고 생각하진 않네.”
“제가 그리 몰염치한 인간으로 보였다면 오산입니다. 당연히 말해 드려야 하지요.”
그리 말하며 천무린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닿았다. 그 시선을 따라 위사검 역시 시선을 옮겼다. 천무린의 시선 끝에 닿은 사람은 다름 아닌 이검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지 땅에서 솟구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운 예기가 절로 느껴지는 기운.
그것만 하여도 그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그것이 이유가 될 순 없을 터인데…….
“천마신교의 일원입니다.”
“……!”
그 말에 위사검이 처음으로 흔들리는 표정으로 이검을 다시금 바라봤다.
천마…… 신교?
천마신교라니.
저도 모르게 입을 꽉 다문 위사검의 눈빛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천무린을 노려보았다.
위사검의 단전이 텅 비게 된 이유는.
정마대전에 있었던 치열한 격전 끝에 생긴 결과물이었다.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고.
그도 사람인지라 마교에 대한 원한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의 앞에 마교의 일원을 데려오다니.
자신을 능멸할 생각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태연하게 자신의 앞에 데리고 올 수 있는가.
그런 위사검의 눈길이 천무린에게 닿았고…….
“후우우우.”
이내 위사검은 한숨을 푹 하고 내쉴 수밖에 없었다.
“자네, 내가 그리 큰사람으로 보였는가?”
“예.”
“무엇을 보고 말인가?”
“눈앞에 마도인을 보고도, 단전을 잃게 만든 주구들 앞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는 차분함과…… 그리고.”
천무린이 씨익 웃으며 이검을 바라본다.
“포용해 내려고 노력하실 테니까요. 어르신이라면.”
“혹여 내가 하지 않겠다고 하면? 혹은 저자와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어르신의 뜻대로 진행되었겠지요.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요.”
단정 짓는다.
그만큼 천무린은 위사검을 굳게 믿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저자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네.”
“제발 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정말 자네란 사람은…….”
“후후후.”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은 위사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천무린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단 것인가.
“말해 주게. 어째서 저자가 이유가 된다는 것인가?”
“정확하게는 저 녀석이 아니라 저 녀석이 본래 있던 뒷배경이 되겠지요.”
그러면서 공야찬과 조수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시선을 받은 공야찬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야 그간 자신이 당했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아무래도 섬서무관의 총교관인 제갈벽이라는 인물에서부터 시작해야 될 듯싶습니다. 어르신.”
제갈벽이 얻은 마공.
제갈벽이 죽자, 제갈벽의 심복인 홍이 마공을 들고 달아나 운남으로 향했으며, 그 마공을 좇아 천무린의 일행과 천마신교의 육장로 무형노괴가 등장한 내용까지.
“허억, 허억.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어르신.”
말하느라 숨까지 헐떡거리는 공야찬에 이어,
“이곳에서 무형노괴와 한바탕했고 다행히 놈을 저지했습니다만, 문제는 따로 있었죠.”
천무린이 말을 받아 이어 가는데, 위사검이 이야기의 맥을 짚었다.
“……무형노괴라니. 자네가 말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마교의 발호인 겐가?”
마교의 발호.
천마의 부재로 인해 무형노괴가 움직였다.
그 말인즉슨, 무형노괴를 제외한 다른 다섯 명의 장로도 활개를 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 아니, 그들은 농후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반드시 움직일 것이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사파 녀석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죠.”
천무린의 짧은 이야기에 공야찬이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특히 녹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녹림. 벽력왕 금태도가 거느린 산채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에 위사검은 갈수록 태산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교의 발호, 사파의 태동. 제법 분주해질 겁니다.”
그러나 천무린은 말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형노괴가 죽었다는 소문은 최대한 막을 겁니다. 입을 함구시키고 마교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최대한 늦춰야겠지요. 허나.”
“허나, 시간문제겠지. 그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그렇습니다.”
……후우.
위사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 버렸다. 무형노괴의 죽음과 마교의 발호가 확정적이라는 소식은…….
위사검은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더니 천무린을 바라봤다.
“할 수 있겠나?”
“하도록 만들어야죠.”
천무린이 씨익 웃으면서 주먹을 든다.
“여태 이걸로 실패했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해야 할 일이 제법 많겠구먼. 바삐 움직여야 될 걸세. 허수아비 문주로는 내가 제격이겠지만, 어디까지나 움직이는 사람은 자네가 될 테니 말일세.”
그 말에 천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