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제183화
구소엽과 혁소, 정합, 육개.
적랑오객의 첫째부터 넷째까지 모두 널브러져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황망한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는 구소엽의 눈엔.
철저하게 파괴된 적랑문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이유도 모르고 두 절정 고수의 습격으로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당하다니.
“……대형! 억울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우리가 왜 습격을 당한 겁니까?”
“맞습니다! 대뜸 쳐들어오더니 대문부터 부수고!”
“얼마나 막돼먹은 인간들이길래!”
둘째 혁소부터 셋째 정합, 넷째인 육개까지.
모두 공분하여 외쳤으나, 구소엽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강호는 힘이 전부인 것을.
정파의 협의와 도리를 따지기 싫고 오로지 힘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파에 들어온 건 본인들이 아닌가. 자신들이 선택한 길을 무엇이 억울하다고 따지겠는가.
하지만 구소엽은 자신 있었다.
왜냐고?
적랑오객 모두 일류 극의에 다다랐다. 작은 기연만 있으면 충분히 절정에 오를 수 있는 경지다.
폐관 수련에 들어가서 조금만 노력한다면…….
그래, 조금만 노력한다면 충분히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무려 다섯 명……. 아니지.
믿었던 막내 놈이 제 한 목숨 부지하겠다고 부리나케 도망간 그 순간부터 적랑오객은 이제 적랑사객(赤狼四客)이 되었다.
후회하게 해 줄 것이다.
도망간 놈이나.
자신들을 건드린 놈들이나.
그런 생각으로 막 말문을 열려는 때였다.
“……더럽게 머네. 고생한 몫까지 톡톡히 받아 내야겠네.”
적랑문의 부서진 대문을 통해 들어오는 여러 인영들.
모습을 드러내며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을 향해 적랑문의 문도들이 모두 미간을 좁히고 바라봤고.
특히 그중에 한 놈을 보고 구소엽은 두 눈에 겁화(劫火)를 피워 올렸다.
제 목숨 하나 부지하겠다고 제 형제들을 버리고 도망간 의리 없는 녀석.
적랑오객의 막내였던 전욱이 맞아서 퉁퉁 부은 얼굴로 맨 앞에 서서 걸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 저 새끼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둘째 혁소가 뒷목을 잡고 뻔뻔하게 들어오는 전욱을 노려봤다. 전욱은 차마 의형제들의 눈빛과 마주하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야. 그렇게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그러지 마. 넌 그럴 자격도 없는 새끼이잖아.”
전욱에 이어 들어온 천무린이 낄낄거리며 전욱의 궁둥짝을 냅다 차 버렸다.
퍼억!
쿠당탕탕!
가벼운 발길질에 전욱은 몇 바퀴를 굴러서 적랑사객의 앞에 나동그라졌다.
“……혀, 형님들!”
눈물을 글썽이는 전욱은 고갤 들자마자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사인방의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특히 구소엽은 당장이라도 전욱을 잡아다가 끝없는 고문으로 절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비정한 강호에서 만난 전욱을 그래도 막내라고 가장 예뻐한 구소엽이었기에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 꼬마 놈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구소엽의 시선에 따라 전욱을 걷어차며 뒤따라 들어온 천무린과 두 여인을 혁소가 살폈다. 아무리 봐도 약관의 청년과 방년의 여인들.
어린놈들이라고 엄중히 말한 혁소. 그리고 그를 비롯한 수많은 적랑문도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등장한 세 사람은 누가 봐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미공자와 미녀들이었으니까.
“어, 어떻게 막내……. 아니, 이놈을 구슬렸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 억!”
천무린과 설화린, 당지혜에게 어른스러움을 보여 주려 애쓰던 혁소는 특히 두 여인에게 시선을 못 떼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네 사람을 보고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켜야 했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뭐야. 다 처리했다더니 멀쩡하네?”
천무린이 뒤를 돌아 한마디 하자, 악교운과 이검이 각각 이용과 이호의 뒷목을 잡은 채 질질 끌고 오다가 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멀쩡히 서서 자신들을 마주 보고 있는 적랑문 문도들을 당황스러운 눈길로 훑었다.
“일처리 제대로 한 거 맞아? 아니, 패는 것도 제대로 못 해, 시킨 것도 제대로 못 해. 대체 수하로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뭐야? 무형노괴는 대체 이런 놈을 어떻게 데리고 다녔지?”
하는 것이라고는 구박밖에 없는 천무린의 말에 이검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휘익.
고개를 푹 숙인 이검을 응시하던 천무린의 시선이 이번에는 악교운에게로 옮겨갔다.
“아니, 따라가서 감시라도 하겠다더니 같이 논 거예요? 이러니 말이야.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노는 사람 따로 있다는 말이 있는 거예요. 하여간.”
대체 누가 일하고 누가 놀았단 말인가.
악교운은 절로 이를 갈아붙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천무린이 혀를 찼다.
“이래서 내가 없으면 집구석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아요, 어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천무린의 시선에 풀죽은 이용과 이호가 얼핏 보였다. 그러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씨익 웃었다.
“어이, 거기 형제들.”
“……예, 옙!”
“부, 부르셨습니까!”
정신교육이 어찌나 잘되었는지 굉장히 빠릿빠릿해졌다. 그 모습에 내심 흡족해진 천무린은 입가를 말아 올리며 적랑문도들을 가리킨다.
“어때? 한번 해 볼 수 있겠어?”
“……예? 어, 어떤 것을 말입니까?”
“뭐긴 정신교육이지. 너희가 당했던 것처럼.”
“…….”
천연덕스러운 천무린의 태도에 이용과 이호가 서로 할 말을 잃은 채 멀뚱히 바라봤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제대로 일처리를 하려는 놈들이 없…….”
“하, 하겠습니다!”
“제가 확실히 조져 놓겠습니다!”
실망한 천무린의 말에 두 형제가 차렷 자세를 취한다.
으응?
“정신교육!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하지만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정신교육을 해야 한다고 이번에 주군께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주군의 지론을 이 아둔한 자들에게 알려 주도록 하겠습니다! 믿고 맡겨만 주십시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두 형제의 모습에 천무린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까 입만 나불거리던 놈들이 교육 한 번에 이렇게 빠릿빠릿해지지 않았는가.
쓰읍.
그러면서 이검을 훑어봤다.
“저 새끼는 교육이 안 돼서 눈치가 이렇게 없는 건지. 어째 이 형제들보다 못하냐.”
그 말에 이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부르르 떨었다. 시키는 대로 다했는데, 돌아온 건 찬밥 신세에다…….
“풉.”
“푸훕.”
두 형제가 입을 가리고 자신을 비웃는 모습을 보자, 이검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아니, 저 새끼들이 진짜?
“주, 주군! 제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졸지에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꼴이 아닌가!
“됐고. 기회는 뭐 매번 찾아오는 줄 알아? 올 때 잡는 게 바로 승부사라는 거야. 이 새꺄.”
“아, 아니……. 어, 어째서 추, 출신도 불분명한 놈들에게……!”
“X랄. 출신 따졌으면 너도 나가리야! 어디 출신을 들먹거려? 나도 고아 새낀데, 나한테도 출신 따질래?”
……할 말이 없어진 이검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고, 두 형제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띤 채 서로를 바라봤다.
드디어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번 일을 기회 삼아 멸마신군의 수하로 들어가게 된다면?
전욱과 같이 두 형제도 비상하게 머리를 굴렸다.
운남에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다져서 명성을 얻겠다는 생각은 대번에 무너졌지만.
멸마신군을 따름으로써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더 높이 비상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선.
처억.
두 사람은 각각 애병인 낭아도(狼牙刀)와 상아도(象牙刀)를 감싸고 있던 도집을 풀어냈다. 마땅한 몽둥이가 보이질 않으니 이것으로 대신해야겠지.
서너 걸음을 나아간 두 형제는 몇 번 도집을 매만지더니 적랑문 문도들을 쓰윽 훑었다.
“안타깝구려. 한때는 그대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운남에서 빛날 운명이었건만, 하늘의 장난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이제는 당신들과 적이 되었소. 하지만 어쩌겠소. 이것이 바로 하늘이 내린 운명인 것을. 나를 너무 원망치 마시…….”
“아오, 시끄러! 말하다가 밤샐래?”
그 말에 이용은 말을 딱 멈추고 냅다 적랑문 문도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에 혼비백산하는 적랑문 문도들이었다.
그들이 보기엔 자신들을 팼던 악교운과 이검이나.
지금 자신들을 향해 도집을 냅다 휘두르는 이용과 이호나.
넷 다 비슷해 보인다. 그만큼 강건한 기운들이 매서웠다.
타다다닥!
퍼억! 퍼억!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절정의 도객인 두 형제는 언제 악교운과 이검에게 당했냐는 듯 적랑문을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무위란.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악교운과 이검 앞에서는 제대로 힘 한번 쓰지 못한 이들이었지만.
적랑문 앞에서는 양 떼 앞에 선 이리처럼.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범처럼.
들쑤시면서 모조리 두들겨 팼다.
그리고 그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호오! 잘 패는걸. 재능이 있는데? 누구완 다르게.”
이검이 순간 뜨끔했다.
“두들겨 맞더니 역시 패기도 잘해. 그렇지?”
천무린이 이검을 보고 히죽 웃을 때마다 이검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쩌랴.
“하, 항복이오! 모,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사, 살려 주십시오!”
“제, 제발 자비를……! 으어어엉엉!”
훑어보니 대번에 곡소리가 나올 만큼 재능이 있는 게 사실인 듯.
대다수가 두 도객의 팔다리를 잡고 늘어지며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한다.
퍼억! 퍼억!
무자비한 구타의 현장을 바라보며 악교운은 참으로 덧없다고 느꼈다.
운남에서 시작된 내리 갈굼의 끝은 결국 적랑문이라니.
이검과 악교운의 적랑문 갈굼.
이어서 이검과 악교운이 이용과 이호에 대한 갈굼.
마지막으로 이용과 이호가 당한 만큼 적랑문에게 푸는 갈굼.
돌고 도는 구타와 갈굼의 향연에 적랑사객은 머리가 빙글빙글 돌 지경이었다. 왜 자신들이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바로 그때.
“왜 이렇게 처맞아야 하나 싶지?”
의문을 해소해 주는 이가 등장했다.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는 천무린이었다.
“이유는 간단해. 네 새끼들이 썩은 동아줄을 잡아서 그래. 이 새끼들아.”
“…….”
꿀꺽.
분명 천무린은 나이도 어린 데다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거늘, 어찌 저 눈빛에서 자신을 꿰뚫는 듯한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단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