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제181화
씨익 웃는 천무린의 표정에 이용이 눈을 부라렸다.
“예끼! 이노옴! 감히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어딜 감히 끼어드느냐!”
그 말에 악교운과 이검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됐다. 시퍼렇게 질린 그들의 모습에 이용과 이호는 더욱 용기백배해졌다.
척 보기에도 어느 도련님을 모시는 호위 무사들인가 본데.
이를 어쩌나.
자신들은 정파에도 사파에도 적을 두지 않는 낭인들인 것을.
거기다 자신들은 온갖 더러운 꼴을 다 당하면서 성장했기에 잘난 명문가 도련님을 모시는 호위 무사들에게는 절대 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응?
아까 두들겨 맞지 않았느냐고?
그럴 리가.
아주 잠깐 방심한 탓에 실수를 한 것뿐이다.
분명 그리 생각한 이용은 점점 질려 가는 표정을 짓는 이들에게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저 버릇없는 도련님의 호위 무사들인가 본데, 좋은 말로 할 때 손에 쥐고 있는 작자를 내려놓으시고 사죄하시오. 특히 댁들이 모시는 저 공자를 데려와서 사과를 시켜야 할 게요.”
그리 말하는 이용의 눈빛에 혼비백산한 표정을 짓는 적랑문의 전욱이 보였다. 전욱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천무린을 언급하자 그만 뜨악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정적이 흐르다가 말고 창가에 턱 걸쳐 있는 천무린의 표정이 흐뭇하게 변했다.
하하, 이거야 원.
명문가 도련님? 공자?
버릇이 없어?
사죄?
점입가경(漸入佳境).
갈수록 가관이다.
천무린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악교운과 이검의 표정이 전욱과 마찬가지로 다급해져서 이용을 바라봤다.
저 새끼가 미쳤나.
지금 누굴 건드리고 있는 건지나 알고 저러는 건지.
그렇게 전욱을 내려놓고 움직이려는 두 사람의 뒤로 천무린의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처리하는 양반……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꿀꺽.
“……쟤들 입에서 먼저 살려 달라고 나오는 쪽을 이기는 걸로 하시죠. 어때요?”
“조, 존명!”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아 참, 절대 내 개인적 감정이나 사적 이유로 두 사람에게 말하는 거 아닌 거 알죠?”
……어.
그, 그렇겠지.
개인적인 감정도,
사적인 이유도 배제한 채 말하는 거겠지.
“적랑문의 빈객이라잖아. 쓰레기들을 돕는다는데, 어째요. 안 그래요?”
“……네, 네 말이 맞구나.”
“조, 존명!”
악교운과 이검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들었다간 천무린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몰라 그들은 황급히 몸을 움직이는 길을 택했다.
“……어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
뿐만 아니라 저놈의 입을 빨리 막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찌 저리 입이 방정맞은지!
악교운은 이검을 바라보며 자신이 먼저 상대하겠다고 입을 열려는 찰나,
쌔앵!
그를 스쳐 지나간 인영이 그대로 이용에게 달려갔다.
이검이었다.
“……비겁하게!”
“흥! 비겁이 어디에 있소. 주군께서 명한 그 순간부터 바로 명에 따라야지. 늦는 놈이 바보인 것이오.”
“…….”
이검은 이용을 향해 냅다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고, 이용 역시 허리춤에서 도를 횡으로 베듯이 뽑아냈다.
“허허! 네깟 놈이 내게 아무리 용을 쓴다 한들! 급습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
어라.
근데…….
왜 이렇게 빠르지.
순식간에 코앞에 당도한 이검의 검 끝에 이용은 황급히 몸을 뒤로 눕듯이 허리를 꺾어야 했다. 그러자 빈틈투성이인 이용의 옆구리를 향해 걷어차 버린 이검이었다.
퍼어억!
“꾸엑!”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땅에 처박히는 이용이었지만, 이검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끄러운 겉모습과 달리, 자신의 쾌검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니.
“한가락 하는 놈이었군.”
절정의 고수다웠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무미건조하던 이검의 표정에 처음으로 입꼬리가 꿈틀했다. 몇 년 만에 보이는 제대로 된 미소라고 할까.
악교운보다 빨리 적을 쓰러뜨렸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물러 터졌군.”
악교운 역시 이호를 향해 비호처럼 날랜 움직임으로 창을 꺼내 쾌속하게 뻗었다. 사십구식악가창법의 절륜한 창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용이 당하는 것을 보자마자 자세를 잡은 이호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란하고도 기기묘묘하게 뻗어 오는 창끝에 양손이 절로 어지러워졌다.
이호는 도객이었다. 그리고 도가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병기가 바로 창이었다. 기본적으로 창이 가진 장점은 바로 긴 길이에서 비롯되는데, 그 길이라는 장점을 단점으로 바꾸려면 펼치는 창술을 회피해 깊이 파고들어서 도격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악교운은 자신이 유리한 지리적인 위치를 절대 내주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오면 뒤로 물러나 창을 휘둘렀고, 혹여 안으로 파고들려 하면 창대를 크게 휘둘러 창대의 반동으로 튕겨 나가게 만드는 유려한 창 솜씨를 뽐냈다.
“오호, 제법인데.”
천무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산동악가의 마지막 후예답게 창 하나는 기가 막히게 쓰는구먼.
산동악가의 기원이자, 옛 북송 말에 최강의 장군으로 추앙받던 악비. 그리고 그의 이름을 본딴 악교운의 아버지의 이름이 동명으로 쓰일 정도로 유명한 그 악비는 역사에서 무신으로 손꼽히는 관우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그런 악비의 창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산동악가의 후예다운 악교운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상대하는 이호로서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빌어먹을!”
묵직하고도 강력한 도격을 자랑하는 상아 도법을 구사하는 이호였지만, 무공은커녕 도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있었다. 기세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한 데다 악교운의 유려한 창 솜씨는 이호가 상대한 적들 중에서 단연 최고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몇 수를 더 주고받다가 악교운의 두 눈이 먹잇감을 낚아채는 매의 눈으로 변했다.
쥐고 있던 오른손을 팽이처럼 빙그르르 돌리더니 왼손으로 창대를 그대로 올렸다가 반동을 줘서 내리쳤다. 그 순간, 기기묘묘하게 꺾인 창끝이 도를 쥐고 있던 이호의 손목을 세게 후려쳤다.
타아악!
“크악!”
챙그랑.
손목이 아작 나는 듯한 충격에 그만 도를 놓치고 만 이호가 신음을 내뱉을 새도 없이.
처억.
이호의 목젖에 닿은 악교운의 창끝.
“……져, 졌소.”
완벽한 패배였다.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사실 이용과 다르게 이호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호는 이용과 크게 무공의 수위가 차이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호가 방심하지 않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깔끔하게 패배를 시인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
“……후후, 고작 두 수만에 해결한 것을 무려 십여 수나 나누었구려.”
이검의 입 끝이 미미하게 올라갔다. 여태 표정 변화라고는 없던 그의 눈매가 살짝 휘어진 것은 착각이 아닐 터.
그 모습에 악교운은 미간을 한껏 찌푸리다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고는 이호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응?”
이검의 눈매가 게슴츠레 변하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묻는 표정을 지었다.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어?
이검이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악교운의 주먹이 올라간 것을 보고 두 눈이 커진다.
어? 어어……?
퍼억!
그리고 이호를 마구잡이로 패기 시작하는 악교운이었다.
“쿠악!”
퍼어억! 퍼억! 퍼억!
속절없이 두들겨 맞는 이호의 모습에 이검은 순간 벙쪘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의료원 창가에 걸터앉아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천무린과 눈을 마주쳤다.
그런 천무린의 눈빛을 읽으니.
‘뭐 해? 넌 안 하고.’
그런 눈빛에 이검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게 맞는 건가 싶었지만.
퍼어억! 퍽퍽!
아랑곳하지 않고 패기 시작하는 악교운의 두 눈에 묘한 광기(狂氣)가 감돌기 시작했다. 두 주먹에 담긴 가벼운 내력은 금세 돌과 다를 바 없이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런 돌주먹에 맞는 이호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권각술에도 자신 있는 그였지만, 작정하고 패기 시작하는 악교운의 권각술에 그저 온몸을 웅크린 채 최대한 고통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퍼억! 퍼억!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검의 귓가에 천무린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라? 수하가 되기 위해 뭐든지 하겠다더니, 각오랑 다르네.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행동하더니. 아, 참고로 난.”
천무린의 표정이 흐뭇하게 변했다. 미소까지 띠면서.
“내 말 듣지 않는 수하는 수하로 안 쳐. 즉, 내 적이 되겠네? 하하.”
‘……!!’
이검의 두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더니 몸을 돌려 이제 막 몸을 일으키고 있는 이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다다닥!
“끄으으응.”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는 이용이 신음을 흘리며 찌뿌둥해진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후우우, 또 방심을 해 버렸구나. 그토록 방심하지 않기로 해 놓고…….”
그리고 도를 쥐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
퍼어어어어어억!
다시 한번 옆구리에 꽂히는 이검의 날아차기에.
우두두둑.
늑골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에 입을 딱 벌린 이용을 향해 이검 역시 무자비하게 주먹과 발로 마구 구타를 시작했다.
구타를 빙자한 폭력(?).
아니, 폭력을 빙자한 구타(?).
뭔지 모를 주먹질과 발길질로 이용을 마구 쥐어 패기 시작했다.
투다다다닥.
퍼억! 퍼억!
의료원에 있는 환자들과 지나가는 운남의 양민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끔찍한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저게 대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대낮부터 사람을 저리 쥐 잡듯이 패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말리는 이가 없었다.
되레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청년 한 명이 그들의 눈길을 끌었을 뿐이었다.
“저, 저기! 이보시오! 아, 아무리 그래도……!”
오죽하면 양민들이 나서서 말리려다 말고,
“호호, 놀라셨죠?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저들은 이번 운남 사건을 일으킨 주체들이랍니다. 죗값을 치르기 위해 저리 당하고 있는 것이니 놀란 가슴을 진정하세요.”
“제가 사천당가 출신이라 침 하나는 기가 막히게 놓거든요.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이리로 오실래요?”
설화린과 당지혜가 나서서 말리려는 양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예? 예, 예!”
무형노괴로 인한 재해 때문에 두 여인이 무림학관 생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운남의 양민들은 없었다. 생도라는 지위와 더불어 두 여인의 미색에 넋이 나가 버린 양민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음악에 취한 쥐 떼처럼 의료원으로 졸졸 따라 들어가 버렸다.
그저 전욱만이 그 광경을 오들오들 떨면서 지켜볼 뿐이었다.
“……너만 짝이 없어서 어쩌냐?”
그런 전욱이 불쌍했는지 한 사람이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아서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전욱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석상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에이, 너무 쫄지 마. 안 죽여, 안 죽여. 짜아식.”
천무린은 전욱의 등을 팡팡 치더니 씨익 웃었다.
“적랑문이 운남에서 돈 좀 벌었다며? 있는 거 다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 줄게. 그 미친 새끼 데려다가 운남에 있는 군소 방파 죄다 쓸어버리고 거기 있는 보물이니 재물이니 다 털어서 갖고 있을 텐데 말이야.”
……그런 악마의 속삭임이 전욱의 귓가로 파고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