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제180화
이용은 저 멀리서 먼지바람을 일으키는 누군가를 바라봤다.
“흠……?”
“저게 무엇일까요?”
“짐승인가?”
우다다다다!
먼지바람을 일으키고 달려오는 누군가는 마치 맹수에게 쫓기는 듯 절박해 보였다. 몰골이 말이 아닌 데다 두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미, 미친 인간들!”
날랜 몸과 경쾌한 발걸음으로 경신법 하나만큼은 일가견이 있는 전욱이었다. 본래 소매치기 출신이었던 그였기에 도망가는 재주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그런 전욱이 이용과 이호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전욱을 바라보던 이용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고놈 참 걸음마 한번 빠르군.”
“……형님!”
“응?”
이호가 황급히 지나쳐 간 전욱을 바라보며 이용에게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지나간 저놈이 적랑문 소속으로 적랑오객의 막내인 것 같습니다.”
이미 적랑문에 대한 정보와 적랑오객의 인상착의를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호였기에 전욱의 얼굴만 보고 대번에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런 이호의 말에 전욱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이용이 몸을 돌렸다.
“그렇다면 두말할 것 없이 쫓아가자꾸나. 제법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예. 그렇게 하시지요. 제가 잡겠습니다.”
제법 날래 보이기는 하나, 절정의 고수로 손꼽히는 이용과 이호가 못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잡고도 남았다.
땅바닥을 박찬 두 형제가 전욱의 뒤꽁무니를 쫓아 그를 잡으려 움직였다. 얼마 안 가 전욱의 뒷모습이 보였고, 회심의 미소를 짓던 이용이 손을 뻗었다.
“내가 도와주겠소이다. 무슨 일……!”
콰앙!
그런 이용의 턱주가리에 작렬하는 호쾌한 주먹.
그리고 동시에 떼구르르 구르며 땅에 처박히는 이용이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호 역시 전욱에게 손을 뻗으려다가 그대로 발길질에 걷어차여 저 멀리 나뒹굴어야 했다.
꽈앙!
“……쿨럭!”
“미, 미친! 뭐, 뭐야! 습격인가?”
이용과 이호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경계하는 태세를 갖췄지만, 이내 자신들에게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는 두 사람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이놈들이 감히 누구의 먹잇감에 손을 대려 하느냐?”
“서열 정리는 확실히 하는 편이 좋지.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꺼져라.”
전욱을 질질 끌고 살기등등한 말을 남긴 채 사라지는 두 사람이었다.
“…….”
“후우, 이거야 원. 간만에 뚜껑 열리는 날이구나.”
이용은 쓰러진 자신의 처지가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사라진 세 사람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대로 당해서야 되겠느냐. 방심해서 쓰러진 것으로 자신감을 잃으면 아니 되는 법. 어서 가자꾸나, 이호야.”
“예, 형님.”
“가서 당한 만큼 반드시 보복을 해 주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형님.”
* * *
끄으응.
온몸이 저려 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이 죄다 마비라도 된 것인지 움직이려 할 때마다 엄습하는 끔찍한 고통에 천무린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된 게 허구한 날 두들겨 맞아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무신 체면에 이게 말이나 돼?’
차마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킨 그 말마따나 근래에는 싸움을 할 때마다 몸이 걸레짝이 되었다.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천무린이었지만, 어쩌랴.
자신은 전생의 무신이 아닌, 현생의 무림학관 생도인 처지인 것을.
그나저나.
끄으응.
양팔이 왜 이다지도 무겁단 말이냐.
내 팔이 이리도 무거웠던가.
그것도 양팔 모두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버겁다니.
……새근새근.
으응?
고른 숨소리에 천무린은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리며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새근새근.
곤히 자고 있는 설화린이었다.
양손에 들려 있는 헝겊과 지혈제를 보아하니 밤새 간호하다가 지쳐 잠든 모양이었다.
“……근데 왜?”
끼긱, 끼긱.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꺾으니, 다른 한쪽에도 한 사람이 곤히 자고 있었다. 금창약을 양손에 쥔 채 천무린의 왼팔을 베고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당지혜였다.
왜 환자의 팔에 팔베개를 하고 자고 앉았냐.
……그렇다고 밤새 간호해 준 녀석들을 깨울 수도 없고.
“으음……?”
“하아아암.”
천무린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설화린과 당지혜가 동시에 몸을 꿈틀거리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다가.
“꺄악!”
“꺅!”
“뭐, 뭔데! 왜 소릴 질러?”
천무린이 눈을 뜬 것을 보고, 두 사람 다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 아니, 죽은 줄 알고…….”
“……다행히 살아 있었네요.”
얼씨구.
죽은 줄 알아?
다행히 살아?
“허, 참. 날 뭐로 보고. 이래 봬도 나 전생엔 무신으로…….”
“……전생이요?”
“무신?”
말똥말똥한 두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여인을 보고 황급히 입을 닫은 천무린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그대로 벌러덩 누웠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어디 가셨길래 코빼기도 안 비쳐?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 왔건만 말이야. 정말로 싸우는 사람 따로 있고, 노는 사람 따로 있다니까.”
그 말에 설화린과 당지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데요. 악 교관님은.”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 교관님을 부려 먹을 생각만 하는지.”
……응?
뭔 소리지.
천무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당최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되레 황당한 표정을 짓던 설화린이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이검인가 뭔가 하는 수하를 거둬서 이 일을 이렇게 벌여 놓은 녀석들을 다 족치라고 시켰다면서요!”
“족치라고만 했겠어? 그냥 아작을 내라고 했겠지.”
아, 맞다.
천무린이 혼절하기 전에 거둔 수하 녀석.
이검이라는 이름의 천마신교의 교인이자 자신의 강함에 반해 충성을 맹세하던 녀석.
드디어 생각났다.
그 표정에 설화린은 더욱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결국 그 작자가 움직이는데, 혼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악 교관님이 따라가신 거고요.”
“악 교관님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으실 텐데……. 어쩌다가.”
두 여인의 째려보는 눈빛에 천무린은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상체를 세우려다가 눈을 꼭 감았다.
그랬지. 첫 시험이니 나발이니 하며 족치고 오라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습관처럼 내뱉어 버리긴 했는데, 뭐 알아서 잘했겠지.
설마 족치라고 했다고 다 반죽음으로 만들진 않았을 거 아냐.
분명 그랬는데.
꽈당탕탕!
“……양보하시오!”
“무슨 헛소리를! 내가 잡았소!”
“어허!”
“허어어!”
천무린과 두 여인이 기거하는 의료원 창밖으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귀에 익은 목소린데.
아픈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창가로 다가간 천무린은 고개만 빼꼼 내밀어 밖을 내다봤다. 웬 쥐새끼 한 마리를 가지고 한 명은 목을, 한 명은 머리채를 잡아끌고 오고 있었다.
……잡힌 전욱의 두 눈에는 생기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찌나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쯔쯧, 사람을 어찌 저리 만들어 놓누. 하여간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은 인간들이 참 많다니까.”
천무린이 혀를 차며 두 사람을 비난하자, 그 말을 들은 설화린과 당지혜는 그저 황당하다는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봤다.
‘……정녕 제가 이런 인간 때문에 밤을 새워 가며 간호를 했답니까.’
‘원시천존이시여, 아니…… 할아버지, 저는 무엇 때문에 이 인간에게…….’
그런 두 여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무린은 창가에서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아유! 그만 좀 싸웁시다! 다 큰 어른들이 뭐 하는 짓이람.”
그 말에 악교운과 이검이 혀를 차면서 천무린을 바라봤다. 두 손에 잡은 전욱은 놓지 않은 채.
“……판결 좀 해 주거라. 누가 이겼는지.”
“주군! 주군의 명을 이행하고자 적랑문인가 뭐시기를 박살 내고 마지막 남은 이놈을 끌고 왔습니다. 제가 이겼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치지지직.
악교운과 이검의 두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의 기 싸움에 천무린은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절친이 따로 없네. 승부욕 하나는 더럽게 잘 맞아.
악교운의 손을 들어 주기도, 이검의 손을 들어 주기도 애매한 때에 천무린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제법 날카로운 기세를 가진 두 사람이 접근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료원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다름 아닌.
“후우, 잡았다. 요놈들.”
“정말 날랜 놈들입니다.”
“무공의 무 자도 모를 것 같은 놈들이 걸음만 빠르구나.”
낭아검 이용과 상아검 이호, 두 형제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전욱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악교운과 이검을 향해 이를 갈아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절정 고수 둘이서 한 사람을 핍박하여 이리 포박하고 있다니.
운남이란 땅에 주인이 없다고 하더라만.
그래도 이리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줄이야.
이용은 뜨겁게 불타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공을 담아 크게 소리쳤다.
“갈! 이노오오옴들!”
공력이 담긴 외침에 의료원에 있는 일행과 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과 이호를 바라봤다.
“어찌하여 힘없는 자를 핍박하고 괴롭히느냐?”
이용의 말을 받아 이호가 함께 나섰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당장 손을 떼고 물러나라.”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명성을 쌓기 위해 운남보다 더 좋은 땅은 없다고 생각했다. 운남에서 차근차근 명성을 쌓고 언젠가는 전 중원을 지배하는 위대한 무인이 되리라는 꿈을 꿨다.
그랬기에 지금과 같은 자리는 다름 아닌 자신들을 위한 무대.
오늘은.
운남에서 낭아검, 상아검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자리가 될 것이다.
천무린은 그 모습을 보더니 한숨을 푹 하고 내쉬고 입을 열었다.
“저기요. 당신들은 대체 누구신대요?”
“……어린 녀석이 예의가 없구나.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히지도 않고 대뜸 어른의 이름을 묻다니, 이래서 버르장머리 없이 큰 아이들이란, 쯔쯧!”
……지금 나한테 예의를 운운한 건가.
천무린이 빙긋 웃었다.
“다시 한번 물을게요. 정체가 뭔데요?”
“흥! 고얀 놈! 잘 들어라! 우린 이번에 적랑문의 빈객으로 온 낭아검 이용과 상아검 이호다. 중원 무림에서 칼밥을 먹은 이라면 우리의 별호 정돈 당연히 들어 봤겠지!”
……전혀요.
처음 들어 봐요.
낭아? 상아?
뭐, 어디 이빨 수집가이세요?
천무린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다 말고 시선을 슬그머니 악교운과 이검에게로 향했다.
“빈객이라네요?”
“…….”
“각각 한 명씩 맡아서 빨리 처리하는 양반이 이기는 걸로 하죠.”
“…….”
캬.
내가 생각해도 참 공평정대하다.
그렇게 낭아검과 상아검의 운명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