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제179화
“……흠. 여기가 운남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형님!”
낭아검(狼牙劍)과 상아검(象牙劍).
피나는 노력 끝에 낭인으로서는 그 어렵다는 절정의 경지에 올라선 두 형제는 자신들의 명성을 쌓기 위한 곳을 정해야 했다.
“이호야.”
“예.”
상아검 이호는 자신의 형이자 낭아검이라 불리는 이용을 바라봤다.
“……아주 천천히 시작하자꾸나.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으니, 우리가 겸손한 자세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나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 말에 이호는 낭아검 이용에게 운남을 추천하였다.
“운남을 추천하는 이유가 있더냐?”
“그곳은 남만야수궁이 사라진 뒤 군소 방파들이 서로 패권을 차지하려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인다고 들었습니다.”
“호오, 그렇군. 각축전이 벌어지면 고양이 손이라도 아쉬운 법이지.”
“예. 그래서 그 이전투구 속에 저희가 끼면 끼니 걱정 없이 대접을 받으면서 명성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그렇지. 그러면서 실전에 대한 경험도 쌓고 말이다. 흐흐흐. 좋구나. 이호야, 네 말대로 운남으로 가자꾸나!”
그렇게 두 형제는 운남으로 향했고, 금방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 말대로 도착하긴 했다만, 원래 이리 을씨년스러운 곳이더냐.”
이용의 두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그는 운남이라는 곳에서 활기보단 뭔가 침체된 분위기를 느끼고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원래 제자리를 지키려면 뭔들 못 하겠습니까. 서로 칼부림을 하면 분위기가 살벌하고 삭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흠. 그도 그렇지. 그럼 먼저 어디로 가면 되겠느냐?”
“미리 알아 둔 곳이 있습니다.”
상아검 이호는 이런 방면에 제법 재주가 있었다. 이용보다 무위가 떨어지는 대신에 조리 있게 말하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고, 또한 주변의 소문이나 쓸 만한 정보를 모으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적랑문이라고, 아마 사파의 조무래기들이 만든 집단인 것 같은데 절정급 무인들이 없어 세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이용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정확히 자신들이 찾던 문파가 아닌가.
“오냐. 드디어 우리의 이름을 널리 알릴 때가 왔구나.”
그렇게 두 형제는 서둘러 적랑문으로 향했다.
* * *
적랑오객의 대형이자 적랑문의 문주인 구소엽은 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적랑문의 문주가 되기 전에 사파에서 개뼈다귀처럼 굴러먹던 구소엽이다.
한눈에 봐도 두 사람의 기운은 자신의 것과는 달랐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대현검 안벽과 최소 동수(同數)이거나 그보다 더 고수들임이 분명하다.’
운남에 저런 고수들이 왔다는 소식은 아직 들은 바 없으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낭인들 중에서도 절정 고수들이 제법 있을뿐더러 빈객으로 대접받기에는 충분한 실력이 바로 절정의 고수이다 보니, 군소 방파들이 혈전을 벌이는 와중에 등장하여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절정 고수들이 제법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이들은 잘 대접하고 먹이면 그만큼의 값어치를 할 것이다.
물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겠지만, 저들은 척 봐도 짝퉁이 아닌 진퉁이었다.
구소엽의 감은 여태까지 틀린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의 검이 스르릉 뽑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으응?”
구소엽의 표정이 대번에 의아하게 변했다. 빈객으로 찾아온 인간이 다짜고짜 검부터 뽑다니.
“……실력 발휘를 해서 제 몸값을 올리겠다는 심산인 건가.”
이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개나 소나 절정의 고수라고 사기를 치고 있는 판국에 자신이 진짜 실력자라는 걸 확실하게 입증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그의 생각과 별개로, 이검은 서늘한 표정으로 검을 뽑으며 악교운을 슬쩍 바라봤다.
“누가 많이 때려잡나 승부하시겠소?”
“오호라, 아까 못다 한 승부를 여기서 하자?”
“싫으면 마시오.”
“누가 싫다고 했나.”
광야차(狂夜叉)라는 별호가 있을 정도로 악교운 역시 호승심 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무인이었다.
여태 천무린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그 역시 날뛰고 싶은 맘이 없었겠는가. 게다가 이검처럼 자신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이가 눈앞에 있다면 더욱 그렇다.
스르릉.
악교운 역시 검을 빼 들었고.
“대장은 내 몫이오!”
곧바로 구소엽을 향해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적랑문 문도들을 마구 유린하기 시작했다.
* * *
번쩍.
두 눈을 번쩍 뜨며 상체를 일으킨 남자는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의 몸을 막 더듬더니 마지막엔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그러다가 이내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씨, 씨X. 나, 나 살아남은 거야?”
눈가에 이슬이 그렁그렁한 남자의 이름은 전욱.
적랑오객의 막내로, 대형 구소엽의 명에 따라 광인을 이끌고 대현문까지 안내해 주고 돌아서다가 갑작스레 마주한 이들과 광인이 격전을 벌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격전.
말 그대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치열한 전투에 전욱은 필시 자신은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놈을 대현문까지 후딱 안내해 주고 돌아가서 술이나 마셔야겠다는 그의 생각은 홍이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규화보전의 내력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떻게 된 인간이 저리도 악독한 기운을 내뿜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 역시 칼밥을 먹은 사파의 일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전욱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려야 했다.
저런 광인에게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니.
자신의 목이 아직도 붙어 있는 게 그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보다 훨씬 어린 녀석이 등장했고, 그 녀석은 홍이라는 녀석의 무위를 그대로 찍어 눌렀다. 그것도 아주 손쉽게.
마치 천신(天神)이 강림하여 악인을 처단하는 듯한 모습이 전욱의 눈에 생생하게 담겼다.
그러다가 웬 늙은이와 그를 보좌하는 인간이 불청객처럼 나타났고, 그렇게 치러진 공방을 지켜보다가 전욱은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펼치는 격전과 그 위력에서 터져 나오는 기운이 전욱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기에.
……하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한 거지.”
홍은 사라졌고.
격전도 끝이 났는지 주변에서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목숨을 건졌다는 것.
그거면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격전을 보고 깨달았다. 자신의 무위가 얼마나 초라한지. 그리고 그 덕에 빨리 알게 되었다. 운남에서 누구보다 빨리 자리를 잡는 것이 중요하고, 내 한 목숨 부지하면서 살아가기에 적당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을.
일단은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니 말이다. 전욱은 한달음에 적랑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을 막 들어서려는 순간.
콰당탕!
떼구르르! 적랑문도로 보이는 자가 전욱의 코앞에서 몇 차례나 굴렀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날아온 적랑문도는 그대로 게거품을 물더니 기절해 버렸다.
“……무, 무슨 일이기에!”
설, 설마 그 광인 새끼가?
도망가야 하나.
차마 적랑문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전욱의 코앞으로 익숙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쿠웅 하고 엎어졌다.
“저, 전욱아…….”
“헐, 대형?”
얼굴에 쌍코피를 터뜨리며 그대로 쓰러지던 구소엽이 전욱을 바라보더니 두 팔로 그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누, 누굽니까? 그 미치광이 놈입니까?”
다급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구소엽은 그저 입만 뻐끔거렸다. 그리고 그런 구소엽 대신 전욱을 맞이한 것은 삭막한 운남의 풍경을 쏙 빼닮은 두 사내였다.
“……헉!”
전욱은 아까 격전에서 그들을 보았고, 그들이 절정의 고수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말도 안 되는 격전을 치르던 이들의 일행으로, 상당한 고수들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두 눈엔 그리 보였으니.
“……다, 당신들이 왜?”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보는 전욱에게.
씨익.
미소를 띠는 이들이었다.
“와! 쥐새끼가 여기에도 있었구려. 혹여 놓쳤다면.”
“아주 끔찍하구려. 쥐새끼를 놓쳤다는 것을 그놈이 알았다면 당신은 이번 시험에서 떨어졌을 것이오.”
“……후후, 그렇구려. 그렇다면 더욱 손속에 자비를 둬서는 안 되겠지.”
두 손에 묻은 핏빛이 더욱 섬뜩함을 드러내며 이검은 전욱을 형형한 안광으로 노려봤다. 악교운 또한 야차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자, 전욱은 저도 오르게 오금이 저려 왔다.
“아, 아니.”
저 인간들 분명 서로 적 아니었……나?
언제부터 저렇게 손발이 잘 맞았……지.
전욱은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구소엽의 손을 뿌리치면서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오, 대형. 아니.”
전욱은 적랑문의 표식을 서둘러 뜯어 버렸다.
“구씨, 나는 내 목숨부터 보전해야겠으니 부디 알아서 잘 살아남으시오.”
그 말에 전욱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있던 구소엽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황망한 눈길로 전욱을 바라봤다.
……이런 놈을 막내라고.
이 개XX!
전욱은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황급히 돌려서 경신법을 펼쳤다.
급히 달아나는 전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악교운과 이검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저놈만 잡으면!”
“저 새끼만 잡으면!”
“내가 이긴다.”
“내가 이기는 것이오!”
정확히 오십 대 오십.
적랑문의 문도를 모조리 때려잡고 간부급으로 적랑오객 넷을 때려잡았다. 거의 반죽음으로 몰아넣었으나 아직 승부를 가를 수 없었거늘.
이제 전욱이라는 저 쥐새끼를 먼저 잡는 놈이 승자가 된다.
이검은 본능적으로 악교운과의 승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함을 깨달았다. 적어도 자신의 주군을 모시려면 그 정도의 능력은 보여 주어야 할 터이니.
악교운은 악교운대로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천무린이 누굴 수하로 삼든 크게 개의치 않지만, 그의 수하에게 밀린다는 것은 악교운의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욱을 잡는 일만큼은 두 사람 다 서로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그 두 사람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구소엽의 황망한 눈길은 곧 포기로 이어졌다.
“……뭐가 어찌 된 건지.”
에라, 나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저 배신자 새끼를 잡아 준다는데 뭐.
도망가는 전욱 새끼, 누가 잡든 잡아서 회를 쳐 준다면 그걸로 족하지 뭐!
그런 생각과 동시에 기절해 버린 구소엽이었다.
저 새끼 잡는 쪽이 우리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