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제178화
삭막해진 운남에도 금방 꽃이 피기 시작했다. 움직이기 시작한 악교운과 설화린, 당지혜는 탈진할 때까지 운남에 있는 양민들을 모두 끌어모아 피신시켰고.
사방팔방에서 움직이는 양민들과 갑작스레 시작된 재앙에 눈치를 챈 대현문을 포함한 많은 군소 방파들 역시 양민들의 피난에 협력했다.
“이놈들아! 움직여라! 어떻게 자리 잡은 곳인데! 빨리 움직이지 못할까!”
“후딱 움직여라! 그리고 다른 녀석들은 이와 같은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 어서 파악하도록!”
“……우리가 자리 잡을 기회다! 지금 양민들한테 눈도장을 찍도록 해라!”
“대현문을 누르고 우리가 올라선다! 가자아!”
비단 그게 꼭 좋은 마음으로 비롯된 것이 아닌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군소 방파들이 움직였단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창 양민들을 대피시키던 세 사람은 꺾이는 무릎을 세워 가며 부축을 하다가 어느 순간 턱턱 막히던 숨이 편안해진 느낌을 받았다.
파아앗!
턱 밑까지 차오르던 압력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사라진 무형의 압력에 악교운과 설화린, 당지혜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들이 올려다본 하늘에 아지랑이같이 피어오르던 무형지기는 없었다.
즉, 그 말은 하나로 직결된다.
“……이, 이긴 걸까요?”
“어, 없어졌네.”
“……후우.”
그 상황에 악교운은 가벼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가 한 가지 놓치고 있었던 것.
“……그곳에 갔다 오마!”
“네?”
“그게 무슨……!”
“그놈이 남아 있다.”
악교운이 크게 놀라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가 말한 그놈이란.
“교관님이랑 대치하던 그 사람을 말하시는 거라면…….”
“아무리 강하더라도…….”
아무리 강하더라도 천무린에게는 안 되지 않겠냐고 말을 덧붙이려던 당지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은 악교운에게 모욕이 될 수 있었기에.
허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악교운은 고개를 저었다.
“비정상적으로 힘을 썼을 것이다. 거산도 전위와 맞붙었을 때를 기억해라. 우린 녀석이 부담을 갖지 않고 싸우길 바랐던 것이지만, 그 녀석이 보여 주는 힘은 반드시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그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
자기 자신의 몸을 내던지며 적과 싸우는 녀석이다.
자신이 준 공청석유 그리고 불가사의한 무에 대한 지식과 경험으로 불가해(不可解)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해 가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열여덟이다.
약관도 지나지 않은 청년이 말도 안 되는 신위를 보여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잠력을 끌어다 썼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녀올 테니 여기 있어라.”
악교운이 막 몸을 돌리며 남은 내력을 끌어모으려는 순간이었다.
“……교, 교관님! 저, 저기!”
설화린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가리키는 손가락.
휘익.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악교운이었다.
저벅, 저벅.
걸어오는 두 사람. 그중 한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여 멀쩡한 이의 부축을 받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검과, 그의 부축을 받고 거의 끌려오다시피 하는 천무린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설화린과 당지혜의 두 눈이 급격히 커지더니, 후다닥 달려갔다. 그녀들의 쏜살같은 움직임에 악교운이 저도 모르게 말문을 열려다가 멈췄고, 그녀들은 이검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동시에 천무린의 상태를 살폈다.
“당신이 왜 이 사람을……!”
“무슨 꿍꿍이인지 말하세요.”
두 사람의 경계에 이검은 두 눈을 감고 있는 천무린을 살포시, 그것도 깊은 잠에 빠져 버린 그가 깨지 않도록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두 사람과 악교운을 바라보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는 잠이 드셨소.”
“엥?”
“……에?”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설화린과 당지혜가 동시에 같은 반응을 보이며 벙찐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무형노괴의 수하로 있던 인간이 갑자기 이 인간한테 주군이라고?
“믿기 힘들겠지만, 그렇게 되었소이다. 비록 악연으로 시작했으나…….”
“뭔 헛소리예요? 당신을 어떻게 믿고?”
설화린은 중간에 이검의 말을 잘라먹으며 더욱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로서는 이검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이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군께서 당연히 이리 반응하시리라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신교에서는 워낙 허다한 일이라…….”
「 마교의 생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손바닥 뒤집듯 네가 태도를 바꾸면 당연히 경계하겠지. 이 멍청한 놈아. 」
이검을 받아들이기로 한 천무린은 깊은 잠에 빠지기 전에 이검에게 당부한 이야기가 있었다.
「 잘 들어. 애들을 보면 이렇게 말해. 」
이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의 차가운 얼굴과 상반된 당혹스러운 표정에 일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느, 늙은 할아방탱 고자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걱정 말고 운남 사람들 잘 이끌어 달라고.”
“…….”
“…….”
이검은 말을 하고 나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일행은 안다. 이검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가 누구의 말을 전달한 것인지.
자신들이 아는 단 한 사람만이 저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것도 무형노괴라는 거악을 저리 경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이검이 전달한다는 것은 천무린이 그를 믿고 잠을 자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상태는 괜찮은 건가요?”
“응급처치는 마쳤소이다. 반나절 안에 의원에 들러서 정양을 하면 되지 않을까 싶소만…….”
“으음…….”
이검의 말과 표정에 딱히 거짓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뜸 이 인간을 믿을 수가 있을까.
일행은 당혹스러움과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천무린의 속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정작 당사자는 저토록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으니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그리고 그때.
일행의 표정을 읽던 이검이 아주 조심스레 이야길 꺼냈다.
“……주군께서 잠드시기 전에 당부하신 말씀이 하나 더 있소이다.”
그 말에 일행의 고개가 일제히 이검에게로 향했다. 이목이 집중된 이검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애먼 놈들 때문에 새로운 독사과를 키워 놨다고. 그런 독사과 농장은 당장에 지워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남겼소.”
“……독사과?”
“그렇소. 독사과라고 하면 알 것이라고. 아무래도 중간에 사라진…… 그 반쪽짜리 마인을 말하는 것 같았소만.”
아!
이검의 말에 설화린과 당지혜가 그간 잊고 있던 존재를 다시 떠올렸다.
규화보전과 구음백골조로 두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홍을 그동안 잊고 있었다.
홍의 존재를 떠올린 악교운이 미간을 좁히며 이검을 바라봤다.
“독사과 농장이라. 어떻게 지우겠다는 말이지?”
악교운은 이검을 향해 차가운 태도로 일관했고, 이검은 그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어떻게 할지는 두고 보시오. 주군에게 명을 받았소이다. 이것이 첫 시험이라고. 여러분한테 인정받으려면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하셨소.”
그러면서 나서는 이검이었다.
설화린과 당지혜, 그리고 악교운은 서로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게 당최 무슨 상황인지.
* * *
적랑문의 문주이자, 적랑오객의 대형인 구소엽은 사라진 홍의 존재를 인지함과 동시에 하늘에서 느껴지는 불가사의한 압력에 맞춰 눈치 빠르게 움직였다.
적랑문의 주가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 이대로 양민들의 호의를 등에 업고 더욱더 높이 비상하리라.
그렇기에 모든 적랑문의 문도들을 풀어 양민들을 돕도록 지시하였다. 대현문의 존재가 꺼려지지만, 그렇다고 한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였다.
오히려 홍을 통해 대현문을 지워 버렸다면, 추후에 홍에게 무엇을 더 어떻게 챙겨 줘야 할지 고민하며 살았을 것을 생각하면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려 왔으니까.
“크크큭, 대형! 정말 우리 세상이 오려나 봅니다.”
적랑오객의 둘째인 혁소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그의 말처럼 구소엽 역시 팔짱을 낀 채 연신 자신들을 향해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양민들을 바라봤다.
“후후후, 정말 그렇구나.”
운남에서 입지를 다진 지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다.
사실 대현문과 비교하면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그 세를 불려 가는 속도로 보면 몇 개월 안에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터.
대현문을 잡고 운남을 대표하는 문파가 된다면.
재물이면 재물.
권력이면 권력.
여인이면 여인.
가지지 못할 것이 없다.
여전히 적랑문에 절정의 고수가 부족한 것은 큰 흠이지만, 벽강문을 지워 버리고 얻게 된 부산물로 그 부분도 충분히 메울 수 있을 터였다.
“조금만 더 안정되면 아우들과 함께 폐관훈련에 들어가면 된다.”
사라진 남만야수궁의 재건을 위해 벽강문이 힘쓰면서 얻게 되었다는 천고의 보물로 손꼽히는 ‘묵린혈망의 내단’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홍이 많은 군소 방파를 지운 뒤 그 뒤처리를 하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야 했지만, 그 덕에 좋은 점도 꽤 많았다. 홍은 애초에 제 맘 편하게 사람을 죽이고 그 흔적을 지울 것을 요구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그리고 적랑문은 그 흔적을 지워 버리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만 몰두하는 미치광이 홍의 뒤처리를 하면서 그로부터 떨어지는 부산물을 수없이 챙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적랑문의 세를 불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문파들과 각각 연합되어 있거나 협력하기로 한 상단과 표국, 그리고 문파 내에 있는 각종 비동과 금고에는 문파를 이끌어 갈 자금과 보물들이 즐비했고, 남만과 가깝다 보니 생기는 영초와 약초 등의 부산물도 제법 되었다.
“묵린혈망의 내단을 아우들과 나눠 먹고 조금만 훈련을 하고 나면 절정에 다다르겠지.”
적랑오객은 대다수가 일류의 극의에 다다라 있었다. 폐관훈련 뒤에 찾아올 극한의 성취를 얻을 생각을 하니 절로 마음이 뿌듯해져 왔다.
자신이 통제할 수가 없던 홍마저 자취를 감추었으니 걱정이 될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구소엽은 분명 그리 생각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문짝이 저 멀리 날아가며 적랑문에 누군가가 침입해 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뭐, 뭐야! 무슨 일이냐!”
그런 구소엽의 공허한 외침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벌떡 일어난 구소엽은 황급히 적랑문의 외문으로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들어오는 두 사람을
“……주군께서 말하셨소. 마교에서 하던 만큼만 하라고.”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평범하진 않는 것 같군. 첫 시작부터.”
“후후, 주군께서 말하셨지. 화끈하게 저지르라고. 그래야…… 갱생 지도도 덜 받게 될 거라고.”
미소를 띤 이검과 그런 이검을 마치 미친놈(?)처럼 바라보는 악교운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