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제177화
금살령은 발동하지 않았다.
천무린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흡성대법으로 흡수한 무형지기(無刑之氣).
그것은 곧 무형노괴의 마기(魔氣)이자 내력이다.
내재된 무공에 대한 지식으로 마공을 익히는 것은 불가하지만.
다른 이로부터 흡수한 마기는 펼칠 수 있다.
또 다른 수확이자 새롭게 나아갈 길을 찾았다.
무형노괴는 아주 강했다.
천마신교의 육장로라는 직위는 허투루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그러나 반대로 육장로라는 직위는 장로들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낮은 6번째 자리다.
천마신교라는 집단에서 서열은 곧 힘의 우열을 뜻한다. 즉, 무형노괴보다 강한 이들이 최소 다섯은 더 있다는 뜻.
천무린은 오늘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흡성대법이 아니었으면, 이미 내력이 고갈되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고.
흡성대법으로 흡수한 무형지기를 통해 금마령이라도 발동되었다면 이미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터였다.
그렇다.
운이 좋았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도 이렇게 운이 좋을까.
장담할 수 없기에 더욱 강해져야 한다.
천무린의 두 눈이 깊이 침잠하다가 고갤 돌린 곳에 무형노괴가 보였다.
벅찬 호흡을 하며 어떻게 해서든 무형지기를 끌어올리려 노력하는 무형노괴였지만, 그조차도 버거운지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명멸한다.
무형노괴의 두 눈이 서서히 암전(暗轉)되었다.
한때, 전 중원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악명 높은 무형노괴는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죽음을 맞이했다.
땅에 쓰러진 채 헐떡거리는 무형노괴의 시선 끝에 천무린이 보였다.
“……죽여라. 내게 걸맞은 죽음을 선사해 다오.”
대라신선이 와도 살아날 수 없었다. 제아무리 무형지기를 끌어올려 구멍 난 상처들을 메워 보아도 불가하다. 그것은 이미 자명한 사실.
어차피 맞이할 죽음이라면.
그간 오랜 기간 중원 무림을 누비며 무력을 자랑했던 무형노괴였기에 자신은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물론.
“X랄. 걸맞은 죽음? 다시 살려 놓고 쥐어 패고 싶네. 아오. 더 쥐어 패고 죽였어야 하는 건데, 힘 조절을 잘못했어. X발.”
그 대상이 천무린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무형노괴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천무린의 표정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다급해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아, 맞아. 할 게 남아 있었지.”
겨우 숨을 부여잡고서 피를 토해 내는 무형노괴의 곁으로 다가간다.
“……끄, 끌끌. 고맙구나. 좋은 승부였…….”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그는 천무린을 두려워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펼치던 천무린을 늘 두려워했고, 그의 무위를 무서워했다.
그와 동시에 동경했다.
빛나던 천무린의 모습에 전율했고, 무형노괴 자신은 할 수 없는 것을 펼치던 천무린을 경외했다.
자신보다 뛰어난 천무린이었기에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를 따랐다. 물론 그것이 천무린에게는 와 닿지 않았을지언정 말이다.
죽음을 코앞에 둔 무형노괴이기에 이젠 그렇게 정리하고 떠날 수 있었다.
비록 천무린과 악연으로 똘똘 뭉쳤으나.
어쩌면 그의 검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동경의 대상이자 경외하는 자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어서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여겼다.
“염병하네. X발. 이 새끼가 어디서 회개한 척 뒈지려고 해?”
물론 그것이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천무린의 발끝이 서서히 올라가다가 멈췄다.
“낄낄, 내가 말했지.”
그리고 한 곳으로 천천히 내려가 안착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무형노괴의 사타구니였다.
“……무, 무슨?”
무형노괴의 두 눈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죽음 직전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무슨은 뭐가 무슨이야. 내가 말했잖아. 사내구실 못 하게 해 주겠다고. 어디 곱게 뒈지려고 그래? 너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간 여인이 몇 명인데. 이 색마 새끼, 진작에 고자로 만들어 버렸어야 하는데. 너무 늦게 고자를 만들어 버렸네. 아오!”
그 말에 무형노괴의 두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는가.
……마지막에 이런 죽음이라니.
저승에 가서도 생각이 날 끔찍한 죽음이지 않은가.
“아, 아니 된……!”
“닥쳐.”
콰직.
“끄, 끄으으읍!”
죽음을 준비하던 무형노괴의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갔다. 제아무리 고강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남성성을 상징하는 사타구니의 ‘그곳’이 이렇게 터진다면.
끔찍한 고통 속에 허덕이게 될 터.
천무린은 몇 번이나 발로 잘근잘근 밟았다.
뽀각! 콰지지직!
“……끄으으으아아아!”
“얼씨구, 곧 죽어 가던 양반이 그렇게 소리도 지를 줄 알고.”
천무린의 두 눈에 서늘함이 감돈다.
“네 손에 죽어간 이들을 생각해라. 네 손에 죽어간 여인들에게 저승에 가서라도 사죄해라. 네 그 쓰레기 같은 짓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는지 말이야.”
무형노괴.
한때는 천마신교의 마도관 관주이자 무형괴마로 이름을 날렸고.
지금은 무형노괴라는 별호로 천마신교 육장로로 있던 그는 사타구니가 터져 끔찍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차마 두 눈을 뜨고 보기엔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으나.
“색마 새끼가 당연히 겪어야 할 죽음이지. 아오! 속 시원해. 환생하고 처음으로 누굴 죽여 봤네! 후우!”
여태 단전을 부수거나 해할 수는 있었어도 죽일 순 없었지만.
무형노괴는 죽일 수 있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이를 계기로 금살령과 금마령을 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
천무린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순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전율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찌.”
인간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뛰어난 무위.
절대자가 가진 힘을 보여 준 무형노괴를 바라보며 자신의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고 여기던 이검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약관의 청년은 더욱 강했다.
뇌리를 강타하는 전율에 떨며 저 청년에게 절로 감탄이 터졌다.
이검과 눈을 마주한 천무린이 미간을 좁혔다.
“……아, 저 새끼가 남아 있었네?”
무형노괴를 보좌하듯 따르던 수하 새끼.
쳐 죽여야지, 단박에.
그렇게 생각하려는 찰나.
휘청.
“어라라?”
천무린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쿠당탕!
아하, 그렇구나.
몸속에 있는 모든 내력을 끌어다 쓴 데다 기껏 흡수한 무형지기도 이번 한 수로 모조리 바닥났다.
거기다 지혈했던 오른쪽 가슴팍에서 꿀럭 하고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온다.
“어라라, 하늘이 핑핑 도네.”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거기다 내력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최악의 순간이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아껴 둘 걸 그랬다. 눈앞에 저 녀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내력을 죄다 끌어다 썼으니.
천무린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이검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다가왔다.
저벅, 저벅.
“……아, 아니. X발! 이건 아니잖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는 그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이검이 뻗어 내는 검기는 고사하고 검풍조차 막아 내지 못할 터.
이렇게 내가 허무하게 죽는다고.
……아직 뚝배기 깨야 할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가오던 이검이 천무린의 앞에 서더니 그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서서히 쥐고 있던 검을 위로 날을 세웠다.
후우웅.
“……아, 아니. 우리 잠깐만 이야기 좀 하는 건!”
천무린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진짜 빌어먹을 놈의 인생.
어쩌다 또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거냐.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이검이라는 존재를 미처 신경 못 쓴 자신의 잘못이지.
후회해도 별수 없었다.
그렇게 두 눈을 감은 채 죽음을 예상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으응?”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 벌써 죽은 건가.
혹시 몰라 천무린의 한쪽 눈을 게슴츠레 떠 본다.
“얼씨구?”
처억.
“뭐 하냐?”
“저를 받아 주십시오.”
“엥.”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냐.
“……주군의 무위에 탄복하였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를 수하로 삼아 이끌어 주십시오!”
……에엥?
천무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검을 바라봤다.
갑자기 다짜고짜 자기를 수하로 받아 달라고?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람.
“……야! 네 주인을 죽인 새끼한테 붙어먹겠다고?”
“강한 자를 주군으로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
그러면서 그의 손길이 천무린의 가슴팍을 향했다. 그러고는.
타다다닥!
순식간에 지혈하며 피를 멈추게 한 이검은 품속에 있던 목함을 열었다.
“……뭐, 뭐 하려고?”
“주군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목함 속에 있던 수많은 비침과 의료를 위한 도구들을 하나하나 즐비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응급 처방에 불과하겠지만, 의원에 도달하기 전까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주군.”
몹시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왜냐고?
천마신교 출신이니까.
광적으로 강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천마신교다.
무형노괴 정도 되는 장로급이 아니라면 강자에게 미친 듯이 빠져드는 것이 그 아래 교인들이었다. 천마신교의 생리를 죄다 파악하고 있는 천무린이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형노괴의 수하였다면 거절하지.”
무형노괴는 육장로 중에서 무위는 제일 낮았지만 여인을 탐하는 색욕에 치중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따르는 수하이니만큼 어찌 믿을 수 있으랴.
“그리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하나, 저는 여인을 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비록 살생은 했으나 그것은 정사마를 비롯한 중원 무림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이리 말하면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이검의 의술 덕에 천무린의 전신에서 느껴지던 끔찍한 고통이 조금이나마 줄어들고 있었다.
“사실이냐?”
“……주군께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천마신교에 돌아가지 않고?”
“주군께서 펼친 마공은 무형노괴를 꺾었습니다.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이 새끼.
흡성대법을 펼친 줄 모르는구나.
“…….”
마공을 쓴 줄로 착각하고 있는 이 녀석을 보아하니.
의술도 제법 쓸 만하고.
데리고 다니기 괜찮은 녀석이다.
거기다 악교운에 버금가는 실력자이고.
공야찬과 조수강을 통한 정보력은 확보되었고, 그들을 통해 아삼 등이 포함된 살수들도 거뒀으나 이들을 총괄할 수 있는 녀석이 필요하긴 하다.
제법 괜찮은 구성이 될 수도 있겠군.
“너 말이야.”
“예! 주군!”
“너무 약해.”
“……죄송합니다! 강해지겠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예!”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갱생이 필요해.”
충직한 표정을 짓던 이검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예?”
“찌든 때 빼야지. 안 그래? 이래 봬도 나 정파인인데, 마도인을 데리고 다닌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이검은 자신을 바라보는 천무린의 눈빛을 보고 저도 모르게 얼어 버렸다.
찌든 때를 빼다니. 이게 무슨.
……과연 이 사람을 따르기로 한 결정이 잘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