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제174화
천무린은 무형노괴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역린(逆鱗) 같은 존재였다.
마도관에서 교육을 받은 천무린은 무에 대한 탁월한 재능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능력까지 갖춘 무인이었다.
무(武)에서 정점에 설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을 갖춘 이가 바로 천무린이었다.
모든 훈련 과정과 수련 과정을 마치는 이립(而立, 서른)이란 나이에 마도관에서는 졸업 시험을 치른다.
졸업 시험에서는 마도관에서 적당한 선택지를 주어 선택지 중에 자신이 자신 있는 놈을 골라 대련을 벌인 후 승리할 경우 상대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단, 수석으로 졸업하는 이에게는 선택지가 아닌 대련 상대를 지목할 수 있는 지명권이 생기며, 대련 상대에 대한 제한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연례행사로 치부되었기에 대련 상대로는 자신과 엇비슷하거나 조금 떨어지는, 마도관을 이끄는 부교관 혹은 기행적인 일을 벌이더라도 천마신교를 이끌어 가는 무력대의 대주 정도를 지목할 따름이었다.
무력대의 대주를 꺾으면 그 무력대의 수장으로 앉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마도관이니까.
그야말로 강자존(强者存). 강한 놈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천마신교의 방침이었다.
무형노괴의 뇌리 속에는 당시 천무린의 수석 졸업 시험을 치르는 과정이 스쳐 지나갔다.
「 천무린 생도, 누굴 지목할 텐가? 」
「 으음……. 」
「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가? 」
「 아뇨. 근데 부탁할 것이 있는데요. 」
「 ……뭔가? 」
「 3초 뒤에 멈추라고 말 좀 해 주시겠어요? 」
그 말에 졸업 시험을 주관하는 교관은 이건 또 무슨 미친놈의 헛소리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순순히 응했다.
「 3…… 2…… 1……! 」
천천히 수를 세는 그의 목소리에 따라.
사사사삭!
사삭!
손가락 끝이 마구잡이로 움직였다.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이던 천무린의 손가락은.
「 멈춰라. 」
교관의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딱 멈췄다.
「 ……헤에? 」
마도관 한가운데 세워진 연무장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서 있던 천무린의 손가락 끝이 멈춰 있는 곳에 모두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 ……. 」
「 ……미친! 」
마도관 관계자들과 천마신교의 무력대 대주들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천무린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 마도관 관주님이시네? ……아, 아니지. 무형괴마(無刑怪魔) 선배라고 불러야 하나. 」
당시 마도관 관주였던 무형노괴를 가리키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던 천무린.
마도관을 갓 졸업하는 생도가 대련 상대로 지목하기엔 까마득히 높은 직위였지만, 지목하는 대상에 제한이 없다는 방침은 마도관을 세운 선대 천마의 뜻이었기에 무시할 수도 없었다.
「 이거 어쩌나……. 난감하네. 」
천무린의 난처한 표정과 뒷머리를 긁적이며 후회하는 반응을 보이는 모습에 모두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갓 졸업하는 생도가 천마신교에서도 손꼽히는 무형괴마를 선택하다니.
제아무리 천둥벌거숭이라고 하더라도 상황 판단은 빨라야 하는 법이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교관이 재빨리 천무린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지금이라도 냉큼 고개를 숙여라. 그러면 용서해 주실 거다. 어서 고개를 조아리고 시험 상대를 다시 선택하게 해 달라고……! 」
「 ……뭔 소리예요? 그 뜻이 아닌데. 」
으응?
교관은, 머리를 긁적이다 말고 하품을 하는 녀석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게 아니라니?
「 그, 그럼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
「 아니, 생각해 봐요. 제가 저기 보이는 무형괴마 선배……. 아, 아니지. 관주님을 꺾으면 얼마나 관주님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겠어. 나이도 지긋하신 분인데, 말이야. 낄낄. 」
미친놈.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저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지는 교관이었다.
「 뼈도 쑤시고 그럴 텐데. 아, 근데 말이죠. 관주가 여자 생도 건드리는 건 너무했지. X발, 생각해 보니까 정말 어이가 없네. 」
「 ……. 」
그러나 녀석은 더욱 급발진하여 마도관 전체를 무시무시한 정적에 휩싸이게 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녀석의 말에 교관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천무린은 갑자기 열이 받은 것인지 마도관의 관주이자 무형괴마라는 악명으로 중원을 떨어 울렸던 마인을 대놓고 저격했다.
가리킨 그의 검지를 서서히 돌리더니,
까딱- 까딱-
「 잔말 말고 나와, 이 새끼야. 오늘 관주고 나발이고 더 이상 사내구실 못 하게 해 줄 테니까. 」
으드득.
무형노괴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기억에서 과거 무형괴마였던 무형노괴는 천무린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거기다 여자 생도를 건드렸다는 과거가 탄로 나면서 마도관 관주의 자격이 박탈되었고, 몇 년간 마옥에 갇혀야만 했다.
물론 강자존이라는 방침에 따라 마옥에 갇혔던 무형노괴에게 사면권이 주어지면서 가장 강한 육장로 중 하나를 꺾으면서 육장로라는 자리로 복귀했지만.
「 하, 나 이 새끼. 싫은데. X발. 늙은 할아방탱이가 우리 교의 명성을 먹칠할 거 같은데. 」
이미 그때 천무린은 천마신교 교주의 자리에 올라선 뒤였다. 숨도 쉬지 못하고 천무린에게 매일같이 짓밟히고 농락을 당하며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꽈드득.
무형노괴의 손아귀가 핏물이 주르륵 배어 나올 정도였다.
그 모습에 천무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피식 웃었다.
“왜? 옛 기억 때문에 좀 사무치나 봐?”
“……어린 아해야, 내가 방심한 것은 인정하마. 허나 그렇다고 한들 결과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아아, 누가 꼰대 아니랄까 봐. 마도관 관주일 때도 네가 지껄이는 이야기 아무도 안 들은 이유가 뭔 줄 아냐?”
일렁이는 무형검의 기운이 천무린의 손아귀에서 터져 나왔다. 무형으로 유지되는 기운이 다른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막대한 내력의 소모를 뜻한다. 평범한 검에 기운을 담는 것보다 내력으로 검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형검을 유지하는 것은 천무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에 대한 운용과 더불어 내력 관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펼치는 무형검의 위력이었지만, 무형노괴는 그 사실보다 다른 이유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놈의 입에서.
“……정체가 무엇이냐?”
이 애송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무형노괴의 무저갱 속에 숨겨져 있던 심리적 상처를 마구 헤집는 것이었다.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천마, 그리고 무신으로 한 세대를 풍미했던 천무린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무형노괴 역시 사라진 천무린에 대한 행적을 처음에는 쫓았다. 천마신교의 근간이 없어졌기에 장로로서 최소한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천무린은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구쳤는지 모를 그의 행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무린이 이 세상에 사라졌다는 확신을 얻기까지는 무려 십여 년이 걸렸다.
……그가 무형노괴에게 안겨 준 정신적 외상(外傷)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컸기에.
천무린의 입가가 비틀렸고,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 아오! 기억력 더럽게 떨어지네! 그냥 늙으면 죽으라니까. 너 없어도 장로들 일 잘해. 살아서 더 뭐하냐고? 추해지기밖에 더하겠어? 」
과거의 천무린이 자신에게 했던 말.
“아오, 기억력 드럽게 떨어지네.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된다니까. 살아서 뭐해? 추해지는 것밖에 더 있냐?”
같은 말투, 같은 내용으로 무형노괴를 자극했다.
“서, 설마…….”
“세상에 별일이 다 있지? 우리가 이렇게도 만나고 말이야. 참 질겨. 인연이란 거.”
천무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무형노괴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과 입가는 사뭇 대조적이었지만, 마음은 한결같았다.
“……그러게 내가 일 시킬 때, 명령할 때, 말 좀 잘 듣지 그랬어. 안 그랬으면 곱게 늙어서 죽었을 텐데. 아! 곱게 늙을 순 없겠구나? 사내구실 못 하게 하는 건 지금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마. 버틸 테면 버텨 봐. 이길 테면 이겨 보고. 그때는 내가 서른 살에 널 꺾었는데, 이번엔 스무 살도 안 돼서 널 꺾으면.”
저도 모르게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말하는 천무린의 표정이 경박스럽게 지어졌다.
“나 같으면 혀 깨물고 뒈지거나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을 텐데 말이야.”
그 말에 무형노괴의 일렁거리는 무형검이 천무린을 향해 곧장 뻗어 왔다. 식별되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응축되어 진각을 밟는 동시에 무형검강(無刑劍彊)이 펼쳐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무시무시한 굉음이 천지를 진동했고, 거대한 기운임에도 불구하고 두 눈으론 식별할 수가 없었다. 기감으로 판단하고 움직여야 하며, 오감 대신 육감(六感)의 감각으로 느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가공할 위력의 검강은 절삭력을 가진 검이라기보다는 부순다는 표현을 가진 철저한 패도(覇道)에 가까운 검이었다.
천무린의 눈가가 꿈틀거리더니, 동시에 무형검에 담긴 기운을 삽시간에 응축하여 내리꽂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네깟 놈이! 네깟 놈이이이이이! 나를 우롱하려 드느냐! 그놈은 이미 죽었다! 죽은 지 오래다! 어느 놈의 사주를 받았더냐! 구유비마더냐! 당장 그놈의 목을 비틀어 찢어 버리겠다! 갈가리 찢어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겠노라!”
터져 나오는 굉음과 동시에 무형노괴의 무형검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무형지가 아닌, 처음으로 다른 무공의 형태인 무형검을 포탄처럼 쏘아 내기 시작하는 그 기운.
거기에는 광기(狂氣)가 담겨 있었다.
사자처럼 포효하는 무형노괴의 모습. 천무린은 그 모든 검강을 피하지 않고 되레 맞서서 검강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꽝! 꽈앙! 꽈가가강!
다시금 부딪치기 시작하는 검강의 격돌은 악교운과 이검의 난전마저 멈추게 만들었고, 초절정을 바라보는 두 사람으로서도 피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멀찍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두 사람은 자신의 몸에 전해지는 진동과 파공음에 호신강기를 펼쳐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 충격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으니.
그리고 그제야 두 사람은 볼 수 있었다.
광기에 미쳐 버린 무형노괴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마구 쏘아 대는 검강의 패도로 사방팔방을 모조리 때려 부수고 있었고.
천무린은…….
그 모든 검강을 향해 동일하게 검강으로 맞서며 미미하게나마.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게끔.
한 걸음씩 내디뎌 무형노괴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의 결연한 얼굴에는 반드시 무형노괴에게 닿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구멍 난 오른쪽 가슴팍에서 터져 나오는 핏물이 여전한데도 말이다.
“……반드시.”
천무린의 중얼거리는 입가를 바라보며 악교운 역시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무형노괴와 맞선다는 것은 천무린이라고 할지라도 버거운 일일 줄 알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천무린은 또 한 번의 기적을 보여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네놈으로부터 시작이다. 내 과오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것이.”
그리고 그 누구도 듣지 못한 천무린의 결연한 목소리가 그의 검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