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제173화
천무린의 손끝이 짜글짜글해진 무형노괴의 오른팔을 파고든다.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입안 가득 채우고도 웃어 버리는 천무린의 기괴한 얼굴.
무형노괴의 오른팔을 가슴팍에 쑤셔 넣는 과감함.
동시에 몸속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의 조화는.
거악(巨惡)이라 불리는 무형노괴의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을 태어나서 두 번째로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게 만들었다.
노도(怒濤)처럼 빨려 들어가는 무형노괴의 무형지기가 천무린의 사지백해로 뻗어 가기 시작했다.
끄그그극!
“흡성대법이라고, 그럴 리가…….”
흡성대법을 어떻게 익힐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단전이 약동하더니 오른팔을 통해 천무린의 몸속으로 자신의 무형지기가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무형노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이유는 단 하나.
삼대 금기 무공으로 꼽히는 흡성대법은 무형노괴가 아는 한, 중원에서 오직 한 사람만 알고 있었다.
아니, 이젠 아무도 모를 테지.
왜냐고?
이젠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한 사람이기에.
천마(天魔) 천무린.
그리고 그가 직접 세운 천마전(天魔殿).
무형노괴 이상으로 무공과 마공, 각종 술법에 관심이 높았던 천무린은 그 천마전에 모든 것을 수집해 넣었다.
천마전 안에는 온갖 비급과 비서들이 가득하고,
흡성대법 역시 그곳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비동이 세워진 이후로 천마신공을 익힌 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천마전이었기에 무형노괴 역시 천무린이 사라진 뒤에 천마신공을 미친 듯이 찾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천마신공뿐 아니라 각종 마공과 금술, 그리고 재물까지.
비급이면 비급.
재물이면 재물.
무기라면 무기.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천마전(天魔殿).
그런 곳에나 있을 법한 흡성대법을 눈앞의 이 어린놈이 익혔다는 것이 당최 말이 되질 않았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그래서도 안 되었고.
그러나.
찰나의 짧은 상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이 반응했다.
울컥!
처음으로 무형노괴의 내부가 진탕이 될 만큼 전신에 내상을 입었다.
“이, 이노옴! 가, 감히 잔재주를!”
퍼억! 퍼억!
단말마의 노호성과 함께 팔을 빼려 했으나, 천무린의 오른쪽 가슴팍을 꿰뚫고 들어간, 검지에 이어 손목까지 파고든 무형노괴의 오른손은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쿨럭! 쿡쿡쿡. 추악하기 짝이 없는 놈이 내공은 참 많아. 그래서 더욱 쓸 만해. 끌끌끌.”
쉴 새 없이 입가를 타고 흐르는 핏물로 당장이라도 과다 출혈로 죽을 것처럼 인상을 일그러뜨린 천무린이었지만.
무형노괴의 당황한 표정을 보는 것은 그런 괴로움을 단번에 잊게 해 주었다.
“……으득.”
혈관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무형노괴의 오른손 손목을 꽉 쥔 천무린의 손은 절대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되레 도망갈까 자신의 상체를 더욱 들이밀었다.
그 모습에 무형노괴는 이를 갈면서도 금세 침착성을 되찾았다. 삽시간에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무형지기를 넋 놓고 바라보는 것은 여기까지다. 흡성대법은 마공이 아니지만, 마공보다 사특한 효율을 보이는 무공이다.
눈앞의 현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넋을 놓았지만, 그래도 무형노괴는 무형노괴였다. 천마신교의 육장로는 아무나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 또한 아니었다.
월등한 실력이 없으면 그 자리는 고사하고 진즉에 천마신교에서 생을 마감하였을 것이다.
제정신을 차린 무형노괴는 천무린을 향해 왼손으로 무형지를 마구 펼쳐 냈다.
“죽어라. 끌끌.”
무형노괴의 왼손은 신속(迅速) 그 자체였다.
우웅!
흡사 수천 마리의 벌 떼가 동시에 날갯짓이라도 하듯 진동음을 크게 내기 시작했다. 진동은 이내 굉음으로 변했고, 무형의 기운이 천무린의 몸을 난자하듯 마구 두드렸다.
파바바바박!
수많은 무형지의 기운에 두들겨 맞으면서 천무린의 몸이 수차례 흔들렸다. 흔들리기 시작한 몸은 금세 온몸에 구멍이 날 것이고, 모든 모공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게 될 것이다.
“흡성대법? 그것이 뭐 어쨌다는 것이냐! 네깟 놈이 어떤 기연으로 그것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는 하나로 직결될 것이다. 끌끌끌!”
무형의 기운이 천무린의 전신을 마구잡이로 두들기기 시작했는데, 천무린의 양손은 더욱 무형노괴의 오른팔에 집중할 뿐이었다.
“네놈이 죽는다는 것! 끌끌. 발악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내력은 다시 채우면 되는 법!”
파바바박!
무형지가 쉴 새 없이 꽂혔고, 떨군 천무린의 고개는 올라갈 새가 없었다. 그저 그 고통을 견디며 흡성대법을 펼치는 것이 전부였기에.
분명 그리 생각했으나.
“……거 참.”
천무린이 고개를 들면서 몸을 난타하는 무형지의 향연에 씨익 미소를 짓는다.
“죽을 때긴 한 것 같네. 색마 영감 새끼야.”
끼긱! 뚜둑.
뚜둑.
뚝.
뚜둑.
뻗어 나가는 무형지가 천무린의 호신강기에 철저히 막혔다. 난타하는 무형지의 기운을 천무린의 호신강기가 모조리 막았고, 두드리는 반탄력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무형노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신강기라고.
이 상황에서 호신강기를 펼쳐?
어떻게 된 인간이.
조금만 더 다가가면 서로의 호흡마저 느낄 수 있을 지척에서 기를 운용하여 호신강기를 펼치는 기예는 절로 감탄이 나올 만했지만.
무형노괴를 더욱 경악하게 만든 것은.
“이…… 이노오옴!”
호신강기를 만든 투명한 기운.
그것은 바로 무형지기(無刑之氣)였다.
유수한 세월 차곡차곡 쌓인 무형노괴의 내공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처진 눈가가 더욱 처지기 시작했고, 주름진 피부가 더욱 늘어졌다.
무형지기가 자신이 아닌, 이 눈앞의 애송이에게서 피어난다. 그리고 무형의 막이 자신의 무형지에 맞물려 상쇄된다.
강물처럼 쉴 새 없이 퍼부어지는 무형지의 난격이 천무린에게 다다랐다고 여겼던 것마저 모두 무형의 막에 가로막혀 닿지 않았다.
자신의 공격이 하나도 먹히질 않는다.
그것도 자신의 내력으로 만들어진 기운으로 인해.
“낄낄. 쿨럭! 쿨럭! 어때? 낄낄.”
천무린이 웃는다.
그저 웃었다.
무형노괴가 육장로로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
어느 누구보다 방대한 양의 내력. 무형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바다와 같은 내력이었다.
그것이 무형노괴가 무형노괴로 거듭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었다.
강력하고 무서운 무형지기를 원 없이 가졌고, 여태껏 단 한 번도 내력으로 밀린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랬던 무형노괴였기에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
무형노괴는 자신의 왼손을 들더니 천무린을 바라본다. 핏발이 선 두 눈은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흉흉하기 그지없었지만, 천무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주 쳐다봤다.
해 볼 테면 어디 해 보든가.
그러나 그 손길은 천무린을 향하지 않았다.
서걱!
무형의 기운이 마치 칼날처럼 변하는가 싶더니 대번에 자신의 오른팔 팔꿈치를 잘라 버리는 무형노괴였다. 동시에 전신에 무형지기를 터뜨려 공간을 벌린 무형노괴는 왼손으로 자신이 직접 자른 오른팔을 지혈했다.
타다다닥!
타닥!
“……나이가 들더니 제법 현명해졌네? 색마 새끼.”
“이러고도 네놈이 무사할 줄 아느냐.”
“뭐래? 병X. 아직도 여유 있는 척하네?”
뻥 하고 뚫려 버린 천무린의 오른쪽 가슴팍을 보면 어느 누가 이와 같이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싶지만.
천무린은 무감정한 표정으로 자신의 뚫려 버린 가슴팍을 지혈하며 입가를 비틀었다.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던 천무린의 단전 속에는 이제 무형지기가 그의 사지백해를 채우며 전신에 충만감을 느끼게 했다.
“멍청하긴. 흡성대법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느냐! 그 후유증으로 아마 네 녀석은 더 이상 무공을 펼칠 수 없을 것이다.”
“맞아. 그 말도. 근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거지?”
천무린의 손끝에 모인 기운이 그대로 튕겨 나간다. 그것도 무형노괴를 향해서.
피잉!
“……!”
핑! 퍼서서석!
무형노괴는 왼손으로 무형지를 튕겨 그 기운을 상쇄했다.
“무, 무형지?”
“……뭔 소리야. 그딴 거랑 비교가 되냐! 이 새끼야, 넌 뒈졌어!”
무형지기(無刑之氣).
탄지신통(彈指神通).
그렇게 두 가지의 기운과 무공이 어우러져 무형탄지신통(無刑彈指神通)이 탄생하였다.
수십, 수백 개의 무형탄지신통의 기운에 무형노괴는 이를 악물고 왼손으로 무형지를 만들어 냈다. 무수히 만들어진 무형지를 난사하는 와중에도 무형노괴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고 있었다.
흡성대법에 대한 과감한 판단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잘라 버렸고 더 이상의 낭비도 막았지만, 그 후폭풍을 무형노괴 역시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
오른손으로 만들어 내던 무형지보다 크게 줄어든 위력과 속도는 아직 익숙지 않을 천무린의 무형탄지신통조차 막기 버거울 정도였다.
심지어 쪼그라든 단전 속에 남아 있는 무형지기는 고작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흡수당한 무형지기 때문에 무형노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천무린을 바라보는 무형노괴의 얼굴이 최소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내력으로 그나마 노화를 막아 주고 있었을 텐데, 견딜 수 있으려나 몰라?”
조롱 섞인 천무린의 말에 무형노괴는 역팔자의 두 눈썹으로 왼손에 무형화된 구체를 천천히 기다랗게 만들기 시작했다.
“……얼씨구, 무형검(無刑劍)이라.”
천무린의 두 눈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무형노괴를 지켜봤다. 한 손이 없어졌다고 한들, 이 중원 무림을 통틀어도 그와 견줄 만한 고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손을 잃은 무인의 무위는 적어도 절반 이하로 떨어질 테지만, 그것도 무형노괴쯤 되는 고수라면 그런 대로 유지할 터이니.
“똥줄이 좀 타셨나 봐?”
“……끌끌, 나를 사지로 모는 인간은 태어나서 네가 두 번째다.”
“오호, 첫 번째는?”
“…….”
말할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첫 번째로 맞이한 당혹스럽고도 위험천만했던 상황을 겪게 한 인간.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천무린이겠지.”
응당 당연한 것을 말하는 듯한 태도.
차마 그가 입으로 말하지 못한 이름 석 자가 저 눈앞의 애송이에게서 나왔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무형노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이름.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무신의 그늘 아래서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무형노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명을 들어야만 했던 나날이 떠올랐다.
그의 기운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그림자만 봐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의 기운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내가 천무린이거든.”
천무린의 손아귀에 쥔 검 한 자루에 똑같이 무형검이 펼쳐졌다. 그 기운은 무형지기로 만들어진 무형검(無刑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