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제172화
“저놈 쫓으러 안 가냐? 천마신공에 관심 있다며.”
천무린의 말에 사라진 홍의 자리 쪽으로 무형노괴의 시선이 머물렀다. 그러다가 무형노괴의 시선이 아주 찬찬히 두 여인을 향해 뻗어 갔다.
“……끌끌.”
무형노괴의 여색에는 취향이랄 게 따로 없었다. 그러니 더욱 위험했고, 비구니들만 가득한 아미파를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힐 만큼 제 자신의 욕망에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선이 두 여인에게 멈춰 있었다.
“천마신공을 익힌 자가 그리 경박해질 리가 있느냐. 줘도 익히지 못할 규화보전에 누가 관심을 가진다고. 끌끌.”
천무린에게는 일절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저 두 여인을 향한 무형노괴의 음심(淫心)이 마구마구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단번에 느껴질 정도로.
“……보물들이 여깄었구나. 끌끌. 먹지도 못할 규화보전보다 나는 이곳에 관심이 생기는구나.”
그 말에 천무린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저 새끼가?
무형노괴쯤 되면 바보가 아니었다. 규화보전이 가진 마기를 따라 천마신공을 쫓게 할 심산이었으나, 홍의 상태를 보고 대충 눈치챈 모양이다.
힐끗.
탈골된 왼쪽 어깨와 온 전신을 적신 피 칠갑을 한 천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거산도 전위와의 처절한 전투는 그의 무위를 한 단계 끌어올려 주었지만, 무형노괴를 상대하기엔 버거웠다.
그의 온몸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힐끗.
설화린과 당지혜가 보였다.
그녀들의 파리한 안색과 양팔에 새겨진 거뭇한 마기의 흔적은 그녀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왠지 짜증이 났다. 당지운이 당지혜가 된 거?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냥 가만히 좀 있을 것이지.
원래 같았으면 니들 주제에 무슨 재주로 그놈을 상대한다고 나댄 거냐고 야단치고 싶었다. 도망치라고 하고 싶었다. 왜 나서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허나.
더 열 받는 게 있었으니.
“아오, X발.”
그런 그녀들을 음탕한 눈깔로 바라보는 저 늙은 할아방탱이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주제도 모르고 나대지 말고 도망가라고 한 그 차이만큼 지금 자신도 저 무형노괴와 실력 차이가 있었다.
“쉬고 있어. 다녀올 테니.”
“끌끌, 그 몸뚱어리로 나를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어.”
“무모하구나. 어린 여아들 앞에서 잘 보이고 싶은 게냐. 끌끌, 희망일랑 갖지 말거라. 그렇다고 한들 내 봐줄 용의는 없으니.”
처진 두 눈 속에 지저분한 열망이 일렁이며 두 여인의 뽀얀 피부를 탐하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자진해서 내 가랑이 안으로…….”
“염병하네. 규화보전 때문에 남성성을 포기 못 하겠다고 했지? 염병할 새끼. 오늘 아예 사내구실을 못 하게 만들어서 규화보전 안 익힌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말을 끊어 버린 천무린의 모습에 무형노괴가 입가를 비틀었다. 천무린의 무례한 말로 인한 분노는 잠깐이었고, 다시 두 여인을 바라보던 무형노괴가 입을 열었다.
“어디 최선을 다해 보거라. 끌끌. 네놈만 없다면 저 어린 여아들은 내 것이 될 테니까 막을 수 있다면 말이야.”
그 말에 천무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스윽.
산발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정돈하여 묶는다. 그러고는 자신의 무복 상의를 오른손으로 쥐고서는.
찌이익.
찢어 버리고 품이 큰 무복을 두 여인에게 던진다.
“지저분하겠지만 가려. 옷이 그리 단정하지 못해서야 사천무관 생도라고 할 수 있겠어?”
그와 동시에 천무린의 신형이 다시 한번 무형노괴를 향해 쇄도했다. 다가갈세라 무차별적으로 폭격해 오는 무형지의 난사에 천무린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지겹지도 않냐. 이 학습 능력 떨어지는 늙은 새끼야.”
황금빛의 기운이 전신을 물들었다가 오른손 끝에 모인 순간.
후우우웅!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이 발현되며 전신을 타고 승천하는 황금빛 용(龍)이 대지를 갈랐다. 상서로운 기운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면서 동시에 무형노괴의 무형의 기운을 대번에 쓸어버리며 그에게 직격했다.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
백보신권(百步神拳).
쿠과가가가가강!
귀청이 터져 나갈 정도의 굉음에 천무린이 준 옷으로 전신을 동여매다 만 설화린과 당지혜는 멀찍이 물러나면서 두 손으로 귀를 막아야만 했다.
어마어마한 힘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권력(拳力)에 무형노괴는 여유롭던 미소를 멈추고 콧김을 한 번 내뿜어야 했다.
“무식하게 내공을 운용하다니! 이번 한 번으로 끝장을 내려는 속셈이더냐! 흥!”
그리 말했으나, 무형노괴 역시 마인(魔人)이다. 무공 간의 상성을 따지면 단지 무시무시한 권력으로만 치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만큼 정순한 내력의 폭발을 무시하기엔 벌써부터 무형노괴의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마기가 미약하게나마 기세를 꺾고 있었으니.
허나.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용트림에 무형노괴의 손끝에 기운이 삽시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응축된 기운이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순식간에 돌개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강인한 기운이 중첩되고, 다시 중첩된다.
중첩된 기운은 동그란 구체의 형태를 갖췄다가 이내 크기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쿠콰가가가가강!
“……확실히 제법이긴 해. 허나! 내력으로 밀릴 노부가 아니니라!”
도달한 황금빛의 거력(巨力)을 향해 찰나의 순간에 수십 번을 응축시킨 무형지가 그대로 튕겨서 나아갔다.
쾅!
포탄처럼 튕겨 나간 그 기운은 무형노괴의 몸뚱어리보다 커진 구체로 형성되었고, 그 기운은 응축된 덩어리로 속력을 더해 백보신권의 권력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앙!
황금빛의 용이 입을 쩍 하고 벌리며 응축된 구체를 집어삼켰지만, 그 막대한 기운을 소화해 내지 못하고 용의 배 속 한가운데서 그만 터지고 말았다.
번쩍!
두 눈을 절로 감게 만들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고, 그 모습에 설화린과 당지혜는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호, 화린아!”
당지혜의 얼떨떨한 음성에 따라 고갤 돌린 설화린은 그만 입을 벌려 경악에 어린 고함을 터뜨려야 했다.
“저, 저게 뭐예요!?”
휘이이잉!
기운들의 충돌로 인해 용권풍(龍卷風)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며 자연경관을 다른 공간으로 바꾸어 버렸다. 거산도 전위와의 대전에서도 충격적인 위력을 보였으나, 이는 전혀 다른 수준이었다. 초토화되어가는 것은 모든 것의 소멸을 의미했고, 그 가운데 천무린의 황금빛 권격과 무형노괴의 투명한 지공이 무자비하게 서로에게 살상을 입히고 있었다.
다만 무형노괴의 손끝에는 자비가 없었고, 천무린의 권격에는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데 그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이 명확히 보였다는 것.
‘제X랄, 제X랄!’
금살령 따위가 아니었으면 무형노괴의 손속에 더 빠르게 대응했을 것이다. 무신이라는 명성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명성과 경험은 무형노괴라는 괴물과의 차이를 좁혀지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금살령이 있기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치명상을 입히고, 죽이기 위한 살수(殺手)를 펼치지 못하는 만큼 약점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곧 무형노괴에게 읽히기 시작했다.
“……끌끌.”
무형노괴는 평생을 마인으로 살면서 천마신교의 육장로라는 자리까지 일신의 무력으로 따낸 자이다. 그런 자인 만큼 전투적인 감각과 본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천무린이 살수를 펼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수를 나눠 보자마자 바로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소림이 그리 가르친 것이냐. 아니면 어설픈 자비 따위로 내게 불심(佛心)이라도 심어 주려는 심산이냐.”
무형노괴의 비아냥거림에 천무린이 입가를 비틀었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 주름진 꼰대 새끼야.”
“……끝까지 주눅 들지 않는 용기는 정말 가상하다만. 끌끌.”
무형노괴의 검지가 빛살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천무린 역시 그에 맞춰 손속을 나누며 양손을 어지럽게 움직였다.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그리고.
천수관음수(千手觀音手).
천무린의 손이 수십, 수백, 수천 개로 늘어나 검지를 튕겨 내며 무형노괴를 밀어 낸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나한권과 용호권을 펼쳐 낸다.
퍼버버버벅!
퍼버버벅!
천 개의 손과, 손마다 달려 있는 눈이 보살의 모습으로 중생을 구제하리라!
고통에 허덕이는 일체중생을 구제하여 다시는 없을 악인들을 처단하리라!
천 개의 황금빛 뇌격(雷擊)이 무형노괴의 전신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콰가가각!
천무린의 호흡이 거칠어졌고, 거칠어진 호흡만큼이나 내력 역시 삽시간에 빠져나갔다. 광활한 바다와도 같았던 내력이 회복할 새도 없이 소모만 되어 가니 천무린의 안색 역시 창백해졌다.
천수관음으로 펼친 수많은 뇌격으로 인해 무형노괴의 양손에 휩싸인 열 개의 무형지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바짝 붙은 상태에서 펼치는 무형지기와 황금빛의 뇌격이 무수히 부딪치며 그 반탄력에 이를 악무는 두 사람이었지만.
내력으로 보나, 현 무위로 따져 보나 밀리는 쪽은 천무린이었다. 그래서 천무린은 저도 모르게 아랫니를 꽉 깨물게 되었다.
‘내가, 내가 이딴 소림의 무공이 아니라 천마의 무공을 익혔다면!’
으드득.
그랬다면 이따위 놈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절로 이가 갈렸다.
타다다다닥!
수천 개의 권력을 모두 막아 낼 순 없었는지 무형노괴 역시 양쪽 어깨와 옆구리, 허벅지에 뇌격에 격중되어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닦아 내야만 했다.
그러나.
“끌끌, 여전히 치명상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지. 이것이 전부이더냐.”
여전히 여유로운 목소리.
그 말에 천무린은 텅 비어 버린 단전에 한 방울이라도 내력을 끌어올리고자 용을 써야만 했다.
‘……제X랄.’
푸욱.
그때.
빛살처럼 다가온 무형노괴의 손끝이 천무린의 오른쪽 가슴팍을 푹 하고 찔렀다. 검지였지만 만년거암도 뚫어 버리는 무형노괴의 검지에 천무린은 저도 모르게 끔찍한 고통으로 입을 벌려야 했다.
“……더 놀아 줄 시간 따윈 없느니라. 제아무리 쓸데없는 마공이라 할지라도 내가 회수해 가야겠지. 끌끌.”
홍의 규화보전과 구음백골조가 마음에 걸리는 무형노괴였다. 그는 어서 천무린을 죽이고 홍을 쫓아갈 생각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전에.
“물론 그 전에 저 여아들을 맛보아야겠지만 말이다. 끌끌끌끌.”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괴소를 흘리는 무형노괴였다. 축 늘어진 천무린을 바라보며 꿰뚫은 검지에 더욱 힘을 주어 뚫어 버리기 위해 마기를 끌어올렸다.
아니.
끌어올리는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천무린의 양손이 자신의 가슴을 뚫은 무형노괴의 오른팔을 잡고 더욱 깊이 찔러 넣는다.
푸우욱!
왈칵하고 천무린의 입가엔 핏물이 가득 고여서 터져 나왔다.
“내가 비장의 한 수가 있더라고.”
자신의 손을 단단히 고정시켜 버린 천무린의 모습에 무형노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흡성대법(吸星大法)이라고 들어 봤지? 이 새끼야.”
그 말과 동시에 무형노괴의 무형지기가 삽시간에 천무린의 양손을 통해 쭈우욱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