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제168화
가공할 만한 압박.
서서히 조여 오는 압력.
고오오오오-!
“흐으으읍.”
내력으로 억지로 버티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폐부 때문에 홍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어둑어둑하다. 너무도 어둡다.
말이 되질 않는다.
저토록 영롱하고 빛나는 기운이 만들어 낸 황금빛의 손바닥인데.
어찌 이리도 칠흑처럼 어두울까.
그 마음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몸은 그 압력을 버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꾸구국.
몸을 지탱하고 있는 양발이 흙바닥으로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양 어깨를 누르고 억지로 몸을 밀어 넣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런 기운이 느껴진단 말인가.
끼기긱.
규화보전(葵花寶典).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
두 무공을 익히면서 인간이길 포기한 자신이었다.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살았든 중요하지 않았다. 두 마공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운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할 절세의 고수가 되고,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하였건만.
지금 이 순간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홍은 보고 싶었다.
숙어지는 자신의 고개를 이토록 내리누르는 이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적어도 홍에게 무공이란 노력과 희생이 따라야 하는, 감수해야만 얻는 결과물이다.
그런데 고작 약관도 되지 않는 녀석 따위에게 자신이 여태까지 해 온 모든 노력과 희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길래.
규화보전을 완성시키기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고작 저 어린 나이에 이만한 무력을 지니게 되었는지.
끄그그극.
목뼈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홍은 고갤 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서 혈안이 된 두 눈과 먹먹해진 귓가를 무시한 채 움직이는 홍의 동공은 질시와 질투, 부러움, 갈망을 비롯한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이렇게 노력했는데.
나는 이렇게 희생했는데!
누구는 저 어린 나이에 가공할 만한 무력을 얻었다.
누구는 미친 듯이 살육을 벌여야만 힘을 얻는데.
불공평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황금빛 휘광마저 그 칠흑과도 같은 마음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다.
들끓기 시작한 홍의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끈적한 마기.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검은 불길이 피어올랐다.
“호호호호호……!”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진동한다.
“참을 수가 없구나. 참을 수가 없어.”
그 모습에 악교운과 설화린, 당지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추했다.
추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그의 눈빛에는 질투와 질시를 뛰어넘은 원독이 담겨 있었다.
그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자에 대한.
누구보다 빛나는 재능을 가진 자에 대한.
지독한 열망에 이은 원망.
그것이 그가 가진 원동력이자 힘의 근원이 되었다.
북풍한설(北風寒雪)보다도 시리게 차오른 독기가 설화린의 피부에 닿는 느낌이었다.
“대, 대체 어떻게 저런…….”
설화린에 이은 당지운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겁에 질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 하악……!”
겁에 질린 음성은 평소에 내던 당지운의 음성과는 많이 다른, 얇은 목소리였지만.
누구도 그걸 알아차릴 수 없는 희미한 음성이었다.
악교운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생도의 앞에 서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마기와 인간이라면 감히 가질 수 없을 지독한 원독을 막아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종래에는 원망에 이은 욕망.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세 사람은 몇 걸음이나 물러나야만 했다. 기껏 따라와서 천무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순간에 잘잘못을 따질 수도 없을 만큼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홍의 안광이 흉흉하게 폭사하더니, 손목을 뒤틀면서 산발이 된 머리채와 굽어 버린 등, 눌려 버린 어깨까지.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면 될 일이지. 호호호호홋.”
통렬히 내리꽂는 압력을 억지로 버텨 내고, 버텨 내다보니 기형적인 몸이 되어 버린 그는 꿈에서라도 나올까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얼굴 역시 이마는 늘어지고 코는 눌렸으며, 입가는 비틀린 채 고정되어 웃고 있으니 심신이 미약한 이들이 보면 까무러칠 외형이 된 홍.
“…….”
“……!”
흉신악살(凶神惡殺).
지옥에서 올라온 아수라도 이보다 끔찍하진 않을 터였다.
꾸구구국.
그러나.
그런 홍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더럽게 못생겨졌네. 어휴. 내 눈 어쩔 거야.”
천무린이었다.
능공천상제(凌空天上梯)라는 위엄 있는 무공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거친 입이었지만, 태연하고도 별거 없다는 말투.
부처와는 전혀 거리가 먼 그의 모습이었지만.
피식.
그것만으로도.
악교운과 설화린, 그리고 당지운까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세 사람에게 가해지던 압박이 대번에 확 줄어들었다.
눈앞에 경악스러운 광경도 천무린에게는 별거 아니라는 듯.
그것은 굳건히 서 있는 태산처럼.
일행에게는 더없이 든든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네깟 놈이 내게 질투를 할 만큼의 그릇이 된다고 생각해?”
감히.
철퍼덕.
결국 두 무릎을 꿇어 흙바닥과 마주해 버린 홍을 장엄한 기운으로 내리누르는 천무린이었다. 절대적인 기운에 휩싸여 버린 홍은 발작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불가항력(不可抗力)이었다.
짙은 마기마저도 퇴색되며 옅어지기 시작했다.
“우스워.”
고작 마공 두 개를 얻어 수많은 학살을 한 놈이.
우연히 얻은 무위를 가지고 노력과 희생을 했다고 표현하다니.
그런 헛소리로 점철된 녀석이 보이는 모습에 천무린은 전혀 용납할 수 없었다. 천무린의 손아귀에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후와아아아앙!
“노력과 희생이라……. 있잖아. 그런 걸 그런 숭고한 단어로 부르진 않아. 너는 그냥 어쩌다 길에 떨어진 보검을 주운 것뿐이야.”
콰아아앙!
내리꽂은 손바닥에 홍의 몸통이 그대로 짓눌렸다.
흙바닥에 고개는 물론이요, 몸 전체가 내리꽂혔다.
“끄아아아아아!”
미친 듯이 펄떡이는 홍의 발작에도 소용없었다.
“그저 그 보검을 주워서 어찌 다룰 줄 몰라 울부짖는 애송이일 뿐이야.”
파들파들.
떨리는 몸이 펄떡거리기 시작하면서 반항했다. 불타오르는 검고 짙은 마기가 황금빛 서기를 감쌌지만.
“노력이라는 건 말이다. 죽을 만큼 해야 하는 거다. 아니, 죽어서도 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노력하는 자들을 매도하지 마라. 그리고 네놈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그 희생이란 단어는 말이야.”
희생(犧牲).
이 단어는 오랜 기간을 살아온, 전생과 현생을 살아가는 천무린조차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누구 앞에서 감히 그 단어를 입에 담는단 말인가.
쏴아아아아!
쾅!
콰가가강!
콰아아아앙!
여래신장이 천신(天神)의 벼락처럼 계속해서 꽂혔다.
쉼 없이 내리꽂히는 그 손바닥의 위압 속에서 먼지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며 주변에 존재하는 나무들이 뿌리째 튕겨 나갔다.
꽈가가강!
몇 번이나 내리꽂혔을까.
후우우웅.
주변을 유린하던 천무린의 손바닥이 멈추고, 천무린의 두 다리가 서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저벅. 저벅.
뭉게뭉게 피어난 먼지바람이 둘러싼 홍의 앞으로 걸어가는 천무린이었다.
저벅, 저벅.
무감정한 얼굴로 다가간 천무린이 먼지바람 사이로 뚫고 나오는 검은 마기를 지그시 바라봤다.
……죽여야 한다.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
죽이지 않으면, 중원 무림은 도탄에 빠질 것이다.
그런 생각이 천무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규화보전과 구음백골조, 두 무공을 익힌 이 녀석은 미처 한 달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수준의 무공을 보여 주었다.
아마 저 너머에 있는 대현문을 학살하고 무공을 대성했더라면.
……그야말로 끔찍한 순간이 벌어졌을 것이다.
비록 천무린이라고 할지라도 제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X랄.”
죽일 수가 없다.
당장 죽여 마땅한 놈을 두고도 때려죽일 수가 없었다.
그물망에 갇힌 물고기처럼,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나아갈 수가 없다니.
저 미치광이 놈을 두고도 살의(殺意)를 일으킬 수가 없다. 빌어먹을 금살령 때문에.
그렇다고 일행의 손을 빌릴 수도 없었다.
이 마기는 너무도 위험하다. 위험해서 혹여 힘을 죽였다가 마기가 엄습하면 저들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뿌드득.
천무린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천무린의 전신에 휘날리던 황금빛의 서기로 온 혈도를 점하고 단전을 폐해 버리는 것만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터.
먼지바람이 사라진 순간.
온몸의 뼈가 박살 난 듯 기형적으로 꺾여 버린 팔꿈치와 무릎, 그리고 억지로 버텨 내다가 튀어나온 목뼈로 보아 과연 살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끄으윽.”
침음을 흘리는 홍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마기가 서서히 몸속으로 스며들면서 일그러진 자신의 몸을 치유하고 있기는 하나.
천무린의 주먹에 황금빛의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고 그마저도 희망이 없어 보였다.
“……네놈 손에 죽어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하며 죽어라. 지옥에 가면 저승사자에게 내 안부를 물어봐 주고.”
무감정했지만 결코 무정할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천무린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이야기는 과거 자신을 빗대어 말한 거니까.
홍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뒤돌아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꿈틀거리며 발버둥 치는 홍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그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모순적이라고 느꼈지만.
……꾸욱.
내 잘못은 내가 바로잡는다. 그래야만 한다.
“……으, 으아아아아! 사, 살려, 살려다오! 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소리치는 홍에게서는 전과 같은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여유라는 것도 우위에 있는 상황일 때나 가능한 것.
우위가 아닌 상황에서 여유를 부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 모습에 아라한신권으로 내리꽂기 위해 주먹을 서서히 들어 올려 내리꽂으려는 찰나.
“……!”
천무린은 황급히 몸을 틀어야만 했다.
투콰아앙!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기운이 천무린의 뺨을 훑고 지나가며 아름드리나무에 틀어박혔다.
콰지직!
쿠웅!
어지간한 성인 남성 서넛이 힘을 합쳐도 들 수 있을까 말까 한 나무가 우지끈하고 부러지며 땅을 크게 울렸다.
주륵.
그리고 천무린의 뺨에 흐르는 뜨거운 한 줄기의 핏물.
스윽, 하고 닦아 낸 소맷자락을 내리며 천천히 고갤 돌려 바라본 곳에는.
“……끌끌.”
검지를 세워 천무린과 홍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혀 차는 웃음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무형노괴.”
“천마신공은 어딨느냐, 아해야? 끌끌.”
무형노괴와 그를 보필하는 이검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