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제167화
“네놈이 규화보전을 어찌 아느냐!”
삽시간에 굳은 표정을 한 홍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으으!”
“꺄아악!”
그의, 아니 그녀의 외침에 당지운과 설화린은 귀를 부여잡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지독히도 귀를 찌르는 음성 때문이었다.
“멍청하게 가만히 있지 말고, 미리 귀를 보호해. 안 그럼 영영 청력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마기가 침투하기 시작하면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들 거고.”
단호한 천무린의 말에 설화린과 당지운은 황급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저 외침뿐이었는데, 절세의 음공(音功)을 펼친 것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다니.
“……마, 마공이라더니 정말로 기분 나쁘네요.”
“그런데…… 그자는 분명 남자라고 하지 않았어?”
“네. 어찌 된 일일까요……?”
“…….”
설화린과 당지운의 물음에 악교운조차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 제갈벽을 비호하던 심복은 남자였다.
다른 심복이 또 있었던가.
하지만…….
“너무도 닮은 것을. ……남매인가?”
그리 말했지만, 답은 없었다. 그저 저자를 본 순간, 천무린이 외친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규화보전(葵花寶典)이라 했던가.
스윽.
고갤 돌려 천무린을 바라본 악교운은 차갑게 굳어 버린 그의 모습을 그저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허리춤에 찬 검집에 손을 올린 채로.
“제갈벽의 똘마니 짓이나 하던 주제에 용케도 그걸 해석해 냈네.”
“……물었지 않느냐? 네 녀석이 규화보전에 대해 어떻게 아느냐고. 그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 어서 말하지 못할까?”
“사람 새끼도 아닌 놈이 지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냐.”
천무린의 전신에서 숭고하고도 엄중한 기운이 황금빛 휘광으로 터져 나왔다. 터져 나온 기운은 모락모락 피어올라 뜨거운 증기처럼 감싸기 시작했다.
“……아니지. 사람 새끼가 아니라 사내새끼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강해지고 싶다고 해도 그렇지. 성별까지 바꿔 가며 강해져야만 했냐.”
그 말에 홍의 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없이 여유롭기 그지없던 홍이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은 안다.
규화보전의 비밀을 알고.
자신의 비밀을 명백히 알고 있다.
아무리 둘러대려고 해도.
막아 보려 해도 막을 수 없다.
아니.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왜? 죽여서 입막음하려고? 낄낄, 제법 피를 묻히긴 했나 본데 아직 완성되려면 먼 것 같은데?”
“……네깟 놈이 나를 우롱하려 드느냐.”
“아니면 반박해 보든가.”
처억.
천무린의 전신을 감싸던 황금빛 광휘가 두 주먹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스며들기 시작한 그 기운은 절로 엄숙하게 만드는 힘이 담겨 있었고.
홍의 표정을 절로 찡그려지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기도 싫은 기운.
아니, 조금 더 풀어 말하자면 감히 범접할 수도 없을 만큼 성스러운 기운이라 해야 맞을까.
“……소, 소림?”
배 속에 잠들어 있는 규화보전의 기운이 절로 숙연해진다. 규화보전의 기운이 역근세수경 앞에서 바람결에 나부끼는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천각 그 새끼가 왜 날 상대로 우위를 점했는지 알겠네. 아오, 생각해 보니까 상성이 더럽게 안 맞았어.”
무공에도 상성(相性)이 존재하는 법.
병법으로 따지면, 보병은 기마병을 이기기 힘들고, 기마병은 창병을 이기기 힘들 듯이.
무공에도 동일한 상성이 존재했다.
특히 내력에서 그 상성이 드러났는데.
마공으로 쌓은 마기(魔氣)는 정공으로 쌓은 정순한 내력을 이기기 힘들고.
사공으로 쌓은 사기(邪氣)는 마공으로 쌓은 특유의 마력을 이기기 힘들다.
물론 그 상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상성을 무시할 만큼 강인한 기운을 쌓는 것.
혹은 마공과 사공, 정공 중에서도 탁기(濁氣)를 배출해 내며 기운을 쌓아 올려 축기(築氣)를 하는 속도보다 정순함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
천무린은 소림의 1인자라 불리는 천각대사와 몇 날 며칠 동안 맞붙었던 터라 더욱이 느낄 수 있었다.
“……흥!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네깟 놈이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당장 네놈의 목을 비틀어서 갈아 마셔 주마.”
코웃음을 친 홍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자신의 양손을 늘어뜨린 채 구부렸다. 그리고 땅을 박차고 천무린을 향해 뻗어 왔다.
촤아아악!
허공을 찢어발기며 뻗어 오는 손을 바라보는 천무린이 주먹 끝에 기운을 담았다.
“할 수 있음 해 봐. 어휴, 손톱 좀 깎아라. 더럽게.”
조법을 펼치는 홍의 모습에 천무린은 그대로 맞부딪쳐 갔다.
길어지는 저 손톱을 대번에 깨부수고 턱주가리까지 뒤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마.
……어라? 손톱이 길어져?
조법 중에 그런 무공은 내가 알기로 단 하나밖에 없는데.
촤아아악!
천무린의 상념이 지워질 때쯤 주먹은 빈 허공을 때리고 있었고, 그의 가슴팍에 길게 상흔이 남아 있었다.
푸화아악!
다섯 손톱이 할퀴고 간 가슴팍에 새겨진 상흔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낀 천무린이 표정을 찡그렸다.
“규화보전에 이어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까지 익혔다? 이거, 이거 대체 어떤 놈들이 무공을 뿌린 거야.”
……물론 정마대전 때 내가 뿌리라고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무공들은 아닌데.
규화보전(葵花寶典).
그리고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
가장 익히기 까다롭다고 정평이 나 있는 두 가지의 무공, 아니 마공(魔功)이다.
거기다 무공의 위력만으로 따지면 천마신공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고 정평이 난 규화보전이다. 다만 규화보전을 익히는 것이 더없이 까다로워 어느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사실 규화보전이라는 비급을 본 순간, 천무린은 실로 깊고 넓으며 오묘하기 그지없는 규화보전 속에 빠져들었었다. 압도적으로 신속하고 기기괴괴한 무공은 그 어떤 절세 고수라도 대번에 찢어 죽일 수 있을 만한 위력이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공이라면 눈이 뒤집히는 천무린조차도 규화보전은 차마 가까이할 수 없었다.
왜냐고?
익히기 위해서 자신의 남성성을 포기해야 했다. 남성성을 포기해야만 익힐 수 있는 그 무공 때문에 천무린은 차마 익힐 수가 없었고 버려야만 했다.
과거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아주 가끔 미친놈들이 익혀서 강호 무림을 휩쓸었다고 들었으나, 차마 그렇게 살고 싶진 않은 천무린이었다.
‘남자도, 그렇다고 여자도 아닌 몸으로 어떻게 살란 말인가!’
규화보전에 대한 상념을 하는 와중에 손끝에 길어진 손톱을 보고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조합도 어떻게 참.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
둘째가라면 서러울 무공 중 하나로 꼽히는 구음백골조 역시 상대의 머리통에 다섯 개의 구멍을 내기 위해 존재하는 마공이다.
구음백골조를 익히는 것 역시 상당히 어려운데, 그에 걸맞은 내공심법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음백골조의 마기(魔氣)에 스스로 잡아먹혀 광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규화보전과 구음백골조의 조합이면 미치지 않을 수 있지.’
그저 피를 미친 듯이 탐하게 되는 발작 증세만 감수한다면 말이지.
거기다 두 가지 무공에 대성하기 위해서는 필요 충족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백여 명에 가까운 이들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이 오백이지.
어디선가 미치광이가 양민을 학살하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난 순간, 오백여 명을 죽이기도 전에 수많은 협객과 무림인들에게 추포를 당할 터였다.
“……뒷배를 봐주는 놈들이 있었나 보지.”
숲속에 숨어 이곳을 관망하고 있는 어느 쥐새끼처럼.
할짝.
“오호호, 제법 피 맛이 좋구나. 역시 영계가 좋아. 달짝지근하니 네놈의 목을 찢어 솟구치는 피 분수에 입을 가져다 대고 잔뜩 취하고 싶구나.”
손톱에서 흐르는 피를 할짝거린 홍의 모습이었다. 기괴망측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설화린과 당지운이 절로 뒷걸음질을 친다.
악교운마저 석상처럼 굳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하아……. 큰일 날 뻔했네. 죽을 뻔했어.”
그래.
한 번 더 어디선가 피 맛을 보고 와서 무공을 펼쳤으면 제아무리 천무린이라고 할지라도 위험할 뻔했다.
대성한 규화보전과 구음백골조를 상대하기엔.
……제아무리 천무린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은 힘들 테니까.
천무린의 굳은 표정에 홍이 입가를 말아 올렸다. 붉은 입술이 한껏 올라가 기분 좋은 표정을 띠고 있는 그녀의 입가에 핏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기괴했다.
“호호호, 이제야 주제 파악이 되었니? 어때, 쓰리지?”
그녀의 말마따나 천무린의 가슴팍에 새겨진 상흔이 까맣게 흉이 지고 있었다. 새겨진 상흔을 통해 마기가 계속해서 침투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마기로 인해 이제 곧 미치고 말겠지. 오호호호! 아이야, 세상 경험을 일찍 했다고 여기거라. 대가로 목숨을 바쳐야겠지만, 그리 나쁘진 않을 거야. 나와 같은 미녀에게 죽음을 맞이하. 는. 거. 니. 까~?”
옷소매를 가리는 그녀의 반응에 설화린과 당지운, 악교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설마 저 상흔을 통해 마기가 침투할 줄이야.
가볍게 던지는 말 한마디에도 귀를 찌르는 듯한 통증과 마기로 내부가 진탕이 되었건만, 직접적으로 상흔을 통해 마기가 침투하면 얼마나 지독할지.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거 쫑알쫑알 더럽게 말 많네. 말 다 했어? 입 안 아파?”
귀를 후벼 파는 천무린이 하품을 쩌억 하고는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검게 새겨진 상흔이 점차 벌어진다 싶었으나.
“흡!”
벌어지는 가슴팍에 새겨진 검은 상흔과 흘러내리던 핏물이 딱 멈췄다.
“……고자가 되면서 귀머거리라도 된 건지. 아까 내가 보여 주지 않았나? 마공이랑 상극이라고. 제아무리 깝죽거려 봐야!”
부우웅.
천천히 천무린의 두 다리가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금빛 서기에 맞물려 반장을 한 채 떠오르는 천무린의 모습에서는 절로 장엄한 분위기가 풍겼다.
능공천상제(凌空天上梯).
부동명왕보에 이어 소림의 또 다른 절세의 절기 중 하나.
저벅. 저벅. 저벅.
허공을 마치 계단을 오르듯 올라서는 천무린의 모습이 보였다. 한 칸, 한 칸 올라서는 천무린의 표정에 더없이 자비로움이 묻어나고, 손바닥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없이 여유롭고, 일면 나태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설화린과 당지운, 그리고 악교운은 현재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할 지경이었다.
후우우웅!
자그마한 손바닥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커지기 시작한 그 손바닥을 황금빛 서기가 감싸기 시작했고, 웅혼한 내력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홍은 천무린이 보여 주는 거력(巨力)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멈춘 채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얼어붙은 홍에게 천무린은 더없이 자비로운 미소로 산뜻하게 말했다.
“내 손바닥 안이라고, 이 고자 새끼야.”